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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1)
글쓴이 하르팔 브라르 E-mail send mail 번호 134
날짜 2009-09-16 조회수 2915 추천수 119
파일  1253080817_tro.hwp

  













기획번역











[역자 주: 이 글은 Harpal Brar, Trotskyism or Leninism, Delhi: Progressive Printers, 1993의 번역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1990년대 초반에 집필되었다. 쏘련이 해체 된 후 얼마되지 않아, 쏘련 해체의 근본 원인을 이토록 놀랍도록 정확하게 진단하고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의 글을 썼다는 것은 저자의 과학적이고 원칙적인 관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쏘련 해체 후에만 쓴 것은 아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쏘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을 써왔고, 그러한 글들을 모아서 1990년대 초반에 출판한 것이다. 저자는 쏘련의 해체를 수정주의 노선의 파산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글을 통해 저자는 뜨로츠키주의가 후르쇼프의 스탈린 탄핵 이후 소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으며, 뜨로츠키주의의 본질적 성격이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부정하고, 나아가서 건설되고 있는 사회주의 사회를 파괴하려 했으며, 현재는 세계적 차원에서 반혁명적인 조류로서 역할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뜨로츠키주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당건설 이론, 일국사회주의, 모스크바 재판, 중국 혁명, 스페인 내전, 농업집단화,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의 문제 등에 대해 필자는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뜨로츠키가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방해하는 반혁명적인 세력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맑스-레닌주의 운동은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의 주요한 무기를 획득하는 셈이다. 뜨로츠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레닌주의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많은 부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뜨로츠키주의인가, 아니면 레닌주의인가” 하는 화두의 제기는 시의적절한 것이다. 뜨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는 화해할 수 없으며, 뜨로츠키주의와 구분되는 레닌주의를 복원하고 레닌주의의 기치 하에 뜨로츠키주의와 맞설 때만 운동은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세와 노동��에는 이번 호부터 계속 연재할 것이며, 올 하반기에 번역이 완료되면 신속하게 단행본으로 발간할 것을 약속드린다.]























































볼세비키당의 지도자,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고무자





그리고 맑시즘에 대한 모든 왜곡과 위조에 대한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투사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게





바친다.










목 차










서문










제1부 





   노동계급의 전위당과 레닌의 혁명론 대(對) 뜨로츠키의 ‘영구혁명’론










제1장  서론





제2장  프롤레타리아트의 당: 새로운 유형의 당에 대한 레닌의 사상과





       뜨로츠키의 청산주의





제3장  혁명론: 레닌의 혁명론 대(對) 뜨로츠키의 ‘영구혁명’론





제4장  결론: 뜨로츠키주의―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적















제2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제5장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제6장  집단화―농촌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















제3부





   모스크바 재판










제7장  서론





제8장  테러리즘





제9장  파괴, 유용 그리고 사보타지





제10장  파시즘과의 반역적 협정





제11장  음모의 군사적 측면―쿠데타 계획





제12장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비판과 이들 비판에 대한 논박















제4부





   중국혁명에 대한 두 노선





       ―코민테른의 노선과 뜨로츠키주의 반대파의 노선










제13장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관련한 뜨로츠키주의





제14장  왜 뜨로츠키주의 반대파는 그들이 중국혁명과 관련하여 범한





        종류의 오류들을 쏘련에서 범했는가?





제15장  코민테른이 중국공산당에게 영향을 준 통일전선의 개념















제5부





   스페인 내전










제16장  스페인 내전의 배경





제17장  인민전선의 형성과 전쟁의 경과















제6부





   집단화










제18장  집단화





제19장  중국정책연구그룹(China Policy Study Group)에 대한 비판










제7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의 계급투쟁의 기제에 대하여










제20장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의 계급투쟁의 기제에 대하여





제21장  계급과 계급투쟁





제22장  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투쟁의 격화





제23장  ‘일국에서의 공산주의’





제24장  ‘민족주의적 타락’





제25장  ‘대중노선의 결여’





제26장  스탈린과 인텔리겐챠





제27장  결론










부록 1: 레닌의 유언





부록 2: 뜨로츠키와 제국주의 언론





부록 3: 뜨로츠키주의자가 뜨로츠키를 살해했다










참고문헌















서 문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아 뜨로츠키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신화들 중의 하나는 레닌주의와 뜨로츠키주의는 동의어라는 것, 즉 뜨로츠키는 레닌 이후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볼세비키였다는 것(일부는 심지어 레닌이 위대한 뜨로츠키주의자였다고까지 암시한다), 혹은 뜨로츠키야말로 레닌주의의 진정한 상속자이고 레닌의 존경스러운 계승자였으나 원통하게도 요시프 스탈린이라는 3류의 평범하고 동양적인 폭군의 교활한 책략에 의해 자신의 합당한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이 반공산주의적 신화는 수십 년간 뜨로츠키주의의 간행물에서 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 소부르주아 역사학 및 사회학 교수들이나 선생들에 의해서,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제국주의 언론과 전자매체에서 참으로 괴벨스적인 방식으로 싫증나도록 반복됨으로써 공공연한 편견으로서의 힘을 획득해왔다. 이러한 편견은, 한편으로는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뜨로츠키주의와 그 부르주아 동맹자들에 의한 의도적인 왜곡과 위조의 산물이자 위대한 10월 혁명의 역사 및 쏘련의 혁명적 실천과 역할에 대한 의도적인 날조, 기만, 빈정거림, 무시, 그리고 저의를 가진 해석의 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속임수와 왜곡, 노골적인 위조가 가해진 사람들에 대한 무지이다. 그 주제에 대해서, 깊은 연구는 차치하고, 약간의 연구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 신화의 총체적인 기만성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신화를 폭로하는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부르주아지가 그러하듯이, ―그 사이비 맑스주의적, 초‘좌익’적, 초‘혁명적’ 언술(言述)에도 불구하고―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인 뜨로츠키주의라는, 진정으로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발가벗기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이 책에서 내 자신이 설정한 과제는 레닌주의와 뜨로츠키주의는 서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 뜨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에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이라는 것, 맑스-레닌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무자비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 그들은 노동계급운동의 한 사상적 조류로서의 뜨로츠키주의를 매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서 내가 논증하려는 바는, 1924년 1월에 레닌이 사망한 후 레닌주의가 이제 스탈린의 지도력 하에 볼세비키 당에 의해 지지되었을 때, 뜨로츠키주의는 그 공격 형태를 약간 전술적으로 조정하면서 끊임없이 레닌주의에 대해 맹공격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뜨로츠키주의는 이제 레닌주의의 이름으로 ‘스탈린주의’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레닌주의와 당의 레닌주의적 정책을 공격했다. 결국, 뜨로츠키주의는, 레닌을 공공연하고 특정하게 목표로 거명하지 않았지만, 혁명적 레닌주의에 대한 반혁명적 투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뜨로츠키주의가 레닌이 생존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타격을 입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맛보았던 것은 볼세비키 당과 그 지도자 스탈린의 명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나는 뜨로츠키주의의 세 가지 독특한 특징들―뜨로츠키주의로 하여금 화해할 수 없이 레닌주의에 반대하도록 한 특징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뜨로츠키주의의 세 가지 독특한 특징들










1. ‘영구혁명’










뜨로츠키주의는 ‘영구’ 혁명이론을 지지하는데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의 광범한 대중을 혁명적 세력으로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믿을 수 있는 동맹으로서 고려하지 못한다. 레닌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뜨로츠키의 ‘영구’ 혁명은 농민운동을 ‘건너뛰고’ “권력의 장악을 논하는” 것과 같다. 뜨로츠키에 의해 옹호되는 이러한 혁명에서 어떠한 시도도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동맹, 가난한 농민의 지지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1905년부터 계속하여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가차없는 투쟁을 설명한다.





레닌주의가 적절한 때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라는 사상을 옹호하고 지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뜨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를 “반혁명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이론이라고 간주했다. 이러한 분노에 찬 견해를 훨씬 넘어가서 뜨로츠키주의는 주장한다:










“현재의 레닌주의의 전체적인 체계는 거짓말과 위조 위에 세워지고 있고 자신의 내부에 그 스스로의 부패의 독소를 지니고 있다.”(카이제<Chkeidze>에 보내는 뜨로츠키의 편지, 1913)










레닌주의는 반대로 주장한다:










“뜨로츠키는 맑스주의의 어떠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확고한 견해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용케 어떤 주어진 견해의 차이의 틈으로 교묘히 빌붙어서 자신의 길을 가고 한편을 위해 다른 편을 버린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그는 분트주의자들과 청산주의자들과 한 패이다. 그리고 이 신사분들은 당이 관련된 곳에서는 예의를 고수하지 않는다.”(레닌, 전집 20권, p. 448, 1914)















2. 조직문제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불신










뜨로츠키주의는 조직문제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볼세비즘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볼세비즘은 새로운 유형의, 규율잡힌 그리고 단일한 당이라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의 원칙을 지지하는 반면에 뜨로츠키주의는 혁명가들과 기회주의자들의 공존을, 그리고 하나의 당 내에 그룹과 분파와 패거리의 형성을 지지한다. 마르티노프주의자들과 오트조프주의자들1), 청산주의자들2)과 뜨로츠키주의자들이 볼세비즘에 반대하는 그들의 투쟁에서 즐겁게 공존했던 뜨로츠키의 악명높은 8월 블럭의 역사에 대해 도대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뜨로츠키주의의 이 청산주의적인 특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이 중대한 역사적 시기에 레닌주의는 8월 블록의 해체를 프롤레타리아 당의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간주한 반면에, 뜨로츠키주의는 청산주의적인 8월 블록을 ‘현실의’ 당을 건설하는 기초로 간주했다.





이 전시기―1903년부터 1917년까지―를 통하여 레닌은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뜨로츠키를 그의 “출세주의”,“멘세비즘”,“화해주의”,“청산주의”로 탄핵했다. 여기에 동일한 맥락에서 레닌의 저작물 중에서 임의로 선택된 약간의 샘플이 있다:





1909년 8월 24일자의 지노비예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쓰고 있다:










“... 뜨로츠키는 랴자노프 등의 유형의 비열한 출세주의자와 분파주의자와 같이 행동한다. 편집부에서 동등함, 중앙위원회에 대한 복종 그리고 뜨로츠키(불한당, 그는 우리의 비용으로 ‘프라우다’의 파렴치한 전체 동료들을 ‘손질하기’ 원한다!)를 제외한 누구도 파리로 이전하지 않는 것 혹은 이 사기꾼과 절연하고 그를 중앙조직위원회에서 폭로하는 것. 그는 당에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어떤 다른 분파주의자들보다 더 안 좋게 행동한다.”(전집 34권, p. 400)










레닌이 당에서 청산주의자들과 오트조프주의자들을 일소하려고 생사를 건 투쟁을 수행하는 동안 뜨로츠키는 조종자의 역할을 취하면서 당과 이 두 부르주아 조류들을 화해시키려고 최악의 활동을 했다. 이것은 레닌으로 하여금 뜨로츠키를 다음의 말로 탄핵하게 했다:










“자신의 결의의 바로 첫 어구에서 뜨로츠키는 최악의 종류의 화해, 인용부가 찍힌 ‘화해’, 분파적이고 속물적인 화해의 충만한 정신을 표현했는데, 그 화해는 당의 주어진 정책, 주어진 정신, 당 사업의 주어진 사상적 그리고 정치적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당에서 청산주의와 오트조프주의를 일소함에 의해 존립하는 실제적인 당주의(partyism)와, 실제적으로 청산주의자들과 오트조프주의자들에게 충실하게 봉사하는, 그리고 따라서 더 교활하고 더 교묘하고 더 수사적으로 자신을 거짓의 친당적, 거짓의 반분파적 선언들로 덮어 가리기 때문에 더욱 더 당에 위험한 해악이 되는 뜨로츠키 등의 ‘화해’ 사이의 거대한 차이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한 정치 평론가의 노트, 전집 16권, 1910년 6월, p. 211―강조가 추가됨)










1910년 11월에, “특히 낭랑한 어구들 뒤에 숨어서, 멘세비키를 따라”가고 있다는 혐의로, “독일의 동지들 앞에 맑스주의적 덮개가 있는 자유주의적 견해들을 제출하는” 혐의로, “울리기는 하지만 텅 빈 어구들”의 거장이라는 혐의로, “러시아 혁명의 경제적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있다는 혐의로, 그리고 따라서 자신에게서 “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가능성을” 앗아가고 있다는 혐의로 뜨로츠키를 고발하면서 레닌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볼세비키주의와 멘세비키주의 사이의 투쟁은... 자유주의자들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농민층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헤게모니를 타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투쟁이다. 따라서 (뜨로츠키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분열을 인텔리겐챠의 영향 탓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 등으로 돌리는 것은 자유주의적 동화에 대한 유치할 정도의 연약한 반복이다.”










그에 더하여:










“뜨로츠키는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에 대한 어떤 명확한 견해를 형성할 능력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볼세비즘을 왜곡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언론에서 뜨로츠키의 거짓말과 위조에 대하여 반격을 하면서 그리고 뜨로츠키에 대해 “광고”의 정책을 따르고 있다는 혐의로, “당을 얕잡아 보는 데서 뻔뻔함과 독일인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우쭐한다는” 혐의로 고발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따라서 뜨로츠키가 독일인 동지들에게 그가 ‘당의 일반적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뜨로츠키가 자신의 분파만을 대표하고 있고 오로지 오트조프주의자들과 청산주의자들 사이에서만 일정 정도의 신뢰를 향유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의 역사적 의미, 전집, 16권 pp. 374-392)










뜨로츠키의 비엔나 클럽이 자신의 활동을 강화하면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협의회를 준비하고 소집할 목적으로 일반적 당 기금”을 조직한다는 결의를 1910년 11월에 통과시켰을 때, 레닌은 이것을 “분열로의 직접적 한 걸음이며... 당합법성의 명백한 위반이며 뜨로츠키가 실패하게 될 모험의 시작”이라고 규정지었다.





레닌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사상적 의미에서 모험이다. 뜨로츠키는 맑스주의의 모든 적들을 모은다. 그는 그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레닌-플레하노프’ 블록을 혐오하는 포트레소프와 막시모프를 단결시킨다. 뜨로츠키는 사상적 부패와 친숙한 모든 사람들을, 맑시즘의 옹호와 관련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투쟁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고 견해의 상이함의 사상적 뿌리를 배우고, 사고하고,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 모든 속물들을 단결시킨다. 이러한 혼란, 분열, 동요의 시기에 뜨로츠키가 ‘시대의 영웅’이 되고 자신의 주위에 추잡한 모든 요소들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러한 시도가 더 공공연할수록 패배는 더욱 더 볼만할 것이다.”(강조가 추가됨)










레닌은 이 편지를 특히 “뜨로츠키의 분열적인 전술과 무원칙한 모험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요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전러시아 협의회에 보내는 편지, 전집 17권, pp. 17-22. 1910년 12월)





1911년 12월에 청산주의자들과 오트조프주의자들의 대리인이자 외교관으로서 뜨로츠키의 더러운 작업에 신물이 나고 싫증을 내면서 레닌은 뜨로츠키의 분파주의를 폭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쟁점의 취할 점에 대해 뜨로츠키와 논쟁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뜨로츠키는 도대체 어떤 견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신에 찬 청산주의자들과 오트조프주의자들과 논쟁할 수 있고 해야만 하지만 양 조류의 오류를 숨기는 것이 수법인 어느 사람과는 논쟁하는 것이 소용없다. 그의 경우에는 해야 할 것은 사소한 재간을 가진 외교관으로서 그를 폭로하는 것이다.”(뜨로츠키의 외교와 어떤 당 강령, 전집 17권, pp. 360-362)










1912년 5월 5일부터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발간되는 일간의 합법 볼세비키 신문이었던 <프라우다>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1912년 7월의 편지에서, 레닌은 편집자에게 뜨로츠키의 “파괴적이고 비방하는 편지들”에 답을 하지 말도록 충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뜨로츠키의 <프라우다>에 대한 더러운 캠페인은 한 무더기의 거짓말과 비방이다. ... 이 음모자이자 청산주의자는  계속하여 사방팔방으로 거짓말을 한다.”(전집 35권, pp. 40-41)










‘8월’ 블록의 해체에서 레닌은 쓰고 있다:










“그러나 뜨로츠키는 도대체 어떠한 ‘형상’을 띤 적이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측면들을 바꾸는,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맑스주의자들로 깡총 뛰고 다시 반대로 뛰는, 약간의 표어들과 과장된 앵무새같은 수식어들을 우물거리는 습관이다.”










그리고: 










“실제로 계급의식이 없는 노동자들을 혼란시키는 높은 소리와 비어있고 모호한 빈말들의 장막 아래에서, 뜨로츠키는 ‘지하의’ 문제들에 대해 침묵으로써 생략하는 것에 의해, 러시아에서 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 따위에 의해 청산주의자들을 옹호하고 있다.”





“통일은 오랫동안 알려져 왔고 청산주의를 비난하는 선언에 대해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의 다수를 집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8월 블록을 찢어 버리고 당의 결정들을 조롱하고 스스로를 조직된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지하’로부터 분리시킨 청산주의자들과 뜨로츠키는 최악의 분열주의자들이다. 다행스럽게도 노동자들은 이 점을 이미 깨달았고 모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은 통일에 대한 청산주의적 파괴자들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현실적 통일을 창출하고 있다.”(전집 20권, pp. 158-161)










1914년 6월에 씌어진 통일에 대한 외침의 가림막 하에서 통일의 파괴라는 자신의 기사에서 레닌은 뜨로츠키를 분파주의와 청산주의로 탄핵하고 뜨로츠키와 청산주의자들에 의해 볼세비키에 퍼부어진 분열주의의 책임에 대한 완전한 위조를 폭로한다.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비분파적인 잡지인 <보르바>에 씌어진 글에서 뜨로츠키는 청산주의를 폭로하고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볼세비키를 분열주의라고 고발하면서 계속하여 볼세비키의 “분열적인 전술이 차례차례로 자멸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뜨로츠키가 덧붙이기를, 이것은 다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완전한 정치적 어리둥절함의 상태에 있는 수많은 선진 노동자들이 스스로 종종 분열의 능동적 대리인이 되었다.”










여기에 이러한 고발과 ‘설명’에 대한 레닌의 반박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설명은 뜨로츠키와... 청산주의자들에게 매우 아첨하는 것이다. 뜨로츠키는 전문가의 박식한 자세를, 뜨로츠키에게 아첨하는 방식으로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거만하고 소리높은 빈말들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수많은 선진 노동자들’이 뜨로츠키 노선에 순응하지 않는 정치적 그리고 당 노선(볼세비키 노선)의 ‘능동적 대리인들’이 되었기 때문에 뜨로츠키는 망설임없이 즉시 문제를 설정하는데 이들 선진 노동자들이 ‘완전한 정치적 어리둥절함의 상태에’ 있고 반면에 뜨로츠키, 그는 분명히 정치적 확고함과 명료함의 ‘상태에’ 있고 올바른 노선을 견지한다! ... 그리고 바로 동일한 뜨로츠키는 그의 가슴을 치면서 분파주의, 편협성, 그리고 자신들의 의지를 노동자들에 강요하는 인텔리겐챠의 노력들을 반대하며 호통친다!”





“이러한 것을 읽으면, 누구나 이러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정신이상자 수용시설로부터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전집 20권, pp 327-347)










레닌은 계속한다:










“뜨로츠키가 사실들과 구체적 언급들을 회피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그의 모든 성난 외침들과 거만한 빈말들을 가차없이 반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짐짓 점잔을 빼고 ‘잔혹하고 분파적인 모조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쉽다. 혹은 ‘보수적 분파주의로부터 해방’이라는 더욱 더 신랄하고 거만한 표어를 덧붙이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값싸지 않은가? 뜨로츠키가 고등학생 소년들로 구성된 청중 앞에서 모든 광채를 뿜어내며 자세를 취하던 기간의 병기고로부터 이 무기를 빌어온 것이 아닌가?”(같은 책)










레닌은 당과 청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뜨로츠키의 동요와 망설임에 대한 찬란한 묘사로써 그의 기사를 끝맺는데, 당 앞에서 “믿을 수 없이 허세부리는 요구들을 하고, 1908년 이래로 청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규정하고 세웠던  당의 결정들과 혹은 앞서 말한 결정들의 완전한 승인에 기초한 다수의 통일을 실제로 가져왔던 러시아의 현재 운동의 경험들을 절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려 하는” 그를 “배신자”라고 부른다. (같은 책)





이 찬란한 묘사는 주요하게는 이 저작의 본론에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서문에서는 빠져 있다.





동일한 시기에―1914년 초―뜨로츠키는 그의 잡지 <보르바> 제 2호에 글을 쓰면서 그에 따르면 민족 자결권이 “완전히 정치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고 강령으로부터 삭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그릇되게도 “폴란드 맑스주의자들”―로자 룩셈부르크가 아닌―탓으로 돌렸다. 이 오류는 레닌에게서 다음의 관찰을 끌어냈다:










“자상한 뜨로츠키는 적보다 더 위험하다! 뜨로츠키는 ‘사적인 대화들’(즉, 뜨로츠키가 언제나 그에 기대어 생활해 가는 단순한 잡담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증거도 만들 수 없었는데 그는 ‘폴란드 맑스주의자들’을 일반적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기사의 지지자들로 분류했다...”





“뜨로츠키는 맑스주의의 어떠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확고한 의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의견의 어떠한 주어진 차이들의 틈으로 교묘히 빌붙는 것을 꾀하고 어떤 것을 다른 하나를 위해 버린다. 현 시점에서 그는 분트주의자들과 청산주의자들의 동료이다. 그리고 그 신사들은 당이 관련된 곳에서 체면을 구기고 있다.”(민족 자결권, 전집 20권, p. 347)










1916년 3월 8일자의 헨리에테 롤란드-홀스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묻는다:










“뜨로츠키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간단히 말해 그는 카우츠키주의자이다. 즉, 그는 인터내셔널에서 카우츠키주의자들과 통일을 지지하고 러시아에서 크하이제(Chkheidze)의 의회적 그룹과 통일을 지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통일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전집 43권, pp. 515-516)










1917년 2월 17일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에게 쓴 편지에서 레닌은 말한다:










“... 뜨로츠키는 얼마나 야비한 녀석인가―좌익적 빈말들 그리고 짐머발트 좌파에 반대하는 우익과 블록이라니!! 그는 그저 <사회민주주의>에 보내는 간략한 편지로써 폭로되어야(당신에 의해서) 한다!”(전집 35권, p.285)










마지막으로 1917년 2월 19일자의 이네사 아만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또한 아메리카에서 노르웨이로 돌아온 콜론타이로부터의 한 통의 편지가 있다. N. Iv와 파블로프가 ... 노비 미르(Novy Mir)를 획득했고 그녀는 말한다, ... 그러나 ... 뜨로츠키가 도착했고 이 악당은 즉시 짐머발트 좌파에 반대하여 노비 미르의 우익과 한 패가 되었다!! 바로 그렇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뜨로츠키이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충실한데 비비꼬고, 협잡하고, 좌익으로서 자세를 취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우익을 돕는다...”(전집 35권, p. 288)










가장 나무랄 데 없고 반박할 수 없는 종류의, 앞서의 역사적 증거들의 관점에서, 뜨로츠키가 이 긴 기간―1903년부터 1917년까지의 사이에―동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당을 건설하려는 볼세비키의 시도들에 반대하여 가장 더럽고 분파적인 캠페인을 수행한 멘세비키였고 청산주의자였다는 것이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다.





볼세비키 당의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1903년부터 1917년 8월까지 뜨로츠키가 멘세비키였고 청산주의자였다는 것을 또한 잘 알지만 뜨로츠키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의적인 침묵을 견지하고 있고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이 점에 대해 뜨로츠키를 조사하고 너그럽게 봐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뜨로츠키의 멘세비즘, 중도주의, 화해주의 그리고 분파주의를 비난하는 뜨로츠키주의자들을 발견하는 것은 후련한 것이다. 소위 제4 인터내셔널의 국제공산주의동맹(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 ICL)이 이러한 범주에 해당한다(공식적인 제4인터내셔널, 물론, 왜냐하면 수많은 뜨로츠키주의 조직들이 저마다 공식적 제4인터내셔널이라고 주장하고 모든 다른 뜨로츠키주의 조직을 가짜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브라이언의 생애를 생각나게 하는 재미있는 현상이다). ICL은 이론적 잡지인 <스파르타주의자>를 발행한다. 뜨로츠키의 멘세비즘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인정과 비난의 경우는 피에르 브루가 쓴 1988년에 발행된 레온 뜨로츠키의 전기에 대해 한 ICL 회원인 다니엘 도제트가 쓴 <스파르타주의자> 45호와 46호, 1990년-91년 겨울, 영어판의 비평이 있었다. 피에르 브루는 그레노블 대학의 정치학 연구소 교수인데 40년 동안 프랑스의 표면상의 뜨로츠키주의 람베트(Lambert)주의적 경향(ICL의 앞서 말한 비평의 묘사) 즉, 국제공산주의자당(PCI)의 회원이었다.





브루는 뜨로츠키가 “자유계약자”(freelancer)였다는 것을 칭찬하는데, 이는 ICL을 성나게 하여 분개하고 노골적으로 모욕하는 칭찬이었다. ICL의 유창한 문장의 전체적 힘을, 완전히 불타는 분노와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잃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전후관계를 무시하고 인용했다는 고발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1903년부터 1917년까지 사이에 뜨로츠키의 분파주의와 멘세비즘과 관련된 비평의 거의 전 부분을 여기에 재생한다:















“자유계약자(freelancer)로서 뜨로츠키”










“1903년의 볼세비키-멘세비키의 결정적인 분열과 10혁명 사이에서 뜨로츠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브루의 취급은 그의 해석의 핵심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당을 연마시키는데 있어 정치적 그리고 강령적 논쟁의 역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혁명적 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성격, 형식 그리고 구조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부에서의 논쟁들을 취급하는 것은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볼세비키와 멘세비키의 1903년의 분열 후에 뜨로츠키는 ‘당에서 일종의 자유계약자가 되었다’.”





“브루는 뜨로츠키를 이 점에 대해 칭찬하는데, 성 페테르스부르크 쏘비에트의 의장으로서 1905년 혁명에서의 뜨로츠키의 지도적 역할과 1905년 패배 후 그의 재판을 화려한 선전자로서 활용한 것의 원인들을 바로 그 점에서 찾는다:





“사실, 어떠한 분파적 구속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자유롭고, 두 주요 분파들 사이의 분쟁의 부침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에게는 미래에 그 승리가 확실하게 보였던 그의 ‘단일성의’ 입장에 만족하면서, 뜨로츠키는 그의 관심과 활동을 러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던 사건들에 집중하기 위해 그의 손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였다....” 브루, p. 97.





“이 점을 읽으면, 혹자는 멘세비즘에 대한 레닌의 분파적 투쟁은―완전히 대치되는 것은 아닐지라도―혁명투쟁에 개입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지도하는데 있어서 부적절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물론 브루는 뜨로츠키의 역할을 모범적인 것으로서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의 지도적인 ‘조정자’로 본다.”





“브루가 주목하는 대로 뜨로츠키는 그가 시베리아로 유형당한 이래로 쭉 중앙집권과 중앙위원회의 권위의 일원으로서 레닌의 ‘사형집행인’으로서 망명자 집단에 나타났다. 1903년 대회에서 뜨로츠키는 당 문제에 대해 레닌에 반대하여 강령적 투쟁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뜨로츠키는 당대회의 최고권위를 반대했다: ‘대회는 등록부, 조정자이지 창조자가 아니다’(시베리아 대표단의 보고, 1903). 강령 상의 함축은 당시에 명확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1903년 분열은 당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열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뜨로츠키의 연방주의적 입장은 ‘당조직의 하나에 개인적 참가’를 요구했던 당원의 볼세비키적 규정에 대한 그의 거부와 더불어 ‘시베리아 대표단의 보고’에서 또한 반영되었다. 실천적 의미에서 뜨로츠키는 ‘당에 대한 개인적 조력’을 주는 자로서 당원이라는 멘세비키적 규정에 찬성했다―그는 모든 광범한 ‘노동자 조직들’을 허용하기를 희망했는데 그것들은 많은 주요 러시아 도시들에서 당 위원회들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당대회의 규칙 혹은 결정들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무관하게 당의 이름으로 행동할 것이었다.”





“브루는 뜨로츠키의 독립성에 열중하는 동시에, 그는 지나가면서 뜨로츠키가 이 전 기간 동안에 당 문제에 대해 틀렸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뜨로츠키 자신의 판단과 비교할 때 빛이 바래진다:





“전체 기간 동안에 나를 볼세비즘으로부터 분리하도록 하고 많은 경우들에서 볼세비즘에 대한 날카롭고 적대적인 반대에 나를 서게 한 깊은 차이들은 멘세비키 분파와 관련하여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혁명의 과정과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의 압력이 두 분파로 하여금 동일한 길을 가도록 궁극적으로 강제할 것이라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망을 갖고 나는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분열이 혁명세력들의 불필요한 파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분열에서 능동적 역할은 볼세비키 측이기 때문이었는데 왜냐하면 레닌의 견해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당의 혁명적 성격을 보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사상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조직적 측면의 무자비한 선긋기에 의한 것이었고(그리고 이어지는 전체 역사는 그러한 정책의 올바름을 충분히 확인시켰다) 나의 ‘화해주의’는 많은 날카로운 전환들에서 나를 볼세비즘과 적대적인 충돌로 향하는 길목으로 이끌었다.” 뜨로츠키, ‘우리의 차이들’(1924년 11월)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적인 ‘중앙’과 우익은 그들 자신의 입장에 대한 좌익적 덮개로서 뜨로츠키의 이름과 저널리즘적인 화려함을 사용할 수 있어서 즐거울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브루가 보고하기를 “뜨로츠키는 적어도 1912년까지 카우츠키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중앙’과 좋은 관계였다 ... 뜨로츠키에게 ‘신시대’와 ‘전진’의 지면을 열어주어 레닌으로 하여금 화가 나게 했던 사람은 이 시기의 카우츠키였다.” 브루는 또한 뜨로츠키가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과 원만한 관계였다는 것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그가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빠르게 ‘비엔나의 사회민주주의 집단의 명백한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동일한 시기 동안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뜨로츠키를 ‘체계적 의심’을 갖고 ‘미심쩍은 인물’로서 보았다는 것을 빠르게 지나치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독일 사회민주주의에서 그녀의 우익적 적수들과 그의 연계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 뜨로츠키에 대한 브루의 태도는 악명 높은 8월 블록에 대한 그의 취급에서 예증된다. 뜨로츠키에 의해 편집된 비엔나의 ‘프라우다’는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분파를 ‘화해’시키려 시도했다―브루는 비엔나 ‘프라우다’가 볼세비키 신문처럼 논쟁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직업적 반공주의자인 레오나드 샤피로가 칭찬한 것을 만족하면서 인용한다. 분파들 간의 1910년 협정은 비엔나 ‘프라우다’에 대한 볼세비키의 재정적 지원을 가능하게 했는데 볼세비키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던 카메네프(레닌과 가깝고 뜨로츠키의 의형제였다)가 참가했다. 그 협정은 멘세비키가 자신들의 우익을 제거하고 볼세비키가 자신들의 좌익을 제거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볼세비키는 그 협정을 존중했지만 멘세비키는 그러하지 않았고 그리고 이어지는 논쟁에서 뜨로츠키는 멘세비키를 편들었고 카메네프를 제거하였다. 그 논쟁의 세부사항에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내의 전투적인 사람들을 목표로 하는 뜨로츠키의 기사들은 볼세비키를 ‘망명자 집단의 음모’라고 탄핵했다. 카우츠키는 뜨로츠키로 하여금 볼세비키를 공격하는 기사를 쓰도록 간청하고 그 기사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레닌만이 아니라 플레하노프와 로자 룩셈부르크도 또한 분노의 대답을 하게했다. 1912년의 볼세비키 프라하 대회가 자신이 전체 당을 대표한다고 선언했을 때 뜨로츠키는 8월에 비엔나에서 ‘통일’ 반(反)협의회( ‘unity’ counter-conference)를 조직했다.”





“뜨로츠키의 마음에서 (그 협의회는) 일반적 통일, 당의 재통일이어야만 했다. 사실 그것에 대한 볼세비키의 거부는 참가자들을 볼세비키들에 반대하는 블록으로 축소시켰는데 그것에 대해 그들은 ‘8월 블록’이라고 세례를 주었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플레하노프도 또한 나타나지 않기를 선택했다. ... 사실 분파적 무대로 뜨로츠키가 복귀한 것은 특히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의도와 그리고 심지어 그에 경계심과도 독립적으로, 프라하 협의회 뒤에 그가 취한 입장과 8월 블록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의 역할은 그 자신과 무관하게 그를 볼세비키에 반대하는 일반적 연합의 중심인물로서 그리고 ‘청산주의’의 간접적 지원자로서 보이게 했다. ” 브루, pp. 139-140.





“8월 블록에서 뜨로츠키의 역할에 대한 브루의 묘사에서 모든 수식어는 틀렸거나 잘못된 것이다. 뜨로츠키가 볼세비키를 ‘망명자 집단’이라고 탄핵한 것에서 맹백하듯이 그는 브루가 ‘일반적 통일’이라고 섬세하게 말하는 것이 레닌을 공격하는 논쟁의 몽둥이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뜨로츠키는 반볼세비키 연합의 중심인물로 단지 ‘보인’ 것이 아니라 그는 사실상 중심인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볼세비키 외부에서 가장 좌익이었고 가장 존경받는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뜨로츠키의 행동들은 ‘그 자신과 무관하게’ 곡해된 것이 아니라 그가 1903년부터 적어도 1915년까지의 전 기간에 볼세비키에 상대하여 했던 역할의 정확한 반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유혈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신의’ 정부를 지지했던 제2인터내셔널의 당들의 배신은 세계 사회주의운동 내에서 논쟁의 무대를 이동시켰고 재편성과 재조직을 강제했다. 레닌과 뜨로츠키 두 사람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싸웠고 둘은 1915년 9월에 스위스 짐머발트에서 열린 반전 사회주의자 모임에 참석했다.” (pp. 33-34)










내친 김에 그 마지막 문장은 부정직 혹은 단순한 무지의 산물―전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이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타오르던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위해 활동한다는 볼세비키의 구호가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라는 뜨로츠키의 국수주의적 구호에 의해 반대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위에서 이 시기 동안 뜨로츠키가 카우츠키주의자였고 레닌의 볼세비키에 의해 영도되는 짐머발트 좌익에 반대하여 싸웠다는 취지로 레닌으로부터 인용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ICL은 계속하여 말한다:










“브루는 레닌과 뜨로츠키 사이에 ‘실제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짐머발트 이후에, ‘오래 전에 낡아 버린 1903년 분열에 의해서만(sic, 원문 그대로) 실제로 나뉘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점차적인 화해에 대한 이해할 만한 전망’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브루가 간과하고 있는(slide over) 것은 레닌이 1903년 분열을 거부한 적이 없고 대신에 그가 그것으로부터, 개량주의와 중앙주의 경향으로부터 분리된 전위 당을 조직하기 위한 혁명적 요원들의 필요성이라는 완전히 정식화된 이론적 입장으로 일반화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고 혁명 전후에 화려한 연설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당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혹은 ‘복도에서의 분파투쟁에 자신을 더 밀착시킬’ 시간이 없었던 수수한 ‘스타’,‘ 자유계약자(freelancer)’라고 브루가 뜨로츠키를 반복하여 소개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고 프랑스의 정치적 전통에서 최악의 측면들을 환기시키는 그러한 것이다. 뜨로츠키는―그릇된 측면에서―1917년 이전에 분파주의자였다. 그러나 화해주의라는 그의 강령은 당에서 지도권을 획득할 수 있는 탄탄한 분파를 건설할 수 없었고 혹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그런 당을 건설할 수도 없었다.”(p. 34)










ICL의 뜨로츠키주의 신사분들이 참 잘 말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어떠한 추가적 언급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뜨로츠키가 레닌 사후에 “스탈린의 찬탈에 반대하여 진정한 볼세비키 강령을 수행할” 최적의 상태였다고 ICL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이 얼굴이 붉어짐도 없이 주장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정말 매우 이상한 논리인데 그에 따르면, 레닌주의의 모든 측면에 반대하는 용서할 수 없는 투쟁에 20년을 보낸 멘세비키 청산주의자인 뜨로츠키가, 볼세비키 강령을 충심으로 지지하고 실제적으로 수행하는데 25년을 보낸 스탈린같은 사람보다도 더 잘 진정한 볼세비키 강령을 수행하는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ICL이 제기하는 것이 있다:










“좌익 멘세비키인 뜨로츠키를 숭배하면서, 브루는 뜨로츠키가 1903년에 탄탄한 당원으로서 레닌의 편으로 건너 왔다면 완강한 볼세비키들 사이에서 뜨로츠키가 획득하고 유지했을 잠재적 가능성-그가 스탈린의 찬탈에 반대하여 진정한 볼세비키 강령을 수행하기 위해 싸웠던 이어지는 시기에 그에게 잘 봉사할 수 있던 권위-을 또한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앞의 책. p. 35)










돼지들도 날 수 있다! ICL의 위의 진술은,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의미없는 동어반복일 따름이다. 말하자면 뜨로츠키가 1903-1917년의 시기에 레닌주의의 완강한 지지자였다면 그는 레닌 사후에 진정한 볼세비키 강령을 수행할 좋은 위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오랜 기간 동안에 그리고 이어지는 시기에서도 그는 레닌주의의 완강한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요시프 스탈린이라는 이름의 완강한 레닌주의자가, 있을 수 있는 찬탈자 말하자면 뜨로츠키에 반대하여, 진정한 볼세비키 강령을 수행하는데 있어 당을 지도하도록 볼세비키 당에 의해 매우 올바르게 선택되었다.





ICL의 미친 헛소리에는 방식이 있다. 그들은, 갑자기 빛을 보고 1917년 후에 다른 누구보다 더 좋은 볼세비키가 되었다고 주장되는 뜨로츠키의 삭제된 판을 속기 쉬운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1917년 전의 뜨로츠키의 멘세비즘을 인정한다.





ICL은 쓴다.










“사실은 브루가 ... 1917년 전의 뜨로츠키의 화해주의에 동의하고 있고 볼세비키인 뜨로츠키보다 반레닌주의자인 뜨로츠키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브루와 달리,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신용을 얻기 위한 헛된 시도로, ICL은 더 열정적으로 뜨로츠키의 옷깃에 완강한 레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하여 뜨로츠키의 1917년 이전의 멘세비즘과 반레닌주의를 명확하게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는 통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그의 찬장에서 반레닌주의의 상투적 수단을 감추고 있던 10월 동안의 짧은 기간은 별도로 하고, 뜨로츠키가 보다 큰 원인이 있는 열정으로써 그의 반레닌주의, 반볼세비즘을  계속하여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ICL이 정당하게 주장하듯이, 브루가 “반레닌주의적인 쏘비에트 인텔리겐챠”의 평가를 획득하기 위해 “레닌을 대포 아래에 교활하게 두는” 경우만이 아니다. 그것은 ICL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이 1917년 이전의 뜨로츠키주의를 탄핵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뜨로츠키주의자들과 공통적으로, 레닌주의를 뜨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속임수, 어떠한 책략, 어떠한 교묘한 묘안, 어떠한 사기도 이 사실을 손상할 수 없다―심지어 레닌주의를 칭찬한다는 구실에서라도. <노사과연>










번역: 편집부
















1) 오트조프주의자들: 1908년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서 형성된 기회주의자들의 그룹. 그것은 보그다노프가 지도했다. 혁명적 말씨의 무대 뒤에서 오트조프주의자들은 제 3차 듀마(짜르의 의회)에서 사회민주당의 의원들의 소환과 합법적이고 반합법적인 조직에서 당활동의 중지를 요구했는데 반동이 날뛰기 때문에 당은 자신을 비합법 작업에 한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또 다른 혁명적 봉기를 위한 힘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한 분파적 조직으로 당을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레닌은 오트조프주의자들의 견해가 일관성이 없고 무원칙하며 맑스주의에 적대적임을 보여주었다. 1909년 6월에 볼세비키 신문 <프롤레타리>의 확대 편집부의 한 협의회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선명한 한 조류로서 볼세비즘은 오트조프주의와 최후통첩주의(오트조프주의의 변종)와 공통점이 없다”는 취지의 한 결의가 통과되었다.






2) 청산주의자들: 1907-1912년의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서 기회주의적 조류의 대표자들. 멘세비키들은 1905-1907년 혁명의 패배로 인해 완전히 타락하였다. 그들은 비합법 당조직들의 해체와 지하의 혁명적 활동의 중지를 원했다. 그들의 목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청산하고 공공연한 개량주의적 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청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에게 길들이고 그것 자체를 러시아의 반동적 정권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청산주의자들은 마르토프, 악셀로드, 단, 마르티노프 그리고 다른 멘세비키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뜨로츠키는 사실상 청산주의자들을 편들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제 6차 (프라하) 협의회에서(1912년 1월), 청산주의자들은 당으로부터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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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 <기획번역> 뜨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1)[2] 하르팔 브라르 2009-09-16 2915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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