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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 중 「정치경제학의 방법」의 한 가지 독해방식
글쓴이 김동수 E-mail send mail 번호 105
날짜 2008-12-19 조회수 2726 추천수 125
파일  1229677960_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hwp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이하 「서설」)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방법을 직접 설명한 유일한 유고라는 점에서 (특히 그의 방법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원고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대체로 보아 서술에서 표현된 범주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철학적으로 보편과 특수의 대립과 일맥상통한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은 철학사 일반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문제다. 철학의 태동기에 인간은 변화하는 구체적 세계를 지배하는 (일종의 논리적 추상물인1)) 불변의 본질이나 근원을 추적하고자 했다. 이른바 자연주의적 전통은 그 답을 자연적 소재로부터 찾았다는 점에서 붙여진 별칭이다. 인본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인간을 배제한 사변이 추상적임을 들어 인간적 세계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사유의 관심을 돌릴 것을 촉구했다.2) 이 관심이 의식적인 철학적 범주의 형태로 등장한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다. 보편과 특수의 대립은 중세 1,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진행되었는데, 11세기와 14세기에 벌어진 보편논쟁은 이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중세를 거부한 근대철학의 중심주제 역시 보편과 특수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약간의 무리를 감수하고 요약하자면) 여기서 보편을 사유 내적 문제로, 특수를 현실적 존재로 치환한 논쟁이 바로 마르크스 이전의 관념론과 (기계적) 유물론의 대립에 상응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근대 유물론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들은 대개 보편의 실재성을 거부한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및 그에 영향을 받은 경험론으로부터 나왔다. 이와 같은 역사적 관련에도 불구하고 유명론(자)이나 경험론(자)을 유물론(자)과 직접 동일시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둘러싼 (헤겔 이전의) 논쟁은 양자를 대립(구별, 차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을 뿐, 동일성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반대로 동일성에만 관심을 두고 대립에 대해서는 외면했다는 점에 형식적 특징이 있는데, 헤겔은 이를 형이상학적 또는 오성적, 즉 형식논리적이라고 비판했고, 마르크스는 다시 헤겔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서 철학사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순수사변의 입장에서 논리적 측면을 강조한 결과라고 볼 수 있고,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논리(적인 것)의 실재성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된 것이다.















1. 유물론과 관념론 또는 역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










유물론과 관념론의 구별이 물질과 의식의 선차성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고전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엥겔스는 ‘이 구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벌어진 혼란’(��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돌베개, 1987, p. 33)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이 구별을 절대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 구별은 단순한, 가장 기본적인 구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구별을 확대해석한다면(즉 이 구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면), 물질과 의식, 존재와 관념, 역사와 논리, 실천과 이론의 대립에서 유물론은 항상 대립쌍의 전자를, 반대로 관념론은 후자를 옹호해야 할 것인데, 이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예를 들어 헤겔은 모든 철학이 관념론이라고 선언했는데, 이 주장은 뒤에 슈타르케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는 포이어바흐를 관념론자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슈타르케가 포이어바흐를 관념론자라고 부른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포이어바흐는 분명히 유물론자였고,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에 선행했던 유물론(자)과 자신(의 이론)이 구별되어야한다고 올바르게 믿었다. 하지만 그는 유물론의 특수한 형태인 18세기 기계적 유물론을 그것의 일반적인 형태와 혼동함으로써 유물론을 단순한 추상에 머물게 만들었으며,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을 뿐인 순수한(따라서 추상적인) 형태의 유물론에 대한 추구는, 그로 하여금 실천이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 형태’(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 속에만 존재한다고 강변하도록 만들어버렸다.





한 사람의 탁월한 유물론자를 관념론자로 바꾸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사유방식이었다. (구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혁명적 방법과 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여겨졌던 변증법과 유물론을 결합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헤겔 체계와의 투쟁에서 몰락한 헤겔좌파를 구원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헤겔과의 완전한 결별, 변증법적 방법의 포기였던 것이다. 분명히 그는 현실의 구체적 사물, 따라서 물질이나 존재를 옹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사물과 (자신의 사유 속에서) 그 사물이 관념화된 형태를 구분하지 못했고 이로써 현실의 구체적 사물이 단순한 관념적 추상으로 전도되고 말았다.





‘모든 철학은 관념론’이라는 헤겔의 말에 내포된 합리적 의미는, 무엇을 사유하든 그것은 관념화된 형태로 사변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사유(또는 이론) 속에서 대상은 관념적인 또는 개념화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서술은 이 개념화된 대상(들)에 규칙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내적 필연성을 가진 일련의 계열(또는 체계)로 만드는 행위이다. 문제는 대상에 대한 서술이 대상 자체와 실제로도 일치하는가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의가 여전히 유효하다. 진리란 대상과 일치되는 서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여전히 진리에 있는 한, 개념이란 오직 대상과 일치하는 관념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대상이 사유 안에서 취한 관념화된 형태는 단순히 단어에 그치고 말 수도 있다.3)





일반적으로 학문적 서술, 즉 개념(화된 대상)의 계열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진행하는 방법, 또는 역사적 방법으로, 통상 분석이나 귀납 등으로 불린다. 두 번째 방식은 추상에서 구체로 진행되는 방법 또는 논리적 방법인데, 일반적으로는 종합적 방법 또는 연역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Ⅰ, 제2판 후기에서 조사(연구)방법과 발표(서술)방법이라고 구별한 이 두 방법을 일상적 관행에 따라 귀납(분석)과 연역(종합)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하면 곤란하다. 사실 ��자본��은 두 방법을 모두 채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서술이 상품에서 화폐, 자본의 순서로 진행(발전)된다는 점에서는 연역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상품이라는 범주가 다시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더 단순한) 범주로 분해되는 과정은 일종의 분석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블로크와 지베르가 ��자본��에 사용된 방법을 각각 분석과 연역이라고 파악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방법 또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진행하는 방법에서는 “완전한 개념이 추상적 규정으로 증발”(��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 ��요강��), 백의, 2000, p. 71)하며, 논리적 방법(추상에서 구체로 진행하는 방법)에서는 “추상적 규정들이 사유의 경로를 통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같은 책, p71)된다고 썼다.





사유의 대상인 구체적 사물은 그 사물의 개념이 담아야 할 모든 내용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차피 개념은 그 사물의 반영, 즉 사물에 대한 관념의 묘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록 완전하게(철학적 입장에서는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상의 관념화된 형태는 우선 (직접적 또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총체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총체성은 대상의 존재 자체로부터 기인한 것, 즉 단순한 소여(所與)일 뿐이고, 개념의 입장에서는 분화되지 않은 완전성에 불과하다. 실제로 역사적 방법은 대상의 현실성을 하나의 소여로 취급함으로써 그  복잡한 내용을 비현실적 단순성으로 추상화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아직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했던) 17세기의 경제학은 구체적 전체로서의 인구, 민족, 국가 등을 분석함으로써 분업, 화폐, 가치 등과 같은 추상적인 규정이나 일반적 관계를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논리적 방법은 이 (추상적) 규정들이 어느 정도 일반화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이로써 경제학은 하나의 학문적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스미스는 분업을 전제로 서술을 시작했지만, 분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분업의 규정을 그대로 수용했던 것이다.4) 그가 분업에 대한 예찬에서 시작했으면서도 결국엔 자기 스승 퍼거슨과 마찬가지로 분업에 대한 비판으로 끝내고 말았다(��자본��Ⅰ, p. 157, 주 29)는 지적은 이를 가리킨다. 이처럼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추상적 규정으로부터 국가나 시장 등과 같은 구체적 규정을 연역해 냈다.





마르크스는 논리적 방법을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요강��, p. 71)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어찌되었든 이론적 작업은 논리적 방법에 의해 서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평가는 또한 논리적 기술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방법으로 기술될 때만 대상에 대한 서술이 학문적으로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서술)방법의 적확함이 그것의 (내용적)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서술)방법의 적확함에도 불구하고 서술이 대상과 불일치하는 경우를 우리는 헤겔에게서 발견한다. 헤겔을 특징짓는 것은 방대한 역사의식이었다. 그는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일관된 역사적 실마리를 찾아내어 거대한 체계를 완성했다. 하지만 “헤겔은 현실적인 것을 (사유―인용자) 자체 속에서 총괄되고, 자체 속으로 침잠하며, 자체로부터 운동해 나오는 사유의 산물로 파악하려는 환상”(같은 책, p. 71)에 빠졌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유대상의 현실성을 (그것이 직접적이라는 이유로) 제거하여 추상적 규정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추상적) 사유 속에서 ‘사유된 관념’과 ‘사유대상’의 관념적 동일성을 현실적 동일성으로 치환한다.





하지만 헤겔의 서술은 분명히 (마르크스가 과학적 방법이라고 말한) 추상에서 구체로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포이어바흐와는 반대의 방법을 쓰면서도 헤겔은 여전히 관념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그 이유는 철학적 의식, 즉 “이해하는 사유가 실재적 인간이고, 이해된 세계 자체가 비로소 현실적인 세계가 되는 의식…에서 범주들의 운동은 세계를 그 결과로 낳는 실재적인 생산행위…로서 현상”(같은 책, pp. 71~72)하기 때문이다.





사유를 통해 가공된 추상적 개념들은 사유의 진전에 따라 보다 발전되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재생산되는데, 물론 “이는 … 사유 총체성, 사유 구체성으로서의 구체적 총체성이 사실상 사유의, 이해의 산물인 한에 있어서는 옳다.”(같은 책, p. 72) 요컨대 사유가 감각, 즉 직관이나 상상을 통해 얻은 표상을 개념으로 가공하고, 이를 통해 대상을(또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나가는 방식은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이론적 작업에 있어서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방법은 사유가 구체적인 것을 점취하고, 이를 정신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재생산하는 방식일 뿐 … 결코 구체적인 것의 생성 과정 자체는 아니다.”(같은 책, p. 71) 다시 말해서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구체적인 것이란 (사유에 있어서 개념들의 위계를 표시하는) 범주의 문제이지, 사유대상 자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즉 이 과정은 전적으로 사유, 따라서 사변적 또는 이론적 상태에 있는 두뇌의 작업과정이지, 인간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유대상 자체의 생산과정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논리적 작업, 즉 “이론적인 방법에 있어서도” 서술의 대상은 “전제로서 항상 표상에 어른거리고 있어야 한다.”(같은 책, p. 72)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합리적 사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란 곧 대상과 일치된 사유’를 일컫는 말이고, 개념은 진리로 표현된 대상의 진실성을 가리킨다. 칸트는 오랫동안 잊혀있던 이 경구를 복원했고, 헤겔은 그 업적을 칭송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로 헤겔은 진리가 사유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사유가 대상을 규정하지,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진리는 관념의 형태로 표현된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학은 존재하는 것을 해석하는 작업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사변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요컨대 대상이 사유를 규정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진실(즉 대상의 내용)이 언어나 관념, 즉 사유의 산물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될 때만 진리의 지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사유가 진리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사유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의 본질은 이론이다. 하지만 실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론의 본질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있다. 이를 방법에 대해 적용하면 연구방법은 서술방법을 전제하고, 서술방법은 연구방법을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동일한 서술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이상 양자의 차이는 연구방법에 있게 되는 셈인데, 이는 다시 서술의 출발점, 즉 시원(始原)의 문제로 귀착된다.





어쨌든 (이론의 영역에서) 개념과 대상의 일치여부는 서술에 의해서만 판명된다. 서술은 개념과 대상이 필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논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논리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필연성과 동의어이다. 문제는 사유대상으로서의 세계가 불변ㆍ부동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엥겔스가 인간의 지식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세 가지 (자연과학적) 발견으로 세포의 발견, 에너지 전환의 법칙, 그리고 진화론을 꼽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연적 사물조차도 존재의 역사성을 갖는다면, 인간의 자연, 즉 사회는 어떻겠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에 선행한 유물론을 추상적 유물론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역사와 역사적 과정을 배제”(��자본론��Ⅰ, 비봉출판사, 제2개역판, p501, 주4)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사유대상인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를 전제로 갖는 방법만을 “유물론적인, 따라서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같은 책, p. 501, 주4)이라고 말했고, 자신이 (방법의 측면에서) 헤겔의 제자라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정반대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그리고 미발전된 것과 발전된 것










어쨌든 (논리적) 서술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또는 복잡한 범주가 아니라 추상적인 또는 단순한 범주다. 수많은 규정들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는 복잡한 것, 또는 “구체적인 것은 비록 그것이 실재적 출발점이고 따라서 직관과 표상의 출발점이라고 할지라도, 총괄 과정, 결과로서 현상하지 출발점으로 현상하지 않”(��요강��, p. 71)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한다면 단순한 범주는 미발전된 범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출발점으로 선택된 개념(단순한 범주)이 현실에서도 미발전된 형태로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대상이 사유를 규정하는(따라서 개념이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유물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범주는 실제로도 미발전된 존재의 표현이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표상이나 범주 앞에 대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분명한 어조로 요구했고, 따라서 단순한 범주로 나타나는 미발전된 사물이 후술될 범주에 비해 선행하여 실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올바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점유를 ��법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헤겔을 올바르다고 평가한 것은 사적 소유라는 전제 하에서 볼 때는 점유가 가장 단순한 범주로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지만, 정작 실제의 역사에서 점유라는 관념은 소유라는 관념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점유, 즉 인간과 물건의 관계는 본래 물건에 대한 인간의 사용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과 물건의 관계가 단지 사용에만 있었던 상태에서 이것은 단지 사용으로만 나타나지 점유라는 법률적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얼핏 소유는 인간과 물건의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유는 소유물에 대한 타인의 배제를 전제한다. 즉 소유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물건을 통해 표현된 관계이며, 인간과 인간의 적대적 관계가 전제된 뒤에야 비로소 인간과 물건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논리적 출발점이 되는 관념과 그것의 실제적 존재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점유가 출발점으로 등장한 것이 올바른 이유는 서술의 전제가 현존하고 있는 사회의 법률적 관계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인간과 물건의 관계의 역사적 및 현실적 존재형태들을 서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론에서) 단순한 범주가 실제의 역사에서도 미발전된 범주로서 (이론에서 구체적 범주로 표현될) 발전된 존재에 선행할 것인가 여부는 “사정에 따라 다르다.”(��요강��, p. 79)





예를 들어 상품이나 화폐와 같은 단순한 범주는 보다 복잡한 범주인 자본이 등장하기 이전에 실재했었는데, 이 경우 추상에서 구체로(또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행되는 방법은 실제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조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추상적 범주와 구체적 범주는 각각 미발전된 범주와 발전된 범주에 상응하게 된다) 반면 페루나 슬라브 민족의 공동체에서는 협업이나 분업이 가장 발전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지만, 정작 사회형태 자체는 매우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화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단순한 또는 추상적인 범주를 미발전된 범주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면 안 된다. 단순한 범주는 구체적 범주에 비해 역사적으로 선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실존에 있어서 단순한 범주(로 취급되어야 할 대상 또는 관계)는 처음부터 (더 발전된 사회에서야 비로소 그 기능과 관계를 온전히 드러내게 될) 완전히 발전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단순한 범주가 처음부터 완전히 발전된 형태를 취하고 등장하는 사례로 노동을 제시한다.





노동일반이라는 추상적 범주는 모든 종류의 노동에 대한 무차별성 또는 총체성을 표현하는데, 총체성의 입장에서 볼 때 개별적인 노동의 특수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노동이 이와 같은 총체성으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특수한 노동들이 실제로도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발전의 수준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혈통이 곧 지배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했던 고대(및 중세)세계에서 사제나 귀족의 노동은 평민이나 노예의 노동과 결코 동질화 될 수 없었고, 따라서 노동일반이라는 범주는 사유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일반이라는 범주는 특수한 노동들의 상호 대체를 전제하는데, 이는 경제학적 의미의 노동, 임노동에서야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이라는 범주를 취급함에 있어서 경제학은 이를 사실상 노동일반이라는 추상적이고 단순한 범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노동의 대체는 미발전된 사회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의 공동체에서도 존재했다.





물론 일반적인 의식에서 발전된 범주는 미발전된 범주를 자신을 향한 전 단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필연적이고도 최종적인 존재로 설명하게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주어진 사물을 완성된, 따라서 고정불변의 것으로 보는 형식논리(형이상학적 또는 오성적 방법)에 적합한 방식이며,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의식인데, 결과적으로는 주장에 내포된 의도와는 무관하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보다 적합한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결국 추상적이고 단순한 범주가 이론적 출발점으로 등장할 수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역사적 관계의 산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경제적 범주들을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규정적인 범주들이었던 순서에 따라 위치 지우는 것은 실행할 수도 없고 잘못된 것”(��요강��, p. 79)이라고 썼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생산일반(사용가치의 생산)





 





 





사용가치의 생산





 





 





원시공산주의





 





 





 





 





 





 





 





 





 





 





 





 





 





 





상품생산





 





 





단순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그림의 가장 오른쪽에 나열된 범주들을 위로부터 아래로 읽으면 실제의 역사적 발전과 일치할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조사가 잘 되어 소재의 일생이 관념에 반영된다면, 우리가 마치 선험적인(따라서 초역사적이고 언제나 타당한, 인용자) 논리구성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자본론��Ⅰ, 비봉출판사, 제2개역판, p. 18)고 썼던 것이다. 하지만 사용가치의 생산은 자본주의가 폐지된 이후에도 지속된다. 이 사회를 사회주의(공산주의)라고 표현하기로 하자. 이 경우 그림은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되는데, 여기서 범주의 진행과 역사적 발전의 순서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형태에서 그림은 (시간적으로 계열화 될 수 없는) 서로 다른 발전의 계열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생산일반(사용가치의 생산)





 





 





사용가치의 생산





 





 





원시공산주의





 





 





 





 





 





 





 





 





 





 





 





 





공산주의





 





 





 





 





 





 





상품생산





 





 





단순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범주들의 서열은 시간적 경과에 따른 자연적 서열 또는 역사적 발전의 계열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확히 반대인 관계에 의해”(��요강��, p. 79), 즉 주어진 시점의 현실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이 (시간적으로 선행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의 결과물에 불과한 상품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에서 기본적 요소로 착목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감각적) 인식에 떠오른 표상과 달리 노동은 그 자체가 복잡한 범주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범주들은 보다 구체적인 범주에서 정신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보다 다면적인 관련이나 관계를 정립하지 않은 채 보다 미발전된 구체물 자체가 이미 실현될 수도 있었을 관계들의 표현들인데 반해, 보다 발전된 구체물은 동일한 범주를 부차적인 관계로 유지한다”(같은 책, p. 73)는 사실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는 범주 자체의 관계에 관한 한에서는 언제나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단순한 범주인 생산일반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같이 이후에 전개될 범주에서 완전히 표현될 관계를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로 존재하면서 복잡한(발전된) 범주에 대한 (일반적) 규정성을 행사하지만, 복잡한 범주는 미발전된 범주의 일반성을 하나의 추상적 규정으로, 즉 단순히 부차적일 뿐인 관계로 내포한다. 그리하여 범주들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일반적 성격과 구체적 성격이 개념의 모순을 구성하게 된다.




















3. 모순과 범주 : 대립하는 두 규정 사이의 보편성과 특수성










변증법의 첫 번째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모순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른바 헤겔좌파의 입장에서 유물론을 전개하려고 시도한 이른바 ‘진정한 사회주의’의 주창자들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립시키고 있는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두 개의 추상적인 이론들로 두 개의 원리들로 바꿔 놓는다면, 임의로 선택한 애매한 이름 아래서 이러한 두 대립들의 자의적인 헤겔식 통일을 상정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독일이데올로기��, 두레, 1989, p. 182, 강조는 인용자)





이것은 엥겔스에 의해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으로 정식화된 변증법의 일반적 특징, 즉 모순을 통속화 시킨 속류 이론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는 모순, 즉 상호 의존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두 규정 사이의 관계란, 자의적으로 선택된 두 규정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5)





마르크스는 ‘양적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동일한 단위로 환원되어야 한다’(��자본론��Ⅰ, 비봉출판사, 제2개역판, p63)고 말했지만, 이는 질적인 비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에 의하면 두 개의 규정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양자가 동일성을 갖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립이란 곧 구별을 전제하는 것이고, 구별은 비교를 전제하는데, 동일성을 갖지 않는 대상을 비교하는 일은 없다. 즉 서로 모순되는 두 규정이 구별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양자의 동일성을 기초로만 정립된다. 모순이란 상호의존(동일성)과 대립(구별, 차이)의 통일인 것이다. 즉 두 규정의 대립은 양자의 구별(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두 규정이 통일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동일성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두 측면은 이제 대상의 필연성을 구성한다.





모순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를 우리는 ��자본��에서 발견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로 규정되는데, 우리가 논리적 필연성을 전제로 하는 한, 여기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두 규정은 자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양자는 동일성과 구별을 제공해야한다. 사용가치와 가치의 구별은 ��자본��의 서술에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양자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물건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범주인 사용가치는, (자연이 직접 제공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구체적 유용노동의 산물이지만, 이 유용노동 자체도 어찌 되었건 인간노동 일반(따라서 가치)으로 환원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다른 한편 가치는 오직 추상적 인간노동의 산물로서, 유용성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지만, 가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사용가치를 자신의 물질적 존재로 보유해야만 하며, 따라서 여기에는 노동의 구체적 성질이 전제되고 있다. 양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용가치는 노동의 지속시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어쨌든 유용노동에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인 노동시간은 가치의 존재조건인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시간과 현실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처럼 사용가치가 가치를 전제로 하고, 가치 역시 사용가치를 전제한다는 사실, 또는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이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자의 동일성을 확인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물건을 사용가치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인 것이다.





이제 상품의 입장에서 보면 사용가치와 가치는 상품이라는 범주에 통일되어 있는 두 개의 내재적인 계기(또는 측면)로 나타난다. 물론 이 규정은 정당한 것이다. 노동생산물이 상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노동생산물은 그것이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할 때만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두 규정을 가지며,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범주는 노동생산물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범주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용가치(생산일반)





상품





 





 





 





 





가치(자본주의적 생산)





 





 





 







그러나 물건을 사용가치, 즉 물건 자체로서 본다는 것과 물건을 노동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는 것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을 전제한다. 물건이 오직 사용을 전제로만 하는 조건에서 시간은 고려될 필요가 없지만, 물건이 교환을 전제로 하는 조건에서는 시간이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 물건은 (교환과 관련이 있든 없든) 어떤 경우에도 사용의 대상이므로, 그것이 교환이라는 관계에 의해 파악되어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특수한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상품이 필연적 범주로 등장하는 것은 일반적(보편적)인 경우가 아니라 특수한 경우이며, 따라서 상품이 일반적 범주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 또한 특수한 경우이다.





또 다른 사례를 생산수단(노동수단과 노동대상) 및 생활수단이 역사적 특수성에서 취하는 형태로부터 찾을 수 있다. 먼저 노동수단과 생활수단을 보기로 하자. 노동수단의 자본주의적 형태는 생산과 유통에서 각각 불변자본 및 고정자본으로 나타나며, 생활수단 또한 가변자본 및 유동자본의 형태를 취한다.





















































 





 





 





불변자본(생산)





노동수단





 





 





 





 





고정자본(유통)





 





 





 



      















































 





 





 





가변자본(생산)





생활수단





 





 





 





 





유동자본(유통)





 





 





 







그러나 위의 그림은 노동수단과 생활수단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부의 두 형태로만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수단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불변자본이나 고정자본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노동수단으로서의 작용을 멈추지는 않는다.(생활수단도 마찬가지다) 생산일반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위 그림들을 수정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노동수단(비자본주의적 생산)





 





 





 





노동수단(생산일반)





 





 





 





 





 





 





 





 





 





 





불변자본(생산)





 





 





 





불변자본(자본주의적 생산)





 





 





 





 





 





 





 





고정자본(유통)





 





 





 





 





 





 















































































































 





 





 





생활수단(비자본주의적 생산)





 





 





 





생활수단(생산일반)





 





 





 





 





 





 





 





 





 





 





가변자본(생산)





 





 





 





가변자본(자본주의적 생산)





 





 





 





 





 





 





 





유동자본(유통)





 





 





 





 





 





 







하위범주는 상위범주의 규정을 받으므로 불변자본이나 가변자본이라는 범주 역시 노동수단이나 생활수단이라는 의미를 여전히 내포하고 있다. 반면 노동수단이나 생활수단이라는 범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불변자본이나 가변자본을 포함하는 생산일반의 범주로도 기능하지만, 불변/가변자본에 대립하는 비자본주의적 생산의 범주를 표현할 수도 있다. 결국 범주란 항상 일정한 역사적 규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범주의 일반성 및 특수성 자체도 역사적 규정성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적 특수성은 범주들의 일반성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노동대상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기능상 명칭





 





 





 





 





 





유통상 명칭





 





 





 





 





 





 





 





불변자본





 





 





노동수단





 





 





고정자본





 





 





 





 





 





 





 





 





 





 





 





 





 





 





노동대상





 





 





 





 





 





 





 





 





 





 





 





 





 





 





가변자본





 





 





생활수단





 





 





유동자본





 





 





 





 





 





 





 





 





 





 





 





역사적 특수성





 





 





 





 





 





현실적 공통성



·





노동과정이 생산적 노동, 노동수단, 노동대상으로 구성되는 이상, 자본투하는 이 요소들 전체에 걸쳐 이루어져야만 하는데, 이 요소들은 가치증식과정 내부에서의 기능에 따라 불변/가변자본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물은 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분배될 수 없으므로 자본투하의 결과로서 생산의 요소들은 유통, 즉 가치의 이전 및 회수 방식의 차이에 따라 고정/유동자본으로 다시 분류된다. 여기서 노동대상은 불변자본(의 일부)과 가변자본의 (유통상의) 공통점을 유동자본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포괄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이로써 두 요소가 가치증식과정에서 수행하는 기능상의 차이가 무시된다. 다시 말해서 불변/가변자본의 분류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서 생산의 주ㆍ객관적 요소가 취하는 기능상의 특성을 반영하지만, 고정/유동자본의 분류는 역사적 특수성을 전제로 그 현실적 공통성을 통해 구별된 규정이다. 전자는 가치가 새롭게 형성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이전되는가에 따른 분류이지만, 후자는 어쨌든 가치는 유통되고 회수된다는 조건에서 분류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이 단지 특수한 역사에 대한 역사 일반의 관계를 표현하는 범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의 영역에서는 동일한 역사적 조건에서 서로 다른 대상이 갖는 외면적 공통점을 발견함으로써, 이들을 단일한 범주로 포괄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고정/유동자본이라는 외면적 구별이 불변/가변자본이라는 내적 구별의 기초 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고정/유동자본의 구별이 자본가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허구적 범주로만 기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마르크스가 보편성이라는 범주를 승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일반성이라는 것은 상이한 시기의 역사적 비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기의 상이한 시각을 반영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당연히 특수한 역사적 조건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앞서 본대로 사용가치와 가치 역시 역사적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을 드러내고 있다. 상품은 그 자체가 특수한 범주이므로(즉 상품생산에서만 일반적 범주로 작용하므로) 생산일반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현된다.













































































































 





 





 





사용가치의 생산



(비자본주의적 생산일반)





 





 





 





생산일반



(사용가치의 생산)





 





 





 





 





 





 





 





 





 





 





단순상품생산





 





 





 





상품생산일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그러므로 “추상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반대로 각각의 역사적 시기는 자기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자본론��Ⅰ, 비봉출판사, 제2개역판, p. 16)는 구절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보편(적 범주) 자체가 아니라,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념적 동일성을 내세워, 초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범주를 역사적으로 특수한 범주와 현실적으로 동일시하고, 다시 이를 빌미로 이 특수한 범주를 보편적 범주의 지위로 격상시키려는 시도, 다시 말해서 특수한 역사적 조건을 초역사적 조건으로 치환함으로써, 주어진 시대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시대인 것으로 호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상품생산일반과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따라서 자기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와 타인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혼동으로 말미암아 스미스가 ‘속류경제학이 활동할 튼튼한 무대를 제공’(같은 책, p. 728)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로 되는 것은 … 정의가 아니라, 일정한 범주로 표현되는 일정한 기능이다.”(��자본론��Ⅱ, 비봉출판사, 제1개역판, p. 267)





일반적으로 말해서 범주, 즉 개념의 계열에서 개념은 위치에 따라 특수한 역할을 수행한다. 상위범주는 하위의 범주에 대해 총체성 및 보편성을 표현하며, 하위범주는 상위범주의 특수한 형태로 기능하는데, 그 개념이 처한 역사적 특수성을 또한 반영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개념이 어떤 범주로 기능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개념이 표현하고 있는 대상의 현실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상위범주가 하위범주의 총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그 개념이 가진 총체성이 사회의 일반적인 선입견으로 작용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앞서 본대로 노동의 일반적 성격은 (인간의 동등성을 배제하고 신분적 위계에 의해 조직된) 고대(및 중세)사회에서는 이론적으로 파악될 수 없었고, 미성숙한 사회의 공동체적 관습에 의해서만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을 뿐이다. 후자의 경우에도 노동일반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인 것으로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일반이라는 관념은 오직 인간의 평등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조건에서만, 또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일반화됨으로써 노동의 동등성이 실재화 된 이후에만,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반화된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일반성(및 총체성) 또한 역사적 규정 하에서 파악된 결과이다.





범주로서 개념의 역할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단계에서 이론은 추상적 관념과 구체적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을 이해함에 있어서 17세기 경제학, 중상주의는 국부라는 관념을 논리전개의 주된 수단으로 삼았는데, 부와 국력이 비례한다는 이 관념을 경제력이 곧 정치적 권력의 토대라고 보는 유물론적 시각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관념은 부의 소재적 토대인 사용가치와 그것의 자본주의적 표현으로서의 가치(및 잉여가치), 즉 화폐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화폐에 의해 표현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부, 즉 사용가치의 생산과 동일시하도록 만들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생산일반의 지위로 격상시키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의식이 “아직은 무의식적으로 위선적인 형태”(��요강��, p. 80)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중세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권력은 단순히 상업적 패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의 표현이기도 했으며, 그 권력은 (에스파냐의 속령이었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이전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생산력상의 지위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권력이 양도된 뒤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패권국가에 대한 채권국으로 남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화폐로 표시된 부의 증가는 감각적 직관에 투영된 것과는 반대로 경제적 지위의 퇴보를 표현할 수도 있다.















4. 사족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에서 벤야민은 ‘예술이 자신의 위기에 대응하여 예술의 신학인 예술을 위한 예술이론, 즉 순수예술이라는 이름의 부정신학을 창출함으로써 모든 사회적 기능뿐만 아니라 대상적 소재를 통한 어떤 규정도 부정하였다’6)고 말함으로써 이른바 ‘순수’라는 관념이 갖는 부정적 의미에 대해 경고했는데, 이것은 예술뿐 아니라 이론의 영역에도 완전히 적용된다.





범주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개념의 계열화 또는 헤겔식 표현으로 개념의 자기 운동에 의해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이론의 영역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헤겔이나 포이어바흐가 그랬듯이) 대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순수한’ 이론이 도달하는 지점은 고작해야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관념이며, 추상적 관념은 다시 ‘순수’라는 미명 하에 현실의 모순을 외면함으로써, 결국 주어진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괴테는 메피스토텔레스의 입을 빌려 ‘모든 이론은 회색빛이고,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파우스트��, 2038~2039행, 민음사, 2008, p. 111)라고 말함으로써 현실(즉 실천)을 외면하는 이론이라는 이름의 공리공론을 조롱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수사유의 공허함에도 불구하고 이론은 실천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전략과 전술이라는 군사학적 논의는 제쳐두더라도) 대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의 성질 등)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며, 바로 그 같은 이유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을 (동물과는 구별되는) 합목적적 행위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갖는 풍부함에 착목하라는 의미에서 괴테를 인용한 레닌의 경고는 이론 자체에 대한 거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무시(왜곡)한 관념의 추상적 성격에 대한 경고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부터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다음의 구절만 보더라도 명백하다.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도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인 힘으로 변한다. 또한 이론은 대인적으로 증명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될 때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근본적으로 된다는 것은 사태를 그 뿌리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아침, 1994, p. 196)





“사태를 그 뿌리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세계의 존재로부터 사멸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 대한 서술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되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마르크스는 이 작업이 변증법적 방법에 매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필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점은 헤겔도 마찬가지다. 절대적 방법(변증법적 방법)만이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으며, (개념의 자기 전개방식인) 방법은 (총체성을 제외하면) 곧 (진리 자체이기도 한) 개념과 동의어라고 본 그는 “방법이라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혼이요, 개념”(��논리학��, 서문당, 1994, p. 407)이라고 단언했다. 만일 우리가 방법이야말로 이론의 혼이라는 헤겔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면, 이론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다음의 경구는, 방법론의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달라는 격려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화폐소유자가 그 사실에 실천적으로 달라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사실에 이론적으로 달라붙어야 한다.”(��자본론��Ⅰ, 비봉출판사, 제2개역판, p. 221) <노사과연>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 중





 「정치경제학의 방법」의 한 가지 독해방식*7)















김동수**7)






1) 일반적으로 ‘추상’이라는 말은 대상의 구체적 성질을 제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와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논리의 입장에서 추상은 그와 같은 뜻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라면 추상화된 범주는 관념에만 존재할 뿐, 현실로는 존재할 수 없다. 보편논쟁, 즉 보편이라는 추상화된 범주가 실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일대 논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하지만 논리적 추상에는 ‘순수’라는 의미가 포함되는데, 이 경우 순수는 현실적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를 순수한 형태로 고찰한다고 말할 때, 순수한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물론 자연에서 물질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순수한 형태의 사물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실험이나 산업을 통해 실제로 이를 만들어낸다. 정제는 그 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의 영역에서 추상은 한편으로는 구체성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갖지만 이는 다시 불순물(예컨대 역사적 잔재 등)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2) 여기에도 모순은 있다. 예컨대 자연주의는 불변의 본질을 자연적 소재 자체로부터 찾음으로써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 소재로 환원시킨 반면, 인본주의는 인간적 세계라는 구체적 대상을 정의(正義)나 도덕(道德) 등과 같은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3) 논리적 입장에서 개념과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단어란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에, 대상과의 일치여부가 여전히 문제로 된다. 언어학이 기표와 기의를 구별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개념에 있어서 이름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 경우에는 인간들이 그러한 명칭을 붙이게 된 역사적(현실적, 어원적) 연원의 추적을 새로운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개념은 논리적 범주이며 단어는 문법적 범주이다.






4) 이점은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사용가치나 가치라는 범주들은 마르크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다. 이 범주들은 선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며, 당연히 마르크스는 그것의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독자적으로 수행한 작업은 추상적으로 사용된 개념에 범주로서의 위치, 따라서 구체적인 논리적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5)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결국은 인간주의 속으로 해소될 것이라는 주장이 헤르만 제밍에 의한 자의적 규정임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자의적인 헤겔식 통일”이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헤겔 자신도 모순의 통일을 자의적인 것이라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헤겔식’이라는 표현은 ‘관념론적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6) “예술은 예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지상주의의 이론으로써 그 위기에 대처하였다. 이 이론에서 생겨난 것이 “순수”예술의 이념이라는 형태를 띤 일종의 부정적 신학이다. 이 부정적 신학은 예술에서 모든 사회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예술을 대상의 소재를 통해 규정하는 일을 일체 거부한다.”(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길, 2008, p. 52)






* 이 글의 소재는 「서설」 방법론 편의 내용에 국한되며, 변증법과 유물론 일반을 취급하는 것은 목적을 벗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마르크스의 논지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헤겔은 (변증법적) 방법의 세 계기로 시원, 진행, 부정의 부정을 꼽았고, 엥겔스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양질전화 또는 그 역의 법칙, 부정의 부정을 변증법의 3법칙으로 규정했다. 「서설」, 방법론 부분의 내용은 범주들의 관계가 서술에서 표현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므로 헤겔의 시원, 또는 엥겔스가 말하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등장하는 형식을 취급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설」은 논리적 기술의 첫 번째 국면만을 다루었을 뿐이며, 전체로서의 방법, 변증법 자체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다. 반면 ��자본��은 헤겔 이후 변증법이 의식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저술이며, 적어도 정치경제학의 영역에 적용된 유일한 저작으로서, 변증법의 세 측면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방법론의 연구는 ��자본��의 연구에서 또 하나의 과제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의 소재적 내용은 하나의 개념이 모순을 내포한 개념으로 등장하기 위한 방식으로 국한되며, 개념의 진행이나 부정의 부정 등 변증법 일반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는다.






** 편집자 주 : 김동수씨는 ��자본의 두 얼굴 (이진경의 마르크스 재해석에 대한 반론)�� (한얼미디어, 2005.01.27.)의 저자이며, 현재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헤겔 소논리학 개념”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글은 연구소에서 매월 진행하는 연구토론회에서 지난 12월 6일에 발표ㆍ토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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