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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4)
글쓴이 사사키타츠오(佐々木辰夫) E-mail send mail 번호 128
날짜 2009-06-02 조회수 3619 추천수 160
파일  1243938058_아프간.hwp

  













기획번역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











Ⅱ. 다우도 쿠데타를 거쳐서 사월혁명으로(2)















4월혁명










1978년 2월 아프간 항공 아리아나노조가 파업을 일으켰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이 주요한 요구였다. 당시 조종사들은 국영회사 안에서도 가장 학력이 높고, 균등한 기술수준을 가진 전투적인 노동자였다. 이 쟁의의 결과는 다른 국영회사의 종업원들에게 있어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에도 파급되는 것이었다. 카불 시내에는 이들을 지지하는 데모로 넘쳐났다.





그때 카불에서는 불온한 공기가 감돌았다. 전년(1977년) 1월 다우도 심복으로 불린 푸람계획상이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다. 또한 부대통령의 임명을 둘러싸고 다우도 반대파와의 사이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4월 17일, 인민민주당의 창립자의 한사람이었던 밀 아쿠발 하이발이 암살되었다. 후에 이는미국중앙정보부(CIA), 이란 비밀경찰(SAVAK)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발은 당내에서 굴지의 조직자였고 많은 시위를 지도했다. 카불에서는 연일 항의 데모가 이어지며 그 수는 만 건을 넘어섰다. 슬로건 중에는 ‘CIA반대’, ‘SAVAK go home’ 등의 팻말이 보이기도 했다. 정권 내부에도 여전히 많은 좌파계의 직원과 애국적 군인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권내부의 사정이 반대파에게 곧바로 새어나가곤 했다. 이는 다우도정권의 취약함 중의 하나였다.





4월 25일, 당국은 타루키, 칼마루 등의 인민민주당(PDPA) 간부 7인을  체포했다. 10만 이상의 시위대가 또 초봄 카불의 거리를 뒤덮었다. 인민민주당은 다우도정권이 제국주의세력과 결탁하여 당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당은 이에 건곤일척, 정권타파를 위해 실력행사 할 것을 결단하고, 아울러 당 간부의 석방방법을 다듬었다. 이것이 4월혁명으로의 결단이었다. 당시 하루쿠파의 국군 내의 프락치활동 지휘를 담당했던 하피주라 아민은 가장 적극적으로 군사궐기를 주장해, 타루키가 그에 동의했다. 칼마루는 여전히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당의 태세를 견고히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 [1979] 이하 ��연보��라고 생략함) 혁명적 궐기에서는 당시의 순간적 판단이 장래의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리하여 4월 28일 아침 8시, 국군 내의 당활동가가 통솔하는 군대가 대통령궁전을 급습해, 대통령 다우도를 체포했다. 대통령 호위대가 반격해왔기 때문에 혁명군과의 전투 중에 그는 살해되었다.  





궁전 내의 교전은 단시간에 끝났다. 이러한 무장궐기의 실행 부대 중에는 5년 전에 쿠데타에 참가했던 경험자도 있었다.





카불 부근의 수비였던 중앙군의 지휘관은 다우도정권 구원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국방상ㆍG.H.래슬리 대장이 정부를 도와주려 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 잡혀있었던 인민민주당당 간부는 전원 무사히 구출되었다.





군사혁명평의회에 의한 혁명선언(라디오방송)을 계기로 전날까지 가두투쟁을 담당했던 노동자, 청년, 학생 및 시민이 달려 나와, 타서 눌은 잔해가 된 전차를 둘러쌌다. 먼 곳에서 자전거로 급히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환호의 소리가 울려 펴졌다. 군사궐기는 성공했다. 그날의 희생자는 인민민주당 34인과 비당원 및 반혁명파 67인 등 전부 101명이었다.





다우도파는 그다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했다. 왜인지 구름같이 정권이 붕괴되었다.





다우도는 1973년의 정변 당시 보수층을 대표하는 왕제 지지파, 이른바 지불가토우라 무쟈디티와 세이드 아마드 가이라니1) 등을 적으로 돌렸다. 그 중 상당수는 국외(파키스탄과 미국)로 달아났다. 이윽고 그들은 국외에서 다우도 타파운동을 비롯해 4월혁명 이후에는 반혁명파를 조직해갔다. 





또한 다우도는 5년간의 정권운영 중에 쿠데타의 공동실행자였던 애국적 좌파활동가를 자르거나 추방했다.





게다가 다우도에게 가장 가깝고 의지가 되었던 친미ㆍ친 팔레비의 새로운 부르주아지를 육성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하나도 두지 못한 상황에서 맨 몸의 왕위 그대로 생애를 끝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긴 민주주의운동 속에서 왕제타파의 역할을 담당했다. 다우도정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인민민주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그의 쿠데타는 예비 4월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73년 7월의 정변 실행은 4월혁명의 예행연습이었고 다우도정권에 있어 통치의 경험은 혁명정권의 행정능력 발휘의 자신감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다우도의 언행불일치, 봉건지주층과의 타협, 유착 배신행위로도 불리는 노선전환은 4월혁명의 방아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이 나라에서 처음이자 최후였던 모더니스트 다우도는 미국 석유자본과 미중앙정보부(CIA)의 노회한 공동모의의 희생자였던 것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도상국의 지도자는 종종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생애를 끝내기보다는 원래 종주국과 미국 등의 외국의 정치적 상황과 압력에 의해 자유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우도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혁명평의회의 발족과 각종 포고










4월 29일, 혁명평의회가 결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날까지 군사궐기를 지휘했던 군사혁명평의회가 전자에 흡수되었다.





4월 30일 인민민주당 서기장 누라 모하메드 타루키가 혁명평의회의장 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대통령겸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포고 제1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선언을 포고했다. 이어 이하의 포고도 발표되었다. 우선 그러한 포고령과 일시를 보도록 하자.










제2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정부수립ㆍ각료선임 (5월1일)





제3호 국가의 합법적 수속에 대해 (5월14일)





제4호 아프가니스탄에 있어 모든 부족ㆍ민족의 문화에 대한 존중에 대해 (동일)





제5호 시민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의 보장, 나딜 전제왕조(전국가군주 모하메드 샤비루 샤의 일가) 및 다우도 가족의 자산과 특권의 몰수 (6월 12일)





제6호 농민의 부채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7월12일),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렸던 부채와 저당 등의 부담경감, 이른바 덕정령. 이때 1150만 명 농민의 빚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제7호 결혼제도의 개혁과 남녀동권의 보장에 대해(10월 17일), 지참금의 제한, 강제결혼과 소녀결혼의 폐지





제8호 토지에 관한 포고(11월 28일) 토지소유의 상한을 일가족당 30세리브(8헥타르)로 한다. 토지의 매매ㆍ투기의 금지. 지주소유 상한을 넘은 토지를 무상으로 농민에게 인도한다





이렇게 신생 아프가니스탄은 내정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가면서 외교정책을 전개해갔다. 그래서 순식간에 50개 남짓한 각국에서 국가로서 승인을 얻어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은 명실상부하게 근대적 민주주의국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혁명정부는 상기의 포고와 여타 정책을 포괄적으로 정식화해, ‘공화국정부의 혁명적 임무의 기본노선’(��世界政治資料��1978년 9월하순)을 5월 8일에 발표했다. 따라서 ‘기본노선’은 4월혁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다.















4월혁명의 기본적 성격










‘기본노선’은 4페이지로 짧다. 이는 다음의 2개의 장으로 성립되었다. 즉 (1)혁명을 시작하게 된 이유와 경과 (2)30항목에 걸친 내정정책.





‘혁명을 시작하게 된 이유’로는 이 혁명을 ‘아프가니스탄의 자유로운 근로인민의 의사에 기반을 둔 민족민주혁명’으로 규정했다. 쉽게 말하면 제국주의ㆍ식민지주의에 대한 민족의 독립을 얻어, 봉건지배에 대해서도 민주주의를 확립하려 하고 있다. 이 혁명은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혁명이지만, 혁명을 이끄는 것은 부르주아가 아닌 노동자ㆍ농민 등의 프롤레타리아이다. 텍스트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문구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신중하게 그러한 용어를 피하고 있다. 이는 부족적 유제와 보수적인 이슬람의 이데올로기가 그 사회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혁명이 더욱 전진한다면 사회주의 각국과의 교류가 진행되어 사회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본노선’은 상정했다. 경제적 후진성에서 탈각하고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의 원조가 필요해진다. 이란 팔레비의 오일달러를 거부했듯이, 신ㆍ구식민지주의의 영향을 배제하고 ‘우호국에서 무조건 신용’을 얻을 것을 의제로 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4월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은 아니지만 그것을 사정권에 넣은 근로인민에 의한 민족민주혁명이었다.





이에 4월혁명을 지지하는 계급기반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혁명의 선두에선 시기부터 등장했던 노동자ㆍ농민ㆍ시민 및 군인들이다. 그들은 국가자본주의 경제정책 중에서 창설된 국유기업의 종업원이든지 관련사업의 종사자였다. 노동자는 노동운동의 경험도 적었고 역사도 짧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이미 후퇴할 수 없는 지점에 온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ㆍ인민에 근거한 정권이 역사적으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4월혁명의 역사적 위치










혁명이라는 것은 역사의 한 점으로 어떤 전제도 예고도 없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혁명은 마치 쏘련의 일방적인 게임으로 일어났다는 듯이 단락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본서는 앞에서 아프간 4월혁명을 인민의 바람과 목적의식을 가진 미래지향과 국가의 내발적 주체적 발전이라는 궤적 위에서 보아왔다. 이를 혁명에 이른 종축으로 한다. 그 종축을 칼마루의 1982년 3월의 인민민주당 전국대회의 연설에서 인용해보았다.





“이미 20세기에 시작하며 쟈라라바디(쟈말딘 아프가니의 이란이름)와 모하메드 타루지 그 외에 아프간 민주주의자가 우리의 진정한 진보를 확신하고 보다 좋은 미래를 위해 민족통일을 호소했다. 제3차 아프간 영국전쟁은 국가의 애국적 통일을 강화시키고 민주적 운동을 강력하게 성장시켜 진보적 세력을 활발하게 했다. 그때 그러한 조류의 발전의 결과, 제1차헌법운동, 아밀 아마누라 한의 진보적인 개혁, 제2차헌법운동, 국민의회의원의 제7차소집운동, 나아가 민주적 개혁을 위한 대중운동과 반동정권의 억압통치에 대한 저항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이러한 역사의 경험이 축적되어 4월혁명에 이르렀다.”(“Documents and Records of the National Conference of People's Democract Party of Afghanistan", Kabul, March 14-15, 1982)





이 종축에 대해 1979년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그 횡축 혹은 세계사에 있어 동시성을 뒤돌아보자. 1973년 OPEC에 의한 석유값 인상, 이어 1974~5년의 세계경제 공황 속에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다. 포르투갈령의 기니아ㆍ비사우 앙골라 및 모잠비크에 있어 독립운동은 베트남전쟁과 동시적으로 진행되면서 포르투갈혁명을 초래했다. 1976년 스페인령 사하라에서 폴리사리오전선이 ‘사하라 아랍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1976년 에티오피아에서는 인민이 황제 하이레 세라쉐를 매장하고 민족민주혁명을 성공시켜, 멘가스츠를 지도자로 해 계획경제로 들어설 준비를 했다. 1978년 이웃나라 이란에 있어 반 팔레비상인과 석유노동자와의 싸움이 호메이니혁명으로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1979년 중남미 니카라과에서도 반독재혁명이 성공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80년에 파라분도마루치민족해방전선이 형성되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서는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활발해졌다 (1980년 독립). 이러한 흐름에 규정되면서도 또한 반대로 이에 영향을 주면서 아프가니스탄혁명은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아프가니스탄혁명은 자국의 역사의 내발적 토착적 발전의 연장선 상에서 국제적 혁명운동 그 중에서도 도상국의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와 겹쳐지면서 격동과 긴장의 도가니 중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 혁명은 세계혁명과 민족해방투쟁에서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이는 역으로 이를 허락하지 않는 반대진영의 움직임에서 보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혁명이 일어나자 곧 제국주의 신ㆍ구 식민지주의세력은 마치 자신들의 꽃밭이 침해된 듯한 초조감에 휩싸이며 그 주변에 결집했다. 이후 10년에 걸친 ‘쏘련군의 아프가니스탄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름을 빌려 혁명을 무너뜨리려고 안달했다. 또한 ‘이슬람권으로의 무신론ㆍ이교도의 침임’이라는 이슬람부흥주의의 슬로건을 교묘하게 이용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이 서남아시아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당내투쟁










인민민주당이 내부에서의 파벌투쟁으로 흔들리기 전에 당의 결성과 변환을 간단하게 연표로 보자.










1948년 누라 모하멧드 타루키(1917년생)는 ‘왜슈 자루마얀’(‘각성한 젊은’이라는 뜻)이라는 소정당을 결성했다





1950년대 중반 정도 바부라쿠 카루마루(1929년생)는 ‘사회과학연구회’를 결성, 이후 ‘팔챠무(‘깃발’이라는 뜻)당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비로소 타루키, 하파이즈라 아민(1921년생) 등은 ‘하루쿠’(‘인민’이라는 뜻)의 당을 결성했다.





1964년 헌법 개정에 의해 정치결사,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1965년 1월1일 하루쿠당과 팔챠무당이 합동ㆍ통일해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인민민주당 )이 되었다.





1966년 당기관지��하루쿠��를 주간으로서 6호까지 발행했으나 이후 발행금지처분을 받았다





1967년 인민민주당이 분열해, 그 이후 하루쿠당, 팔챠무당으로 각각 재출발





1977년 다우정권의 반동화. 양당은 다시 통일해 인민민주당 로 불림





1978년 4월 4월혁명





        7월 인민민주당은 카루마루 등 전 팔챠무파 간부를 ‘반당 반혁명의 음모’로 격하.





1979년 9월 수상아민이 대통령에 취임해 타루키를 살해, 전 하루쿠파의 해체가 시작됨





        12월 아민이 살해되었다. 카루마루 등은 전 하루쿠파의 멤버를 포함해 인민민주당 의 집단지도체제를 확립, 이후 ‘혁명의 제2단계’에 들어섰다.





인민민주당은 1965년 결성 이래 합동-분열-재합동 그리고 팔챠무파 간부의 격하처분 등의 길을 걸어왔다. 이 양 파벌 사이에는 어떠한 사상과 이론 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하루쿠파가 혁명의 주체세력은 노동자계급과 도시소시민계층이라는데 반해, 팔챠무파는 모든 층의 민주적 세력을 결집한 민족통일전선이고자 했다. 혁명주체에 관해 양 파벌이 역점을 둔 것은 확실히 달랐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차이는 ‘당의 통일ㆍ총단결’의 관점에서 화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당면한 혁명의 성격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라는 점에서는 양파는 일치했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인 영국식민지주의와 러시아챠리즘과의 싸움, 현대의 아프간 사회의 성격규정, 이른바 반자본주의 반봉건적 생산양식, 외교정책(사회주의제국과의 우호적 연대, 비동맹운동으로의 참가와 적극적 평화중립) 등의 지표로 양파를 보면, 그 차이는 찾아내기 어렵다. 사실 1965년 당 결성시의 ’당강령‘과 1978년 5월의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혁명적 임무의 기본노선‘등의 중요문서는 용이하게 양자 사이에서 합의되었다. 이는 타루키 타루마루 및 아민 등이 토의해 정리한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양 파벌은 다우도 쿠데타 및 그 정권의 성격을 둘러싼 견해가 갈라졌다. 그러나 양측의 애국적 군인이 쿠데타에 참가했기 때문에 이는 논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애국적 군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은 반영전쟁에 참가한 사람과 그 손자 및 1930년 대 이후 쏘련적인 군대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군인과 테크노크라트들이었다. 다우도는 그러한 군인의 진보적 경향에 주목해 쿠데타에 협력할 것을 권했다. 다른 한편 애국적 인사들은 자신들을 국정과 민주주의에 있어 항상 진보적 입장으로 규정짓고자 했다.





그렇다면 양 파벌의 대립점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파벌적인 대립, 분파주의였다. 양측은 제각기 다른 인격에 의해 다른 동기ㆍ장소ㆍ 일시에 따라 결정된 조직집단이었다. 이러한 파벌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전근대적ㆍ비민주적ㆍ비이성적 조직개념이었다. 이를 절대시하는 한 파벌의 해소는 없고 더군다나 다가오는 혁명이라는 대사업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분파주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앞의 연표에 있었듯이 1978년 7월 당 중앙은 제1부수상 카루마루 등에 대해 ‘반당 반혁명의 음모’라는 이유로 격하처분을 수행했다. 카루마루를 체코슬로바키아, 전 팔챠무파의 서열 2위 누루 모하메드를 미국, 아나히타여사(아프가니스탄 민주여성동맹의장, 교육상 등으로 근무했다)를 유고슬라비아, 나지불라를 이란 대사로 각각 임명했다. 그때 당사문위원회가 발표한 ‘음모자의 자유’에 의하면 카루마루파(칼챠무파와 하루쿠파)는 인민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혁명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당의 일부 멤버는 그 정부를 직접적으로 독점한 하루쿠(인민)정부를 자칭했다. 이는 일부 멤버의 독재였다. 이는 인민의 바람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우리는 인민민주주의의 정부를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의 책,��연보��, p. 1312~1367) 이러한 팔챠무파의 주장에는 일정한 진실이 포함되어있다. 전술했던 ‘기본노선’에는 ‘하루쿠정부’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 후 ‘하루쿠정부’라는 귀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하루쿠든지 인민민주주의든지 하는 것 때문에 서로 상대편을 이러니 저러니 하는 험담이 이어졌다.















분파주의의 해소 ― 아민의 망동










2개의 파벌수립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해소되기에 이르렀다.





4월혁명 후 1년이 경과하고 하피즈라 야민이 농지개혁 실시의 선두에 서(1979년 1월) 실권을 쥐기 시작해 2월에는 수장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여름이 되자 미국, 파키스탄, 중국, 이란 및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반혁명파의 무기와 군사물자가 국가의 안팎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타루키정권을 비롯해 쏘련에 군사지원을 요구했던 것이 이 때의 일이었다.





9월을 시작으로 타루키는 제6차 비동맹제국 수뇌회의 출석을 위해 쿠바를 방문해 이어 10일 모스크바에서 브레지네프와 회담을 했다. 일국의 원수가 10일 이상이나 외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정권의 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당시 쿠바와 쏘련의 보도에서는 타루키대통령은 그 외교일정을 막힘없이 소화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타루기 측에서 보면 국내에는 반혁명파의 움직임 이외에는 긴급하고 중대한 정치안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했다.





아민은 타루키의 외국방문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고 전 권력을 강탈했다. 아민은 타루키가 귀국하자마자 그를 살해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9월 15일의 일이었으나 1개월 후에 발표되었다. 하루쿠파의 자기해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내용의 전말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타루키와 아민의 관계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1960년대 이후 두 사람은 하루쿠 당내에서 약 30년간 혁명의 동지였고 사제 간이었다. 아민은 30세를 지나고 나서부터 미국으로 유학해 1959년과 1962~64년, 재미아프가니스탄 학생협회의 대표가 되어, 그 조직력을 발휘했다. 그것도 타루키의 지도에 따르는 일이 많았다. 아민은 타루키 당의장 아래 서기장의 임무를 해냈다(앞의 책, ��연보�� ‘위대한 지도자 누라 모하메드 타루키의 전기. p. 629-632) 그렇다면 왜 아민은 스승으로 떠받들던 타루키를 살해하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일으킨 것일까. 이 살해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이루어진 설명은 주로 아민의 권력욕망설과 CIA에 의한 음모설 두 가지였다. 어느 쪽도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둘 다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아민이 권력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 몇 가지 단계에서 그의 연설을 읽으면, 하나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타루키를 칭송하는 것이다. 아민은 1979년 1월 인민민주당 창립 14주년 기념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당과 타루키와의 관계는 신체와 영혼의 관계이다. 몸을 영혼에서 분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에 대해 말할 때, 타루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루키에 대해 말할 때 당에 관한 것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그는 말했다(아민은 팔챠무파의 존재 등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해 3월 내각개조에서 아민은 제2수상에서 수상으로 승진했다. 그때 그는 연설을 했다. 이는 겨우 4페이지 정도의 짧은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위대한 지도자 타루키’를 10번이고 반복해 사용했다. 이렇게 아민은 타루키를 지극히 높은 자리에 놓았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개인숭배였다. 1980년대가 되면서 이미 국제공산주의운동에 이런 개인숭배가 퇴출되게 되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개인숭배는 그 상대(타루키)보다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아민)의 독재로 진행되는 것을,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계획했던 것이겠지만, 속되게 말하면 남을 위하는 체하며 실속을 차리는 거였다. 만약 그가 독재의 길을 걷는다면 그는 그 길을 저해하는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주요한 저해물이 대통령 타루키였다. 이것이 아민의 권력탈취 방정식이었다.





그렇다면 타루키는 권력탈취를 목표로 하는 아민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했는가. 또한 타루키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누루 모하메드 타루키










타루키는 민간회사와 정부의 재외공관(대사관) 등에서 영어통역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1948년의 ‘왜슈 쟈루마야’(‘눈뜨는 청년’이라는 뜻)운동 이래 정치활동과 문학작품의 창작에도 많은 시간을 써왔다. 그는 당출판물과 ‘하루쿠’기관지에 파슈톤어로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막심고리끼�� ��자유란 어떤 것인가��, 후기에는 ��약행상인�� ��일을 찾는 남자�� ��농민의 딸�� 등 사회저변의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면서 사회체제의 변혁의 필요를 암시했다. 특히 타루키문학 중에서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4월혁명 직전에 발표한 ��구두장인��이라는 작품이다. 이미 모하메드 오스만 니쟌트라는 시인이 쓴 동명의 시가 있었는데, 타루키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 ��구두장인��을 썼다.










“빈곤함과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무영의 거리의 구두장인은 사회적 전제의 희생이 된다. 신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받고 그 구두장인은 구두두드리기의 형벌에 처해져, 괴로워하다 죽었다. 니쟈드시의 마지막 구절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전제정치의 일-인용자주)이 확립되어





압제자의 박해가 공정함을 의미해





신앙이 군사력에 이용되어





그 한편으로 억압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박해되어온 사회에 있어서





최량의 약은 인민의 대혁명이다





이것이 니쟈드의 조언과 가르침이다“





(��사회과학��제4호 「4월혁명과 아프간문학의 인민민주주의적 전통」G기리스 저,馬場역 사회과학사 1982년)










타루키가 남긴 문학작품 이외의 정치적 발언과 문장을 읽으면 정치적 선전이 아닌 측면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른바 1965년 1월의 당결성 대회에서 연설이 있었다. 연설은 6페이지의 짧은 것이었으나,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영국 식민지주의와 그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민과의 싸움에 대해 적고 있다. 이어 국가의 노동자와 인민이 세계의 반제ㆍ반식민 투쟁의 한축을 담당해가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적으며 마지막 말로 “이 당의 횃불은 인민에 의해 높게 내걸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이 횃불을 아래로 내려버린다면, 그 사람의 턱수염은 그 횃불의 불길로 타서 눌어, 그는 영구히 부끄러운 생각에 꾸짖어질 것이다.(��연보�� p. 271)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이른바 문화인 정치가였는가, 그게 아니라면 몹시 사랑했던 충견에게 물릴 정도로 남에게 호인이었던 것일까. 타루키가 아민의 망동을 저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의 초동단계(1978년 7월경까지)를 보면 그는 하루쿠파를 정비하고 팔챠무파를 흡수한 당을 통솔해온 지도력에 있어 큰 의문이 발견되지 않는다.















‘혁명의 제2단계’를 향해










아민은 자신의 정치적 선도자였고 가장 친밀하고 ‘위대한 혁명가’를 살해했다. 한편 타루키는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이고 아이도 더 이상 낳지 않았다. 타루키의 부인은 항상 남편의 옆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한 것은 아민의 지시를 받은 캄(KAM, 아민의 비밀경찰)의 멤버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나에게 알려주었던 조직원이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Afghanistan - Washington's Secret War", by Phillip Bonosky,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85)





아민은 1978년 7월 이후 타루키에 내각개조를 진언해왔다. 이 시기부터 타루키와 아민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표면화되었다. 아민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전 하루쿠파 당원을 입각시키고 싶었다. 그 달성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전권을 장악한 1979년 9월이었다. 물론 그때 이미 말했듯이 함께 타루키를 말살했다. 결국 9월의 내각개조는 모든 하루쿠파 중의 온건 현실파였고 당창립 이래 유력했던 멤버들과 다우도 쿠데타에 참가했던 애국적 전사를 추방하고, 아민의 수족을 새롭게 발탁한 인사였다. 입각한 관료들은 연령도 낮고 경험도 부족했다. 이에는 아민의 위기의식과 고립감이 투영된 것이었다. ‘아민 쿠데타’는 즉 하루쿠파 자멸의 시작이었다. 유력한 정부비판 세력으로서 팔챠무파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하루쿠파의 통치능력의 비력을 꾸짖어갔다. 이때 아민이 재 카불미대사관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흘러들었다. 또한 쏘련공산당 정치국내 아프가니스탄 위원회2), 통칭 4인위원회의 기록을 보아도 아민은 미대사관 혹은 CIA의 접촉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아민에 의한 타루키 살해는 아민의 권력욕망설과 CIA음모에 의한 것이었는지 식별은 곤란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헤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중에 약 2주 후의 10월, 카루마루 등등 전 팔챠무파였고 대사로서 외국에 좌천되었던 이들이 카불에 결집했다. 그들은 타시켄트에 모였다는 설도 있다. 12월 말에는 카루마루를 중심으로 새로운 각료평의회가 결성되었다. 9월에는 아민에 의해 추방된 전 하루쿠파 내의 온건 현실파였던 아스라무 화탄쟈루 내상(중좌), 쇄루 쟌 마즈도우랴루 국경문제상(소장), 세이드 모하메드 구라프쇼이, 샤루무 모하메드 세아리, 구라무 다스타키루 판제리도 모여 당은 단결하였고 집단지도체제를 성립시켰다. 이렇게 하루쿠파와 팔챠무파와의 피비린내 나는 파벌투쟁은 거의 해소되고, ‘혁명의 제2단계’가 시작되었다.





아민은 대체 누구에 의해 살해된 것일까. 카루마루를 중심으로 한 팔챠무파였다라는 설도 있고 쏘련군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아프가니스탄혁명의 진전 상황을 보면 아민을 추도하거나 명예회복하려는 움직임은 일반 인민 중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혁명적인민의 당시 긴박한 의사가 그의 생존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사과연> 




















사사키타츠오3)(佐々木辰夫)





번역 :정혜윤(회원)











1) 무쟈디티는 종교지도자에게서 태어나 1929년 아마누라 개혁에 반기를 나부끼며 영국과 접촉해 앵글로 이슬람이라고 불렸다. 후에 미국과 깊게 내통했다. 가이라니는 아프간 반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전 국왕의 딸을 아내로 삼아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성역 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통일 이슬람혁명위원회의장’의 자리에 있기도 했다.






2) 브레지네프의 노령화와 함께 그를 원조하는 의미에서 정치국내에 각종 소위원회가 비공식적으로 사실상 설치되었다. 이른바 중국, 폴란드, 쿠바, 군축 및 아프가니스탄 등의 20개 가까운 위원회였다. 아프가니스탄위원회의 상련멤버는 그로무이코(외교담당), 안드로포프(국가보안), 우수치노프(군사) 및 포노마료프(당의 국제정치)의 4인으로, 임시로 다른 멤버가 출입하기도 했다.(��ソ連のアフガン戦争―出兵の政策決定過程��, 李雄賢저, 信山社, 2002)






3) 1928년 출생, 도시샤(同志社)대학졸업, 실직 중일 때부터 오키나와ㆍ아마미를 비롯해 일본각지를 외딴섬ㆍ벽지를 정력적으로 걸었다. 후에 중학교에서 일을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1960년대 인도ㆍ오키나와 그 밖에 지역에 관한 르포를 ��신일본문학��과 관서인들이 하는 문학ㆍ사회운동의 동인지��표상����변혁자�� 등에 발표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이란혁명, 아프가니스탄혁명에 대해 ��사회평론��에 집필했다. 저서로는 ��아하곤쇼코(阿波根昌鴻)- 그 투쟁과 사상��(2003, スペース伽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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