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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번역> 제2차 대전에 관한 몇 가지 거짓과 진실
글쓴이 진보노동당(PLP) E-mail send mail 번호 132
날짜 2009-08-07 조회수 4034 추천수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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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역자 주] 이 글은 나치(Nazis) 타도 50주년(1995년 5월)을 맞아 미국의 진보노동당(Progress Labor Party)이 자신들의 기관지 ��도전(Challenge)��의 “특별부록(Special Supplement)”으로 발표했던 글을 초역(抄譯)한 것이다. 원문은 ‘http://www.plp.org/cd_sup/cd4.html’에서 볼 수 있다. 대중의, 그리고 우리의 ‘상식’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를, 특히 이 시대의 수많은 반쏘 산초 판자(Sancho Panza)들이 되돌아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을 쳐부순 것은 쏘련이 선두에 선 국제노동자계급이었다. 이 승리는 노동자계급의 최대의 위업 중의 하나다. 극히 당연하게도 지배계급과 그 선전도구들은 언제나 제2차 대전에 관한 수많은 거짓과 신화를 날조하려 해왔다. 나치 타도 50주년이 가까워지면서 이 거짓들은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이 승리를 쟁취하는 데에서의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지도부의 중대한 역할을 완전히 은폐하면서 파시즘에 대한 이 승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해먹으려 하고 있다. 이 거짓말들을 헤치고 들어가 제2차 대전에 관한 실제의 진실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거짓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자본가들은 처음부터 파시시트들을 반대했다.”










나치가 그 총부리를 오로지 쏘련에게만 겨누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부추기면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은 나치에 대해서 유화적이었다. 이들 국가가 돕지 않았다면, 제1차 대전 후 독일의 재무장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이 필요한 외국 은행권들은 모두 다 런던 외환시장(London Exchange)을 통해 조달되었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에 런던 고무시장에서 독일은 그 월간 수요량의 2배에 달하는 고무를 구매했다.





선전포고가 있은 후에도 독일은 이탈리아(1940년 5월까지는 이탈리아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를 경유하여 30만 배럴의 석유를 받았고, 또 스위스를 경유하여 미국의 목화를 받았다. 이들 국가들은 1938년 9월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양도한 것처럼 강한 정치적 지지를 보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크게 원조했다.





이 기간에 프랑스와 영국은, 나치의 군사적 위협을 초기에 제거하기 위한 동맹을 맺자는 쏘련의 제안을 다섯 번이나 거절했다. 자본주의 주요 열강의 이러한 배신 때문에, 쏘련은 나치의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좀 더 벌기 위해 나치와 협정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의 장군 요들(Jodl)의 전후(戰後) 증언에 의하면, “[1939년 9월] 폴란드 전쟁에서 독일군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독일이 이미 프랑스와 영국에 대해서 선전을 포고한 후인데도 불구하고, “서부 국경에서 독일의 29개 사단과 대치하고 있던 이들 프랑스와 영국의 110개 사단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무너진 것은 친나치적인 고위 사령부의 이적행위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빠리로 진군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20개 최정예 사단은 시리아에 머물러 있었는데, 거기에서의 그들의 유일한 목적인 중앙아시아 쏘비에트 공화국들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지배계급은 전세계 다른 수많은 파쇼 지배자들을 지원했다. 전쟁이 선포된 후에도 그들은 나치가 신뢰하는 두 동맹국인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차관을 제공했다. 스페인 내전기(1936-39)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반파쇼 공화국 정부에 대한 어떤 보급품의 수송이나 판매도 금지함으로써 파쇼 장군 프랑코(Franco)를 지원했다. 한편,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의 공개적인 지원 외에도, 텍사코(Texaco, [미국의 석유회사])로부터는 석유를, 그리고 포드와 GM으로부터는 12,000대의 자동차를 무료로 받았다. 자본가들이 스페인을 파쇼의 개들에게 던져준 반면에, 노동자계급은 국제여단들(International Brigades)이라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스페인의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웠다. 53개국으로부터 온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들이 이들 여단에 참여했고, 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반파쇼 투쟁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나치가 만일 노동자계급을 위협하고 쏘련을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부르주아 지배자들은 그들을 내버려뒀을 것이다. 제2차 대전 이전과 대전 중, 그리고 대전 후의 자본주의의 역사는 파시스트들에 대한 공공연한 지원으로, 그리고 칠레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자본가 국가들에 의한 대량학살로 어지럽게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무장한 나치 악당은, 세계라는 노략물을 둘러싼 기존의 분배를 결코 ‘공정한’ 분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악당들에게 자신의 몫(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하늘 아래의 몫”이라고 불렀다)을 요구하고 나설 것임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나치는 거의 공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익은 열매들을 모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폴란드와 홀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에는 최소한의 희생밖에는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몫’을 위해 과도하게 싸웠기 때문에 서유럽 모두와 적대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동맹국들은 그들 나치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자본주의 지배자도 결코 반파시즘이 그 목표가 아니었다. 영국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제국을 위해 싸웠다. 미국은 태평양에 대한 통제를 위해서, 그리고 전쟁이 준, 최대의 자본주의 강국으로 등장할 기회를 위해서 싸웠다.















두 번째 거짓말: “미국과 영국이 나치를 쳐부쉈고, 쏘련의 도움은 그저 사소한 것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파쇼 추축국들을 쳐부순 것은, 쏘련의 붉은 군대였고,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중국, 조선, 베트남, 필리핀에 이르는, 공산주의자들이 이끈 빨치산이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지배하게 된 파시스트들은 1941년 6월 22일에 270개 사단을 동원, 쏘련을 공격했다. 이토록 거대한 공격은 이전에는 유례가 없었다(나치는 단지 50개 사단으로 프랑스를 점령했다). 파시스트들은 초기엔 약간의 성공을 거두어 쏘련 영토의 3분의 1을 유린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는 영웅적으로 싸워 일련의 전투에서 적군(敵軍)들을 쳐부쉈고, 1945년 5월 5일에는 베를린을 해방시켜 마침내 나치의 공포지배를 끝냈다.





1941년 10월이 되자 나치는 모스크바 교외에까지 다다랐고,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총통(히틀러)은 볼쉐비즘의 탄생지를 지구상에서 쓸어내 버리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조직들이 강했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고 버텼다.





나치는 3면에서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그들 부대 중 하나는 크레믈린에서 25마일 거리까지 접근했다. 끝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러 사수하겠다는 쏘련 지도부의 결정에 고무되어 전주민이 떨쳐 일어나 방어전에 나섰다. 남자들은 의용군을 조직하여 전선에서 나치와 싸웠다. 여자들과 청소년들은 수주일씩이나 추위에 떨면서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참호를 팠다. 2개월에 걸친 공격 끝에 독일군이 기진맥진하자 쏘련군은 반격을 가하여 적군(敵軍)을 모스크바로부터 100마일 이상 밀어냈다. 이것이 나치가 겪은 최초의 대패배였다. 그것이 전쟁의 전환점이 되어 나치는 괴멸되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의 전쟁은 그 후에도 베를린이 적군(赤軍)에 떨어질 때까지 3년이나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수도 없이 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때마다 더욱 더 영웅적으로 싸웠다(자세한 것은, 알렉산더 워드의 ��전쟁에서의 러시아�� 및 ��주코프 원수의 추억��을 보라). 두 개의 전투에 대해서 특히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사람 수에서도 무장력에서도 심한 열세에 있었던 쏘련 시민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집집이 투쟁에 나섰다. 그들의 새로운 노동자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이 도시의 모든 남녀 노동자들이 나서서 싸웠다. 폭탄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은 자발적으로 남아서 공장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위해 탱크들을 만들었다. 공산주의 정신의 본보기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스탈린그라드이다. 시민들은 인류 최고의 한없는 용기와 희생정신, 결의, 동무의식을 보여주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또한 스탈린을 수장으로 하는 쏘련 최고사령부의 빛나는 계획과 전략의 표본이기도 하다. 쏘련인들은 파쇼의 3개 군를 포위하여 쳐부숴, 나치의 사상자 수가 15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유럽의 파쇼 현역 부대의 70% 이상이 붉은 군대와 싸웠다. 예컨대, 1942년 11월에는 독일의 전체 256개 사단 가운데 172개 사단이 붉은 군대와 싸웠다. 나머지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빨치산과 싸우거나 휴식을 취했다. 영국은 이때 북아프리카에서 단지 4개의 독일 사단과 싸우고 있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을 때에도 그들을 맞은 것은 단지 3개의 독일 사단들뿐이었다. 성공적인 노르망디 상륙은 행운도, 연합국 사령부 측의 빛나는 전략의 예도 아니었다. 그것이 성공한 주요한 이유는 전체 유럽의 100개 이상의 사단이, 붉은 군대가 모든 파쇼 군대들을 쳐부순 백러시아와 남부 우크라이나로 급히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전선의 배후에서는 쏘련의 빨치산 부대들이 1백만 명 이상의 파쇼 군대를 격파했고, 이는 전쟁 전체를 통해서 영국과 미국 군대가 파괴한 것보다 많은 숫자이다.





실제로 붉은 군대가 파쇼를 격파하고 있던 1941년, 42년, 43년, 44년에 미국과 영국의 전략은, 나치와 쏘련이 서로 싸워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리고 나서 개입하여 재빨리 승리를 챙기는 것이었다. 미국과 그 연합국들이 독일의 서부에 제2의 전선을 여는 것을 2년 동안이나 미룬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붉은 군대가 파쇼를 철저히 쳐부순 것이 명백해진 1944년 여름에야 그들은 이 제2 전선을 열었다. 제2의 전선이 없었더라도 쏘련은 유럽 전역을 나치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저들 연합군이 제2의 전선을 연 것은 공산당이 베를린을 넘어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는 그들 전력의 대부분을 붉은 군대와의 싸움에 집중시켰다. 계급적 본능으로 그들은 쏘련으로부터 보다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훨씬 나은 대우를 받을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최정상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나치 장교들이, 즉 파쇼 도살자들이 미국과 영국의 통제 하에서 그대로 독일의 관료로 머물렀다. 사실상, 집단수용소들을 위한 가스실이나 병기들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챙겼던 거대 자본가들 모두가 전쟁 중에 그리고 전후에 그대로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은 재빨리 그들의 제품에 시장을 개방했다.





붉은 군대 외에 파쇼를 격파한 다른 세력은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던 빨치산들이었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빨치산들은 미군과 영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밀라노와 토리노, 파두아, 볼로냐, 제노바를 해방시켰다. 1945년 4월 27일에는 그들은 무솔리니와 그의 최고위 똘마니 18명을 사로잡아 노동자계급에 범죄를 저질은 혐의로 처형했다.





1944년 말까지 공산주의 빨치산들은 그리스와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켰다. 프랑스에서는 미군이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서 빨치산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들 빨치산 가운데 가장 대규모 부대는 공산주의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영국군과 미군보다도 빨치산의 전투들이 훨씬 더 많은 파쇼 군대들을 격파하고, 꼼짝 못하게 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23개의 독일 사단과 4개의 이탈리아 사단이 빨치산과의 전투에 붙잡혀 있었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파쇼의 24개 독일 사단, 9개 불가리아 사단, 그리고 3개의 헝가리 사단이 빨치산과 전투하고 있었으며, 그리스의 빨치산들은 10개의 사단을 붙잡고 있었다. 공산당과 기타 좌익 활동가들은, 파시스트들을 공식적인 전쟁에 붙들어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독일에서 비밀스럽게 파업과 사보타쥐(파괴행동)를 조직함으로써 파시스트들의 전쟁 준비를 방해했다.




















세 번째 거짓말: “처칠은 위대한 전쟁 지도자였다.”










처칠은 반공 지도자이자 인종주의자, 정치적 기회주의자였고, 반동적이고 열렬한 제국주의적 계급 전사(戰士)였다. 내무대신이었던 1910년에 그는 군대를 보내 리버풀의 파업광부들과 운송노동자들을 진압했고, “영국의 인종적 혈통을 개선하기 위하여” 정신이상자들을 강제불임조치 시키도록 권고했다.





러시아 내전기에는 노동자 국가를 세우려던 볼쉐비키들에 대항하여 그는 간섭전쟁을 벌였다. 그는 인도에서의 말라칸트 야전군(Malakand Field Force),1) 수단에서의 옴두르만 학살(Omdurman massacre),2)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3) 같은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에 종사했다. 그는 독가스를 살포하여 아랍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지지했고,4) 아일랜드의 카톨릭 교도들에게 테러를 가했던 블랙앤탠스(Black and Tans)5)의 조직에 책임이 있었다. 영국 지배계급의 다른 사람들이 인도를 계속해서 직접 예속시켜두는 것은 너무나도 비용이 든다고 결정한 후에도 그는 1947년에 인도를 독립시키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전쟁 중에 처칠은 서부의 제2 전선의 개시를 지연시키는 데에 간여했다. 여러 범죄행위들 가운데, 그는 공산주의 빨치산에 의해서 그리스가 나치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후에 그리스에 영국군을 보내 파시스트 국왕을 옹립했다. 영국의 지배계급들에게는 처칠은 훌륭한 전시 수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 지배계급을 위해 그들의 제국을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 민망스러운 공헌조차도 결국은 역사적으로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돼버렸는데, 다름 아니라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의 대중들이 전후 곧 투쟁을 통해서 영국의 공공연한 식민지 지배를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 거짓말: “일본은 미국에 의해서 격파되었다.”










중국의 홍군이 50만의 일본군과 1백20만의 그들의 괴뢰군을 격파했다. 이 숫자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국민당(장개석 지휘 하의 중국 민족주의자들) 군대가 쳐부순 일본 파시스트들보다 훨씬 많았다. 자본가 대중매체들은, 일본은 단지 태평양에서 미국과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싸웠을 뿐이라는 거짓말을 유포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다른 수많은 군대들과 싸웠다. 미국과의 두 개의 주요 전쟁이었던 오키나와 전투와 필리핀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의 수는 중국의 공산당과의 전투에 투입된 수의 5분의 1도 안 되었다.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특히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공산당이 이끄는 빨치산들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군대가 상륙하여 퇴각하는 일본군의 배후에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권리를 다시 요구하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일본군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다섯 번째 거짓말: “대일(對日)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원자폭탄이 필요했다.”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스탈린과 루즈벨트, 처칠은 쏘련의 붉은 군대가 나치를 격파한 후 1945년 8월 8일까지는 중국 북부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서방측 연합국들은 이 결정을, 미군과 영국군의 많은 사상자를 낼지도 모르는 일본의 침공을 피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미국은 이미 원자폭탄을 실험했다. 그리고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붉은 군대를 앞질러 일본을 공격하고, 그리하여 일본의 항복은 자신들의 공(功)이라고 주장하면서 전후 일본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거머쥘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원자폭탄은 쏘련의 예정된 공격 이틀 전인 8월 6일에 투하되었다.





적을 사살하는 것은 어떤 전쟁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십만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불구자로 만드는 것은 군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원자폭탄들은 사실상 장래 전후기(戰後期)에 대비한 원자 협박수단으로서 이용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자본주의 초강국이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음을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노동자들과 쏘련에 경고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부르주아 학자들조차도 원자폭탄의 투하가, 일본을 전면적으로 침공할 경우 발생했을 50만 내지 70만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거짓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침공은 결코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은 수개월 전부터 항복하겠다는 제안을 보내오고 있었고, 붉은 군대는 만주의 일본제국 군대의 대부분을 격파하면 일본이 재빨리 항복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무조건 항복을 하는 데에 대한 일본 파시스트들의 주요 요구는 천황제의 존속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이에 대해 미국은 반대하지 않고 있었다.

























여섯 번째 거짓말: “제2차 세계대전과 유태인 대학살의 원인은 히틀러였다.”










전쟁은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 조지 부시, 레이건의 사악한 계획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을 축적하고 노동자들과 자연자원들을 착취해야 하는 지배계급의 끊임없는 필요성이다.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은 노예들을 위해서 전쟁했고 로마군들은 귀족적 지배자들을 위한 사치품들을 위해서 세계를 약탈했다. 이후 유럽의 자본가계급은 노동력과 자연자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였다. 현대사에서는, 미국은 운하를 위해서 파나마를 침략했고, 중동의 석유를 통제하기 위해서 걸프전쟁을 시작했다.





유태인 대학살은 종종 나치의 정신상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는 진실이 아니다. 나치의 정신상태는 정말 가장 사악한 형태의 자본가적 정신상태이다. 자본주의는 인종주의를 먹고 자란다. 수년 동안에 수천만 명을 학살한 것은 인류사에 전례가 없긴 하지만, 인종주의적 대량학살에는 수없는 예들이 있다. 몇몇만 예로 들자면, 아프리카로부터의 노예무역, 남ㆍ북 아메리카에서의 원주민의 학살, 이라크 폭격, 1천500만 콩고 인민에 대한 벨기에의 대량학살 등이 그것이다. 유태인 대량학살은 인종주의의 직접적 결과였고, 인종주의가 없었다면 나치는 그토록 강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곱 번째 거짓말: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나치당이 독일을 파쇼로 만들었다.”










독일에 파시즘을 강요한 것은 독일의 자본가계급이었다. 이 은행가 및 사업가 계급이 히틀러의 자금을 댔다. 이 자본가계급이 그에게 자금을 대서, 길거리에서 노동자계급에게 테러를 가할 돌격대원들을 조직하게 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자본가들을 위해서 일했던 것이다. 그는 파업을 금지했고,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감옥에 그리고 집단수용소에 쳐 넣었다. 실질임금이 떨어진 1934년에서 1938년 사이에 자본가들의 이윤은 50%나 폭등했다. 독일의 자본가들은 전쟁으로부터, 즉 군수품으로부터도 (유태인이나 짚시, 동유럽인들, 전쟁포로 등등의) ‘열등인간들(Untermenschen)’의 노예노동으로부터도 거대한 이윤을 챙겼다.















여덟 번째 거짓말: “쏘련군들은 반(反)유태인적이었다.”










아주 사악한 중상모략은 쏘련군들이 반유태인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스탈린이 붉은 군대에 내린 첫 번째 명령들 중 하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진군하는 나치군들이 미치지 않을 쏘련 후방의 안전지대로 반드시 소개(疏開)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대와 전쟁물자들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데에 이용되었어야 할 쏘련의 철도 수송 역량의 상당 부분이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서 할당되었다.





사실 수십만 명의 유태인들이 사병으로서, 그리고 장군을 포함한 장교로서 붉은 군대로 싸웠고, 쏘련의 빨치산으로 싸웠다. 1941년 후반에 빨치산 부대들이 쏘련의 중앙 통제 하에 편입되게 되자 모스크바 당국은 특수요원들을 보내 어떤 형태의 반(反)유태인주의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게토(Ghetto, 유태인 집단거주지) 반격들은 나치 점령 하의 (백러시아와 같은) 쏘련 지역에서 발생했다. 쏘련 인민의 반(反)인종주의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다른 한편에서, 나치 살인자들의 대부분이 관직을 유지한 것은 바로 반공주의적인 전후 독일연방공화국(FRG, [서독])에서였다. 서독에서 전범들의 평균 수감기간은 살해된 희생자당 10분꼴이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친나치 비시(Vichy) 정부의 수많은 반유태주의적 관료들 역시 결코 기소되지 않았다.















아홉 번째 거짓말: “자유민주주의는 파시즘의 반대이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재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누구나 즉각 이 독재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경찰 병력과 판사들, 선출된 관료들, 조합 관료들이 한패가 되어 자본가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나선다.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강제나 폭력, 기만도 서슴지 않는다.





경제가 심각한 위기 상태가 아니고 노동자들의 반대가 전투적이지 않을 때에는 부르주아 국가는 얼마간의 자유언론과 자유로운 결사 등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자유주의적 권리’는 자본가들의 요구 여하에 달려 있다. 자유주의가 반파시즘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가면일 뿐이어서, 바로 그 뒤에 자본가적 지배자들의 현실적인 파쇼적 의도가 있다. 그리하여, 체제가 위기에 처하거나 이윤율이 떨어질 때, 그리고 실업률이 올라가고 대중들이 다루기 힘들 때, 부르주아 국가는 그 독재적 단검(短劍)을 보다 노골적으로 사용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위기들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파시즘은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궁극적인 형태이다.





이것이 한 나라 한 나라에서 예증된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 세계를 엄습하고 파시즘이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을 때였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처럼 보다 잘 알려진 예들 외에도, 포르투갈이나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핀란드 등등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파쇼 정권 하에 있었다.





당시 공산주의를 향해 도약하고 있었고 또한 전세계 노동자계급 혁명가들에게 영감(靈感)의 원천이었던 쏘련은 국제 파시즘의 주요 표적이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야말로 파시즘의 반대이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 근로인민은 혁명을 개시하고 공산주의를 향해 전진할 수 있거나, 아니면 파시즘 하에서 죽을 수 있다.




















그들은 대항했다










나치가 ‘열등인간들’이라고 생각했던 수백만 명의 유태인이나 집시들을 살해한 것은 현대사의 가장 야만적인 행위였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대중매체들은, 유태인 대량학살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수많은 거짓들을 퍼뜨려왔다.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같은 영화들은 유태인들이 마치 순한 양들처럼 학살에 끌려간 듯이 암시하고 있다. 이보다 더 진실과 먼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게토[유태인 집단거주지]와 수용소들에서는 나치에 대한 광범한 저항이 있었다. 무장투쟁을 조직한 지하망들(underground networks)이 있었고, 그 중 많은 것들은 쏘련과 연계된 공산당들이 이끌었다. 1943년 초에는, 공산당과 기타 반나치단체들이 바르샤바 게토에서 조직한 5만 명의 유태인들이 사제(私製)의 권총과 폭탄, 화염병을 들고 수 주일 동안 나치 친위대(SS) 사단과 싸웠다.





반란의 불길은 나치의 죽음공장들 속에서도 타올랐다. 아우쉬비츠(Auschwitz)의 수감자들은 몰래 반입한 다이너마이트로 화장로(火葬爐)를 폭파해버렸다. 트레블링카(Treblinka)의 수용소는 1943년 8월 2일에 방화(放火)되어 200명의 수감자들이 탈출에 성공했다. 쏘비보르(Sobobor)의 수용소에서는 붉은 군대의 장교의 지도 아래 과감한 반란이 조직되었다. 수감자들은 10명 이상의 나치 친위대원들과 4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인 간수들을 살해했다. 약 300명이 탈출하여 자유를 찾았다. 노예 노동자들처럼 노동하던 인민들은 광범하게 생산 파괴행동(sabotage)을 벌였다(유태인들의 저항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것은, 유리 수흘(Yuri Suhl)의 책, ��그들은 대항했다(They Fought Back)��을 보라).





게토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의 명령을 전달하며 대항하지 말라고 인민들에게 말함으로써 나치에 봉사하던 우익 유태인 종교지도자들이나 유태인 평의회들에 맞서 싸웠다. 수천 명의 유태인들이 나치에 맞서 빨치산 부대들을 조직하고 거기에 결합했다. 쏘련 내에서는 유태인들이 200개 이상의 그런 부대들의 지도자였고, 수십만 명의 유태인들이 붉은 군대에서 싸워 파시즘을 격파하는 것을 도왔다.





민스크(Minsk)에서는 유태인들의 생존율이 다른 곳보다 훨씬 높았는데, 이는 나치에 대한 활기찬 저항이 독일군을 수세에 몰아넣어 학살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다. 백러시아의 반인종주의적 농민들은 유태인들을 지원하여 나치와 싸웠다.





자본주의 문화에서 유태인 대량학살에 관해서 수많은 거짓을 늘어놓는 데에는 명확한 이유들이 있다. 하나의 이유는, 자본주의 문화의 최고의 기능은 착취를 정당화하고 은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주요한 목표는 대중들의 혁명적 투쟁정신을 꺾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순한 양들처럼 도살장으로 행진해간 것처럼 보여주는 것은 억압에 대한 무저항(passivity)을 유포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역사적 사실은, 나치에 대한 대부분의 대항을 이끈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진심으로 반인종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와 반공주의를 두 기둥으로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유태인들의 저항의 진실을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는 파쇼 국가이다. 이스라엘의 자본가들은 대학살의 기억을 냉소적으로 조작하고 있다.





... <노사과연>















(번역: 편집부)











1) [역주]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영국이 파쉬툰족(Pashtun)의 거주지를 가로질러 영국 지배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국경선(Durand Line)을 긋자 약 1만 명의 파쉬툰족 군인들이 이에 항의하여 1897년 7월 26일에 영국의 수비대들을 포위공격했는데, 이 포위공격을 타개(8월 2일)하기 위해 영국군이 보낸 야전군.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06명이 죽거나 다쳤고, 파쉬툰군은 최소한 2천 명의 희생자를 냈다.






2) [역주] 수단의 수도 하르툼(Khartoum)의 서부 교외도시 옴두르만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현지주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1989년 9월 2일에 영국군이 벌인 대학살.






3) [역주] 남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금광 및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배하기 위해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이 네덜란드인의 후손들인 보어인들(트란스발 공화국)과 벌인 전쟁. 총인구 약 50만, 병력 약 7만의 보어인들에 대항하여 영국은 약 45만 명의 군대를 파견, 사실상 주민 말살정책을 꾀했다.






4) [역주] 식민지 지배에 대항한 아랍인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영국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들의 도시인 술라이마니아(Sulaimaniya)에 공중에서 독가스를 살포했다. 역사상 최초의 비행기로부터의 독가스 살포였다.






5) [역주] 아일랜드 독립전쟁(1919-21) 당시 영국의 식민지 지배 무력이었던 왕립아일랜드경찰대(RIC)의 예비군인 Black and Tans(검은 제복에 카키색 모자를 쓴 자들)이 벌였던 잔혹한 살상행위를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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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번역> 제2차 대전에 관한 몇 가지 거짓과 진실[1] 진보노동당(PLP) 2009-08-07 4034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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