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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1930년대 쏘비에트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5) 쏘련공산당 (CPSU)의 숙청과 정치재판 ―
글쓴이 Mario Sausa / 2001저 E-mail send mail 번호 107
날짜 2008-12-19 조회수 3640 추천수 144
파일  1229678822_계투.hwp

  






























(연재 마지막) 가치없는 연구 (Research equal to zero)










부하린-라코프(그리고 퍄타코프-라데크)에 대한 공판 기록에 진술된 사실들을 토대로 하는, 그러한 연구는 거의 수행되지 않고 있다. 이 공판들에 대한 견해들이 자본주의 대중매체 안에서 책과 논문들로 새롭게 쓰여져서 매번 반복해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단지 경찰요원(Conquest와 같은), 파시스트 또는 트로츠키파의 책과 논문들을 단순히 복제한 것에 불과했다. 이 공판들에 대한 연구는 실질적으로 거의 없다. 이 연구의 저자는, 1999년 11월 웁살라(Uppsala) 대학의 도서관에서 퍄타코프-라데크와 부하린-라코프에 관련된 공판의 영문판 속기록을 빌리려고 했던 시기에, 이러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속기록들이 대출 중이었고, 1967년 5월 이래 동일한 사람에게 대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학 도서관의 서적은 누군가가 그것을 원하는 날까지 먼저 대출한 사람이 지닐 수 있었다. 1967년 이후, 내가 32년만에 처음으로 그 속기록 대출을 원한 사람이었다. 스웨덴의 스웨덴전쟁과학학술원(Swedish Royal Academy of Science of War)과 스웨덴왕립학술원(Swedish Academy)의 회원이고, 웁살라에 살고 있는 작가 피터 잉글런드(Peter Englund)는 결코 그 공판 속기록을 빌린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판에 대한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우리는 또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쓰여진 공판 속기록들은 더 이상 웁살라 대학 도서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2002년 이 작업의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판을 준비하던 중에 이러한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대학에서 발행되는 신문사에 질문했다. 속기록들은 불태워져서 폐기처분되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대학 도서관측은 대학에서 (자료를 보관하기 위한) 임대료를 지불할 돈이 부족하며, 그들은 많은 도서와 학술지를 폐기처분했다고 말했다. 사회주의의 역사에 관한 거의 모든 책들이 폐기처분되었다. 이는 부르주아들이 문화를 존경하는 좋은 예이다!.















인민 농업부 장관인 체노프에 대한 심문










공판 동안 피고인들은 생산설비부분에 대한 사보타지가 널리 만연되는 상황을 야기시킨 끔찍한 범죄를 인정했다. 우크라이나 전 통상부 장관이자,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 농업부 장관인 체노프(Chernov)는,1) 법정에서의 심문동안 그가 라코프에게서 임무를 부여받았고 우크라이나에서 "중류층 농민을 격노시키는" 그런 방식으로 그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했다2). 우파의 전술은 사보타지를 하고 집단농장을 위한 노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리코프가 체노프에게 내린 지시사항 중에는 “정책을 왜곡시켜 강조하기, 특히 우크라이나 인민에 대한 국민감정을 고려하기,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왜곡은 모스크바 당국의 정책 결과라고 설명하기”가 있었다!3) 더욱이, 체노프는 법정에서 “무역 대표부와 대사관의 직원 중에 우익 성향의 인물이 혹시라도 있다면, 이들을 규합하여 우익 조직을 만들 것”을 또한 베를린에서 지시 받았다고 진술하였다.4)





체노프는 독일에 도착한 뒤 그렇게 했다. 이 사례에서 리코프가 한 지시는, 체노프가 제2인터내셔날(the Second International) 무리들을 이용하여 “부르주아 정부의 쏘련에 대한 적대적 성향을 증대시키기”위해 “쏘련 정부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우익단체는 “우파가 권력을 잡은 뒤.... 우파는 경제적 문제와, 필요하다면, 영토 문제에 대하여 부르주와 정부와 협의하는 것을 승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5) 리코프는 체노프에게 “이 나라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쏘련의 몰락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몰락을 진척시켜야 하고, 또한 쏘련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쇠퇴시킴으로써 전쟁, 바로 그것이 일어나도록 진척시켜야 한다”고 지령을 내렸다.6) 공개재판에서 그리고 전 세계 보도진 앞에서 리코프는, 그가 체노프에게 이런 모든 지시를 하였다고 시인하였다. 우파는 전쟁에서 패배를 위한 노력을 했고, 쏘련 정부를 전복시키고 국가권력을 쥐기 위한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독일에게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일부를 그리고 일본에게 태평양 연안을 이양할 준비를 하였다.















나찌 독일의 첩자 










그러나 독일에서 체노프의 활동은 갑자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독일 경찰을 위해서도 일하는 우익 단체의 한 요원이 독일 경찰에 체노프의 음모를 밀고했다. 체노프는 독일을 위해서도 일하거나 아니면 쏘련 당국에 고발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독일의 지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농업과 산업계 활동 동향에 대한 기밀정보뿐만 아니라 독일 경찰이 지시한 사보타지를 이행한 것까지 독일 경찰에 정기적으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체노프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 당시 독일 정보부가 나에게 내린 주요한 임무는 국가 내 곡물 산업이 피폐해지도록 책략을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늘어나는 곡물 수확량의 규모와 가용 보관 공간의 불일치가 야기되도록, 곡물 창고의 건설을 지체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두 가지 목적의 달성이 기대되었습니다. 먼저, 곡물산업 그 자체가 피폐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농부들의 분노가 일어날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썩어나가는 곡물들을 바라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또한, 해충을 이용하여, 특히 옥수수 벌레를 이용하여 곡물창고를 대규모로 오염시키는 모략을 꾸미도록 지시받았습니다.”7) 바로 이러한 모든 끔찍한 행위가, 체노프가 독일을 위해 저지른 쏘련에 엄청난 손실을 야기시키는 파괴행위였다. 체노프가 몇 년동안 농업 분야에서 최고위직의 당 관료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농업에서의 사보타지










체노프는 법정에서 또한 그의 반(反)혁명 행위의 다른 활동들에 대해서도 진술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금기 있는 씨앗을 섞어 파종을 완전히 망침으로써 국가 전체의 수확량을 낮추는”일과, “경작할 때 농사 지역을 부적절하게 선택하여 집단 농장 농부들이 사실상 적절한 돌려짓기를 못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도록” 하는 계획이 있었다.8)





농사기계 및 트랙터 공장에 관한 “계획은 농사기계 및 트랙터 공장의 재정 상황을 악화시키기 위해 트랙터, 수확용 콤바인 그리고 농업기계를 고장 내는 것이었다.”9) 축산에 관련한 리코프의 지시사항은 무엇보다도 특히 “순종의 가축을 죽여 버리고 소의 사망률을 높이도록 힘쓰며, 사료자원의 개발을 막고, 그리고 특히 소의 사망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로 인위적으로 소를 감염시키는 것이었다.10) 체노프의 사보타지 활동을 돕기 위해 그에게는 전국적으로 우익 조직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들은, 1936년 봄에 2만5천 두의 말을 몰살시킨 소 해충으로 결론난, 동부 시베리아로 전파된 소 전염병에 대한 치료제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익 조직원들은 또한 레닌그라드(Leningrad)와 보로네즈(Voronezj), 아소프-블랙 (Asov-Black) 해안 지방에서 전염병을 퍼뜨리고 돼지 흑사병을 발생시켰다. 전염균은 우익 단체가 관리하는 카신제프(Kasjinzev), 올로프스크(Orlovsk), 스타브로폴(Stavropol) 지방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일만 두의 돼지가 이 시기에 비명횡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바로,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쏘련 농업부에서 일해 왔던 체노프가 많은 수의 우익 조직원들과 함께 시간을 바쳐 일한 활동의 유형이다.















젤렌스키, 당 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센트로소유즈 (Centrosoyuz) 의장11) 










반역자 활동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젤렌스키 스스로가 법정에서, 짜르(Tsar) 시대 동안 돈에 매수되어 그의 공산당 동지들을 탄핵하며 비밀 경찰을 위해 그가 어떻게 일해 왔는지 이야기 했다. 그는 용케 과거를 숨기고 공산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은 그런 이들 중 한 명 이었다. 그는 1929년에 심로프(Simrnov)에 의해 부하린-리코프 조직에 소속되었다. 그의 첫 임무는 중앙아시아의 협동농장체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는 심로프로부터 “부농(kulak) 농장을 의미하는 대규모 농장을 보호하고” 그리고 “협동농장의 조직체를 저지하고 붕괴시키는”12) 업무를 지시받았다.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의 협동조합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 젤렌스키에게 부여된 임무였고 젤렌스키가 의장으로 있는 센트로소유즈(Centrosoyouz)에서도 그의 임무였다. [센트로소유즈(Centrosoyouz) : 농산물의 생산계획, 수송, 분배뿐만 아니라 외국과 생산품을 거래하여 농업 생산자들에게 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중앙 쏘련 조직체. 센트로소유즈는 쏘련의 모든 공화국에 지부가 있다. 그리고 차례대로 마을단위까지 계속 내려가는 지부가 있다.] 그 목적은 “물품의 공급부문과 관련해서 인민들 사이에서 불만을 일으킬” 의도로, “주택, 협동조합, 무역, 상품 유통 등 인민에게 가장 즉시 영향을 끼치는 그러한 경제 지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13) 젤렌스키는 1936년에 많은 상점이 “2-3주 동안 설탕이 바닥났던 지역”인 “쿠르스크 지역 (Kursk Region)에서 어떻게 설탕공급 방해공작을 했는지” 진술했다.14) 젤렌스키는 레닌그라드에서 담배를, 벨로루시에서 빵을 그리고 전국에서 소금을 비슷한 방법으로 사보타지를 했다고 진술했다.















목구멍과 위장을 찢은 버터










뷔신스키(Vyshinsky) 검사가 우익과 트로츠키파 단체에 의해 계획된 버터의 사보타지에 대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자, 젤렌스키는 처음에는 그것에 대한 사전 인지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뷔신스키가 계속해서 질문하자 마침내, 젤렌스키는 전모를 고백해야만 했다. 우익단체는 오직 고품질의 버터만이 매우 높은 가격에 정기적으로 생산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것이 인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더 악화되었다. 우익단체요원들은 인민들이 불만족에 차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우리 인민들의 목구멍과 위장을 난도질”하는 못과 유리를 버터 속에 섞었다. 젤렌스키는 이러한 사보타지 행위와 심지어 달걀에 대한 사보타지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다. 젤렌스키에 따르면 “1936년 화물차 50대 분량의 달걀을 썩게 두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달걀이 동나도록 하였다. 좌우명은 “가능한 모든 곳을 파괴하라”였다.15)










쿠데타에 호의적인 영국 노동당










젤렌스키가 센트로소유즈(Centrosoyouz)의 의장이었고 그의 업무는 인민에게 영양식품과 다른 생필품을 공급하는 일이었다는 것에 주목하라! 젤렌스키는 또한 법정에서 상품을 잘못된 지역이나 잘못된 시간에 보내어 물품공급을 얼어붙게 하는 그의 음모에 대하여 진술했다. 예를 들면, 여름 상품을 겨울에 보내고, 반대로, 겨울 상품을 여름에 상점에 보내는 사례가 있었다.16) 이를 테면 러시아 전통 장화(felt boots)를 여름에, 여름 신발을 겨울에 보내는 일이었다. 이것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 젤렌스키의 반(反)혁명 활동은 대형 센트로소유즈(Centrosoyouz)에서의 공금횡령과 전국의 센트로소유즈(Centrosoyouz)의 지부를 반(反)혁명을 조직하는 본부로 비밀리에 이용하는 것까지 확대되었다. 젤렌스키는 또한 센트로소유즈(Centrosoyouz)의 의장이라는 그의 지위를 이용해 영국 노동당과 접촉하여 쏘련에서 우파의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도움을 줄 것인지 물어보았다. 노동당은 반 혁명 정부 쿠데타를 환영했고 영국에서의 협조적인 태도를 보장 하였다.















이바노프, 북 코카서스(North Caucasus) 제2당서기17)  










법정에서의 체노프와 젤렌스키는 노동자들에 대해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하여 답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하린과 리코프가 이끄는 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범죄 중 단지 일부에 불과했다. 또 다른 피고인, 북 코카서스 제2당서기 이바노프는 공판에서 부하린에게 지시받은 지령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시스트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무력개입의 경우를 대비해 쏘련 정권의 몰락을 위하여 우파 단체의 병력을 이용하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준비하라”는 것과 이러한 정황에 있어서는 “영국 정보부의 요구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곳에 파견될 상주 요원에게 충분한 도움을 지속적으로 주라는 것”이었다. 이바노프는 부하린에게 지시받은 대로 행하였고 “영국 정보부에서 하달 받은 지령들이 내가 우익 본부에서 하달 받은 지령들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8)















이바노프에 따르면 부하린은 북쪽 지방에서 영국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우파 본부가, 우익을 도와 쏘련 정권을 전복시키고 빼앗은 정권을 유지하도록 도움을 받기 위해 그 나라와 협정을 맺었다며 그가 언급한” 지방은 바로 코카서스였다. 이 협정에서 그들은 북쪽 영토의 목재와 관련해 영국 목재 회사의 이익을 보장하였다. 이바노프에 따르면 부하린은 “영국에 제재소를 양도하여 이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동시에 쏘련 정권하에서 지어진 새로운 제재소도 짜르(제정 러시아)의 채무 변제로서 양도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부하린은 “우리는 1934년 이래로 영토를 양도하는 실질적 변상을 이미 시작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우리가 영국 부르주아들에게,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는 특혜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하린의 이런 지시에 따라 “그에 따르는 대책이 로젠골츠(Rosengoltz)와 로보프(Lobov)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가장 값비싼 목재가 저렴한 가격에 팔렸다. 이것은 외화로 수백만 루블(rubles)어치의 쏘련 국가의 손실을 의미하였다.19)




















북 코카서스에서의 테러










이바노프는 또한 법정에서 부하린이 북 코카서스에서 테러집단을 양성하라는 임무를 내렸다고 진술했다. 키로프(Kirov)의 암살 이후 부하린은 이바노프에게 “제한된 테러리스트 활동은 어떠한 성과도 낳지 못한다. 대규모 테러리스트 활동이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우린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것이다. 그의 노선은 당의 지도력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만약 그것이 나찌 독일과의 임박한 전쟁 이전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린 전쟁 동안 그렇게 할 것이며, 이것은 엄청난 동요를 일으키고 국가의 전쟁 효율성을 손상시키며 그리고 제국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쏘련 정권의 몰락을 급속히 초래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바노프의 테러집단은, “무력개입의 시점이 도래해서, 아크엔젤 (Archangel) 과 우리 나라의 중심 동맥들간의 통신을 두절시켜서, 영국이 보다 더 손쉽게 이곳 삼림 지역과 가장 유용한 항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아크엔젤 (Archangels) 에서부터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20)





이바노프의 테러 집단은 또한 북 코카서스에서 목재가 더 부족해지도록 “저질의 목재를 섞고  기계공장을 파괴하며 목재를 강에 띄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제재업의 기술적 재정비를 막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임업에 대한 사보타지를 계획했다. 더욱이 그 테러 집단은 “특히 제지업에서, 가장 좋은 설비를 갖춘 공장의 운영을 저지하며, 그 결과 국가가 종이 부족 사태에 처하게 하고, 공책의 공급을 중단시키고, 대중들 사이에서 불만을 증대시켜서, 문화혁명에 타격을 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벌채의 기술적 재정비를 방해하기 위해 일을 꾸몄다.”21)





그러나 이바노프는, 점차 이 공작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부하린에게 한 보고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나는 부하린에게 조직이 와해되는 중이며, 여러 곳에서 대중들이 우리 조직원들을 적발하고 있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국가 전체에 만연된 이 상황 이후에 우리가 완전히 파멸 당하는 것은 아닌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전체 조직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나는 우익의 활동이 사실상 완전히 드러나기 직전이라고 여러 번 말 하였습니다.”22)















이바노프의 심문에 관한 부하린의 진술










범죄에 대한 이바노프의 자백은 동시에 법정에서 단지 몇 걸음 떨어져 앉아 있는 부하린에게 불리한 매우 심각한 범죄였다. 이바노프의 심문 도중, 뷔신스키 검사가 부하린에게, 이바노프가 제시한 자료를 그가 인정하는지 또는 부정하는지 물어보는 기회가 있었다.










“뷔신스키: 피고 이바노프는, 당신의 지시에 따라 북 코카서스에서 분명하고 특정한 목적을 띤 우익 단체를 조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것도 인정하십니까?





부하린: 이바노프는 사실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뷔신스키: 무엇보다도, 진술한 내용 그 자체는 인정하십니까?





부하린: 나는, 내가 그에게 조직을 만들라고 지시한 사실 그 자체는 인정합니다.





뷔신스키: 비밀 조직입니까?





부하린: 비밀 조직이고 불법적인 반(反)혁명 단체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공산당과 쏘련 정부에 대한 격렬한 투쟁은 구체적 형태를 띠지 못 하였습니다...





뷔신스키: 나는 현재 오직 피고 이바노프가 법정에서 한 증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부하린이 나에게, 즉 이바노프에게, 북 코카서스에서 비밀 우익단체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이것도 인정하십니까?





부하린: 그 부분은 내가 인정합니다.





뷔신스키: 그 결과로서, 당신은 1928년에 불법적이고 반체제적인 활동 노선을 채택하였죠?





부하린: 그 당시는 매우 과도기였고 ...





뷔신스키: 나는 그때가 언제인지를 당신에게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니면 거짓입니까?





부하린: 그것은 사실입니다.





뷔신스키: 당신은 또한 이바노프에게 그 당시 우익단체 지도부가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죠?





부하린: 그랬습니다.





뷔신스키: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까?





부하린: 세 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톰스키, 리코프 그리고 나입니다.





뷔신스키: 당신은 이런 지도부가 쏘련 정권의 전복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바노프에게 말했죠?





부하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뷔신스키: 정확히 언제입니까?





부하린: 내 생각에 대략 1932년에서 33년 사이 같습니다.





뷔신스키: 약간 이후군요. 그러나 당신이 이바노프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까?





부하린: 인정합니다. 몇월 며칠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것은 우익 지도부의 일반적인 방침이었습니다.





...





뷔신스키: 그리고 언제 폭력집단에 대한 안건을 제안하였습니까?





부하린: 폭력을 채택한 시기는 대략 1932년에 속합니다.





...





뷔신스키: 이바노프는, 트로츠키파 및 우익단체와 민족주의자 단체 간에 연합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부하린: 맞습니다.





뷔신스키: 그리고 이바노프와 다른 사람들이 자본주의 국가와 작당한 협정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까?





부하린: 예, 이것은 훨씬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뷔신스키: 지금부터, 영국 정보부와의 관계에 관하여 이바노프의 진술이...





부하린: 나는 정보부와 음모에 관하여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뷔신스키: 당신은 무엇에 대하여 들었습니까?





부하린: 나는 이바노프에게, 우익 본부의 대외 정치노선에 관하여 지시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쏘련 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기위해서, 전쟁 상황과 많은 다른 상황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우익 본부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서, 외곽 본부의 지도자들 중 한명에게 우리의 노선을 알려주는 것은 나의 직무였습니다. 무슨 노선이었냐구요?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노선은, 쏘련 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데 있어 전쟁 상황을 이용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립화하여, 때때로 그들의 도움을 얻을 목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어떤 양보를 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뷔신스키: 바꾸어 말하면, 특정한 외국에서 원조를 받고자 하는 정책.





부하린: 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뷔신스키: 말하자면,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몰락을 추구하는 정책.





부하린: 대체적으로 봐서, 요약해 보면,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그렇습니다.23)















부하린에 대한 심문 










이제 세 명의 주요 피고인, 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야고다에 대한 심문을 계속 살펴보자. 우리는, 실제로 조직화를 구석구석까지 결정했던, 우파 본부의 실질적인 이념적 지도자인, 부하린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리코프도 더불어 살펴볼 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역사의 거짓말쟁이들은, 검사 뷔신스키가 부하린과의 토론에서 졌고, 부하린은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화려한 선전을 하는데, 법정을 이용했다고 이따금 우겨댄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법정 절차에 정통하기 때문에 관객은 이러한 속임수에 빠지기 쉽다. 자료가 손에 있다면, 스스로 판단하라. 계속해서 심문조서를 인용해 보자.










“뷔신스키: 당신이 정확히 무엇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하는지 간단히 정리해 보시오.





부하린: 먼저, 반(反)혁명 단체인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속해있던 것에 대해......





뷔신스키: 이러한 반(反)혁명 조직이 어떤 목표를 추구 하였습니까?





부하린: 비록, 말하자면, 완전히 실현시키지 못했고 모든 일을 꼼꼼히 처리하지 못했지만, 그 단체가 추구한 주요한 목표는,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자본주의적 관계(capitalist relations)를 회복하는 것이 본질적인 목표였습니다.





뷔신스키: 쏘련 정권의 전복도 추구하였습니까?





부하린: 쏘련 정권의 전복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었습니다.





뷔신스키: 어떤 방식으로 입니까?





부하린: 알려진 대로입니다.





뷔신스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전복을 통해서 입니까?





부하린: 예, 이 정권에 대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전복에 의해서 입니다.





뷔신스키: 어떤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까?





부하린: 쏘련 정권이 직면한 모든 난국을 이용해서 입니다. 특히, 오래잖아 발발이 예상되었던 전쟁 상황을 이용해서 입니다.





뷔신스키: 그러한 것 중에, 어떤 것이 장래에 실현 가능성이 있었습니까?





부하린: 외국의 원조입니다.





뷔신스키: 어떤 거래 조건으로 원조를 받는 것이었습니까?





부하린: 구체적으로 말하면, 많은 이권입니다.





뷔신스키: 어느 정도 이권을 주는 것이었습니까?





부하린: 영토의 할양입니다.





뷔신스키: 다시 말하면?





부하린: 상세하게 말하자면,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분할해서 주는 거래 조건입니다.





뷔신스키: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모든 공화국과 지방을 분리하는 것입니까?





부하린: 그렇습니다.





뷔신스키: 예를 들자면?





부하린: 우크라이나, 연해지역, 벨로루시입니다.





뷔신스키: 어느 국가로 이익이 돌아가는 것 입니까?





부하린: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응하는 국가를 위해서 ...





뷔신스키: 정확하게 어느 국가입니까?





부하린: 독일, 일본 그리고 일부분은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 입니다.24)










부하린은 또한 법정 심문에서, “그러한 노선은 트로츠키로부터 하달되었고, 트로츠키가 독일과의 협상을 진행 중이었으며, 트로츠키는 이미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많은 영토의 할양을 독일에게 약속했다는 사실”을 1934년 여름에 라데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진술했다.25)















키로프에 대한 암살










계속하여 공개 심문에서 검사 뷔신스키는, 당 간부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질문을 이어갔다.










“뷔신스키: 그 조직이 테러리스트 활동, 즉 공산당 간부와 쏘련 정부의 고위급 인물에 대한 암살 계획을 꾸몄습니까?





부하린: 맞습니다. 내 생각에, 그 음모는 대략 1932년 가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 같습니다. 





뷔신스키: 그리고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Sergei Mironovich Kirov)에 대한 암살과 당신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암살도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승인과 지시로 저질러졌습니까?





부하린: 그 점에 대해서는 나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뷔신스키: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살이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승인과 지시로 저질러졌습니까?





부하린: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검사님, 나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뷔신스키: 당신은 키로프에 대한 암살과 관련해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몰랐습니까?





부하린: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뷔신스키: 피고 리코프에 대한 심문을 요청합니다.





재판장 : 허가합니다.





뷔신스키: 피고 리코프, 당신은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의 암살에 대하여 어떤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까?





리코프: 나는, 키로프의 암살에 우익 조직 또는 그 조직의 일부에서 관여했다는 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





뷔신스키: 당신은 예누키쩨 (Yenukidze)와 관련이 있었습니까?





리코프: 예누키쩨(Yenukidze)와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뷔신스키: 그가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일원이었습니까?





리코프: 1933년부터 그는 그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





뷔신스키: 이 조직에서 그는 트로츠키파와 우익 중에 어느 성향을 나타냈습니까? 그는 어느 쪽으로 기울었습니까?





리코프: 틀림없이 그는 우익의 성향을 띠었습니다.





뷔신스키: 좋습니다. 앉으십시오. 피고 야고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피고 야고다, 피고 리코프가 방금 진술한 인물인 예누키쩨가 그 조직에서 우익의 성향을 띠고 있었고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의 암살 음모에 직접 연루되어 있었습니까?





야고다: 리코프와 부하린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리코프와 예누키쩨는, 키로프의 암살 문제를 논의할 때 조직 본부에서 있었던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뷔신스키: 우익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습니까?





야고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조직은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뷔신스키: 피고 리코프와 부하린이 그 암살에 특히 관련이 있습니까?





야고다: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뷔신스키: 당신도,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 조직의 일원으로서 이 암살에 관련되어 있습니까?





야고다: 예.





뷔신스키: 부하린과 리코프가 그 암살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는 진술이, 진실을 말한 것입니까?





야고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누키쩨(Yenukidze)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 회의에서 키로프에 대한 암살 계획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것에 절대 반대 하였습니다.26)















격분한 반 혁명주의자들 










부하린과 리코프가 1934년 12월 키로프에 대한 살인에 서로 협력했다고 야고다가 폭로하자, 부하린과 리코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밀경찰의 전임 수장인 야고다가 키로프의 암살에 관하여 모든 사항들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논쟁을 계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깊숙이 연루되어 있었는지를 입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뷔신스키는 우익과 트로츠키파 연합 조직이 쏘련 정권에 맞서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이유에 대해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부하린:... 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재판관을 마주한 범죄자로서,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한 명의 피고인입니다. 다른 국가들의 여론과 마찬가지로, 가장 진보적인 인류로 고려되어지는 한에서, 재판관과 우리 나라의 여론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구렁텅이에 빠졌는지, 어떻게 우리 모두가 과격한 반(反)혁명주의자와 조국 쏘련에 대한 반역자들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간첩, 테러리스트 그리고 자본주의 회귀론자들로 바뀌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개념과 정치적 관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심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반, 범죄, 반역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우리가 이런 일에 뛰어들었습니까? 우리는 폭도로 바뀌었고, 테러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파괴 활동에 관여하였고, 쏘련의 영웅적인 수뇌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쏘련 정부를 전복시키길 원했습니다.





...





뷔신스키: 피고 부하린, 당신의 반 쏘련 활동에서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실제로 구체화 했는지 나에게 말하시오.





부하린: 나의 활동 분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경제 분야, 국가 자본주의, 부유한 러시아 농민(muzhik), 집단 농장의 축소, 외국의 이권, 외국과의 무역에서 독점권의 양도,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자본주의 국가로의 회귀 등이 될 것입니다.





뷔신스키: 당신의 목표는 무엇을 달성하는 것이었습니까? 전반적으로 어떤 예상을 하였습니까?





부하린: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원할 거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뷔신스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하린: 결과는 예상과 매우 달랐습니다.





뷔신스키: 결과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부하린: 예, 결과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뷔신스키: 그리고 당신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부하린: 예, 우리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27)















1918년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Sverdlov)에 대한 음모










부하린에 대한 심문 도중에 그에게 불리한 새로운 죄상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검사 비신크기가 말한 대로, 공소 시효를 고려해야 하는 법정 앞에서가 아니라 시효나 사면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의 법정 앞에서, 유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죄상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브레스트(Brest)에서 독일과 평화 협정을 맺을 무렵인 1918년에 발생한 사건들과 연관이 있었다. 검사 뷔신스키는 심문 도중에 이러한 사건들을 제시하며 부하린이 레닌을 체포하는데 찬성했는지 여부를 물었다. 다소 주저한 뒤 부하린은 “처음에는 24시간 동안 그를 감금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뷔신스키는 심문을 계속 이어갔다.










“뷔신스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1918년에 스탈린 동지를 체포할 계획이 있었습니까?





부하린: 스탈린만 아니라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를 체포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뷔신스키: 또한 스탈린, 레닌, 스베르들로프 동지들을 암살하는 계획이 있었습니까?





부하린: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28)










그런 다음 검사 뷔신스키는, 그 때(1918년)부터 소위 급진 공산주의자이자 부하린의 조직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3명의 전 조직원, 증인 야코프레바(Yakovleva), 오신스키(Ossinsky), 만쩨프(Mantsev)뿐만 아니라, 2명의 급진 사회주의 혁명 중앙 위원회의 전 위원인 카렐린(Karelin)과 캄코프(Kamkov)의 출석을 법정에 요청하였다. 검사 뷔신스키에 따르면, 1918년의 음모는, 부하린의 급진 공산주의자들, 급진 사회주의 혁명주의자들 그리고 트로츠키파 무리들이 브레스트(Brest)에서의 평화 협정을 저지하기 위하여 벌인 일이었다. 독일과의 협상을 담당한 트로츠키는 평화 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으며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전 세계 부르주아들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였다. 이 시기는 지루하고 끔찍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였고, 전쟁을 계속한다고 해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던 시대였으며, 짜르군대 이래로 크게 멸망당해 버린 상태였으며, 붉은 군대도 없었던 시기였다. 















계획된 쿠데타










트로츠키가 평화 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일은, 독일이 거의 방해받지 않고 러시아로 계속 진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레닌은, 중앙위원회에서의 논쟁 후에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격리시키고 중앙위원회를 설득하여 평화 협정을 승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러한 결정, 즉 레닌의 정책을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제안에 반대하는 무엇인가가 도모되고 있다는 점은 알았으나 그 당시에는 반대파의 음모를 밝혀낼 여력이 없었다.





모든 증인들은 법정에서, 급진 사회주의 혁명주의자들과 부하린, 트로츠키파의 음모에는,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를 체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부를 바꾸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무리들은, 증인 야코프레바에 의해 공식화 된 것처럼, “만약 투쟁이 더 격렬해 진다면, 우린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까지 주저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였다.29) 음모를 지시하고, 이 음모를 계획하고 선동한 주요한 인물들 중에 한 명이 부하린이었다. 부하린은 법정에서 이 점을 인정했으나 체포된 이들을 없애버리는 사안에 대하여 어떠한 결정도 한 적이 없었다고 단언하였다. 우리는, 뷔신스키가 1918년에 공모자들이 누구를 체포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 뒤에, 뷔신스키와 부하린 간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누가 체포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나? 










“부하린: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였습니다.





뷔신스키: 또한 24시간 동안 구금하는 것이었습니까?





부하린: 그러한 정해진 계획은 그때에는 없었습니다.





뷔신스키: 그리고 어떻게 체포하려고 하였습니까? 또한 어떤 목적으로?





부하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뷔신스키: 그리고 체포한 이들을 없애기 위해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부하린: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한 논의는 없었습니다.





뷔신스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죠?





부하린: 그러하기는커녕, 우리 모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체포된 이들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뷔신스키: 정부가 전복되어 기능이 정지되면,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부하린: 그렇습니다.





뷔신스키: 체포 할 때에 강제적인 방법을 채택하리라고 예측하고 있었습니까?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부하린: 예, 사실입니다.





뷔신스키: 하지만 강제적인 방법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결정하였습니까?





부하린: 아니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뷔신스키: 그래서 당신은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행동할 것을 결정하였습니까?





부하린: 바로 그렇습니다.





뷔신스키: 하지만 상황은 매우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였죠?





부하린: 예, 그렇지만 사실, “급진 공산주의자들”이 운명론적인 관점을 유지한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판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도 그리고 모든 것이 상황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였습니다.





뷔신스키: 법정에 참석한 이들을 위하여 논의 되지 않은 사실을 정리해 봅시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Brest-Litovsk Peace) 이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체포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이후에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체포와 정부의 강제적인 전복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부하린: 대체로 맞습니다.





뷔신스키: 게다가, 쏘련 정권에 대한 강제적인 전복과 레닌,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동지들에 대한 체포가 논의 되었을 때, 강제적인 방법이 실제로 거론 되었지만 정확히 어떤 것이 언급되었습니까?





부하린: 그것은 이렇습니다. 논의된 사항은 오로지 그들의 안전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뷔신스키: 증인 야코프레바, 이것에 대하여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부하린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야코프레바: 나는, 그가 “급진” 사회주의 혁명론자들과 협상하는 동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뷔신스키: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였습니까?





야코프레바: 그는 나에게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뷔신스키: 어떤 가능성입니까?





야코프레바: 그것은 목숨을 빼앗는 가능성, 즉 암살은 배제되지 않았습니다.”30)










1918년 부하린의 가까운 동지들 중에 한 명인, 증인 야코프레바는 사건의 심리와 심문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리코프에 대한 심문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로 구성된 우익 조직의 바로 그 본부에서, 리코프는 실질적 활동을 앞장서서 지시하였다. 리코프는 1928년에 쏘련 정부에 대한 반체제 음모를 꾸몄다. 그는 야고다, 안티포프(Antipov), 라즈모프(Rasumov), 루미안쩨프(Rumiantsev)와 같은 당 고위 관리들을 반(反)혁명 단체의 조직원으로 포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反)혁명 단체의 조직원으로서 자신들의 신분을 명백하게 바로 밝히지 않았다. 리코프는 법정에서, 그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그 옆에 앉은) 부하린이, 우익 단체의 사보타지 공작원들을 보낸 코카서스와 시베리아에서, 부농(Kulak) 봉기를 계획하는데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털어놓았다. 부하린은 법정에서 이러한 모든 일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코프와 부하린 둘 다 1932년부터 그들의 반(反)혁명 공작이 대역죄로 바뀌었다고 자백하였다. 리코프에 따르면, “내가 아는 한, 1930년부터 테러리스트의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략 1932년에 테러리즘을 적용하려는 우리의 적극적 태도는, 권력을 얻고자 하는 투쟁의 방식으로 그 모습을 갖추었고 실제적인 표현수단을 얻게 되었습니다.”31) 그리고 리코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연합하여 










“리코프: 그러한 노선이 채택되자마자, 그에 상응하는 조직적이고 실천적인 결론들을 그 노선에서 즉시 얻게 되었습니다. 즉, 많은 수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조직되었습니다. 나 스스로도, 네쩨로프(Nesterov), 라딘(Radin)과 같은 측근들은 별개로 하더라도, 많은 수의 테러리스트와 사람들에게 지시를 하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지시를 또한 국가주의자 조직원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나는 판-티우르킥(Pan-Tyurkic) 및 벨로루시 국가주의자 조직원들과 테러리즘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이러한 토론 외에도 나는 다른 문제에 대한 논의도 하였습니다. 네쩨로프(Nesterov)는 그 후에 우랄(Ural) 지역의 스베르들롭스크(Sverdlovsk)주에서 나의 지시에 따라 테러 조직을 구성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 이후, 1935년에 나는, 모스크바 우익 조직의 간부인 코토프(Kotov)와 테러리즘에 대하여, 테러리스트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마 1934년에 나는, 나의 전 비서인 아텐멘코(Artemenko)에게 관용 차량이 지나가는지 망을 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우리의 반(反)혁명 단체의 다른 조직원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이러이러한 정부의 관리들을 죽여야 한다는 어떠한 확정된 결정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익 조직의 본부는 결코 그와 같은 결정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조직의 업무는, 본부가 그러한 결정을 채택 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의 실행이 가능하도록, 테러리즘에 대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테러리스트 요원을 훈련시키는 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또한 부하린을 통하여, 사회주의자 혁명가인 세묘노프(Semyonov)와 테러리스트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세묘노프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부하린이 나에게 그가, 세묘노프를 통해서, 스탈린의 목숨을 빼앗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32)





검사 뷔신스키는 이러한 마지막 진술을 부하린이 확인해 주기를 원한다.










“뷔신스키: 그러므로, 1932년에 당신과 세묘노프는, 스탈린 동지와 카가노비치 동지에 대한 살해 음모가 계획되어져야 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부하린: 나는 그것이 행해졌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엇이 일어났었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 중입니다.





뷔신스키: 내 말은, 1932년에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탈린과 카가노비치 동무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하린: 당신이 그렇게 규정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구체적인 음모이군요.





뷔신스키: 매우 구체적입니다.





부하린: 그 당시 우리는 공산당의 간부들에 대한 테러리스트 활동에 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뷔신스키: 그것은 단지 공론에 불과하였습니까?





부하린: 아닙니다.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공론이 아닙니다.





뷔신스키: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까?





부하린: 우리는 정치국 위원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일들을 실행하는 테러리스트 계획에 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뷔신스키: 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부하린: 스탈린과 카가노비치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뷔신스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이군요.





부하린: 아주 구체적입니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정확히 파악하여 말하고 싶었습니다.





뷔신스키: 나는, 피고 부하린이 사전 신문 동안 털어놓은 진술서의 낭독을 법정이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재판장: 허락합니다.





뷔신스키: 105페이지에서 106페이지입니다. 12월 1일에 연방 검사가 당신에게 심문 하였을 때, 당신, 피고 부하린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나는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안건을 본부의 회의에 보고하였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세묘노프의 제안을 참조한 후의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묘노프에게 지시하여 테러리스트 무리를 조직하도록 결정 하였습니다”





부하린: 예.





뷔신스키: 이것이 맞습니까?





부하린: 맞습니다.





뷔신스키: 이것은 정확히 1932년의 일입니까?





부하린: 틀림없습니다.





뷔신스키: 그러므로, 1932년에 당신은, 우익 조직 본부의 결정에 따라 세묘노프에게 테러리스트 무리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까?





부하린: 그렇습니다.





뷔신스키: 왜 당신은 그에게 테러리스트 무리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였습니까?





부하린: 테러리스트 활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뷔신스키: 누구를 대상으로 합니까?





부하린: 정치국 위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뷔신스키: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부하린: 스탈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33)










리코프에 대한 심문 동안 나찌와의 협력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리코프: 반(反)혁명 투쟁을 지속한 그들은, 우리가 1933년 이후의 기간 동안 채택했던 대책, 수단, 연합노선을 취했습니다. 이는 “본부”가 독일 파시스트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매우 중죄이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그리고 나도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 조심스럽게 진술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조직의 본부에서 이러한 연계에 대하여 사전에 논의 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우리는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사실상 그 상황은 톰스키가 주도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하린과 나는 나중에 그것에 대하여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변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부하린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톰스키가 옳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만약 그가 우리에게 물어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이 적절한 행동이었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34)















접선 본부 










검사 뷔신스키가 부하린에게 한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질문은, 소위 접선 본부로 불리는 연합 공모 조직을 구성한 이들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뷔신스키: 당신이 말한 이 조직은 우익세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누가 이 조직의 소속입니까?





리코프: 우익세력과 트로츠키파 그리고 지노비에프파 입니다.”





...





“뷔신스키: 피고 크레친스키, 당신은 트포츠키파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우익블럭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크레친스키: 1935년 2월 퍄타코프가 이것에 대해서 나에게 말했을 때, 그동안 조직을 계속 해서 만들어 왔고, 그 조직이 우익세력과 트로츠키파, 군대를 연합 시키고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한 조직 본부의 간부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익 출신인 리코프, 부하린, 루드주타크(Rudzutak), 야고다 그리고 군 출신의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y)와 카마니크(Gamarnik) 였습니다. 또한 트로츠키파 출신인 퍄타코프가 있었습니다.





...





뷔신스키: 당신 개인도 이 본부의 조직원이었습니까?





크레친스키: 1937년 많은 이들이 체포된 뒤에, 트로츠키파 출신으로 로젠골츠(Rosengoltz)와 본인 그리고 우익 세력 출신으로 루드주타크와 야고다 또한 군부 출신으로 투하체프스키와 가마르닉(Gamarnik)이 이 본부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35)















투하체프스키와 결탁하여










뒤이은 심문 동안 리코프는, 군대와 동맹을 맺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였고  “전쟁 상황을 이용해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의” 투하체프스키의 군대에 대해서도 털어놓게 되었다. 그것은 독일을 위하여 “전선을 개방하자는 의견”과 패배를 이용하여 연방의 정권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리코프는 또한 본부에서 논의된,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는 벨로루시의 분할을 허용하는 계획에 대하여 말하였다.





검사 뷔신스키는 부하린에게 어느 군대가 전선을 개방하기로 되어 있었는지 질문을 던졌다. 부하린은, 그들은 “투하체프스키,코르크(Kork) 그리고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트로츠키파 군대”라고 대답하였다. 뷔신스키의 질문에 크레친스키는, “그 중에서도 특히, 야키르(Yakir), 우보레비치(Uborevich), 코르크(Kork), 에이데만(Eidemann)” 등이 투하체프스키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36)





리코프와의 심문 도중에 재판장 울리히는, 공산주의 조직 내부에 첩자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리코프는, 벨로루시에서 우익 조직이 폴란드 군 참모와 협력하여 외국 공산주의 조직 내에 지속적으로 첩자를 침투시킨 것은 사실이라고 밝혀 주었다.





공판에서의 충분한 심문으로, 우익에 의해 계획된 반역의 보다 명확한 실태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반역자들이 생전에 쏘련 사회의 지도층 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들이 정치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반(反)혁명의 편으로 돌아서서 사회주의와 싸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리코프 그 자신도 한때 인민 위원회 회의 의장, 즉 쏘련의 총리였다.















막심 고리끼(Maxim Gorky)에 대한 암살과 야고다










비밀경찰, 연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전임 의장인 야고다에 대한 심문으로 끔직한 범죄가 드러났다. 야고다는 1928년 우호적인 관계였던 리코프를 통하여 부하린과 리코프의 비밀 우익 조직에 가입하였다. 그 당시 야고다는 비밀경찰, 연방국가정치보안부(내무인민위원회의 전신)의 부의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우익 조직이 발각되거나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심지어 우익 조직 출신의 사람들을 연방국가정치보안부의 간부직에 앉히는 것이 가능하였다. 야고다는 이러한 여건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크렘린의 수비대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 있는 파견 부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야고다는 모의되던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우익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야고다는, 그가 사보타지, 첩보활동, 그리고 쏘련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야고다는 또한 트로츠키가 맡긴, 많은 돈을 횡령하였고 키로프의 살인을 모의하는데 공범이었다고 실토하였다. 다른 모든 이들의 사례와 구분되는 야고다의 특징은, 바로 그의 지휘 하에 실행된 살해 시도와 살인의 유형이다. 야고다는, 많은 수의 의사와 다른 이들을 강요하여, 막심 고리끼와 그의 아들 막심 페슈코프(Maxim Peshkov), 공산당 정치국 위원인 쿠이비셰프(Kuibyshev), 직속 상관인 연방국가정치보안부의 의장인 멘진스키(Menzhinsky)에 대한 범죄와 살인을 저지르도록 그의 권한을 이용하였다. 암살을 실행한 의사들은 레닌과 고리끼의 주치의들이었다. 그들은, 레닌의 주치의인 플래트네프(Pletnev), 멘진스키의 주치의인 카자코프(Kazakov), 그리고 살해 음모의 초기에 노환으로 사망한 레닌의 또 다른 주치의인 비노그라도프(Vinogradov)였다. 이러한 암살에 연루된 다른 이들은, 야고다의 비서인 블라노프(Bulanov), 고리끼의 비서인 크리우치코프(Kryuchkov), 그리고 쿠이비세프의 비서인 막시모프(Maximov)였다.















트로츠키 대 고리끼










고리끼에 대한 위협은 처음에 트로츠키한테서 시작되었다. 고리끼는 트로츠키를 정치적 위험인물로 여기고 그와 완전히 의절하였다. 쏘련 정부에 맞선 투쟁에 트로츠키가 고리끼의 동의을 얻을 가능성은 없었다. 고리끼는 사회주의 건설을 강하게 지지하였고 스탈린과 우호적인 관계였다. 비록 몇몇 반역자들이 고리끼와 접촉하여 그의 동의를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노비예프(Zinoviev)뿐만 아니라 카메네프(Kamenev)와 톰스키도 그렇게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리끼는 반(反)혁명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그는 유럽의 많은 국가에 있는 지식인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쿠데타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배경으로 반(反)혁명주의자들을 비난할 태세였다. 그러한 이유로, 우익 세력과 트로츠키파의 본부는 고리끼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가 요구한 것이었다.





고리끼의 비서인 크리우치코프는 법정에서, 고리끼의 아들인 막심 페슈코프를 죽여 고리끼를 절망에 빠진 힘없는 노인으로 만들라는 지령을 야고다한테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야고다는 크리우치코프가 고리끼의 상속인이 되는 것을 미끼로 내세워 그를 꼬드겼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리우치코프는, 페슈코프를 부추기어 야고다에게 받은 와인을 밤낮으로 마시게 했다. 허약해진 몸은 점차 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사인 레빈(Levin)과 비노그라도프가 페슈코프를 진찰하고 약을 처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약은 페슈코프의 병세를 악화시켜 마침내 1934년 5월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고리끼는 비탄에 잠기었으나 지속적으로 혁명과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활동을 적극 펼쳤다. 크리우치코프의 다음 임무는, 의사들이 고리끼에게 약을 처방할 이유가 생기도록 고리끼가 쇠약해 지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막심 고리끼는 젊었을 때부터 고질적인 결핵이 있었다. 야고다가 크리우치코프에 내린 다음 지시는 고리끼가 감기에 걸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러번 실패한 뒤에, 고리끼가 병에 걸리는 기회가 찾아왔다. 야고다의 지시대로 크리우치코프는, 어느 비가 내리는 추운 날에,테쩨리( Tesseli)의 크리메아(Crimea)에서 휴가를 보내던 고리끼를 페슈코프의 미망인과 고리끼의 손자가 있는 모스크바의 그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손자는 독감에 걸렸고, 그를 끔찍이 사랑하던 고리끼도 곧 전염되었다. 고리끼는 1936년 5월 31일에 독감에 걸렸다. 마침내 의사, 레빈과 래트네프가 음모를 실행할 기회가 생겼다. 고리끼에 대한 잘못된 처방으로 그의 병은 폐렴으로 전이되었다. 의사들은 법정에서, 그들이 고리끼에게 내린 처방에 대해 후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그가 병에 걸린 지 불과 몇 주 뒤에 그것은 성공하였다. 고리끼는 1936년 6월 18일에 숨졌다.















더 많은 암살










막심 고리끼와 그의 아들 막심 페슈코프만이, 의사들을 이용한 야고다, 부하린, 리코프에 의한 음모의 유일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정치국 위원인 쿠이비셰프와 연방국가정치보안부의 의장인 멘진스키도 이러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었다. 야고다를 통해, 우익 본부는, 혼란과 지도부의 부재를 야기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많은 수의 중앙위원회의 간부 위원들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멘진스키의 사례에서, 그의 죽음으로 야고다가 연방국가정치보안부의 의장으로 진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심장병이 있었던 멘진스키는 심장 활동에 해로운 약을 복용하여 숨졌다. 그는, 1934년 5월 10일 고리끼의 아들 페슈코프가 죽은 날보다 먼저 죽었다. 이러한 치료는 의사 레빈과 카자코프에 의해 자행되었다.





정치국 위원 쿠이비셰프에 대한 암살은, 의사 레빈과 플래트네프 그리고 쿠이비셰프의 비서인 막시모프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쿠이비셰프의 심장 질환은 고의로 무시되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잘못된 약을 처방해 주었다. 막시모프는, “만일 어떤 종류든 급성 질환이나 발병의 징후가 있다 해도, 의사를 서둘러서 부르지 마라. 또한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불러야 한다면, 그를 치료하고 있던 의사인 레빈과 플래트네프 그들을 불러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37) 쿠이비셰프가 그의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던 어느 날, 그는 통증을 느끼며 매우 창백해졌다. 막시모프는 기회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막시모프는 의사를 부르지 않았고 쿠이비셰프는 집에까지 계속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 3층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 결과 쿠이비셰프는 집에 도착한 직후에 심장마비로 숨졌다. 정치국 위원인 쿠이비셰프는,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하여 막후에서 활약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었다. 몰로토프(Molotov)와 더불어 그는 1932년 쏘련공산당(CPSU)의 제17차 당회의에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하여 평가하고 제2차 계획에 대하여 제안을 하게 될 연사 중 한명이었다.















부하린-리코프 반역 공판, 요약










부하린-리코프 반역 공판의 모든 피고들은 법정 앞에서 그들의 범죄 행위를 자백했고 어떻게 이 모든 것이 합의되어 실행되었는지 실토했다. 21명의 피고인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사건을 진술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유죄를 부인하기까지 한 법정에서, 수없이 많은 범죄가 드러났다. 사건의 진전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피고 중 누군가는, 음모의 핵심 인물에 의해 잘못된 길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공판이 끝나갈 무렵 부하린은 변론을 하면서, 자신은 “리코프와 동등한 첩보활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라는 점”을 부인하였다. 부하린의 발언은 샤란고비치에 의하여 제지 되었으며, 샤란고비치는 “일생 동안 한번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법정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소.”라는 말로 부하린을 힐난했다.38)















훌륭한 검사










쏘련의 최고위직 검사인 뷔신스키는, 거짓 진술에 벌떼처럼 달려들어 보도하는 부르주아 언론의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영국비밀경찰 요원인 콘퀘스트에서 스웨덴의 언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은, 공판 동안 뷔신스키의 역할과 행동에 관하여 거짓된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완전히 달랐다. 법정의 심문 조서를 읽어보면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검사 뷔신스키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였고, 그것은 피고인이 진실 말고는 어떤 다른 진술도 할 여지를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이 완전히 틀렸다는 의미이다. 그는 사건에 대하여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고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피고인들이 연루되었다고 실토하며 모든 세부사항들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공판 내내 검사 뷔신스키는 피고인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뷔신스키는 검사로서의 그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피고인들의 답변에서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부르주아 언론이 빈번하게 왜곡시켜온 유명한 진술로 그의 답변을 마쳤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국민들 모두는, 단지 하나만을 기대하며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적에게 팔아버린 반역자들과 첩자들을 더러운 개처럼 총살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39)





법정은 18명의 피고인에게 극형을 선고하였다. 사형과 모든 개인재산의 몰수.(부하린, 리코프, 야고다, 크레친스키, 로젠골쯔, 이바노프, 체노프, 그린코, 젤렌스키, 이크라모프, 코자예프, 막시모프-디코프스키, 크리우치코프) 그리고 남은 3명에게는, 금고형과 만기 후 5년 동안 시민권의 상실 및 모든 개인 재산의 몰수를 선고했다. (플레트네프 25년 형, 라꼬프스끼 20년 형, 베쏘노프 15년 형)















러시아의 반역자들은 자본주의의 영웅들이다










공판 조서를 읽은 다음에는 이러한 판결이, 반역자 및 간첩과 살인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최상의 정당한 결과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부 저술가들은, 18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사형 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사형은 인간 사회에서 구시대의 유물이다. 그러나 60년 전보다 훨씬 전부터, 사형은 전 세계에서 대역죄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형벌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는 사형은, 역사의 거짓말쟁이들이 제기하는 전형적인 논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에게 1930년대의 공판을 비난하도록 하는 구실이 된다. 실은 쏘련에 비판적인 이들에 의해 제기되는 의문은, 그 공판이 사상가, 철학가, 시인, 세계 개혁가 등 정부에 방해되는 무리들을 제거하는데 목적을 둔 꼭두각시극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그것이 스웨덴 작가 알막(Ahlmark), 스꼬테(Skotte) 그리고 잉글런드가 그들의 서적과 평론지에 쓴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거짓말쟁이들의 영웅들은 쏘련에서 정권을 잡기 위하여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일본과 협력했던 가장 나쁜 유형의 범죄 집단이다. 그들은, 알막(Ahlmark), 스꼬떼(Skotte) 그리고 잉글런드가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었고 스웨덴 학교의 학생들에게 구체적 사례들로써 보여주려고 했었던, 나찌와 파시스트 협력자들이다. 그들은 막심 고리끼와 키로프를 죽인 살인자들이며 스웨덴 수상 올로프 팔메(Olof palme)를 살해한 이들과 같은 유형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문화혁명을 저지하기 위하여 종이 공급에 대한 사보타지를 자행하여 쏘련의 학생들에게 공책 공급을 불가능하게 만든 인물들이다. 그들은 공장, 광산, 기차를 파괴한 이들이다. 또한 그들은, 망설임 없이 못과 유리를 버터에 넣어 인민의 목구멍과 위장을 찢어지게 만들고, 수많은 말과 소를 죽인 소 흑사병을 퍼뜨린, 그러한 사람들로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살해한 이들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반역자들이며 자본주의 대중 매체가 만든 우상이자 스웨덴 우익이 영웅으로 여기는 나찌의 협력자들이다.















부하린-리코프 공판에 대한 주 모스크바 스웨덴 대사관의 보고










1938년 3월 모스크바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에 대한 오늘날 부르주아들의 호의적이고 찬양하는 태도는, 그 당시 스웨덴 외교부로 보낸 주 모스크바 스웨덴 대사관의 보고서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스웨덴 외교부와 외교관직에는 항상 우익들과 스웨덴 부르주아 상류사회 출신 사람들로 많은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사관이 서신으로, 유죄가 드러났다고 스웨덴 외교부에 통보한 그들은, 정말로 쏘련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접수할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다.










“발신: 스웨덴 대사관





최근의 트로츠키 공판에서 드러난 사항





모스크바, 1938년 3월 30일





대외비





수신: 외무부 장관 각하 귀하





기소된 내용에 대하여 유죄로 평결 난 “우익과 트로츠키 연대”에 대한 최근에 끝난 공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조금이라도 결코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 진 적이 없습니다. 진실을 전해 듣는 것이 힘들다면 그것은 특히, 객관성이라고는 찾기 힘들고, 설사 있다고 해도 예외 없이 짓밟히는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해외 단체의 사실관계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이곳에서 진행 중인 가운데, 의견은 특정 방향으로 유도되는 것 같습니다. 스물한 명의 원로혁명가에 대한 기소에 참여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비록 여러가지 측면에서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고, 모순되는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기소의 내용들이 현재 유죄 선고를 받은 그들이 지도층 집단을 없애기로 결심했으며, 강력한 결의에 고무되어 기회가 닿는 대로 권력 집단을 없애기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실의 본질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피고인들이 뜻하는 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사전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40)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묘사되는, 모스크바 공판 이후의 쏘련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또한 대사관은 다른 내용도 보냈다.










“발신: 스웨덴 대사관





테러리스트 숙청에 대하여.





모스크바, 1938년 7월 14일





대외비





수신: 외무부 샌들러(Sandler) 장관 귀하





이제 당연하게 외신에 보도되기 시작하는 테러 행위를 다루고 있는 쏘련으로부터의 충격적인 이야기들과 한여름의 무더위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항상 그랬던 것처럼, 확실히 지금 쏘련에는 특이한 기사들이 너무 많지만, 그것들이 이질적이고 편향적인 망상으로 조작되기 보다는 현실적이 된다면, 이러한 기사들은 분명히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될 것입니다. 모스크바발 외신 보도에 관해서, 약간 사실에 부합하는 핵심에 단 한 번의 강력한 언론의 선정성이 더해지면, 기사의 주된 재료는, 십중팔구 쏘련에 편견이 있는 사람들한테서 유래한 강력한 정치적 성향과 결부된 오해와 망상이라고 말해야 합니다.”41)










약간의 “명백한 사례들”을 살펴보고, “부적합한” 인물들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이들” 즉, “인민위원회에서 감옥으로 투옥된” 부패한 인민위원과 같은 “일반적인 지위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뒤, 대사는 숙청의 원인으로 화제를 이어갔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권의 반대파들이 숙청을 당했지만,(“사실 그 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권력남용, 오만, 무능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모범을 보이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쫓겨난 사람들이다. 쏘련 정부는 노동 계급 출신의 사람들로 행정부를 혁신하기를 열망했고 그것은 사실상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붕괴나 퇴보의 전조로 여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며, 오히려 사회주의자의 통합의 징후로 보아야 한다.”라고 스웨덴 대사의 보고서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고 덧붙일 수 있다. 이미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전쟁이 도래하였고 곧 나찌주의자들은 쏘련도 침공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시민, 군대, 재정기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대사의 보고서는 계속된다.










“하지만 쏘련에서 유행하는 공포정치에 대해 주목할 만한 점은, 우리가 되풀이하여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으로서, 외부인에게 강렬한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고위직들만의 획일적인 몰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는 극소수 인원에 불과하고, 공포정치와 관련된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1935년 이후 내내 행정부, 시민사회계, 군대, 경제계 등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가지각색의 권력에 의해 대규모로 숙청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례 없는 숙청의 과정에는, 최고위직의 사람들에 해당되며 그래서 극과 극의 몰락을 겪는, 현 정부의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또한 부패하고 권력을 남용하거나 모범을 보이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무능한 사람들을 있는 대로 전부 숙청하려는 뜻도 있다. 이러한 격렬한 숙청은, 한편으로 사회적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행정의 혁신을 추구하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즉 본질적으로 혁명을 수반하고 오늘날 새로운 질서의 성과를 누리고자 정당한 요구를 하는 그러한 사회적 집단 출신의 인물들을 발굴하는 노력에 의해서 추진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이들을 선발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노동자와 농민 계급 출신의 젊은 세대로, 순수한 공산주의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이들, 또한 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사회에 나와 유리한 지위 및 행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기록으로 남겨서 잊어서는 안 되는 실질적 이유가 있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견해가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여기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붕괴나 퇴보의 전조로 여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며, 오히려 사회주의자의 통합의 징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 역사적, 기술 민족학적, 지리적으로 ― 전국의 정세가 확실히 예전에는 없었던 상황이라는 당연한 이유로, 그것들은 생소하게 들린다.”42)















부하린-리코프 공판과 죠셉 데이비스 대사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법정 안에서 온종일 있었던 사람은, 바로 당시 미국 대사인 죠셉 데이비스였다. 미국 정부를 위하여 그는, 모든 공판과정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피고인의 주변상황과 공판의 진실성에 대한 보고를 해야 했다. 죠셉 데이비스가 쓴 모스크바의 임무(Mission to Moscow)라는 책을 살펴본다. 1938년 3월 8일 데이비스가, 그 당시 미국에 있었지만 일찍이 모스크바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그의 딸 엠렌(Emlen)에 쓴 서신부터 살펴본다.










“부하린 반역 재판에 대하여.





1938년 3월 8일










“소중한 나의 딸”에게.





지난주부터, 나는 부하린 반역 재판을 매일 방청하고 있단다. 분명히 너도 신문을 통해 이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정말 굉장하단다. 나는 상당히 지적인 호기심을 만끽하고 있어. 왜냐하면, 증언의 신빙성을 검토하고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 즉 거짓과 진실 ― 을 구별하는 것에 관련된, 예전에 아주 오랫동안 사건을 다룬 법정에서 사용했으나, 근래에 별로 쓸 일이 없었던 모든 지력을 총동원하게 되었기 때문이야.





인성의 모든 근본적인 결점과 부도덕 ― 최악의 모습인 사적인 욕심 ― 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는 구나. 거의 성공할 뻔 했던 쏘련 정부를 전복시킬 음모의 윤곽이 재판을 통해 밝혀진단다.





법정의 증언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 봄과 여름에 일어난 일들의 실체를 알게 되었어. 너도 예전에 법정에서 사람들이 크렘린 주변에서 벌어진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 했던 걸 기억하지? 그 당시에 크렘린은 출입을 통제했어. 마치 폭풍전야 같았고, 경비대의 분위기가 예전과 달랐어. 경비대는, 우리가 이에 대해 이야기 했던 거 기억할꺼야, 거의 전원이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Georgia) 출신으로 새로 구성되었지.





크레친스키, 부하린,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의 놀라운 증언은, 크렘린이 느꼈던 두려움이 상당히 이유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구나. 그들의 증언으로 생각해 보건데, 이미 1936년 11월 초에, 다음해 5월에 쿠데타를 감행하려는 음모를, 투하체프스키가 계획한 것 같구나. 분명히 그것은, 당시에는 정말 실행할지 여부가 불확실한 위험한 음모였어.





하지만 쏘련 정부는 아주 강력하고 신속하게 행동을 취했지. 붉은 군대의 장군들은 총살당했고 당의 전 조직은 숙청되어 완전히 정화되었어. 그러자 상당수의 고위직 인사들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바이러스에 심각하게 전염되어 실제로 독일과 일본의 정보부와 내통하게 되었어.





이러한 상황으로인해, 현 쏘련 정부는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견지하고 여러 외국 영사관을 폐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어. 정말 솔직히 말해서, 지금 법정에서 폭로되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쏘련 정권이 과잉 반응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어.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믿을 수 없는 범죄자들의 자백에서 추론한 것이라 완전히 맞다고 볼 수 없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오전 11시에 재판이 속개되어 이제 그만 해야 되겠구나. 뛰어가야 할 것 같구나.”43)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서신










이것은 서방 출신의 수석 변호사-데이비스 대사-가 부하린 공판에 대하여 쓴 내용이다. 이제 데이비스 대사가, 1938년 3월 17일에 미국 외무부의 상관에게 보낸 기밀 긴급 보고서 No.1039를 살펴본다.










“이른바 부하린의 반역 공판에 대하여





No.1039





모스크바, 1938년 3월 17일





국무 장관 귀하





대외비










자백 증거를 듣고 생기는 선입견과 피고인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지 못하는 사법 제도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증언, 증언하는 그들의 태도,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확증적인 사실들, 그리고 사법적 인지 ― 사실 입증의 필요가 없는, 법원이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 ― 로 인정할 수 있는 것들과 더불어, 재판과정에서의 여러 모습들을 매일 지켜본 뒤에, 그 사건으로 기소된 이들 중에서 정치범들에 대한 저의 견해는, 쏘련 법 체제 하에서 증거에 의해 충분히 범죄 요건이 성립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반역죄의 유죄 평결과 쏘련 형사 법규에 규정된 형벌의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공판에 거의 빠지지 않고 방청한 외교관들은, 만만찮은 정치적 반대 세력과 대단히 심상치 않은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 그 재판으로 밝혀졌다는 점에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판을 통하여 지난 여섯 달 동안 쏘련에서 벌어진,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현상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짐작하건대, 유일한 의견의 차이는, 다양한 피고인들이 어느 정도로 그 음모를 진행시켰는지, 그 계획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결속했는지에 대해서였던 것 같습니다.”44)















나찌주의가 유럽을 휩쓸다










조셉 데이비스 대사는, 피고인들이 연루된 범죄의 규모와, 아주 극적이 될 뻔 했던 그 음모의 여파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나찌주의는 사실상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1938년 3월 11일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나찌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다. 곧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가, 그 다음으로 폴란드가, 그리고 전 유럽이 나찌 독일에 넘어갈 태세였다. 그리고 나찌 독일의 바로 제1의 목표인,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짓밟아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쏘련에서,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가를 분할하여 나찌 독일과 나누어 가질 요량으로 나찌와 협력한 고위 정치 집단이 있었다!





쏘련 정부와 스탈린의 적절한 조치로 임박한 재앙을 막아 사회주의 쏘련과 탄압받는 인민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인민들을 전멸시키겠다는 히틀러(Hitler)의 협박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3년 이상 지속된 전쟁과, 나찌 군대가 2천5백만 이상의 인민을 학살하며 우크라이나, 벨루로시, 쏘련의 다른 서부 지역을 점령했던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라. 반역자들을 숙청하는 것은, 쏘련의 흥망이 걸린 문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쏘련이 승리를 얻기 위한 단호한 행동이었다.





숙청을 실행한 것은, 나찌주의를 뿌리째 없애버리고, 오늘날 현실화된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 세계가 누릴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조치였다. 만약 나찌가 쏘련을 정복했다면, 그들은 전 세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깨달아 널리 알렸다. 이 경우에는, 양심적인 부르주아들도 역시 우리들과 같은 편에 섰다.















반역 공판이, 러시아에서 히틀러의 제5열을 제거하였다.










다시금 조셉 데이비스의 책 [모스크바의 임무(Mission to Moscow)]를 살펴보자. 그는 쏘련에서 제5열의 활동을 다루었다. 제5열이란 명칭은, 외부의 적을 위해 활동했던 반역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 용어는, 스페인 내전 때 정부군에 맞선 파시스트 반란군의 공격에서 유래하였다. 파시스트 반란군은 4열로 행군하였고, 5번째 열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반란군―역자) 뒤에서 방어자 (정부군―역자) 들을 공격하는 열이었다. 데이비스 대사가 쏘련에서의 “제5열”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자. “모스크바의 임무”에 나오는 다음 장이, 1941년 여름에 쓰여 졌으나 1938년 3월 17일에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기밀 긴급 보고서를 보낸 직후에 해당하는 부분에 삽입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라.















조셉 데이비스 대사: “러시아에서의 제5열” - 1941년에 이루어진 사후 연구










주: 비록 이것이 1941년 여름에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에 집필되었지만, 러시아에서 반역 공판이 히틀러의 제5열을 어떻게 무력화 시켰는지 보여주기에 이 부분이 적절하므로 이곳에 삽입한다.










유서 깊은 모교의 6월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시카고를 지날 즈음, 대학교 연구회 및 위스콘신 연합회에서 나에게 강연을 부탁하였다. 그때는,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략한지 겨우 3일이 경과한 때였다. 청중들 중 누군가가 질문했다: “러시아에서의 제5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즉흥적으로, 나는 대답했다: “그들이 제5열을 사살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없습니다.”





그날 기차간에서,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이번 나찌의 최근 침략에서, 러시아 배후의 “내부 공작”과 관련해 어떠한 말도 없었다는 것은 다소 의외였다. 독일의 고위 지도부와 협력한 이른바 “내부 공격”은 없었다. 1939년 히틀러의 프라하(Prague) 진격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헨라인(Henlein)의 조직원들이 적극적으로 군사적 도움을 준 것과 수반하여 일어났다. 노르웨이(Norway)의 침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쏘련의 상황에서는, 수데텐주(Sudeten)의 헨라인도, 슬로바키아(Slovakian)의 티소스(Tisos)도, 벨기에(Belgian)의 그렐(De Grelles)도, 노르웨이(Norweign)의 퀴즐링(Quislings)도 없었다.





그 상황을 이리저리 깊이 생각하던 중에, 내가 러시아에 머물렀을 때 일어났던 몇 가지 사태에 아마도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별안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예전의 일기장의 목록을 다시 읽고, 국무부의 허락을 받아 내가 쓴 보고서 몇 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1937년과 1938년 러시아에서, 우리 중 누구도 “제5열”의 활동과 관련하여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표현은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 “제5열”과 “내부 공격”과 같은 나찌의 전술을 묘사하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사용하게 되었다. 대체로,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그런 전술을 취하지 않았을까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전술이라고 생각하였다. Dies 위원회와 F.B.I.에 의하여, 쏘련과 남미에서 독일의 비밀 조직 활동이 드러나고,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에서 조국을 배반하고 히틀러의 계획된 침략에 동조한 반역자들과 협력한 독일 정보부 요원들의 실제 공작이 밝혀진 것은, 고작 지난 2년 동안이었다.





이러한 공작과 전술은, 일찍이 1935년에 독일이 쏘련에 대해 꾸민 음모의 일부로서 분명히 러시아에 존재하였다.





이제야 드러나는 실상이지만, 쏘련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침략에 앞서, 독일의 고위 군부와 정치 지휘부에서 계획한 음모와 러시아에서 수행된 “내부 공작”에 대하여, 이미 그 당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골똘히 생각하다, 나는 불현듯이 그때 알아챘어야 했던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방청하였던 1937년과 1938년의 이른바 반역 재판 또는 숙청 재판에서,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이러한 공판 기록과 그 당시 나의 글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독일 제5열의 사실상 모든 계략이, 러시아에서 범죄를 인정한 반역자들의 이러한 공판에서 도출된, 자백과 진술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난 깨달았다.





쏘련 정부가 이러한 활동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빈틈없이 경계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진압하는 절차를 밟았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독일의 침략이 시작된, 1941년까지 계속하여, 쏘련 정부는 조직된 모든 제5열을 일소하였다.





그 당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사태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는 또 다른 사실은, 쏘련 정부가 1937년과 1938년에 독일과 이탈리아 영사관원에 대해 가졌던 “무시하는” 방식이었다. 매우 억지스러운 태도였다. 관련국가에 대하여 거의 억지로 무시하고 관심이 없는 태도를 취했다. 쏘련 정부가 내세운 이유는, 이러한 영사관원들이 내부적, 정치적, 파괴적 활동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이러한 연유로 그들은 공개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외세”를 도와 쏘련을 전복시키는 반역적이고 파괴적인 활동을 한 혐의로, 피고인들이 예상대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재판과 형 집행(숙청)의 내용이, 그 해 러시아 전역에 공표되었다.”










조셉 데이비스 대사는, 그 다음에 반역 공판의 몇 가지 다른 사건을 상세하게 논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장을 끝맺는다.










“이 사건의 증언으로, 투하체프스키 장군과 육해군의 수많은 군 고위 간부들의 연루 사실과 유죄가 드러났다. 라데크의 공판 직후에 이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투하체프스키의 지휘 아래, 쏘련에 대한 침략에 독일 지휘부와 협력을 모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군부에서 자행된 많은 파괴적인 행위들이 증언으로 드러났다. 증언에 따르면, 최고위급 여러 군 지휘관들이 매수되어 이러한 음모에 가담했다. 또한 증언에 따르면, 모든 세부조직, 정치적 혁명 집단, 군부에서 독일과 일본의 지휘부와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이러한 공판으로 드러나듯이, 그것이 바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이다. 크렘린 당국이 이러한 폭로와 피고인들의 자백에 대단히 놀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부가 신속하게 반응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숙청을 추진하고, 정력적이고 매우 꼼꼼하게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붉은 군대의 원수인 보로실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둑을 들어오게 도와주는 공범이 있다면, 도둑이 집에 침입하는 것은 더 쉽다. 우리는 첩자들을 경계했다.”





투하체프스키 장군은, 계획했던 대로 런던의 대관식에 가지 않았다. 그는 볼가 지방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전출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전출지에 도착하기 전에 기차에서 끌려나와 체포된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몇 주 뒤인 6월 11일, 비공개로 진행된 군사재판 후에, 11명의 다른 장군들과 함께 그는, 판결에 따라 총살되었다. 그 당시 극단적으로 보였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이러한 모든 재판, 추방, 숙청은, 오늘날 보면, 내부의 혁명뿐만 아니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스탈린 정부의 강력하고 단호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들은 국가 전역에서 모든 반역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일소하였다. 정부에 유리하게 모든 불신이 제거되었다.





1941년 러시아에서는 제5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5열을 총살하였다. 숙청으로 국가가 정화되었고 반역이 제거되었다.”45)










데이비스 대사의 연구는, 여느 때보다 오늘날 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숙청에 대한 문제를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문제도 제기하는데, 이는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결코 다루지 않은 주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는, 여하튼 어떻게 나찌가, 영국군의 도움까지 받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프랑스를 이겼는가 하는 것이다. 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프랑스 고위층의 자국에 대한 배반과 기타 여러 문제들은 설명이 필요한 주제이다.















반역자들과 쏘련에 대한 위협










1930년대 통상적인 일간지를 읽어본 이들은, 어떻게 쏘련에 대한 위협이 나날이 증대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위협은 나찌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나, 서방의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 가해 왔다. 1930년대 내내 그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었다. 1939년 9월 나찌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어떠한 전투도 시작하지 않았고, 폴란드를 구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위 “위장된 전쟁”이었다. 프랑스 영국 연합군과 나찌 독일 간의 실제 전쟁은, 9개월이 지난 1940년 6월에 나찌가 프랑스를 침공해서야 발발하였다. 그러나 1939년 9월부터 1940년 6월까지, 프랑스와 영국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반 쏘련 정책이 이 국가들에서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에는, 쏘련으로부터 망명한 이들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군대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장군 웨이강(Weygand) 휘하의 부대에 코카서스인들로 구성된 외인 전투 부대가 창설되었다. 1939년 12월 핀란드가 쏘련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핀란드 편을 들었다. 영국은, 144대의 전투기, 114문의 중포와 수많은 수류탄 및 공중폭탄을 보냈다. 프랑스는, 179대의 전투기, 472문의 대포, 5,100정의 기관총과 대략 백만 개의, 여러 종류의 수류탄을 보냈다. 동시에 이 국가들은 150,000명의 군대를 핀란드 전선에 보내어 쏘련과 싸우게 할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그들의 영향력을 미치는 곳에 나찌 독일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길 원했다. 쏘련에 대한 대규모의 위협은 1930년대 내내 존재한 명백한 사실이었다. 모든 자본주의 유럽국가 정부는, 쏘련에 대한 전쟁을 일으킬 여론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이러한 위협은 현실로서 인식되었다.





쏘련 지도부는, 전 국민을 단합시켜 사회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사회적 성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엄청난 국방비를 마련하지 않으면 쏘련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렇게 긴장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쏘련 정부는, 쏘련을 위협하는 국가들이 쏘련 내부에 첩자를 심어두고 있었고, 그들이 정부와 당에서 고위직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쏘련의 생존을 위해 모든 이들이 매우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러한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에서,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산업계와 군부에서 사보타지를 하는 다른 이들도 있었다.





쏘련 정부는, 반역자들이 쏘련 전역에서 활동하고 조직화되어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이들은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부에 유리하게 모든 불신이 제거되었다.”라고 데이브스 대사는 말한다. 만약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나찌의 침략과 쏘련에 대한 학살 전쟁이 목전에 닥치고 있었다. 행정부와 국가 기관에서, 나찌 침략자들과 협력을 준비하고 사회주의 국가에 적의를 품은 이들을 그대로 두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강력한 조치로 쏘련 정부는, 나찌 약탈자들로부터 국가를 ― 그리고 전 세계를 ― 성공적으로 구하였고 나찌주의를 박멸하였다. 만약 쏘련이 멸망하고 나찌가 전 세계를 차지하였다면, 역사는 쏘련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였을까?















몇 가지 결론들










이 책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1958년에 출간된 멀 페인소드의 책, “쏘련 통치하의 스몰렌스크”를 살펴보자. 새롭게 알게 된 사실로, 페인소드의 책이 사실상 역사적 사건을 왜곡하여 상당히 독자를 현혹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는 일련의 지식인들이 형성되었고,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저속한 비밀경찰에게 쏘련을 다룬 권위 있는 책으로서 여겨진 것은 훨씬 더 안 좋은 일이다. 아크 게티의 책, “대숙청의 기원들”을 보면, 페인소드의 근거없는 주장처럼 여느 때보다 과장된 연이은 숙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936년 당의 정책이 바뀌자 중앙 위원회가 연이은 숙청을 시작했다는 페인소드의 주장은 조금도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쏘련의 모든 반대파를 없애기 위한 꼭두각시극이라고, 페인소드가 말한 그 재판은, 나찌와 협력을 모의한 반역자들에 대한 공정한 소송 절차로 결국 판명난다.





사실 1930년대에 쏘련에서 벌어진 정치적 운동은, 당과 사회에서 관료의 권력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 제기였다. 모든 것이 훌륭하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투쟁은 쏘련이 사회주의 완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나찌의 침략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크 게티 교수의 책, “대숙청의 기원들”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증언에 따르면, ―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로 “대숙청”을 의미하는 ―예조프시치나 (Ezhovshcina, 예조프 (Ezhov) 시기46)) 는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그것은 경직된 관료제도가 반대파를 짓밟고 옛 급진적인 혁명주의자들을 전멸시킨 결과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완전히 정반대였을 것이다. 예조프가 활동하던 시대가 관료정치에 대하여 다소 급진적이고, 심지어 병적인, 반발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증언과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공무원들은, 주의주의와 혁명적인 청교도주의로 요동치는 정국 속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퇴출되었다.47)





 










끝맺는 말










조셉 데이비스 대사와 같은 인물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양심적인 부르주아 지성을 찾기 위해서는 망원경 크기의 돋보기가 필요하다. 부르주아 대중 매체에는, 콘퀘스트, 스콧(Skotte), 알막(Ahlmark), 잉글런드와 같은 어릿광대들과, 대학과 신문 정치면을 꽉채우는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작가들”과, 정확히 말하면 공산주의 범죄를 전혀 연구할 의도가 없는 이른바 신망이 두터운 자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의 지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신용카드를 휘두르며, 기꺼이 주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신적인 난쟁이들을 연상시킨다. 좀처럼 감히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 양심적인 지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항상 수세에 몰려있고, 사기꾼을 지적하거나 그들을 사실대로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몇몇 더 대담하고 문명화된 용기 있는 자들은, 대중에게 논쟁에 대한 다른 이해를 제공할 수 있었고 그것을 품위 있는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더욱이 “시장 권력”에 대한 지성의 순종적인 복종은,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멍에를 만들어 낸다. 착취와 지성인의 둔감함으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부르주아 계급의 오만한 어릿광대들과 투쟁해야 한다.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거짓에 맞서기 위해 중요하다! 오늘날 사회에서, 거의 예외 없이, 오직 우리 공산주의들만이 역사의 지식을 노동자 인민에게 되돌려주길 원한다. 우리는 이 임무에 실패하지 말자. <노사과연>










1930년대 쏘비에트공화국에서의 계급투쟁(5) ― 쏘련공산당 (CPSU)의 숙청과 정치재판 ―














Mario Sausa / 2001저





번역 : 편집부











1) Ibid, p. 88.






2) Ibid, p. 106.






3) Ibid, p. 91.






4) Ibid, p. 98.






5) Ibid, p. 93.






6) Ibid, p. 106.






7) Ibid, p. 102.






8) Ibid, p. 103.






9) Ibid.






10) Ibid.






11) Ibid, p. 322.






12) Ibid, p. 326.






13) Ibid, p. 327-328.






14) Ibid, p. 328.






15) Ibid, p. 331-332.






16) Ibid, p. 333.






17) Ibid, p. 118.






18) Ibid, p. 121-122.






19) Ibid, p. 122-123.






20) Ibid, p. 123.






21) Ibid, p. 124






22) Ibid, p. 126.






23) Ibid, pp. 128-137.






24) Ibid, p. 370.






25) Ibid, p. 430.






26) Ibid, pp. 373-375.






27) Ibid, p. 379.






28) Ibid, pp. 377-378.






29) Ibid, pp. 440.






30) Ibid, pp. 448-449.






31) Ibid, pp. 169-170.






32) Ibid, p. 170.






33) Ibid, pp. 173-174.






34) Ibid, p. 178.






35) Ibid, p. 181.






36) Ibid, pp. 186-188.






37) Ibid, p. 612.






38) Ibid, p. 770.






39) Ibid, p. 697.






40) Correspondence from the Swedish Embassy in Moscow to the Swedish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in Stockholm, Riksarkivet, Stockholm.






41) Ibid.






42) Ibid.






43) Davies 1941, p. 269.






44) Ibid, p. 271.






45) Ibid, pp. 272-280.






46) 역자 주: 내무인민위원 예조프에 의해 대숙청이 자행되었던 시기.






47) Getty 1985, 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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