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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1920년대 쏘련에서의 노선투쟁
글쓴이 문영찬 | 편집위원 E-mail send mail 번호 104
날짜 2008-11-11 조회수 2658 추천수 144
파일  1226409637_1920.hwp

  






























머릿말










쏘련은 붕괴되었지만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은 쏘련의 경험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교훈을 이끌어냄으로써만 전진할 수 있다. 인류가 사회주의로의 전진에서 어느 단계에 도달했었는지, 어떤 오류와 실패가 있었는지를 토대로 할 때만 21세기 사회주의는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의 쏘련에서의 노선투쟁을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쏘련에서 1920년대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과도기의 시기로서 이 당시에 발생한 논쟁과 노선투쟁들은 사회주의변혁을 꿈꾸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논쟁들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드러날 수 있는 논쟁들의 원형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한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변혁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들이 필요한가,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칙과 경로가 필요한가 등등의 핵심적 논쟁들이 바로 이 시기에 발생하였고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이러한 논쟁들을 통하여 또 극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 쏘련에서 노선투쟁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정확히 사실을 파악하고 그 의미와 교훈을 파악하여야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논쟁의 교훈은 프롤레타리아 당은 강력한 사상적 통일을 이루어야 올바른 지도력을행사할 수 있다는 것, 당내의 노선투쟁이 실은 사회 전반의 경제적 관계의 반영이라는 것, 사회주의건설을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필수적이라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은 향후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변혁의 과정에서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최소화하고 사회주의 변혁과 건설의 과정을 앞당겨야 한다.















1. 1920년대 쏘련의 상황










1920년대의 쏘련의 상황은 매우 힘겨운 것이었다. 1917년 혁명은 거의 무혈혁명이었으나 이후 제국주의자들의 간섭과 백군의 반란으로 약 3년간에 걸쳐 내전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이는 1차 세계대전에 이은 또 한번의 전쟁으로서 쏘련 사회를 극도로 피폐화시킨 것이었다. 그로 인해 경제는 무너져 버렸고 곳곳에 기아와 실업이 넘쳐나는 때였다.





이러한 어려움은 1921년 3월 크론슈타트에서 수병들의 반란으로 표출되었다. 그 이전까지 크론슈타트 기지는 혁명의 요람으로서 유명했으나 이곳에서 반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구성되었던 수병의 반란이라는 점에서 이는 볼세비끼 정권에 대한 농민의 이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에 대해 농민의 이반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기초로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이른바 신경제정책(NEP)으로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신경제정책은 경제에서 자본주의 원리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으로서 일종의 전략상 후퇴를 의미하였고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상업이 부활하였고 네프맨이라는 신흥 부르주아지가 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업에서 강제징발제도를 폐지하고 농업세를 식량세로 전환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복원한 점이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은 쏘련의 국민경제의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되고 나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쏘련은 공업과 농업에서 다같이 1차대전 전의 생산고를 회복하게 되고 경제는 부흥하게 된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자체의 모순이 있는 정책이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 지표는 공업생산물과 농업생산물 간의 협상가격차였다. 즉, 공업생산물은 갈수록 가격이 상승하는데 농산물의 가격은 낮은 상태가 지속되어 농민들의 불만이 높았던 것이다. 이는 공업의 기업들이 국유화되어 사회주의 기업으로 되었지만 신경제정책으로 인해 이윤추구를 원리로 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볼세비끼 당은 공업제품의 가격을 인하시킬 것을 결의하였고 한편으로 농업에서 집단화를 결의하게 된다. 특히 1926-8년까지 농업에서 풍년이 들었음에도 도시 노동자는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는 부농 등이 농산물의 높은 가격을 실현하고자 농산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아서였다. 이러한 상황은 농업에서도 사회주의적 관계의 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공업과 농업의 전반적 상황이 쏘련을 계획적 경제로 이행하도록 촉진했다. 그리하여 1929년에 최초로 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어 쏘련은 명실상부하게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하게 된다.





쏘련에서의 1920년대 노선투쟁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도외시하고 오직 상층의 권력투쟁으로만 이 시기를 바라보는데 이는 비과학적인 접근태도이다.















2. 노동조합논쟁과 10차 당대회










1920년대의 노선투쟁의 서막을 알린 것은 노동조합 논쟁이었다. 1920년 11월에 제 5회 전 러시아 노동조합대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볼세비끼당은 노동조합의 군사적 활동방법을 중지하고 민주주의적 활동방식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대한 것이 트로츠키였는데 그는 노동조합에 명령과 행정적인 관리방법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라고 했다.





노동조합을 둘러싼 논쟁은 노동대중에 대한 접근방법, 노동대중을 사회주의에 참가시키는 방법, 그들에 대한 지도방법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노동조합을 둘러싼 트로츠키와의 실제적 의견차이는 ‘대중에게 접근하여 대중을 획득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방법의 문제를 둘러싼’ 의견차이이며 “여기에 모든 본질이 있다”고 하였다1).





이 논쟁 당시에 트로츠키 이외에 여러 반대파 그룹이 등장했다. 노동자 반대파, 민주주의적 중앙집권파, 부하린의 완충파 등이었다. 트로츠키 파의 주장은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하자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하여 생산관리의 기능을 노동조합으로 이양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노동조합으로부터 노동자대중의 물질적 이익, 생활상의 이익, 문화적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대중의 사회주의 정신 함양이라는 기능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노동조합의 해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전복을 가져오는 것이었고 레닌에 의해 철저히 반박되고 거부되었다.





한편 노동자 반대파는 국민경제의 관리를 노동조합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는 국가를 조합화하는 것, 국가를 노동조합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일종의 생디칼리즘적인 주장이었다. 민주주의적 중앙집권파는 노동조합이 최고국민경제회의의 간부회를 추천할 것, 당내 분파결성의 자유를 인정할 것, 당과 쏘비에트에서 당내분파가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또한 공장에서 단독책임제와 관리의 중앙집권제를 반대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들이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떠드는 무리’로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의 혼합물이라 했다. 부하린의 완충파는 레닌의 정강과 트로츠키의 정강을 절충하려는 것이었는데 노동조합이 경제관리기관에 대해 후보자를 뽑고 지도기관은 그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트로츠키주의의 옹호라 할 수 있다. 부하린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정강을 버리고 트로츠키의 정강에 합류했다.





이러한 노동조합 논쟁의 교훈은 당과 대중조직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당과 대중조직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레닌은 노동조합의 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조직이 아니다. 강제조직도 아니다. 이것은 교육조직, 끌어들이는 조직, 훈련시키는 조직이다. 이것은 학교이며, 관리의 학교이고, 경영의 학교이며, 공산주의의 학교이다.’2)










이러한 노동조합 논쟁의 결과 볼세비키당은 국가의 전반적 경제관리를 부정하고 이를 노동조합에 옮기고자 했던 생디칼리즘적 경향을 분쇄한 것이었고 동시에 노동조합에서 대중조직적 성격을 박탈하고자 하는 트로츠키노선을 분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당과 대중조직의 관계는 올바른 궤도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을 기초로 하여 1921년 3월 8일에 러시아 공산당 제 10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노동조합논쟁을 결말지으면서 당과 대중조직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였고 또 당시 경제건설에 온 힘을 쏟을 때 분파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당내 분파의 금지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레닌의 횡포라고 하는데 이는 민주집중제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공고한 사상적 통일을 핵으로 하는 당은 분파가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물론 당은 광범한 토론의 자유와 의견 제출의 자유를 보장하고 활성화시켜야 하지만 그것이 분파의 자유를 허용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분파결성의 자유는 토론의 활성화라는 것을 넘어서 당의 통일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당 내에 경향은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하지만 분파의 존재는 민주집중제와 배치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제 10차 당대회는 식량할당징발제를 현물세로 바꾸는 것, 현물세에 의한 할당분을 식량할당제에 의한 할당보다 훨씬 적게 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복원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전시공산주의 체제가 항구적 체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사회주의 건설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를 기초로 하는 신경제정책은 일대 전환이었고 이후 쏘련은 국민경제의 부흥기를 맞게 된다.





3. 11차, 12차 당대회와 트로츠키 노선에 대한 투쟁










한편 10차 당대회의 결의를 바탕으로 당내 숙청이 전개되었다. 숙청은 공개집회에서 행해졌는데 부패분자, 출세주의 분자, 분파주의자 등이 제거되었다. 이 숙청에서 당원의 거의 1/4이 제명되었다. 그로 인해 당원의 자질이 강화되었고 당의 규율도 향상되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 속에서 당의 권위는 높아졌다. 이러한 숙청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숙청이 정상적인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세분자들이 당내에 침투하여 당원증을 가지고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고 인민을 압박하는 것이 가능한데 이를 광범한 민주주의적 원리에 기초하여 제거하는 것이 숙청인 것이다. 이러한 숙청을 통하여 당의 단결과 통일성이 강화되고 당과 대중의관계가 강화되는 것이다.





한편 신경제정책은 농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경작면적이 크게 늘어났고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몰려들고 대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과를 기초로 하여 1922년 3월 27일 제 11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신경제정책을 공고화하는 대회였다. 당이 봉착한 임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상업이었는데 “상업기술을 배우자”가 레닌이 제시한 슬로건이었다. 이 대회는 레닌이 출석한 최후의 대회였는데 이 대회에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쏘련이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고 당의 통일이 공고화되자 대외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1922년에 독일과 외교관계가 부활되었다. 그리고 쏘련은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어키와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들 세 나라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했다. 이 조약들은 동방국가들이 대국과 맺은 최초의 평등한 조약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레닌은 “우리는 자본주의 열강과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쟁취하였다”고 언급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민족문제의 해결과 쏘연방의 수립이 중요했다. 1922년 12월 30일 쏘비에트 연방 제 1차 쏘비에트대회가 열렸는데 다양한 민족들의 공화국들이 민족적 주권을 유지한다는 원칙 위에서 자유로운 연방을 결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쏘연방의 결성은 볼세비키 당의 민족정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4년 제 2회 쏘비에트 대회에서 최초의 쏘비에트 연방 헌법이 채택된다.





한편 1923년 4월 17일 제 12차 당대회가 개최된다. 당대회의 슬로건은 “보다 경제에 접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당의 경제노선에 대해 반대하는 자신의 노선을 제출한다. 트로츠키는 12차 대회에 공업독재라는 슬로건을 제출하고 나아가 사회주의적 원시적 축적이라는 정책을 제기한다. 이는 축적 기반이 취약한 쏘련의 조건에서 공업이외의 영역, 즉, 농업에서 ‘퍼올려서’ 공업의 축적을 위한 재원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농민을 수탈하고 착취하여 공업을 건설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 주장이 반민중적이라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주장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붕괴시키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트로츠키의 이러한 주장은 당대회에 의해 거부된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1923년 가을 다시금 자신의 분파적 활동을 개시한다. 트로츠키는 당내 민주주의가 질식되고 있다, 당과 중앙위원회가 뒤바뀌어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중앙위원회로 보냈고 이어서 트로츠키그룹의 46인의 성명서가 중앙위원회에 발송되었다. 이는 트로츠키가 공개적으로 권력투쟁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가장 관료주의적 입장을 취했던 트로츠키가 레닌이 병이 들어 지도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를 기화로 권력투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트로츠키 자신이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는 당내 민주주의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던 사람이 자신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후계구도가 문제되는 상황이 되자 당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더구나 트로츠키는 10차 당대회의 당내 분파의 금지라는 결의를 정면으로 위배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당은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총회를 1923년 10월에 개최하여 트로츠키의 서한과 46인의 성명서가 “반당적 행동의 성격을 가지며, 당의 단결에 타격을 주고 당의 위기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정치적으로 잘못된 태도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신노선」이라는 팜플렛을 발간하여 당의 지도부를 기회주의로 비난하고 미성숙한 청년층과 학생층을 당의 바로미터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악의적인 것으로서 당의 지도부와 당원대중을 이간질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을 총괄한 것은 1924년 1월의 제 13회 당협의회였는데 당협의회는 트로츠키파의 반당투쟁을 비난하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반대파는 볼세비즘을 수정하려는 시도 혹은 레닌주의로부터 명백한 이탈일 뿐만 아니라 확연한 소부르주아적 편향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1924년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를 저술하여 트로츠키주의를 반박하였다.















4. 13차, 14차 당대회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










13회 당협의회 직후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하였다. 레닌의 사망 직후 볼세비키당은 입당운동을 벌였다. 지도자가 서거하여 당이 어려운 시기에 입당을 촉진하여 당의 활력을 증대시키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하여 광범한 입당이 이루어졌다. 당원이 거의 배가되었으며 새로운 당원은 주로 노동자였다.





1924년 5월 23일 제 13차 당대회가 열렸다. 13차 당대회는 신경제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고 동시에 신경제정책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13차 당대회 이전에 신경제정책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1923년 가을부터 협상가격차가 심각해진 것이 문제였다. 공업제품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데 비해 농산물의 가격은 낮은 것이 문제였는데 이는 농민의 불만을 사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공업에서 국영기업의 독점적 지위 때문이었다. 즉, 국유의 공업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가격을 높게 유지했던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신경제정책이 국유기업에 대해 이윤실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볼세비키 당은 공산품의 가격인하를 결정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곡물수출을 증진시켜서 곡물의 가격을 올리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24년의 13차 당대회는 농업문제, 상업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농업문제와 관련하여 당대회는 농민을 협동조합에 가입시키는 문제를 강조했고 상업문제와 관련하여 국유기업이 상업을 장악할 것을 강조했다.





한편 이 대회에서 레닌의 유언이라 불리는 「대회에 보내는 편지」가 공개되었다. 레닌은 이 편지에서 중앙위원의 수를 늘릴 것과 주요 지도자에 대한 평가를 서술하고 있다. 트로츠키의 문제점은 비볼세비즘이라는 것, 너무나도 자신과잉에 빠져 있으며 사무를 순 행정적으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했고 부하린에 대해서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서기장이 됨으로써 무한한 권력을 수중에 집중했는데 이 권력을 신중하게 사용할 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스탈린을 경질하고 그보다 인내심이 강한 사람으로 대체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레닌의 평가는 후계자라는 구체적 지위를 상정하고 그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레닌의 유언을 좇아 사임할 것을 당대회에 청했으나 기각되었다. 당대회에 의해 스탈린의 사임이 기각되었다는 것은 당시 트로츠키가 불러일으킨 당내 풍파를 평정하고 어려운 시기를 헤쳐갈 지도자로 스탈린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13차 당대회 이후 곧이어 코민테른 5차 대회가 1924년 6월에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트로츠키주의는 소부르주아적 편향이며 당의 단결을 해치고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협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한편 1924년 10월에 개최된 중앙위원회 총회는 농촌문제가 주요 관심사였다. 중농에 대한 부농의 영향력과 투쟁하는 문제, 촌쏘비에트를 활성화하는 문제에 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농민과의 결합을 강화하기 위해 농민을 가능한 한 널리, 정치, 행정에 참가시키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국민경제를 재건하고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시기에 트로츠키는 다시 한번 분파투쟁을 전개한다. 트로츠키는 볼세비즘이 1917년에 자신의 영구혁명론을 받아들여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레닌이 사망하였다는 것을 기화로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인가 아니면 레닌주의인가」라는 글을 써서 트로츠키주의를 반박하였다. 트로츠키는 이 논쟁에서 패배하였고 쏘련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쏘련 이외의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여 쏘련을 원조하지 않는다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테제와도 배치되는 것이고 또 당시 1920년대 쏘련 상황에서 일종의 패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혁명의 발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했다. 따라서 이러한 레닌의 견해를 따를 때는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도 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논리적 흐름을 인정하지 않고 일종의 패배주의를 유포시켰던 것이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회의하고 불신하는 것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의 현실적인 의미였던 것이다. 따라서 트로츠키주의는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진행될수록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14차 당대회가 1925년 12월 18일 열렸다. 이 대회는 신경제정책이 옳다는 것이 실증되었고 ‘누가 누구를’이라는 문제가 사회주의에 유리하게 해결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시기는 국민경제의 부흥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대회는 국가의 공업화 대회로 기록되었는데 대규모 기계공업의 발전, 농민경제의 사회주의경제로의 개조 등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는 신반대파가 형성되어 다시금 분파투쟁을 전개하였다.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가 트로츠키 블록에 가담하여 14차 당대회에서 당에 도전했던 것이다. 이들은 부농의 위험을 과장하였고 그 결과 농민과의 동맹을 침해하려 했다. 또한 서구에서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는 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적 관점을 유포시켰다. 이들은 신경제정책이 자본주의로 후퇴라고 바라보고 국영기업이 사회주의 기업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기업이라 했다. 이러한 신반대파의 견해는 신경제정책으로 발생하는 소부르주아층의 압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들 신반대파는 14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불신임투표를 했고 또 대회의 결의사항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레닌그라드에서 파괴활동을 한다. 이에 대해 중앙위원들이 레닌그라드로 파견되어 당원집회를 소집하여 활동한 결과 당원의 97%이상이 당대회의 결의사항에 찬성하고 신반대파를 비난했다.





신반대파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분파활동을 벌인다. 특히 1927년 10월 혁명 10주기에는 공개적인 집단시위를 벌이는데 이는 신반대파가 당내 소수분파에서 반체제활동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은 이들을 당에서 제명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5. 15차 당대회와 부하린의 우편향에 대한 투쟁










한편 트로츠키주의와의 투쟁이 일단락되었을 때 쏘련은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민경제가 부흥하여 1차 대전 전의 생산고를 회복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농업에서 소소유자적 생산관계가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충돌은 도시의 식량난으로 표현되었다. 1926년부터 28년까지 농촌에서는 풍년이 들었지만 도시는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까지 시장에 내놓는 상업적 곡물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부농들이 곡물을 높은 가격으로 실현하기 위해 시장에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당과 국가는 농촌에서의 강제징발을 몇차례 실시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생산과 어울리지 않는 농촌의 소소유적 생산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에 대해 당은 농업의 집단화를 결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당은 다시 한번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부하린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은 당시에 ‘부농의 생산을 방해하지 말라’, ‘부자가 되라(enrich yourself)'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는 부하린이 신경제정책을 일종의 과도기로 보지 않고 공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병행을 상당히 장기간으로 본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하린의 정책은 부농의 이익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부농과의 계급투쟁이 차츰 격렬해지면서 이것이 당내에는 부하린과의 논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부농들은 당시에 곡물의 징발과 농업의 집단화에 저항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한 통계에 의하면 약 5만명의 집단화 활동가들이 부농들의 테러에 의해 사망하기도 했다. 이는 농업집단화가 단순한 경제의 문제를 떠나 계급투쟁의 문제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927년 12월에 개최된 제 15차 당대회는 트로츠키 등 신반대파의 제명을 추인하였고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집단화를 강화할 것을 결의했다. 부하린이 제출했던 ‘부자가 되라’는 슬로건은 중앙위원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또 부하린은 공업의 지나친 속도를 비판했고 국영농장을 확대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부하린이 신경제정책을 하나의 모순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경제 정책 자체의 모순의 결과 부농과의 투쟁이 다가오고 있는데 여전히 부농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전체가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부하린이 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쏘련은 1928년부터 1차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계획경제로 이행하고 있었고 이를 위하여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은 먼 미래가 아니라 당면의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자신들의 정책을 뒤에 채용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몰역사적인 관점이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하는 당 지도부는 농업을 수탈하여 사회주의공업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반대로 농업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그를 토대로 농업집단화를 이루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1925년까지 강조되었던 신경제정책이 1928년 이후 계획적 경제의 강조로 옮아간 것은 정세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계획경제가 신경제정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신경제정책이라는 자궁에서 계획적 경제가 탄생하고 자라나왔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점을 무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은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는 점,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과학적 원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맺음말










1920년대의 쏘련에서의 노선투쟁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노선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흔히 쏘련은 이미 과거의 일이며, 스탈린은 낡은 것이라는 사고가 사회주의자들의 일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쟁점들을 우리는 쏘련의 1920년대를 통하여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 건설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쏘련은 트로츠키주의와의 투쟁을 통하여 해결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 착취의 소멸이 실제로 가능한가, 노동자계급과 농민과의 결합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 농업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부하린과의 투쟁을 통해 해결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결코 과거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사적 소유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는 반복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레닌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축이라는 것,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불가피한 전략적 후퇴가 가능하다는 점, 자본주의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러한 레닌주의를 정확히 실현한다면 흔히 말하는 대안의 문제를 우리는 해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쏘련이라는 거대한 경험이 있다. 쏘련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변혁과 사회주의 건설의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 세계공황으로 인해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지금 1920년대의 쏘련의 노선투쟁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원칙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노사과연>











1) ��러시아 혁명사 III��. 거름. p. 132.






2) ��러시아 혁명사 III��. 거름. p. 135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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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1920년대 쏘련에서의 노선투쟁[3] 문영찬 | 편집위원 2008-11-11 2658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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