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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3)
글쓴이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E-mail send mail 번호 106
날짜 2008-12-19 조회수 3625 추천수 131
파일  1229678439_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hwp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역자의 말: 이번 호는 지난 호에 이어, 이 글의 2장을 번역․연재한다. 내용은 쏘련의 형벌 체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고르바쵸프에 의해 개방된 국가 문서고의 자료를 연구한 결과들이다. 문서고가 개방되기 전, 콘퀘스트와 솔제니찐의 추측을 바탕으로 제시된 쏘련의 수용수의 숫자들과 이것을 비교해 보길 바란다. 그들이 쏘련을 비난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내세웠던 수치들은 아직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이는 앞서 번역을 통해 이야기되었던 러시아의 메드베제프 같은 자들의 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의 정통적 계승자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라 자칭하는 국제사회주의자(IS)의 개조(開祖)인 토니 클리프의 책(예를 들면, ��소련국가자본주의�� 같은 책들)을 통해서도, 또한 그들의 후계자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수용되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이번 호의 번역은 스웨덴어 원본을 그대로 따랐다. 상당한 오류로 판단되는 몇몇 부분이 영어본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본은 참고용으로만 사용했다. 역자가 스웨덴어의 문외한이지만, 영어본을 참고해서 스웨덴어를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은 순전히 과학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 이 글의 모든 각주는 역자에 의한 것이다.















※ 바로잡습니다.





��정세와 노동�� 2008년 10월호 100쪽의 열 번째 줄에서,





“다시 콘퀘스트에 의하면, 1937년부터 1939년 사이에 1백만 명의 정치 수용범이 처형되었고, 정치 수용범 2백만 명은 굶어 죽었다”는 구절의 ‘1939년’을 스웨덴어 원본을 기준으로 ‘1938년’으로 바로잡습니다.]



































싣는 차례





Ⅰ.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감금되고, 죽었다는 조작된 역사



․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찐까지



독일 국민 생활권의 일부분으로 생각되었던 우끄라이나



윌리엄 허스트 - 히틀러의 좋은 친구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



52년이 지나서야 거짓말이 밝혀지다!



로버트 콘퀘스트 ― 꾸며낸 이야기의 창조자



영국정보부의 첩보원이자 정보조작담당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찐 ― 반동분자, 파시스트



․ 프랑코의 파시즘을 선전하다.



나찌, 경찰스파이, 그리고 파시스트!



 



Ⅱ. 국가문서고가 거짓선전에 구멍을 내다.



 





․ 위조 방법



․ 고르바쵸프가 국가 문서고를 열다.



조사 보고서



노동 수용소에 대한 사실



9백만 명이 아니라 4십5만4천 명이다.



내․외부의 위협



미국에 더 많은 죄수들이 있다.



의약품의 부족



10만 명이 사형에 선고 되었다.



형벌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Ⅲ. 쏘련에 대한 조악한 거짓말들



․ 러시아 조사보고서 - 검토



․ 반혁명



․ 무장 공격



․ 1937년의 숙청



․ 산업 사보타지



․ 절도와 부패



․ 쿠데타를 위한 계획



․ 조작된 숫자



역사로부터 배우자!







조사보고서










쏘련 형벌 체계에 관한 조사연구는 거의 9천 쪽에 달하는 긴 보고서 속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다수에 의해 저술되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은 러시아 역사학자인 V. N. 젬스코프, A. N. 더긴, 그리고 O. V. 슬레브늌이다. 그들의 저작은 1990년 발표되기 시작해, 1993년까지 대략 마무리되었고, 러시아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출판되었다. 보고서들은 서방연구자 사이의 공동연구의 결과로, 서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필자가 잘 알고 있는 2개의 저작이 있다: 하나는 1993년 9월 프랑스 잡지 ��l’Histoire��에 게재된 것인데, 프랑스과학연구센터, 즉 CNRS(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수석연구원 니꼴라 베르뜨[Nicolas Werth]가 쓴 것이다. 다른 저작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J. A. 게티[J. Arch Getty]에 의해 미국 잡지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 발표된 것으로, 그것은 CNRG의 연구원 G. T. 레터스폰[G. T. Rettersporn]과  러시아역사연구소(러시아과학아카데미 부설)의 연구원 V. N. 젬스코프와의 공동연구의 결과이다. 오늘날 이 문제에 등장하는 책들은 상기의 연구자들 또는 그들 연구 그룹의 다른 연구자들이 쓴 것이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 이후 오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서 분명하게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연구자도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세계관은 부르주아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이다. 실제로 그들 중 대다수는 극히 반동적이다. 이 점은 독자들이 아래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의 소산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강조되어야 한다. 일어났던 일은 상기의 연구자들이 콘퀘스트, 솔제니찐, 메드베제프와 다른 이들의 거짓말을 완전히 폭로했다는 것이며, 그들이 알마르크[Ahlmark], 엥글룬트[Englund], 스콧[Skott] 1)등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학자적 양심을 앞에 두고, 프로파간다의 의도에 자신을 팔아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작업들이 순수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연구의 결과들은 쏘련 형벌 체계에 관한 수많은 물음에 답하고 있다. 우리에게 스딸린이 쏘련을 지도하고 있던 시기는 연구의 주관심사이며, 거기에 논쟁이 집중되어 있다. 먼저 우리는 아주 구체적인 다수의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 답을 앞서 말한 ��l’Histoire(L’H)��와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AHR)��에서 찾을 것이다. 이것이 쏘련 형벌 체계에 관한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들을 다루는 최선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쏘련의 형벌 체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





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또는 “다른 이유로” 구금되어 있었는가?





3. 노동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4. 1953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가, 그리고 특히 1937년부터 38년까지의 숙청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가?





5. 형량은 얼마나 길었는가?










이 다섯 가지 물음에 답한 후에, 우리는 쏘련에서의 수감자, 사망자와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는 두 집단에 가해진 형벌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즉, 1930년 형벌에 처해진 쿨락들과 1936년부터 38년 사이에 형벌에 처해진 반혁명분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노동 수용소에 대한 사실










첫 번째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1930년대 이후 쏘련의 형벌 체계는 구치소, 굴락 노동 수용소와 노동 이주지, 개방특별지역[öppna specialområden, special open zones], 그리고 벌금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구인되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을 기소할 것인지 석방할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예비심문 기간 동안 그 사람은 구치소에 수감된다. 그 중 기소된 사람은 재판을 받게 되고, 재판 결과에 따라 석방되거나, 투옥되거나 혹은 벌금형에 처해진다. 벌금형을 받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이 저지른 위법의 성질로 볼 때 벌금형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예비심문 기간에 구인되지 않았다. 또한 벌금은 그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얻을 수 있는 보수의 일정 비율로 결정되었다. 징역형에 선고된 피고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





굴락 노동 수용소에는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이들의 다수와 심각한 범죄 행위(살인, 강도, 강간, 경제범죄 등)를 저지른 자들이 보내졌다. 3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다른 범죄자들도 여기로 보내졌다. 여기에서 일정 기간을 보낸 후에 수용수들은 노동 이주지나 개방특별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노동 수용소라는 말은 그것의 면적이 매우 넓고, 그곳의 수용자들이 엄중한 감시 속에 생활하며, 노동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들이 수감 기간 동안 노동을 하면서, 사회의 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낼 수는 없었다. 오늘날 몇몇 사람들은 이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것이다. 1940년 3월, 쏘련에는 53개소의 노동 수용소가 있었다.





굴락 노동 이주지는 약 425개소가 있었으며, 노동 수용소보다 훨씬 작은 단위였고, 더 자유롭고, 덜 엄격한 제도로 운영되었다. 여기에는 대개 일반 범죄자나 정치범 같은, 더 짧은 기간의 징역형에 선고된 사람들이 보내졌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공장에서, 또는 농장에서 일했고, 이것은 일반적 사회경제의 일부분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노동에 대한 보수는 다른 노동자들이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수 각자에게 돌아갔다.





개방특별지역은 대개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토지를 몰수당하고, 살던 곳에서 추방된 쿨락들이 보내진 농업 지역이다.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일부 또한 그들의 형벌 기간을 이곳에서 보내야했다.















9백만 명이 아니라 4십5만4천명이다.










두 번째 질문. 쏘련의 형벌 체계에는 얼마나 많은 수용수가 있었는가? 이 질문은 사실상 굴락 노동 수용소와 노동 이주지, 그리고 구치소에 있는 수용수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럼 형벌 체계가 중앙 행정으로 단일화 되었던 1934년부터 스딸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20년 동안의 통계표를 보자. 이 표는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아래를 보라).















1934년부터 53년까지 쏘련의 수용수 통계





(표는 ��American Historical Review��로부터)










                                              (단위: 명, %. 수용수 인원은 매년 1월 1일 기준임.)













































































































































































































































































































































































































































































































































































 





굴락



노동수용소







혁명분자







혁명분자



(%)





한 해 동안의 사망자 수











(%)





한 해 동안의 석방자





한 해 동안의 탈주자





굴락



노동



이주지





구치소





총계





1934





510,307





135,190





26.5





26,295





5.2





147,272





83,490





 





 





510,307





1935





725,438





118,256





16.3





28,328





3.9





211,035





67,493





240,259





 





965,697





1936





839,406





105,849





12.6





20,595





2.5





369,544





58,313





457,088





 





1,296,494





1937





820,881





104,826





12.8





25,376





3.1





364,437





58,264





375,488





 





1,196,369





1938





996,367





185,324





18.6





90,546





9.1





279,966





32,033





885,203





 





1,881,570





1939





1,317,195





454,432





34.5





50,502





3.8





223,622





12,333





355,243





350,538





2,022,976





1940





1,344,408





444,999





33.1





46,665





3.5





316,825





11,813





315,584





190,266





1,850,258





1941





1,500,524





420,293





28.7





100,997





6.7





624,276





10,592





429,205





487,739





2,417,468





1942





1,415,596





407,988





29.6





248,877





18





509,538





11,822





360,447





277,992





2,054,035





1943





983,974





345,397





35.6





166,967





17





336,135





6,242





500,208





235,313





1,719,495





1944





663,594





268,861





40.7





60,948





9.2





152,113





3,586





516,225





155,213





1,335,032





1945





715,506





283,351





41.2





43,848





6.1





336,750





2,196





745,171





279,969





1,740,646





1946





600,897





333,833





59.2





18,154





3





115,700





2,642





956,224





261,500





1,818,621





1947





808,839





427,653





54.3





35,668





4.4





194,886





3,779





912,794





306,163





2,027,796





1948





1,108,057





416,156





38





27,605





2.5





261,148





4,261





1,091,478





275,850





2,475,385





1949





1,216,361





420,696





34.9





15,739





1.3





178,449





2,583





1,140,324





 





2,356,685





1950





1,416,300





578,912





22.7





14,703





1





216,210





2,577





1,145,051





 





2,561,351





1951





1,533,767





475,976





31





15,587





1





254,269





2,318





994,379





 





2,528,146





1952





1,711,202





480,766





28.1





10,604





0.6





329,446





1,253





793,312





 





2,504,514





1953





1,727,970





465,256





26.9





5,825





0.3





937,352





785





740,554





 





2,468,524












위의 표로부터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로버트 콘퀘스트가 제시한 데이터의 수치들과 위의 표를 비교하며 시작해보자. 콘퀘스트는 1939년 쏘련의 노동 수용소에 9백만 명의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주장했고, 1937년부터 39년 사이 3백만 명의 정치범이 거기서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콘퀘스트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이들은 오로지 정치범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정치범 이외에 더 많은 일반범이 수용소와 구치소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50년 쏘련에 정치범 1천 2백만 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명명백백한 사실로, 우리는 콘퀘스트가 얼마나 사기를 친 작자인지 쉽사리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수치 중, 사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1939년 노동 수용소와 노동 이주지, 구치소 전체에는 약 2백만 명의 수용수가 있었다. 이 중 정치적 범죄로 형을 선고받은 자들은 콘퀘스트가 주장하듯 9백만 명이 아니라, 대략 4십5만4천 명이었다! 그리고 1937년부터 39년 사이에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은 그의 주장처럼 3백만 명이 아니라, 1십6만 명이었다! 1950년 노동 수용소에는 1천2백만이 아니라, 5십7만8천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 로버트 콘퀘스트가 오늘날 공산주의에 맞선 우익 프로파간다의 주요 출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페터 엥글룬트[Peter Englund], 슈타판 스콧[Staffan Skott], 그리고 페르 알마르크[Per Ahlmark] 같은 자들에게는 구루[guru]2)와 같은 존재이다. 6천만 명이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솔제니찐의 말은 논할 가치조차 없으며, 이는 누가 보아도 명백히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단지 병든 정신을 가진 자만이 이런 터무니없는 망상에 현혹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기꾼들은 제쳐두고, 굴락 노동 수용소에 관련된 통계들을 분석해보자. 곧바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형벌 체계 하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대 약 2백5십만이라는 수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속박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그 사회가 아직은 불충분하며 긍정적 발전을 위해 요구되는 것을 모든 이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2백5십만 명은 사회에 대한 부정적 정도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내․외부의 위협










그러나 우리는 또한 형벌 체계 하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더 상세하게 답해야만 한다. 봉건제와 농노제로부터 막 나온 쏘련과 같은 나라에서, 전(前)사회의 유산은 다방면에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회가 감내해야 할 무거운 부담이었다. 짜르하의 전(前)체제에서 근로인민들은 극도로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었다. 인간의 삶은 거의 가치가 없었다. 절도와 폭력범죄는 거대한 폭력으로 처벌되었다. 권위에 대한 반란은 보통 대량학살이나, 사형, 그리고 견디기 힘든 징역형으로 끝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들과 이와 나란히 연관되어 있는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이 강한 쏘련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지게 되는 데, 또 국가적 범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우리는 그 나라가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쏘련의 인구는 거의 1억6천만~1억7천만 명이었다. 30년대는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힘겨운 시기였다. 독일의 나찌즘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들은 쏘련에게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나찌 독일은 민족으로서의 슬라브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1931년 스딸린은 정세의 심각성에 관한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들보다 50년 또는 100년 뒤쳐져 있다. 우리는 10년 내에 그 차이를 따라 잡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해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하게 될 것이다.”3) 그로부터 10년 후인 1941년 6월 22일, 나찌 독일은 쏘련을 침공하였다. 1930년대 전반에 걸쳐 사회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왜곡되었다. 나찌 독일에 맞선 임박한 전쟁에 대한 방어 준비가 사회적 자원의 가장 큰 몫을 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큰 보수 없이 노동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1937년, 하루 7시간 노동일제는 폐지되어야 했다. 1939년에는 대부분의 일요일에도 노동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대(大)전쟁으로 인해 30년대 그리고 40년대 이십 년 동안 사회의 발전이 왜곡되었던 이 시기에, 전쟁은 2천5백만 명의 쏘련 인민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국토의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개인들은 생활이 그들에게 주지 못하는 것을 가지려고 범죄를 저질렀다.





이처럼 힘겨운 시기 동안, 쏘련에서 형벌 체계 하에 있었던 사람은 최고 2백5십만 명이었다. 이는 대략 성인 인구의 2.4%였다. 그럼 다시 한번,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숫자가 많은가? 아래와 한번 비교해보자.















미국에는 더 많은 죄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구가 2억4천만 명이고 세계 자원 전체의 60% 이상을 혼자 소비해 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의 형벌 체계 하에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는가? 전쟁의 위협도 없는 그리고 사회적 변화로 인해 경제적 안정성이 위협받지도 않는, 이 부유한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997년 8월 16일자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백5십만 명이 미국의 형벌 체계 하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1995년보다 2십만 명이 증가한 수치이며, 오늘날 미국의 범죄자 수는 “성인 인구의 2.8%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미연방 법무부의 통계를 따른 것이다(다음을 보라. 미연방 법무부 법무통계국, ‘보호관찰 및 가석방 인원 통계’ 보도자료, 1996; http://www.ojp.usdoj.gov/bjs/press.htmhttp://www.ojp.usdoj.gov/bjs/press2.htm). 지금 미국의 죄수 숫자는 이전 쏘련에서 있었던 수용수의 최대 인원보다도 3백만 명이 더 많다! 쏘련에서는 제일 높았을 때 성인 인구의 2.4%가 형벌에 처해졌다. 반면 현재 미국에서의 수치는 2.8%이며, 이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4) 1998년 1월 18일자 미연방 법무부 보도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범죄자 수는 1년 동안 96,100명5)이 증가했다.





쏘련의 노동 수용소는 아마도 수용수들에게는 힘들고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감옥은 마약이 수두룩하게 있고, 매음과 성노예가 판치고 있다(미국 교도소에서는 한 해 290,000 건의 강간이 발생한다). 미국의 감옥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현대에, 가장 부유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의약품의 부족










세 번째 질문으로 가보자. 노동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앞의 통계를 통해, 우리는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수는 1934년 5.2%에서 1953년 0.3%까지 큰 폭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용소에서 죽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주요하게는 전염병과 싸울 의약품이 부족했던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다른 사회, 이를테면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는 없었던, 그래서 특별히 쏘련의 노동 수용소에서만 발생했던 문제가 아니었다. 항생제가 발견되고, 2차 대전 이후 그것이 널리 쓰이게 된 이후에야 상황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다. 야만적인 나찌가 쏘련인민들에게 매우 가혹한 생활조건을 강요했던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상황은 가장 힘겨웠다. 그로 인해 이 4년 동안, 노동 수용소에서는 5십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20년 동안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 수의 거의 절반 이상이 되는 숫자이다. 이러한 전후사정을 고려하며 우리는, 전쟁 중에 노동 수용소 밖에서는 2천5백만 명의 인민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1950년대 초, 쏘련의 상황이 나아지고 항생제가 널리 쓰일 수 있기 시작했을 때, 노동 수용소에서의 사망자 수는 0.3%로 현저하게 떨어졌다.















십만 명이 사형에 선고되었다.










네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자. 1953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가, 그리고 특히 1937년부터 38년까지의 숙청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가? 우리는 볼쉐비끼들이 1930년부터 53년까지 노동 수용소에서 1천2백만 명의 정치범을 살해했을 것이며, 1937년부터 38년 사이에 그들 중 1백만 명을 처형했을 것이라는 콘퀘스트의 수치를 앞서 보았다. 솔제니찐은 수천만 명이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중 3백만 명이 1937년부터 38년 사이에 죽었다고 주장한다. 쏘련에 관한 논쟁에서 언급되는 훨씬 더 높은 수치가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올가 샤투노프스카야[Olga Shatunovskaya]6)는 1937년부터 39년 사이에 7백만 명이 처형되었다는 수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쏘비에트 문서고로부터 읽을 수 있는 기록들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1937년부터 38년까지 사형이 선고되었거나 사형이 집행된 이들의 총체적 수치는 입수할 수 없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이중으로 계산될 위험성이 있고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수를 보여줄 위험성이 있지만,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유사한 수치들을 모아야 했다. 옐친에 의해 옛 쏘비에트 문서고 전체의 책임자로 지명된 드미뜨리 볼코고노프[Dmitrii Volkogonov]7)에 의하면, 1936년 10월 1일부터 1938년 9월 30일까지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30,514명이었다. KGB로부터 나온 또 다른 자료를 보자. 1990년 2월의 KGB 보도 자료에 따르면, 1930년부터 53년까지 23년 동안 반혁명죄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786,098명이었다. 그 중 681,692명이 1937년부터 38년 사이, 사형에 선고되었을 것이라고 KGB는 말하고 있다. KGB의 자료를 조사해 볼 방법은 없다. 그러나 사형에 선고된 사람의 수를 이렇게 분류하는 것을 믿기는 힘든 일이다. 더구나 자본주의를 위해 일하는 새로운 KGB가 사회주의를 위해 일했던 옛 KGB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차피 KGB의 자료가 근거하고 있는 기초자료에 의해, 23년간 사형이 선고되었던 사람들이 1990년 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단지 반혁명분자들인지, 아니면 일반범과 반혁명분자 양자를 포함하는 것인지는 결국 밝혀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모든 자료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일반범과 반혁명범의 수가 거의 비슷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 모두의 결론은, 1937년부터 38년 사이에 사형이 선고된 사람의 수가 서방의 프로파간다가 주장하는 것처럼 수백만 명이 아니라, 대략 십만 명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서, 쏘련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사형 선고를 받은 많은 이들은,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노동 수용소나 노동 이주지에서 형기를 복역하도록 형이 변경되었다. ‘일반’범과 반혁명분자를 구분하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사형이 선고된 사람 대부분은, 과거에 살인이나 강간 같은 매우 험악한 강력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이다. 60년 전 그 때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런 범죄자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형벌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다섯 번째 질문. 형벌의 기간은 얼마나 길었는가? 형량 선고는 서방의 프로파간다를 통해 널리 퍼진 쏘련에 대한 유언비어 가운데도 최악의 소재 중 하나이다. 쏘련에서 징역형에 처해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갇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들어온 자는 절대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것은 완전한 날조이다! 스딸린 시기, 범죄자 중 압도적 다수는 최고 5년형에 선고 되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AHR)��의 통계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936년 러시아 연방에서 일반범에게 선고된 형량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5년 미만의 형: 82.4% ▲5년~10년형: 17.6%. 1936년 쏘련 전체에서 인민법정을 통해 정치범에게 선고된 형량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5년 미만의 형: 44.2% ▲5년~10년형: 50.7%.8) 굴락 노동 수용소형이 선고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오랜 기간을 복역했는데, 1940년 1월 수용수 통계는 다음과 같다. ▲5년 미만의 형: 56.8% ▲5년~10년형: 42.2% ▲10년 이상의 형: 1.0%. 또한 우리는 1939년 한 해 동안의 쏘련법정 통계를 가지고 있다. 그 때 선고된 형량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5년 미만의 형: 95.9% ▲5년~10년형: 4.0% ▲10년 이상의 형: 0.1%.





우리가 볼 수 있듯, 무한정 긴 징역형이라는 소재 역시 사회주의를 헐뜯기 위해 서방에 널리 퍼진, 쏘련에 대한 유언비어 중 하나이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번역: 김해인(교육위원장)











1) 이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마리오 소사, 「쏘련역사에 대한 거짓말(2)」, ��정세와 노동�� 2008.10.(제39호), p. 97의 각주 7.






2) 힌두어로 영적 스승, 현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3) Stalin Works, Vol. 13,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1954, p. 41; J. V. 스딸린, “THE TASKS OF BUSINESS EXECUTIVES(Speech Delivered at the First All-Union Conference of Leading Personnel of Socialist Industry, February 4, 1931)”.






4) 2007년 말 미연방법무부 통계에는 7백3십만 명이 연방교도소와 구치소에 수감되었거나 보호관찰 및 가석방 형태로 교정 기관의 관리 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70%인 5백1십만 명은 보호관찰 및 가석방 상태에 있었으며, 30%인 2백3십만 명은 연방교도소나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는 전년에 대비해, 수감인원은 1.5%, 보호관찰 및 가석방의 형태로 지역사회의 감시(under community supervision)를 받는 사람은 2.1% 증가한 수치이다. 이상의 수치로 볼 때, 2007년 말 미국 성인 31명 중 1명(성인 인구의 3.2%)이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사회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참조: US department of justice Bureau of Justice Statistics, ‘Probation and Parole in the United States’, 2007; http://www.ojp.usdoj.gov/bjs/pub/press/p07ppuspr.htm).






5) 1998년 8월 16일자 보도 자료에는 약 110,000명이 증가했다고 되어있으며, 1990년부터 연평균 3%정도 증가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참조: US department of justice Bureau of Justice Statistics, ‘Probation and Parole Populations’, 1997; http://www.ojp.usdoj.gov/bjs/pub/press/papp97.pr).






6) 올가 샤투노프스카야(Olga Grigoryevna Shatunovskaya, О́льга Григо́рьевна Шатуно́вская, 1901~1991). 1901년 러시아 바쿠에서 유대인 법률가의 딸로 태어났다. 16세에 공산당에 가입했고, 모스끄바당 중앙위원이었던 1938년 뜨로츠끼 그룹에서 활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노동 수용소 10년형에 처해졌다. 모스끄바 당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알고지낸 흐루쉬쵸프의 도움으로 1954년 당 통제위원이 되었다. 그녀는 키로프 암살과 30년대 재판을 재조사하는 책임자가 되었고, 스딸린 격하 운동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후 레닌훈장(군인, 민간인 구분 없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훈장)과 노동자 적기훈장(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훈장)을 모두 받았다.






7) 드미뜨리 볼코고노프(Dmitri Antonovich Volkogonov, Дмитр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когонов, 1928~1995). 러시아 육군대령이자, 역사학자이다. 1963년부터 71년까지 레닌 군사정치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71년 이후 정치총국에서 근무, 1984년에 정치총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8년부터 91년까지 전사연구위원회 위원장에 재직했다. 1992년부터는 대통령 군사담당 보좌관에 있었고, 최고회의 문서보관소 위원회 위원장 및 러시아 국방부 창설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군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레닌과 스딸린 그리고 뜨로츠끼의 전기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스탈린��(세경사)과 ��크렘린의 수령들��(한송) 등이 있다. 그의 책에서 볼코고노프는, 스딸린을 숙청 대상을 일일이 메모하고 그것을 지시하는 음산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특히, 그는 뜨로츠끼의 죽음과 관련해서 그것이 스딸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부분은 여러 곳에서 뜨로츠끼주의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이와 관련된 한국의 대표적인 논문은 정성진, 「트로츠키의 생애와 사상 - 볼코고노프의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동향과 전망�� 제36호(1997년 겨울호)가 있다. 또한 그의 책 ��스탈린��에는 한국전쟁과 스딸린의 관계가 서술된, 소위 ‘비밀문서’가 수록되어있다. 이 부분은 군사관계자와 우익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고 있다.






8) 영어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1937년 이전, 징역의 최대 기간은 1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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