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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 번역]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2) ―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친까지
글쓴이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E-mail send mail 번호 102
날짜 2008-10-22 조회수 3557 추천수 131
파일  1224611536_소사.hwp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싣는 차례





Ⅰ.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감금되고, 죽었다는 조작된 역사



․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찐까지



독일 국민 생활권의 일부분으로 생각되었던 우끄라이나



윌리엄 허스트 - 히틀러의 좋은 친구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



52년이 지나서야 거짓말이 밝혀지다!



로버트 콘퀘스트 ― 꾸며낸 이야기의 창조자



영국정보부의 첩보원이자 정보조작담당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찐 ― 반동분자, 파시스트



․ 프랑코의 파시즘을 선전하다.



나찌, 경찰스파이, 그리고 파시스트!



 



Ⅱ. 국가문서고가 거짓선전에 구멍을 내다.



 





․ 위조 방법



․ 고르바쵸프가 국가 문서고를 열다.



․ 조사 보고서



․ 노동 수용소에 대한 사실



․ 9백만 명이 아니라 4십5만4천 명이다.



․ 내외부의 위협



․ 미국에 더 많은 죄수들이 있다.



․ 의약품의 부족



․ 10만 명이 사형에 선고 되었다.



․ 형벌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Ⅲ. 쏘련에 대한 조악한 거짓말들



․ 러시아 조사보고서 - 검토



․ 반혁명



․ 무장 공격



․ 1937년의 숙청



․ 산업 사보타지



․ 절도와 부패



․ 쿠데타를 위한 계획



․ 조작된 숫자



역사로부터 배우자!












로버트 콘퀘스트 ― 꾸며낸 이야기의 창조자










현 시점에서 부르주아 언론을 통해 정말 광범위하게 인용되는, 부르주아지에게는 이토록 진실하게 신의 계시를 전하고 있는, 이 사람은 상당히 특별하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글을 가장 많이 써 온, 두 명의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실제 2차 대전 이후 전파된 쏘련에 관한 모든 지어낸 이야기들과 거짓말의 창작자이다. 콘퀘스트는 주로 그의 저작인 ��거대한 테러��[The Great Terror](1969년 작)와 ��슬픈 추수��[Harvest of Sorrow](1986년 작)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2차 대전 중 나찌에 부역했고, 미국으로 망명한 우끄라이나 극우정당원들의 정보를 근거로 삼아, 우끄라이나에서 일어난 기근 때문에, 그리고 노동수용소에 갇혀서, 또 1936년부터 38년에 걸친 재판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쏘련에서) 죽었다고 쓰고 있다. 콘퀘스트 저작의 주인공들 중 대부분은 전쟁 범죄자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1942년 우끄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대학살에 가담하고, 이를 이끌던 자들이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미꼴라 레베드[Mykola Lebed]1)였는데,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레베드는 나찌 점령기 동안 (우끄라이나) 리비브[Lvov]에서 안보국장으로 일했으며, 1942년에 벌어진 끔찍한 유대인 박해의 주역이었다. 1949년 CIA는 레베드를 미국으로 데려왔고, 거기에서 그는 꾸며낸 정보의 원천으로 복무하였다.





콘퀘스트의 저작들에서 볼 수 있는 표현방식은 일종의 억지스럽고 광신적인 반공주의이다. 1969년의 저작에서 그는 1932년부터 33년 사이에 쏘련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들이 5백만에서 6백만 명에 이르며, 이 숫자는 우끄라이나 주민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83년, 레이건의 반공주의 성전기 동안 그는 기근을 1937년까지 확장하며, 숨진 사람의 숫자를 1천 4백만 명으로 확대했다. 이 같은 주장들은 결국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1986년 레이건은 콘퀘스트를 고용했고, 그는 대통령이 주재했던 캠페인을 위한 글을 썼다. 그 캠페인의 목적은 미국 국민들이 쏘련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문제의 그 글이 ��러시아가 왔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 생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안내서��이다! 역사학 교수로서는 예상 밖의 저작이 아닌가!















영국정보부의 첩보원이자 정보조작담당자










사실 그 작자가 그런 말들을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전 생애를 쏘련과 스딸린에 대한 거짓말과 날조에 의지해 살았다 ― 처음에는 첩보기관원으로, 그 다음에는 작가로,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로. 콘퀘스트의 과거는 1978년 1월 27일자 ��가디언��[The Guardian]지를 통해 폭로되었다. 그 기사는 그가 영국정보국[British Secret Service]의 정보조작부서, 즉IRD(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전 기관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IRD는 1947년 설치된 부서인데(원래 공산주의 정보국[Communist Information Bureau]으로 불렸다), 주 업무는 정치가, 언론인, 그 외 여론에 영향을 끼칠 위치에 있는 자들 사이에 꾸며낸 정보들을 주입시킴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다. IRD의 활동범위는 해외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 내에서도 매우 광범위했다. 1977년 극우파와의 연루가 폭로되어 IRD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어야 했을 때, 영국에서만 백 명 이상의 저명한 언론인들이 IRD와 접촉해왔고, IRD는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기사 자료를 제공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Financial Times��, ��The Times��, ��Economist��, ��Daily Mail��, ��Daily Mirror��, ��The Express��, ��The Guardian��과 그 밖의 몇몇 주요한 영국 신문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진상이 ��가디언��지에 의해 폭로됨에 따라, 우리는 정보부가 어떻게 일반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뉴스를 교묘하게 조작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예를 볼 수 있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IRD가 창설되었을 때부터 1956년까지 IRD를 위해 일했다. 거기에서 그의 업무는 쏘련에 대한 소위 ‘black history’(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작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언론인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콘퀘스트는 공식적으로 IRD를 나온 이후에도, IRD의 제안에 따라 정보부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해서 책들을 집필한다. 그의 책 ��거대한 테러��는 1937년 쏘련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이라는 주제에 관한 우익의 기본 저작인데, 이것은 사실 그가 정보부를 위해 일할 때 썼던 글을 재편집한 것이었다. 이 책은 IRD의 협조로 마무리되고, 출판되었다. 발간부수의 1/3을 Praeger press가 구입했는데, 그 출판사는 정규적으로 CIA 정보에 근거하고 있는 글들을 출판하는 것과 관련 되어있는 곳이다. 이렇게 구입된 콘퀘스트의 책은 대학교수와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에 종사하는 사람 같은 ‘유용한 바보들’에게 증정본으로 보내졌고, 콘퀘스트와 극우파들의 거짓말이 전 주민을 거대한 천으로 완전히 덮을 듯이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콘퀘스트는 오늘날까지 우익역사가들에게 쏘련에 관한 자료의 가장 중요한 원천 중에 한 명으로 남아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찐 ― 반동분자, 파시스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쏘련에서 생명과 자유를 잃었다고 주장하는 책과 기사들에 항상 관련되는 또 한 명의 작자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이다. 그는 1960년대 말쯤, 그의 책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에서 두루 유명해졌다. 1946년 솔제니찐은 반쏘비에트 선전물을 배포한 반혁명 활동 혐의로 노동수용소 8년형을 선고받았다. 솔제니찐에 의하면, 만약 쏘련 정부가 히틀러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2차 대전에서 나찌 독일과의 싸움은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쏘련 인민이 전쟁에서 무시무시한 결과를 겪어야 했다는 관점에서, 쏘련 정부와 스딸린이 히틀러보다 훨씬 나쁘다고 비난했다. 솔제니찐은 나찌에 대한 공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반역자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2년 니끼따 흐루쉬쵸프의 동의와 도움으로, 솔제니찐은 쏘련에서 책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출판한 첫 번째 책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A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로 (쏘련에서의) 죄수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흐루쉬쵸프는 솔제니찐의 책을 스딸린의 사회주의적 유산과 싸우기 위해 이용했다. 1970년 솔제니찐은 ��수용소 군도��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책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대량으로 출판되기 시작했고, 그 작품들은 제국주의가 쏘련의 사회주의와 싸우는데 있어 가장 가치 있는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노동수용소에 관한 그의 저작들은 자본주의 매스미디어에 의해,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선전들이 덧붙여져 마치 그러한 것들이 진실인 것처럼 해서 제공되었다. 1974년 솔제니찐은 쏘련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 다음 미국으로 갔다. 그 시점에 그는 자본주의 언론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전사로 생각되었다. 나찌에 대한 그의 공감은,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선전전에 방해되지 않도록 숨겨졌다.





미국에서 그는 중요한 대회에 뻔질나게 초청되어 연설을 했다. 예를 들면, 1975년 AFL-CIO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주요 연설자였고, 동년 7월 15일 국제 정세에 관한 강연을 위해 미연방 상원에 초청되었다! 그의 강연들은 가장 반동적인 견해를 대표하여 주장하고, 선전하는, 극단적이고 도발적인 선동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을 공격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1974년 뽀르뚜갈의 좌익 장교들이 인민혁명을 통해 40년 동안의 파쇼통치를 끝내고 권력을 잡았을 때, 솔제니찐은 뽀르뚜갈 정국에 미군이 개입할 수 있도록 선전을 시작했다. 그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뽀르뚜갈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할 것이라고 미국 상원에 경고했다! 또 솔제니찐은 강연을 통해, 끊임없이 뽀르뚜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해방된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했다!





그런데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고, 북베트남에서 수만 명의 미국인이 아마도 포로로 잡혀 감금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그의 연설의 요지는 늘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더러운 전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미국인들이 북베트남에서 노예노동에 동원되고 있다는 솔제니찐의 상상은 베트남전쟁을 다룬 람보 같은 영화를 낳았다. 솔제니찐은 연설에서, 미국과 쏘련 사이에 평화를 위해 큰마음을 먹고 용기 있게 집필활동을 하는 미국인 저널리스트들을 잠재적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선전활동도 진행했다. 그는 쏘련의 탱크와 항공기가 미국보다 5~7배 강력하며, 핵무기에 있어서도 곧2) ‘2배~3배, 심지어 5배 정도’ 미국보다 강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쏘련에 관한 솔제니찐의 강연은 극우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나 그는 공공연하게 파시즘을 지지함으로써 한층 더 오른쪽으로 가버렸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선전하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함으로써 스페인의 파쇼정권은 정국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시작했고, 1976년 초에는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는 파업과 시위가 진행되었고, 프랑코의 후계자 국왕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3)는 사회적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다소간의 자유화 조치를 매우 신중하게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스페인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은 마드리드로 가서, 3월 20일 토요일 밤 황금시간대에 방송되는 Directísimo라는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가졌다(스페인 신문 ��ABC��4), ��Ya��5) 1976년 3월 21일자 참조). 사전에 질문지를 받았던 그는 온갖 종류의 반동적 주장을 펼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국왕의 소위 자유화 조치를 지지할 의도가 없었다. 반대로 그는 민주주의 개혁에 경고를 보냈다. 그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1억 1천만 명의 러시아인이 사회주의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단언하며, 쏘련 인민이 겪었던 노예상태와 스페인에서 만끽되는 자유를 비교했다. 솔제니찐은 또한 ‘진보진영’을 스페인을 독재라고 생각하는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에게 ‘진보’란, 그들이 자유주의자이건 사회민주주의자이건 또는 공산주의자이건 간에 누구든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말했다. “지난 가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의 테러리스트들의 운명을 걱정하였다[5명의 반파쇼활동가들이 프랑코 정권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다. 저자의 주]. 쉬지 않고 진보적인 여론은 민주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은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를 지지한다. 급속한 민주주의 개혁을 추구하는 그들이 내일 혹은 그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스페인에서 내일은 민주주의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 민주주의에서 전체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러한 말들이 자유가 없는 국가들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을지 하는 기자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자유가 없는 곳을 하나만 알고 있다. 그 곳이 바로 러시아이다.” 스페인 텔레비전에서 그가 한 말들은 노골적으로 스페인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것이고, 그는 지금까지 그가 옹호한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가 미국에서 (그 뒤) 18년의 망명 생활6)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던 이유이며, 자본주의 정부로부터 전면적인 지원을 별로 받지 못하기 시작했던 이유이다. 자본가들에게 사회주의와 싸우는 더러운 전쟁에서 솔제니찐 같은 사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 러시아가 정치집단을 위해 서방의 원조를 받기로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러한 집단의 비호 아래 높은 이익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러시아의 대안 정치 체제로서 파시즘은 그들의 돈벌이를 위해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에 대한 솔제니찐의 정치적 구상은, 서방이 러시아를 원조하는 것을 비추어 보아도 사문화된 것이다. 솔제니찐이 러시아의 정치적 미래로 원했던 것은 전통적인 러시아 정교회와 함께 권위주의 체제인 짜르 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거만한 제국주의자조차 이 정도의 정치적 백치를 지원하는 데는 흥미가 없다. 서방에서 솔제니찐을 지지하는 누군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극우파 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사람들 가운데 찾아야 할 것이다.7)





나찌, 경찰스파이, 그리고 파시스트!










이렇게 그들은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고, 감금되었다는 부르주아들의 꾸며낸 이야기들을 가장 훌륭하게 퍼뜨린 사람들이다: 나찌 윌리엄 허스트, 비밀정보원 로버트 콘퀘스트, 파시스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이 바로 그들이다. 콘퀘스트가 1960년대 이후 선도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정보는 자본주의 언론에 의해 세계 도처에서 이용되었고, 심지어 어떤 대학들에서는 그것은 전체 교과를 이수하기 위한 기본 과목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급 경찰의 가짜 정보이다. 1970년대에 콘퀘스트는 솔제니찐과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8), 로이 메드베제프[Roy Medvedev]9) 같은 일련의 또 다른 인물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게다가 세계 여기저기에서 쏘련에서 죽고, 투옥된 사람들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부르주아 언론은 그들에게 항상 좋은 보수를 주었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진실은 마침내 드러났고, 역사의 위조자들의 진짜 얼굴이 밝혀졌다. 1989년, 고르바쵸프의 당 기밀문서고 개방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Ⅱ. 국가문서고가 거짓선전에 구멍을 내다.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견해는 쏘련에 대항하는 더러운 선전전의 부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쏘련의 부인과 해명은 결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본주의 언론의 어떤 공간에서도 그들의 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이것을 묵살했고, 반면에 자본에 의해 고용된 ‘전문가’들에게는 그들의 허구를 퍼뜨리기 위한 아주 많은 공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히 허구였다! 콘퀘스트가 주장하고 다른 ‘쏘련 비판자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쏘련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고, 감금되었다는 이야기들은 어떤 과학적 원리도 없는 조작된 통계 개산(槪算, approximations)과 평가 방법의 결과였다.















위조 방법










콘퀘스트, 솔제니찐, 메드베제프 그리고 다른 이들은, 예를 들면 국가 인구 조사 같은 쏘련에서 발표된 통계들을 사용해서, 거기에 그 나라의 실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추정되는 인구증가분을 더했다. 이 방법으로 그들은 주어진 연도 말에 그 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만 했는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실제통계와 그 추정치와의 차이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사회주의에 의해 죽임을 당했거나 감금된 것으로 주장했다. 그 방법은 단순하지만 완전히 사기이다. 중대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폭로’는, 만약 문제의 ‘폭로’가 서방 세계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교수들과 역사가들이 틀림없이 이러한 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의 대상이 바로 쏘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이 같은 전문가들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양심보다 전문가로 출세하는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던 것에 있다.





총 인원수에 관한 ‘비판자’들의 마지막 결론은 무엇인가? 콘퀘스트에 따르면(1961년 그가 추정했을 때), 1930년대 초반 쏘련에서 6백만 명이 굶어죽었다. 콘퀘스트의 숫자는 1986년 1천 4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노동수용소에 대해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당, 군대, 국가 기구에서 숙청이 시작되기 전인 1937년에 5백만 명의 죄수가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 숙청이 시작된 이후인, 1937년부터 1938년 사이 7백만 명이 추가되었고, 1939년에는 노동수용소에 총 1천 2백만 명의 죄수가 있었다! 그리고 콘퀘스트가 말하는 이 1천 2백만 명은 오로지 정치 수용범이었다! 그에 따르면, 노동수용소에는 또한 일반 범죄자도 있었는데, 그들이 정치 수용범보다 훨씬 많았다. 그것은 쏘련의 노동수용소에 2천 5백만에서 3천만 명의 죄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콘퀘스트에 의하면, 1937년부터 1939년 사이에 1백만 명의 정치 수용범이 처형되었고, 정치 수용범 2백만 명은 굶어 죽었다. 1937년부터 1939년 사이의 정치 수용범에 관한 그의 결론: 9백만 명이 노동수용소에 있고, 3백만 명은 죽었다! 이 숫자들은 콘퀘스트에 의해 즉시 ‘통계적 조정’을 거쳐, 1930년부터 1953년 사이에 볼쉐비끼가 최소한 1천 2백만의 정치 수용범을 살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30년대 기근으로 죽었다고 말해지는 인원에 이 숫자를 더해, 그는 볼쉐비끼가 2천 6백만 명의 인민들을 죽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게다가 그는 또한 1950년에 쏘련에 1천 2백만 명의 정치 수용범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은 콘퀘스트와 대체로 거의 같은 통계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다른 전제에 기초해서 이 비과학적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그는 훨씬 더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솔제니찐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기근으로 6백만 명이 죽었다는 콘퀘스트의 추정은 수용했다. 그렇지만 1936년부터 1939년의 숙청 기간에는 관해서, 그는 매년 1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농업 집산화부터 스딸린의 사망한 1953년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쏘련에서 6천 6백만 명의 인민들을 죽였다고 계산하고 있다. 그는 그 위에,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중에 죽었던 4천 4백만 명의 러시아인의 목숨에 대한 쏘련 정부의 책임을 더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1억 1천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사회주의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수용수들의 경우에 관해서 그는, 1953년 쏘련의 노동수용소에는 2천 5백만 명의 인민들이 갇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르바쵸프가 국가문서고를 열다.










위에서 열거한 상상의 숫자들은 그것을 만드는데 많은 비용이 든 공상의 결과물인데, 1960년대 이후 서방의 부르주아 언론에 반복적으로 등장해서, 지금껏 줄곧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 확정된 진실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조작 뒤에는 주로 CIA와 M15 같은 서방의 정보부들이 숨어있었다. 여론에 대한 매스미디어들의 영향력은 워낙 강력해서, 서방 주민들의 대부분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이 숫자들을 진실로 믿고 있다.





이러한 고약한 정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는데, (그 전에는) 솔제니찐이나, 다른 잘 알려진 반체제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로이 메드베제프 같은 작자들이, 쏘련 내에서 그들의 망상을 지지하는 그 누구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상황은 1990년 극적으로 변화했다. 고르바쵸프 하에서 새로운 ‘자유언론’이 개방되었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긍정적인 것으로 환호하며 받아들였고,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주의 하에서 죽고, 감금되었다던 사람들의 숫자에 대한 전례 없는, 사변적인 폭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수천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것으로 되었다.





고프바쵸프의 새로운 자유언론들의 광란은 콘퀘스트와 솔제니찐의 거짓말을 더욱 앞으로 몰고 나갔다. 동시에 고르바쵸프는 조사를 위하여 중앙위원회의 문서고를 개방했는데, 이것은 자유언론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의 개방은 이 혼란스러운 추측들에 있어, 핵심 쟁점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부분적으로는 문서고에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들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쏘련에서 살해당했고, 감금되었던 인민들의 숫자를 거칠게 추측했던 사람들 모두가, 문서고가 개방되는 날 그들이 언급했던 숫자들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에 대해 말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했다: 콘퀘스트, 사하로프, 메드베제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나 문서고가 개방되었을 때, 실제 문서에 기초한 연구자들이 예상 밖의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쏘련에서의 감금과 죽음을 이야기하던 자들뿐만 아니라 고르바쵸프의 자유언론들 모두 다, 더 이상 국가문서고에 관심이 없었다!





러시아 역사학자인 젬스코프[Zemskov], 도우긴[Dougin], 그리고 슬레브늌[Xlevnjuk]은 중앙위원회 문서고를 연구한 조사 보고서들을 1990년부터 과학 잡지에 발표했는데,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보고서들은, ‘자유언론’에 의해 죽거나 감금되었던 사람들의 숫자가 폭등하고 있던 경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들은 널리 발표되지 못한 채 남겨졌다. 그 보고서들은 일반대중에게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낮은 발행부수의 과학 잡지에 출판되었다. 과학적 조사 결과를 담고 있는 보고서들은 자유언론의 광란과 거의 경쟁할 수 없었고, 따라서 콘퀘스트와 솔제니찐의 거짓말은 전(前) 쏘련 인민들 중에서 다수 부분의 지지를 계속 늘려갔다. 서방에서 또한 스딸린 시기의 쏘련의 형사제도에 관한 러시아 연구자들의 보고서는 신문의 1면에서,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 방송에서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왜?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2)





― 히틀러에서 허스트, 콘퀘스트, 그리고 솔제니친까지





스딸린 시기 동안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죽은 사람과 기아로 죽은 사람이 수백만으로 추정된다는 역사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번역: 김해인(교육위원장)















[역자의 말: 이 글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는 1장의 나머지 부분과 2장의 도입 부분을 번역‧연재하였다. 지난 호 역자 주 4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글의 원본과 영어본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그래서 이번 호부터는 스웨덴어 원문을 많이 참조하였다. 하지만 번역은 영어본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상이한 부분도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면, 영어본을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 몇몇 부분은 스웨덴어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살렸는데, 대개 별도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이번 호의 많은 부분이 솔제니찐에 관한 것인데, 최근 솔제니찐이 죽었을 때, 그를 자유를 위해 평생을 싸운 민주주의의 투사로 부각시켰던 한국을 포함한 세계 언론의 시각과 이 글을 대비시켜 읽으면 좋을 듯하다.





※ 싣는 차례에 열거된 소제목은 스웨덴어 원문에 가깝게 3장으로 나누어 새로 편집하였다. 이 글의 모든 각주는 역자에 의한 것이다.]






1) 미꼴라 레베드(1909~1998).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에서 태어났다. 1930년부터 32년에 리비브 인근에서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단체(OUN)의 청년 그룹 활동을 시작했고, 1941년 단체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의 비서가 된다. 동년 야로슬라프 스테트스꼬 우끄라이나 정부의 고위 공무원직을 역임한다. 그는 1941년부터 44년까지의 10만 명 이상이 살육되었던, 폴란드인을 겨냥한 잔혹한 학살이었던 볼히니아 대학살의 주모자였다. 1942년 OUN의 3차 특별회의에서 중앙위원회를 이끌었다. 1943년 그는 UPA의 창설을 주도하고, UPA의 보안국장이 된다. 1944년 UHVR를 창설하고, 그 단체의 추천인 자격으로 다양한 서방 정부와 접촉하였다. 1948년 OUN(Diaspora)의 회원이 되고, 1949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2) 영어 번역본에는 ‘in short’라고 되어 있지만, 스웨덴어 원문은 ‘snart’이다. ‘snart’는 ‘곧’(soon)이라는 의미이다. 원문을 참고하여 ‘곧’으로 번역했다(영어본의 ‘in





   short’은 ‘in a short time’의 의미라고 판단된다). 더욱이 원문에는 ‘skulle bli’





   (would be)라고 명확하게 적고 있어, ‘곧’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반면 영어본에는 그냥 ‘were’라고 되어 있다).






3) 후안 카를로스 1세(1938~ ). 1931년 스페인 공화국에 의해 폐위된 알폰소 13세의 손자. 스페인 왕가의 망명지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1948년 프랑코 정권 하에서 스페인으로 귀국하여, 1969년 프랑코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974년 프랑코의 와병 중에 국가 원수직을 대행하였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동년 11월 22일 국왕에 즉위, 현재까지 국왕직을 수행하고 있다.






4) ��아베세(ABC)��. 1903년부터 마드리드에서 발행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스페인의 3대 유력 일간지. 군주정을 옹호하는 보수적 신문이다. 스페인 내전 기간에는 몰수되어 마드리드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공화정을 옹호하는 신문이, 세비아에서는 반동적인 신문이 발행되었다. 전쟁 후 프랑코 정권 하에서 몰수되었던 신문을 되찾게 되고,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큰 신문이 되었다.






5) ��야(Ya)��. 이혼과 낙태를 반대하고, 교회의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우익 가톨릭 신문.






6) 솔제니찐은 1974년 미국 버몬트에 정착하여, 쏘련이 붕괴된 이후 1994년 러시아로 돌아가 2008년에 죽었다.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 18년(18-åriga exil i USA)은 1976년 노골적으로 파시즘을 지지한 이후부터 그가 대중 매체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7) 스웨덴어 원문에는 솔제니찐의 지지자로 Peter Englund, Staffan Skott, Per





   Ahlmark 같은 사람들이 거론되어 있다. 그 중 Peter Englund는 스웨덴의 작가이자 역사학자로, 2002년부터 스웨덴 한림원 회원으로 있는 사람이다. Staffan





    Skott는 스웨덴의 언론인, 작가, 번역가이다. 그는 많은 러시아 희곡을 스웨덴어로 번역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안톤 체호프 전집, 니꼴라이 고골의 ��검찰관�� 등이 있다. 그는 쏘련에 관한 많은 글을 저술했는데, 그의 글은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또니아,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대표작으로 쏘련에서의 대학살을 다룬





   ��다시는 안돼!(Aldrig mer!)��가 있다. Per Ahlmark는 스웨덴의 유명한 작가이자, 자유인민당의 전 당수로, 스웨덴에서 40년만에 최초로 비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던 1976년부터 1978년에 수상 대리이자 노동부 장관이었던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열렬한 지지자로 유명하며, 스웨덴-이스라엘 친교 연맹의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1983년에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스웨덴 위원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1997년에는 전쟁, 대량학살, 기근 등을 주제로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책을 발표해서, 스웨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 인물이다. 2003년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8)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쏘련의 저명한 핵물리학자이자 반체제운동가. 세계최초로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과학자이다. 197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9) 로이 메드베제프(1925~ ). 러시아의 반체제 역사학자. 고르바쵸프와 옐친의 정치적 조언자였다. 1989년 뻬레스트로이까 이후 쏘비에뜨 인민대표자회의 의원이자 최고 쏘비에트 위원으로 활동했다. 노동자 사회주의당(Socialist Party of Working People)의 공동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1, 2��(새물결), ��레닌주의와 현대 사회주의의 제문제��(새물결), ��한국, 푸틴의 리더십을 배우다��(굿뉴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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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기획 번역]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2) ― 히틀러에...[1] 마리오 소사(Mario Sousa, 스웨덴 공산당원) 2008-10-22 3557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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