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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6)
글쓴이 사사키타츠오 E-mail send mail 번호 133
날짜 2009-09-14 조회수 2527 추천수 122
파일  1252925228_아프카니스탄.hwp

  

























1)





바브라쿠 칼마루 정권의 위치




















역사는 퇴위하고 패배한 혁명가에게 다양한 험담을 퍼붓는다. 칼마루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가 교조적 맑스주의자라든지 쏘련의 괴뢰라는 식으로이다. 칼마루정권이 쏘련의 원조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신식민지주의에 의해 침식된 도상국이 사회주의국의 원조 없이 어떻게 국가의 독립ㆍ주권ㆍ영토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상국 정부는 인민의 생활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회주의국의 원조는 결코 지배와 종속(괴뢰)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노동자 인민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국제적 연대ㆍ우호의 증거였고 의무였다. 이른바 맑스는 “개인의 관계를 규제해야하는 도덕과 정의의 단순한 법칙을 제반 국민의 교제의 최고의 준칙으로 확립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국제노동자협회창립선언」칼 맑스, 1864년9월28일, 『マルクス・エンゲルス 全集』제16권, p. 11)라고 140년 전에 말했다. 또한 노동자의 국제연대에 대해 레닌도 반복해 강조해왔다.





칼마루에 대한 갖가지 세평이 어떻든지 간에 그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당내 대립의 극복과 반혁명파에 대해 대처해야 하는 심각한 위기 속에서 제기되는 긴박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하나의 회답 혹은 해결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 포석의 하나가 전(前)하루쿠파 당원과의 단결이었다. 전술했던 1979년 12월 27일에 아민이 책임을 지고 사형된 직후부터 칼마루는 혁명평의회의 재건에 나섰다. 그는 그때 전 하루쿠파 간부 가람 다스타기루 판지쉐리, 사례 모하메드 제아리 및 세이드 모하메드 그라부지 등을 평의회의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 한사람인 판지쉐리(1933년생)는 당창립 이래 활동가였고 하루쿠파의 2인자였다. 그는 1966년에 체포되어 이후 7년의 장기형으로 복역한 것을 비롯해 종종 옥문을 두드렸다. 또한 4월 혁명의 유일한 기록문서라고 해야 할 1979년 4월 발행의 『연보』(앞의 책)의 1470페이지에 걸친 대작의 편저자였다. 그는 여기에서 반팔챠무파, 하루쿠파 옹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연보』에는 동시에 그가 집필한 「아프가니스탄 혁명사 훑어보기」(“A glimpse the history of revolutionary Afghanistan")이 수록되어 있다. 판지쉐리는 편찬한 부문이나 자신이 집필한 부분 도처에 ‘중간자본가층과 공모한 칼마루’와 ‘팔챠무파의 음모’등의 문구를 남기고 있었다. 그런 반 팔챠무파, 반칼마루파인 판지쉐리를 칼마루가 임용한 것은 하루쿠파와 팔챠무파 사이에 있었던 불화의 해소이고 당의 통일과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사였다라고 보인다. 이는 또한 이후 제2, 제3의 포석으로 가게 되었다. 칼마루의 제2의 포석은 1980년에 들어서자 전선별로 조직을 결성하는 방침을 내세운 것이다. 이른바 1980년의 조직활동가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5월 제1차 아프가니스탄 교육회의 개최





6월 공공의료 노동자회의





7월 아프가니스탄노조 중앙평의회대회





    아프가니스탄 민주청년동맹 전국대회





    이슬람성직자회의





9월 저널리스트연맹결성대회





10월 예술노동조합창립총회





    작가조합 제1차회의





11월 청년저작자 제1차 전국협의회





12월 농민조합결성총회










겨우 1년의 프로그램이지만 이러한 대중단체가 차례대로 결성되었다.





이와 함께 인민민주당(PDPA)와 그 외의 대중단체의 조직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표(1) 인민민주당(PDPA)와 대중조직의 가입자수























































































































































 





PDPA당원





당의 기초조직





농민당원





노동조합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피오네르





1980





 55,000





673





  3,000





150,000





150,000





 50,000





 10,000





1982





 75,000





1027¹





 19,200





160,000





160,000





110,000





 14,000





1984





120,000





3900





140,000²





190,000





190,000





125,000





 22,000





1985





140,000





 





 35,300





200,000





200,000





152,000





 28,000





1986





155,000³





 





 





 





 





 





 





1987





180,000





5300





 





300,000





300,000





 





 



¹ 1983년의 숫자, ² 농업협동조합원수, ³나지블라정권 발족 시










인민민주당(PDPA)의 당원수는 1965년 창립 때 겨우 27명으로 출발해 그로부터 당이 재통일을 달성한 1977년에는 15,000명이 되었다. 다음해 1978년의 혁명 때에는 18,000명이었다. 1980년에는 표(1)과 같이 55,000명으로 급증해 이후 상승 곡선을 그렸다. 칼마루가 혁명평의회 의장이 된 1979년 말, 즉 ‘혁명의 제2단계'에 들어서자 PDPA는 그 기초조직을 유지할 것인지 어떤지의 검토의 여지가 있었으나 당원수는 87년에는 18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당산하의 대중조직의 구성원과 당원의 증가도 하나의 궤적을 나타내고 있다.





노동조합과 민주청년동맹이 PDPA와 함께 혁명의 3대지주가 되어 이들이 후위부대로서 국군을 떠받치는 동시에 신병을 보급했다. 이렇게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에 이후 일어난 ‘선전포고 없는 전쟁’에서 역할을 할 부대의 진용이 정비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상의하달의 관료조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각기 분야의 주요인물이 성원을 보낸 것만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조직이 설립된 것일까.





여성동맹원의 수는 노동조합과 민주청년동맹 등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동맹원은 아니지만 당과 노조 안에서 활동하는 여성의 수는 꽤 많았다. 전봉건전(부족적)ㆍ봉건적 지배질서(가부장제)속에서 자기해방을 위해 일어서는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및 문화적 분야로의 등장은 아프가니스탄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현상이었다. 아마누라 한왕이 일부일처제를 스스로 실천에 그의 왕비가 베일을 두르지 않고 집회에 나선지 60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농민당원수는 인구에 비해 결코 많지 않았다. 1985년이 되어 35,000명으로 증가했으나 PDPA의 조직방침의 약함과 농업정책의 불명확함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제4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농업문제 전반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보도록 하다.





칼마루가 내세운 최후의 포석은 사회의 제반 조직을 규합한 민족조국전선(NFF)의 결성이었다. (1981년 6월) 전선은 전술한 PDPA, 노조, 민청, 여성동맹을 비롯한 이슬람성직자협의회, 민족대표, 시인ㆍ작가, 저널리스트조합, 평화연대 우호협의회 등 11개의 주요조직과 개인(연령은 14세 이상의)으로 구성되었다.(“Documents and Materials of Founding Congress of the DRA National Fatherland Front", National Fatherland Front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 June 15, 1981) 1984년이 되자 개인자격으로 가입한 이가 6만명에 달했다. 전체 구성원은 결성초기에는 약 100만명이었고 1986년에는 약 150만명에 달했다.





당시 ‘카불정권의 영향력은 적다’라는 평가가 현재에도 버젓이 통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조국전선의 하부조직의 총수는 300인 이상의 멤버를 떠받치는 위원회만 1249개에 달했다. 그 내부를 보면 25개주, 68지구, 15하부지구, 23시, 239촌, 826지방위원회였다. (“Achievements of the April Revolution in Afghanistan", Information and Press Department, DRA Ministry of Foreign Affairs, Kabul, 1984) 민족조국전선은 카불 이외의 지방에서 꽤 기초를 다졌다라고 볼 수 있다.





1985년 10월 레이건은 유엔총회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정책의 연설을 행했다. 그러자 카불에서는 11월 7일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 기념일 집회를 마치고 300만 명이 레이건 연설을 반대하는 대행진을 행했다. 가로수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 카불거리는 적기와 플랭카드로 뒤덮였다. 카불시 인구 약 100만 명의 1/3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넘쳐났다. 이는 민족조국전선의 총결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칼마루는 민족조국전선의 구상을 베트남에서 1951년 결성해 조국전선(리엔베트)방식으로 학습했다. 리엔베트방식이란 호치민이 베트남에서 혁명을 이끈 방식으로, 호치민은 베트남에서는 1930년대~40년대, 노동자, 농민이 아직 혁명세력으로서 성장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과 베트민에 들어가지 않은 사회의 각 계급, 각 계층의 조직, 개인으로부터 민족전선을 조직해, 그들에 의해 프랑스 식민지주의(후에 미국제국주의)와 지역반동세력ㆍ지주와 싸우는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칼마루는 이러한 방식을 도입하는 것과 함께 이전에 존재했었던 하루쿠파와의 혁명의 추진방식을 둘러싼 대립을 극복하고 일대통합세력으로서 혁명의 방위부대가 되었다. 





역사의 흐름을 좀 더 미래로 향한다면, 이른바 1989년에 쏘련군이 철수하고, 유럽에서는 베를린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고 나서도 여전히 1992년까지 3년간 나지브라정권은 국제 반혁명과 직접 무력으로 맞서며 저항을 계속했다. 나지브라가 정권을 잡고 나서 그 정권이 5년이나 존속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힘의 잠재력은 이른바 칼마루를 중심으로 구축된 조국전선방식의 조직이 결실을 맺은 성과였고 열기였다고 볼 수 있다.





칼마루는 군인의 가정에서 자라나 유년기 때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비교적 혜택 받은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칼마루의 조직적 재능, 젊을 때부터 독일어로 맑스주의 문헌을 학습해 축적된 논리구축력과 이데올로기로서의 역량이 쏘련군 철수~사회주의체제 해체기에도 훌륭하게 발휘되었다.





그가 남긴 연설기록물들은 다른 도상국의 지도자가 연설을 대중교육의 장으로서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합적이고 길게 반복적인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석력과 축적된 강고한 논리는 그의 선동 속에 훌륭하게 관철되었다. 본서 이외에도 인용된 문장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염두해야 할 점은 칼마루정권 재임 기간은 1979년 12월부터 1986년 5월까지의 6년 반이었고 결코 긴 기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혁명과 반혁명의 심각한 ‘전쟁’ 속에서 그는 요새의 지형을 구축해 그것을 나지부라 정권으로 이어가도록 했다. 인민의 요새와 지형이라는 점을 볼 때 외국의 원조만으로 이러한 것이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괴뢰라는 평가와는 오히려 무관계하다. ‘사회주의 초대국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 명백하게 인민의 주체적인 혁명정부가 존재했다는 것을 역사는 정확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번역 :정혜윤(회원)






1) 1928년 출생, 도시샤(同志社)대학졸업, 실직 중일 때부터 오키나와ㆍ아마미를 비롯해 일본각지를 외딴섬ㆍ벽지를 정력적으로 걸었다. 후에 중학교에서 일을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1960년대 인도ㆍ오키나와 그 밖에 지역에 관한 르포를 󰡔신일본문학󰡕과 관서인들이 하는 문학ㆍ사회운동의 동인지󰡔표상󰡕󰡔변혁자󰡕 등에 발표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이란혁명, 아프가니스탄혁명에 대해 󰡔사회평론󰡕에 집필했다. 저서로는 󰡔아하곤쇼코(阿波根昌鴻)- 그 투쟁과 사상󰡕(2003, スペース伽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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