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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2) ―제18회 대회에서의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테제―
글쓴이 번역 : 김성칠(편집위원) E-mail send mail 번호 127
날짜 2009-06-02 조회수 3441 추천수 140
파일  1243937497_그리스.hwp

  













힘있는 그리스공산당











[역자주 : 이하에서 소개하는 글은 그리스공산당중앙위원회가 제18차 당대회(2009년 2월 18일~22일, 아테네)를 맞이하여 당내논의를 벌이기 위해서 발표하였던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영문으로의 발표는 2008년12월29일)의 전문이다. 이 “테제”는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A. 사회주의 체제의 공헌





B. 공산주의의 최초의 낮은 단계로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입장





C.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반혁명의 승리의 요인들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경제의 평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공산당의 역할에 관한 결론





      쏘비에트정권의 전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전개와 그 전략





      그리스공산당의 입장에 관한 평가





D.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적합성, 우리당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개념의        강화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적합성





      우리당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개념의 강화





결론










지난 호에 이어서, 나머지 부분을 번역‧게재한다.]





C.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반혁명의 승리의 요인들










9. 우리는 쏘비에트연방의 경험을 연구해 왔으며 그 이유는 쏘비에트연방이 사회주의 건설의 전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다른 유럽 나라들의 추이나 아시아 나라들(중국, 베트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쿠바에서의 사회주의 정권의 추이에 대해서도 더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쏘비에트연방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다음과 같은 것에 근거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 사회주의적 소유가 존재하고(여러 가지 모순은 있지만) 협동조합적 소유가 그것에 종속해 있는 점, 중앙의 계획, 노동자의 권력, 근로인민 전체에게 이익을 주는 전례 없는 성과.





이런 것들은 어떤 시기 이후 당이 혁명적 성격을 서서히 잃어가고 그 결과 1980년대에 반혁명세력이 당과 정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부정될 수는 없다.





우리는 1989년부터 1991년에 걸치는 사태 진전의 특징을 반혁명의 승리, 사회주의건설의 전복, 사회적인 후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전개가 국제적인 반동세력으로부터 지원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사회주의 건설, 특히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창조하는 시기의 사회주의 건설이 국제적인 제국주의로부터 사상적‧정치적 포화를 받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붕괴(collapse)”라는 말을 거부한다. 반혁명활동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고 사회주의건설에서의 주체적 요인의 약점과 이탈에 의해서 반혁명활동이 발전하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사회적인 기반을 과소평가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1991년에 걸치는 반혁명의 승리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개시하기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의 발전이 필요한 최저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맑스는 인간은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 이외에 어떤 것도 제기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문제 그 자체가 그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생겨날 때 비로소 제기되기 때문임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한 생산세력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이 그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투쟁할 때부터 혁명의 개시에 의해서 더더욱 생산력은 생산관계와의 충돌,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과의 대립이라는 단계로 발전해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이 존재하고 있고 그를 토대로 해서 혁명적 상황이 형성되었다.





그 시대의 통계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말하면, 러시아에서는 발전의 독점단계에 있던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혁명 권력은 집중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위해서 이런 물질적 기반에 의지하였다.1)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특히 그 공업부문이 공산당(볼셰비키)의 지도로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에서 혁명적 활동을 조직하는 핵으로 쏘비에트를 설립하였다. 레닌의 지도를 받은 볼셰비키 당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이론적 준비를 꾸리고 있었다. 즉 러시아 사회의 분석, 제국주의라는 사슬에서의 약한 고리의 이론, 혁명적 상황의 평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딕테이터싶(dictatorship)의 이론이라는 것들이다. 당은 계급투쟁의 매개 발전단계에 대응하는 전술, 동맹, 슬로건, 술책 등으로 당의 전략을 구사함에 있어 특징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 이상의 특수한 곤란에 직면하였다. 그런 곤란은 선진자본주의나라들과 비교하면, 생산력의 발전단계가 낮은 나라(V. I. 레닌은 "중등‧열등"이라 규정하였다)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며2) 전자본주의적인 관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것에 의해서 발전의 성과를 분배함에 있어 불평등이 컸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막대한 파괴에 뒤이은 내전의 와중에서 개시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대규모 파괴에 직면했으나 아메리카 합중국과 같은 자본주의 대국은 국내에서의 전쟁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들은 1930년대의 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쟁을 이용했다.





이 같은 상황 아래에서 거대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우월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발전은 일부 기회주의 및 쁘띠부르주아지의 평가를 확증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적 관계의 미성숙성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의 견해는 확증되지 못했다.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던 트로쯔끼스트들의 견해는 오류였음이 증명되었다. 10월 혁명 후에 등장하였던 사회가 그 성격에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거나, 혹은 그런 사회는 존재했었지만 몇 년 후에는 급속히 타락해버리고, 쏘비에트연방의 70년 역사 속에서 중단은 불가피하였다거나 하는 그런 견해는 주관적인 것이고, 사실에 의해서 논증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사회가 어떤 종류의 “새로운 착취체제” 내지는 일종의 “국가자본주의”였다고 하는 이런저런 기회주의 조류들이 호소하는 이론들을 반대한다.





더 나아가 이런 발전은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마오이스트(Maoist)” 조류의 전체적인 입장을 옳은 것으로 증명해주지 못한다. 그 입장이란 쏘비에트연방을 사회제국주의자(social-imperialist)로 성격 지우면서 아메리카 합중국과의 화친을 도모하는 것인데, 이는 중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문제와도 모순되고 있다(사회주의 건설의 협력자로서의 민족부르주아지의 승인 등).





우리 자신의 비판적 평가는 쏘비에트연방 및 다른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옹호함을 전제로 한다.










10. 쏘비에트연방에서의 반혁명에 대해서 검토함에 있어, 우리는 (외부 요인의 영향을 무시하지는 않으면서) 내부 요인을 우선한다. 반혁명에 의한 전복이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와 최상층부로부터의, 공산당의 방침을 통해서 야기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공산주의 이론에 의거하여 우리는 다음의 논점에 따라서 검토결과를 기술하였다.





  § 경제, 즉 사회적인 모순과 격차가 출현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기초로서의 사회주의에서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의 발전





  § 사회주의 건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딕테이터쉽과 공산당이 수행하는 역할





  §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전략과 전술










11.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건설의 진로는 볼셰비키 공산당이 그 혁명적이고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에 결정되었다. 그 능력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각 단계에서 필요한 혁명적 전략을 검토하고 추진할 수 있는 능력, 기회주의와 대결하고 발전도상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새로운 긴급한 요구와 과제에 결연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새로운 사회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중앙에서의 계획에 기초해서 사회주의적 생산이 지배적으로 이루어졌고, 자본주의적 관계가 폐지되었다. 착취자를 없애려고 하는 계급투쟁은 성공리에 수행되었다. 사회적 번영의 성장과 관련해서는 두드려진 성과들이 달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건설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당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발전과 관련해서 새로운 요구와 도전에 직면했다.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차 대회(1956년)는 그 전환점에 서 있었다. 이 대회에서 경제문제와 관련해서,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 및 국제관계와 관련해서 일련의 기회주의적 견해가 채용되었다. 대회 전에 생겼던 논쟁이 이어지고 수정주의‧기회주의 입지의 전화에 의해서 그것이 강화되었다.3) 그 결과 당은 그 혁명적 성격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10년 동안에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서 기회주의가 완전히 전개되어 반역적인 반혁명 세력으로 되었다. 배반의 최종단계에 제28차 당 대회에서 반격했던 책임 있는 공산주의세력은 시의적절한 방식으로 반역을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반격을 조직할 수 없었다.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경제의 평가










12. 중앙계획의 최초 계획을 책정함으로써 다음의 문제가 경제와 관련된 이론적 대립과 정치적 투쟁의 한복판에서 제기되었다. 사회주의 생산은 상품생산인가? 사회주의 건설에서 가치 법칙의 역할은, 그리고 상품-화폐관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를 둘러싼 논의와 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종전 후에도 이어졌고 첨예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치법칙이 최초 단계에서의 공산주의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이라고 하는 이론적 아프로치(approach)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아프로치는 1950년대에 쏘비에트연방과 공산주의당들의 대다수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이런 입장은 비자본주의적인 상품생산의 확대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농업생산에서의 전자본주의적인 관계로부터 협동의 상품-화폐관계로의 계획적인 이행을 통해서 출현하였다.





이런 물질적인 토대는 중앙에서의 계획을 책정하고 실행할 때의 주체적 요인의 이론적인 결여와 약점을 악화시켰다. 기회주의적 방침의 이론적 기반의 하나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중앙에서의 계획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소유를 침식하며 반혁명세력을 강화하였다.










13.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사회주의 건설의 최초 시기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경제상의 문제들에 대해 계획적으로 대응한다고 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사회경제상의 문제들은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이고, 제국주의의 포위와 간섭에 의해 악화되었던 것이다.





1917년부터 1940년에 걸쳐 쏘비에트 정권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성과를 기록하였다. 생산의 전화와 공업화를 실현하고 운송수단을 확장하고 농업생산의 대부분을 기계화했다. 계획적인 생산이 개시되고 사회주의의 공업생산은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쏘비에트 정권은 모든 공업부문에서 국내의 생산력을 성공리 발전시켰다. 생산협동조합(콜호즈 kolkhoz)과 국영농장(소프호즈 sovkhoz)이 창설되었고 그것에 의해서 농업생산에서 공산주의적 관계를 확대하고 우세를 점하기 위한 토대가 확립되었다. “문화혁명”이 실현되었다. 신세대의 공산주의적인 전문가와 과학자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임금고용의 노동력을 폐지하여 생산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완전히 폐지하고 그럼으로써 공산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토대가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14. 자본주의적 관계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관점에서 일정한 “이행조치”(전시공산주의를 말한다-역자주)를 실시하였던 것은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의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볼셰비키 공산당으로 하여금 일정한 정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하는 일시적인 정책을 실시하도록 강제했던 요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쁘띠 부르주아 농민부분이 다수를 차지하는 계급구조, 분배, 공급, 감독기구의 결여, 후진적인 소규모 생산, 무엇보다도 내전과 제국주의의 간섭이 초래하였던 파괴에 의한 생활조건의 열악화. 이들 요인들에 의해 중기적인 중앙에서의 계획의 발전은 그 시점에서 곤란하게 되었다.





내전 후에 실시되었던 신경제정책(네프, NEP)에서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업을 부흥시키고 그것에 기초해서 농민을 협동조합으로 “유인하는” 그런 관계를 농업생산의 분야에 구축한다고 하는 기본 목표가 설정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로의 일시적 양보정책을 의미하였다. 많은 기업들이 자본가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인도되었고(그 기업의 소유권은 갖지 못했다), 매매가 발전하였으며 농업생산물과 사회화된 공업생산물사이의 교환이 “물납세(tax in kind)”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규정되었다. 농업생산물의 나머지 부분을 농민이 시장에 내다파는 것이 허용되었다.





일정한 환경과 특수한 조건 아래에서 요구되었던, 이 같은 유인책과 자본주의적 관계로의 일시적 양보는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결코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네프는 1980년대의 10년 동안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의해서 실시되었던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역사적 역전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cover-up)로 이용되었다.










15. 1920년대 후반에 생산력의 발전이 새로운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네프를 대신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공세”라는 정책이 채택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완전히 폐지함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자본에 대한 양보가 철회되고 집단화 정책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발달한 형태에서의 농업경제의 완전한 협동조합조직, 즉 콜호즈이다.4) 동시에 생산의 기계화에 의거하고 그것의 생산물 전체가 모두 사회적 소유물이 되는 농업 생산의 국영사회주의단위(state-socialist units)인 소프호즈가 (한정적인 방식으로이지만) 전개되었다.5)





제1차 5개년 계획은 혁명의 승리가 있은 지 7년이 지난 1928년에 시작되었다(내전의 종결은 1921년). 쏘비에트정권은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중앙에서의 계획의 정식화에서 원래 처음부터 곤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로 자본주의적 관계(네프)와 대단히 많은 개별 상품생산자, 즉 주로 농민이 존속해 있었음에 있었다. 주체적 요인인 당에게도 약점이 있었음은 명백하다. 당은 생산의 조직화를 지도하는 간부전문가를 결여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정 기간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수한 조건(제국주의의 포위, 전쟁의 위협, 큰 후진성) 때문에 집단화의 추진을 가속화하는 것이 부득이하게 되었다. 그런 것은 특히 다른 한편에서의 계급투쟁을 첨예화시켰다.





농업생산에서의 집단화운동의 전개에서 오류와 일정한 관료적 과장이 있었지만―그런 것은 어떤 경우든 당의 결정에 기록돼 있다6)―이 운동의 강화와 보편화를 지향하는 쏘비에트 정권의 방침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목적은 소규모 개인 상품생산자를 사회화된 생산으로 전화하는 데에 기여하는 과도적인 형태의 소유(협동조합)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16.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공세”라는 방침은 격렬한 계급투쟁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었다. 쿨락(kulaks, 농촌에서의 부르주아 계급), 네프로부터 이익을 얻었던 사회계층(네프맨, NEPmen), 구래의 착취계급으로부터 발생했던 지식인계층, 이들 모두가 공업에 대한 파괴활동(예를 들면 “샤프띠 사건(The Shakhty affair)”7))을 하거나, 농촌에서의 반혁명활동을 수행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반항했다. 이 같은 계급에 기반을 지녔던 반사회주의층의 이해가 공산당에 반영되고 거기에 기회주의 조류가 생겨났다.





두 개의 기본적인 “반대” 조류(뜨로쯔끼, 부하린)는 그 시기에 활동하고 쏘비에트 사회의 후진성이라는 요소를 절대시함에서 공통의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1930년대의 10년 동안에 그들의 견해는 쏘비에트 경제의 문제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들의 입장은 전쏘비에트연방공산당에 의해서 기각되었고 현실에 의해서 확증되는 일도 없었다.8)





사태의 추이에서 몇 개의 기회주의 세력이 공공연한 반혁명세력과 통합하였다. 반혁명세력은 제국주의 나라들의 비밀첩보기관과 공모하여 쏘비에트정권의 전복계획을 조직하고 있었다.9)





당과 쏘비에트 정권의 일부 지도적 간부들이 기회주의 조류의 선두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계급투쟁의 첨예화에 직면했던 전위간부가 편향하여 우유부단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운동과의 결합을 단절하여 반혁명과 제휴하게 된 일조차 있었다는 일이다.










17. 당 간부와 경제이론가의 이론 및 정책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조류가 발전하였다. 맑스주의 사상과 정책으로 일관된 조류는 스딸린의 지도 아래에 가치법칙은 사회주의적 생산을 지배하는 기본법칙과 모순하는 것, 사회주의 생산은 상품생산이 아님을 승인하였다. 이 조류는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쏘비에트 연방에서의 (상품-화폐 관계의) 가치법칙의 작용은 협동 및 개인의 농업생산을 근원으로 하고 있었다. 가치법칙은 사회주의적 생산‧분배를 규제하지 않는다. 소비제품은 상품으로서 생산되고 소비된다.10)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지만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상품과 같이 등장한다. 생산수단은 외부와의 통상에서만 상품이 된다.11)





사회주의적 생산에서의 생산물은 그것이 개인적 소비로 정해져 있든 아니면 생산과정을 위해 충원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든 간에 상품으로 여겨지고 가치법칙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법칙이기도 하다고 주장하였던 “시장” 경제이론가와 정치지도자들에 반대하는 논쟁이 이루어졌다. 이것에 관해서 특징적인 점은 보즈네쎈스끼(고스플랜12)의 감독)의 견해가 기각되었던 일이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가치법칙은 생산물의 분배뿐만 아니라 쏘비에트 국가경제의 여러 부문에서의 노동의 배치에서도 작용한다. 이 영역에서 국가계획은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의 여러 가지 부문에서의 사회적 노동의 올바른 배분을 보장하기 위해서 가치법칙을 이용한다.”13)





한편 당시 사회의 생산기반에 의해서 부과되었던 객관적 제약을 고려함 없이 화폐형태에서의 분배의 완전한 폐지를 지지하였던 경제이론가들에게 정당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I. V. 스딸린은 저작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14)에서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발전해가는 생산력과 그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언급하였다. 그는 쏘비에트연방에서는 협동조합에 의한 소유(콜호스)와 상품이라는 형태에서의 개인적 소비의 유통이 생산력의 강력한 발전에 제동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전면적인 생산‧분배의 중앙에서의 계획을 완전히 발전시키는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스딸린은 서로 협력하는 두 개의 계급, 노동자계급과 콜호스농민계급의 차이에 대해서 개괄하였는데, 농업생산에서의 상품화의 계획적인 폐지에 의해서 그것들을 폐지할 필요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15)





소규모 콜호스의 더 큰 콜호스로의 통합16) 및 콜호스의 소프호스로의 점차적 전환에 의해서 농업생산의 사회주의화를 가속시키는 일을 지지하였던 일관된 조류의 최초 조치는 모든 농업생산물을 국고로 거두어들이는 일이었다.





사회적 생산의 제1부문(생산수단의 생산)과 제2부문(소비제품의 생산)의 비율과 관련한 대립문제에서 이 조류는 사회주의적 산업의 여러 가지 부문에서 노동과 생산의 계획적이고 균형 잡힌 분배를 하기 위한 주요한 기준이 제1부문의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지하였다. 장래의 사회적 번영을 확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생산의 확대와 사회주의적 축적(사회적 부)은 생산의 이런 범주(제1부문)에 의해 좌우된다.





이 혁명 조류의 약점은 노동에 비례해서 분배되는 사회적 생산물의 일부에 관한 분배관계의 해석이 불충분했다는 점이다.










18.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에 관한 논쟁이 이어졌고 첨예화되었다. 일정한 문제들의 해석을 둘러싸고는 대립이 생겨났다.17) 우리는 1950년대의 10년 동안 초기에 쏘비에트 지도부가 채택했던 입장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경제 레벨의 문제는 발전해가고 있는 생산력과 뒤떨어지는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됨의 표현이라는 입장이다. 생산력의 발전은 전후의 경제 부흥을 걸쳐서 새로운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생산력의 더더욱 발전을 향하는 새로운 동적인 자극에 의해서 공산주의적 관계의 심화와 확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다음과 관련된 공산주의적 관계가 지체되고 있었다. 중앙에서의 계획, 분배관계의 공산주의적 성격의 심화, 노동 및 관리의 조직화로의 더 정력적이고 의식적인 밑으로부터의 노동자의 참가, 공동조합적 소유관계(그 때 상품의 사유가 잔존해 있다)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





의식적으로 충분히 계획하여, 즉 이론적‧정치적으로 준비하여 사회적 생산 분야에서 공산주의적인 관계가 확대되고 우세하게 될 필요성이 성숙해 있었다. 그때까지의 시기에는 사회적 생산의 분야에서는 (물질적 성숙, 노동생산성이라는 관점에서) 전면적인 우세는 아직 불가능했었다. 이런 전망에 대한 사회적 저항(콜호스농민, 산업의 경영간부)이 당내투쟁으로 사상적‧정치적 레벨에서 표면화되었다. 논의의 격화는 사회주의의 법칙으로 가치법칙을 이론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로 되고 그것은 전전(戰前) 시기와 비교한 경우에 공산주의 발전도상에서 더더욱 긴급한, 더더욱 영향력 있는 결과를 수반하는 정치적 선택을 의미하였다. 전전에는 물질적 후진성 때문에, 이 같은 이론적 입장의 영향이 초래하는 곤란은 더 적었다.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회 대회 후, 차차 정치적 선택이 채용되었고 중앙에서의 계획의 약점들 및 사회주의 기관(기업체들)의 관리를 바로 잡는다는 미명 아래에서 상품­화폐관계(잠재적인 자본주의 관계)가 확대되었다.





경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에 속하는 방법과 수단이 사용되었다. 사회적 소유와 중앙에서의 계획, (복수의 전문화를 위한, 그리고 노동의 기술부문에서의 교대를 위한 능력과 가능성을 확대함으로써의) 노동자계급의 균질화, 노동자의 조직화로의 노동자의 참여와 관리를 강화하여 공산주의적 자기관리로 발전하기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반대의 흐름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사회적 의식이라는 레벨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영향이 생겼다. 공장쏘비에트에서의 그때까지의 경험과 유효성, 품질관리에서의 스타하노프운동(the Stakhanovite movement), 더 효과적인 조직화와 관리, 소재와 노동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훌륭한 발견, 그런 것들이 이용되지 않았다.





“시장” 경제이론가들(Lieberman, Nemtsinov, Trapeznikov 등)은 경제에 존재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하여 문제는 계획에서의 주체적 약점18)이 아니라 생산에서의 양의 발전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응하고 다면적인 필요의 발전에 대응할 때의 중앙계획의 객관적 약점에서 기인하는 결과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 이론적인 요인이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생산의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것, 농업 발전의 경시, 경제 관리로의 주체적 개입의 실현성의 과대평가라고 호소하였다.





그들은 중앙기관이 모든 상품의 품질, 기술, 가격 및 임금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계획경제의 목표달성을 촉진하기 위해서 시장기구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소비요구에 대응하는 생산의 양과 구조의 채용이라는 문제 및 각 부문사이의 분배라는 문제는 가치법칙에 기초하여 결정되는 수용과 가격의 영향에 의해서 대처할 수 있다고 호소하였다.





이론적 레벨에서는 서서히 “사회주의적 상품경제” 내지는 “시장이 있는 사회주의”라는 이론, 가치법칙은 발전된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고 하여 공산주의 생산양식의 법칙으로 용인하는 일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이 같은 이론이 경제정책을 책정하기 위한 기반으로 되었다.19)










19. 중앙에서의 계획과 사회적 소유의 정치적 약화는 제20차 대회 후에 최고조에 달했다. 콜호스의 소프호스로의 전환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1958년에는 트랙터와 그 밖의 기계장치20)가 콜호스의 소유물로 양도되었다. 21) 당시 콜호스의 생산은 충분히 발전했고, 콜호스 당 약 10대의 트랙터가 할당되었다. 1950년대 초반에 공포되었던 발전을 위한 지령은 공산당원들의 인니셔티브에 의해 소규모 콜호스의 더 큰 규모의 콜호스로의 통합을 목표로 콜호스 조합원의 광범위한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수정되었다.





1957년 쏘비에트연방과 각 공화국의 공업생산을 지도하고 있던 각 분야의 관청들(branch ministries)이 해체되었고 지역관리기관 “소브나르코즈(Sovnar-khoz)”(지역경제평의회)가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계획에 관한 중앙의 지령이 약해졌다.22)





이 같은 변혁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표면화시켰으며 더 나아가 문제를 증폭시켰다. 예를 들면 가축 사료의 부족이나 콜호스에서의 기술쇄신의 방기라는 것이다. 1960년대의 중반 경, 경제의 농업부문 관리에서의 주체적 오류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정확히 지적되었다.23)





그 후의 개혁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콜호스로부터 정부로 양도되는 분량의 감축24), 초과한 분량을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가능성, 콜호스 세대들 사이의 거래 규제의 해제, 가축 사유에 대한 과세의 폐지. 국영은행으로의 콜호스의 부채가 삭감되었고, 선불금에 의한 채무를 반환하는 기한이 반복해서 연장되었고, 가축 소유자에게 가축의 사료를 직접 판매하는 일이 인정되었다. 따라서 개개의 세대 및 콜호스에서 생산되고 시장에서 자유로이 판매되는 농업생산물의 일부가 보존되고 증가하였으나25), 반면 축산의 지체는 심화되었고 여러 지역과 쏘비에트연방구성공화국사이의 농산물에 대한 수요의 만족도의 불공평이 확대되었다.





(사회적 성격을 희생하고서) 생산의 상품적 성격을 강화하는 유사한 정책이 산업에서 실시되었으니, 그것은 “코스이긴 개혁(Kosygin Reforms)”26)이라고 알려져 있다(항상적이지만 공식적이 아닌 성격의 “기업의 자주관리제도”). 그것은 1960년대 초기에 보여 졌던 노동생산성의 연간 신장율과 연간 생산고의 최저‧감소에 대응하는 것이고 그 최저‧감소는 공업부문지향의 중앙계획을 침식했던 조치의 결과이라고 논해졌다(소브나르코즈, 1957년).





개혁의 제1탄은 제23회 대회(1966년)와 제24회 대회(1971년)의 중간 기간에 개시되었다.





“신제도”에 의하면, 생산고가 생산계획을 초과달성했던 것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판매계획의 초과달성에 기초하여 관리자에 대한 보수(추가특별수당)가 산출되었고27) 그것은 기업의 이익률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노동자의 추가보수 일부도 이런 이익에서 나왔고, 주택의 필요 등을 더욱 만족시켰다. 이리하여 이익이 생산을 위한 유인으로 채용되었다. 임금격차가 확대되었다.





기업 간의 대등한 상품-화폐교환, “소비자단위와 상업기관”의 직접 계약, 가격결정, 이 같은 거래에 기초한 이익의 형성, 그러한 것들의 가능성이 주어졌다.





중앙계획은 새로운 기업체만의 생산과 투자의 전체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었다. 구래의 기업체를 근대화하기 위한 자금은 기업의 이익 안에서 충당되었다.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이론적인 저하와 그것에 수반한 정치적인 후퇴는 생산력의 더더욱 발전의 새로운 단계에서 생겨났다.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 중앙계획과 그 분야별, 분야 간 및 기업레벨에서의 실시에서 보다 더 효과적인 인센티브(incentives)와 지표가 필요하게 되었다. 즉 공산주의 생산양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하는 중앙계획이 발전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시장개혁을 통하고 사회주의의 생산단위를 중앙계획으로부터 억지로 떼어냄을 통해서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약해졌다.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을 침해하는 가능성이 생겨났다.





한편, 컴퓨터나 정보기술을 이용하라고 하는 제안과 계획28)은 데이터의 전문적 처리를 개선함에 기여하여 물질적인 지표에 의한 생산의 감독과 관리를 향상시킬 수 있었으나 그것들은 기각되었다.





쏘비에트연방 제24회 대회(1971년)는 제9차 5개년계획(1971~1975년)의 책정에 관한 대회지령에 의해서 제2부문에 대한 제1부문의 우선을 거꾸로 바꾸어놓았다. 이 비율의 뒤바꿈은 제20회 대회에서 제안되었으나 거기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수정은 인민의 소비수준을 향상시키는 선택으로 정당화되었다. 현실에는 그것은 사회주의의 법칙에 반하는 선택이고 노동생산성의 성장에 악영향을 주었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사회적인 부를 증대하고 필요를 만족시키며 인간을 전면적으로 발달시키기 위한 기본요소―은 생산수단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계획은 다음과 같은 필요를 수반하는, 보다 큰 유효성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했다. 즉 공업, 생산물의 수송, 저장, 분배에서의 근대적인 과학기술의 도입이라는 것이다.





이 비율을 역전시키는 선택은 표출돼 있던 모순(화폐형태의 초과수입, 가전품이나 칼라텔레비젼 등의 소비물자의 부족 등)으로의 대응에 기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계획을 그 기본 목표(사회적 번영의 향상)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단계와 공산주의적 생산-분배관계 수준 사이의 모순을 더더욱 악화시켰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앞서서 안드로포브(Andropov)가 쏘비에트연방공산당중앙위원회 서기장이었던 시기(1982년 11월~1984년 2월)는 단정적인 판단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의 서기나 문서에는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해서, 또 제국주의의 파괴활동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과 관련해서 부르주아적 기회주의의 견해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음이 쓰여 있다.





1980년대, 정치적 레벨에서의 제27회 대회(1986년)의 결정은 더더욱 기회주의적 선택을 의미했다. 그 후, 법률의 제정(1987년)에 의해서도 반혁명이 추진되었다. 그 법률은 복수의 소유형태의 용인이라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적인 경제관계를 제도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의 초기에 “계획적인 시장경제”(제28회 대회에서의 쏘비에트연방공산 중앙위원회의 정강)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수법이 재빨리 폐기되어 “규제된 시장경제”라는 입장이 채용되었고 이것이 더 나아가 “자유시장경제”로 대체되었다.










20. 지배적이었던 방향성은 오늘날 이론만이 아니라 그 결과에 의해서도 판단할 수 있다. 이 같은 개혁을 20년 동안 적용한 결과, 문제들이 분명하게 첨예화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에서 최초로 경제정체가 표면화되었다. 과학기술의 후진성은 의연히 대부분의 산업에서의 현실이었다. 많은 소비제품이 부족하게 되었고 시장 안에도 더더욱 문제가 발생했다. 기업체가 창고에 상품을 비밀리 숨겨 저장해놓고는 분량을 제한하여 공급함으로써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에서 시장 요소의 관여를 늘림으로써 사회적 생산이 약화 되었다. 그럼으로써 사회주의적 발전의 활력이 저하하고 사회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 및 소집단의 눈앞의 이해가 (각 기업체의 노동자 사이 및 여러 가지 기업 사이의 수입 격차의 확대를 수반하여) 강화되었다. 급기야 반혁명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수단으로 이용하여 번창하였고 최종적으로 지배적으로 되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개혁에 의해서 오로지 불법적인 수단(밀수 등)에 의해서 축적된 화폐액이 “암(暗)”(불법적인) 시장에 투자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이 같은 기회는 오로지 기업체 및 부문의 관리층이나 외국무역의 간부에게 관계하는 일이었다. 소위 “부차경제”에 관한 데이터는 쏘비에트연방의 검사총장에 의해서도 제출되고 있었다. 그 통계에 의하면, 협동조합 내지는 국영의 농산물 중 적지 않는 부분이 불법적인 수단에 의해서 소비자들에게 흘려들어가기도 했다.





개개의 농업생산자들 사이, 콜호스들 사이의 수입 격차가 확대되고 농업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는 경향에 대한 반대도 확대되었다. 그와 같이 부유하게 되었던 농업생산자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장애가 되는 사회계층으로 힘을 얻었다.





“기업체 수익”의 집중에 의해서 공업에서의 사회적 격차가 더더욱 심하게 되었다. 소위 “음영 자본(shadow capital)”, 그것은 기업체 수익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암시장의, 사회적 생산물을 횡령하는 범죄행위의 결과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생산에서의 자본으로 합법적인 기능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생산수단의 사유화, 자본주의의 재건이다. 이런 자본의 “소유자”들이 반혁명을 추진하는 사회세력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국가와 당의 기구 안에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였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기 쉬운 동요하는 계층, 예를 들면 지식인의 적지 않은 부분, 청년층, 특히 학생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만을 지니고 있는 층의 지지를 이용하였다.29) 이 같은 세력이 직접‧간접으로 당에 영향을 미치고 기회주의에 의한 침식과 반혁명의 퇴폐를 강화하였고―그런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서 보여 졌다―, 자본주의적인 관계의 제도적인 강화를 구하였다. 그것은 페레스트로이카 후에 실현되었고 사회주의는 전복되었다.















사회주의건설 과정에서 공산당의 역할에 관한 결론










21.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당의 불가피한 역할은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의 지도성에서 이 과정에 참가하도록 인민대중을 결집할 때에 보여 진다.





노동자계급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당을 통해서 이 새로운 국가권력의 지도세력으로 형성된다.





새로운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은 혁명적 노동자의 권력에 의해서 공산당과 함께 수행된다. 공산당은 그 지도의 중심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활용한다. 인간이 사회과정의 주인이 되고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서서히 변화한다. 여기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사회경제조직에 관계하는 주체적 요인의 더 고차적인 역할이 생긴다. 그때까지의 사회경제조직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생산관계의 자연발생적인 전개에 의거하는 사회법칙이라는 자연발생적인 강제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당 방침의 과학적인 계급적 특질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사활적으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이러한 특질이 잃어버릴 만큼 기회주의가 정착하고 그에 대한 대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들은 조만간 반혁명세력과 융합하게 된다.





공산주의적인 생산관계를 발전시키는 임무는 공산당에 의한 과학적인 연구의 이용을 통한 과학적인 공산주의 이론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공산당은 계급지향의 목표를 지니고 공산주의의 사회경제구조에서의 운동법칙을 연구해야 한다. 경험에 의해서 보여 지고 있는 바대로 쏘비에트연방 및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권정당은 이런 임무를 수미일관하게 수행하지는 못했다.





노동자계급전체의 계급의식이 자연발생적으로 몸에 익혀진다든지 규격적으로 몸에 익혀진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노동자계급 대부분의 공산주의적 의식의 높이를 결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적인 생산관계의 강화이고 공산당 지도로의 노동자계급의 참가 정도이다. 공산당은 인민대중에게 혁명적 의식을 갖도록 하는 주요한 모체이다. 이런 물질적 기반에 덧붙여서 이데올로기 활동이 뿌리내려지게 된다. 그것은 혁명정당의 영향력이고 혁명정당은 지도적 역할을 강화하여 노동자계급을 사회주의 건설로 결집한다.





전위의 의식은 항상 경제관계에 의하여 노동자계급 안에 대규모로 형성되는 의식에 앞서서 존재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경제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런 것으로부터 당이 이론적‧사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으면서 간고하고, 기회주의와의 투쟁에서 동요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런 것은 자본주의라는 조건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조건에서도 더더욱 필요한 일이다.










22. 제2차 세계대전 후, 1950년대에 기회주의로의 방향전환이 지배적으로 되었고 당의 혁명적 역할이 서서히 상실해갔던 것은 이탈이 진전하는 위험성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제국주의의 포위와 그것의 분명한 마이너스 영향 이상으로 기회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사적 소유와 소집단의 소유가 남아있는 한, 상품-화폐 관계가 남아 있는 한, 사회적 격차가 남아 있는 한, 잔존해 있다. 기회주의의 물질적 기반은 사회주의 건설이 한창인 기간에도 자본주의가 지구상에 남아 있는 한, 특히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가 남아 있는 한, 계속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면에서는 계급투쟁 속에서 경험으로 달련되었던 간부당원을 대량으로 잃었기 때문에, 당이 사상적‧계급적으로 약해졌고 첨예하게 제기된 새로운 문제들로의 대응에서 이론적 약점이 있었다. 당은 기존의 사회적 격차를 반영한 당내투쟁에 대해서도 견고하지 못했다. 이 같은 조건 아래에서 그때까지의 당내 투쟁의 국면에서는 저지당하고 있던 기회주의와 수정주의 견해의 채용에 국면이 유리하게 변화하였다.





결국 쏘비에트연방공산당과 다른 공산주의당들의 지도부가 수정주의‧기회주의의 견해를 채용하였던 일로 이들 당은 1980년대의 반혁명을 초래하는 수단으로 변해버렸다.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차 대회(1956년)에서 기회주의로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졌고 그 후 서서히 제국주의에 의한 공격의 표적이기도 한 정권정당, 당의 혁명적 성격이 상실되어 일관된 공산주의자를 자각시키고 결집하는 일이 더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그런 것에 의해서 일관된 공산주의 세력은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의 1985년 4월 중앙위원회와 제27회 대회(1986년)에서 우세하게 되었던 방침의, 배신적인 반혁명의 본질을, 적절하게 폭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한 눈에 띠는 결집추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반혁명세력과 성공적으로 대결할 수 없었다.30) 전진하는 반혁명에 항의하여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혁명적인 공산주의 전위는 제때에 형성되지 못했다.





특히 1980년대까지 이런 진전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해도 정권정당 안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안의 저항이 있었다면, 이 국제적인 운동의 재건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투쟁이 더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그런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제조건도 당연히 존재했을 것임이 확실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수정주의의 사상적 입장과 기회주의의 방침이 급속하게 전개되고 우세하게 되었던 일, 쏘비에트연방공산당과 다른 정권에 있는 공산주의당들이 서서히 기회주의에 의해서 침식당했던 일, 국가권력의 혁명적 성격이 후퇴했던 일, 이것들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전개의 요인으로 되는 모든 요소를 탐구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그런 일에 기여한 요인으로 열거할 수 있다.










A) 전쟁, 간부당원의 대량 상실, 당원의 급증에 의한 공산주의당들의 지도부와 당내 전체에서의 정치적 맑스주의 교육 수준의 저하, 그 결과의 하나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발전이 늦어졌다.





● 당의 계급구성의 구조와 기능, 그 변화가 당과 당원과 간부의 사상수준과 혁명적 성격에 미치는 영향, 이것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 쏘비에트연방에서 공산당의 국가권력이 처음부터 부르주아 출신의 관리적‧과학적 간부에게 상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





● 전자본주의적인 후진성의 깊이 및 그 불균등한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쏘비에트연방이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던 것





●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대량 손실 및 서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부흥과 경쟁하는 상항에서 전후의 부흥을 위해서 필요로 하였던 사회적 변영의 레벨에서의 희생. 서유럽의 부흥은 자본을 수출하는 아메리카합중국의 능력과 필요성에 의해서 크게 지원받았다.





● 동구 및 중구의 나라들을 사회주의 체제로 융합할 때의 문제점들과 모순들





● 조선 등에 대한 제국주의의 개입으로 인한 새로운 전쟁의 염려, 냉전, 서독일의 헬슈타임원칙(the Hellsteim dogma: 독일민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쏘비에트의 점령지”라고 규정).





B) 사회민주주의의 지원을 받아 국제제국주의가 자행했던,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중동구의 특정 나라들과의 더 유연한 통상거래 및 쏘비에트연방으로의 더 직접적인 사상적‧정치적 압력에 의해서 차별화된 정치개입.





C)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전략과 분열의 문제




















쏘비에트정권의 전개










23. 쏘비에트 정권의 추이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기반은 사회주의의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딕테이터싶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이고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모든 형태의 국가권력에서 생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딕테이터싶은 계급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기관이고 계급투쟁은 다른 형태와 수단에 의해서 계속된다.





노동자계급은 형성되고 있는 공산주의적 관계의 담당자로서 사회화된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자로서 공산주의적 관계의 전면적 지배를 목표로 하여 계급의 폐지와 국가의 사멸을 지향하는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지배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은 그 혁명적 국가권력을 통해서 사회화된(사회주의의) 생산에서 아직 노동자가 아닌 다른 인민계층(예를 들면, 도시와 지방의 협동조합의 소규모소유자, 서비스부문의 자영업자, 과학자‧지식인, 부르주아 내지는 상류중산계층 출신의 생산관리 기술자)과의 동맹을 실현하게 된다. 이런 동맹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공산주의적 관계의 전면적 지배를 향하여 사회주의 건설에서 이들 계층을 지도하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의 필요성은 국제적으로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사회관계가 공산주의로 될 때까지 유지된다. 말하자면 국가가 정치지배의 기구로서 존재할 필요가 있는 한, 유지된다.










24. 상부구조,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의 조직, 노동자지배 등에 관한 정치적 선택지는 경제레벨에서의 정치적 선택지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해명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의 한 형태로서의 쏘비에트의 발전이다. RSFSR31)의 제정헌법과 1924년 쏘비에트연방 제정헌법(및 1925년의 각 공화국헌법)에서 인민대중과 국가기구의 공산주의적 관계는 선거단위로서의 생산단위(선거단위로서의 지역단위와는 다르다-역자)에서 실시되었던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던 노동자의 대표를 통해서 보장되었다. 선거권은 (시민일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근로인민에게만 보장되었다. 부르주아 계급, 지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모든 자, 성직자와 승려, 반혁명분자에게는 선거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네프시대의 자본가에게로의 양보에는 정치적 권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1936년의 헌법에서는 지리적인 선거구를 통한 직접선거에 의한 대의원제가 확립되었다(지역이 선거단위가 되었고 대의원수는 주민의 수에 비례하였다). 총회의(general assembly)에서의 선거의 실시는 폐지되었고 이것은 선거구로 대체되었다. 선거권은 보통선거‧비밀선거에 의해서 모든 자에게 인정되었다.





1936년의 헌법 개정은 일정한 문제들32)을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당 및 쏘비에트 고관과 그 기반사이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의 결여, 쏘비에트의 기능, 관료적 현상 등의 문제들이다. 나아가 다음 전쟁을 목전에 두고서 쏘비에트 권력을 안정화시키는 것도 목적이었다.





(대회와 총회의를 통한 대위원의 간접선거를 폐지하였던 것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국가 권력을 조직하는 요체로서의 생산단위의 경시에 대해서는 더욱 더 검토가 필요하다. 그것이 고차적인 국가기구의 계급구성과 대의원을 파면할 권리의 적용(그것은 레닌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에서의 민주주의의 기본적 요소이다)에 미쳤던 영향에 대해서도 검토하여야 한다.










25. 제20회 대회(1956년) 후에 지방쏘비에트의 권한이 사회주의 기업체의 “자주관리”와 “자급자족”과 관련된 사항에 관해서 강화되었다. 그와 같이 하여 정치레벨에서의 민주집중제가 후퇴하였고 그것과 아울러 경제레벨에서의 중앙계획이 후퇴하였다. 각 쏘비에트에서의 고관의 “영속성”을 강화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것은 기관들의 고관 임기를 서서히 연장하고 대의원을 생산에서의 임무로부터 면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2회 대회(1961년)에서 “발달한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의 종언”에 관한 객관적이지 않는 평가가 채택되었다. 사회적 계급들 및 집단들 사이의 “비적대적인 모순”이라는 명목에서 쏘비에트연방은 “전인민의 국가”이고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은 “전인민의 당”이라고 하는 견해가 채용되었다(1977년의 헌법 개정으로 강화되었다).





이런 전개는 혁명적인 노동자의 국가라는 성격을 개변하는 한 요인으로 되고, 당과 그 간부의 계급구성을 퇴보시키고, 혁명적인 경계를 상실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역성”이라는 테제로 이론화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1988년의 정치제도의 개혁에 의해서 쏘비에트제도는 부르주아기관으로 변질되었다.










26. 현실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 바대로, 인민대중은 쏘비에트제도로의 참가로부터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되고 1980대까지 쏘비에트제도는 단순한 형식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 같은 벗어남은 오로지 쏘비에트 기능의 변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제정책에 의해서 조장되었던 사회적 격차가 심화되었고, 개인 및 소집단의 이익과 집단적인 사회적 이익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되었다.





소유의 사회적 성격을 약하게 하고 협소한 개인과 소집단의 이익을 강하게 하는 정책을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의 지도부가 채용하고 있는 한, 사회적 소유로부터의 소외의 감정이 생겨났고 의식은 손상되었다. 수동성과 무관심 및 개인주의로의 길이 열렸고 현실은 점점 공식발표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되었으며 공업생산과 농업생산의 수준은 저하하고 그리고 증대하는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킬 능력도 저하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노동자지배의 수준은 퇴화되든가 단지 형식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되든가 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과 인민계층일반은 사회주의에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페레스트로이카 기간에 사용되었던 슬로건이 “혁명 속의 혁명”, “더 나아간 민주주의”, “더 나아간 사회주의”였다는 것이다. 인민의 대부분은 문제들을 목격하고 있었고 사회주의의 태두리 안에서 변혁을 바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먼저 공산주의적 관계를 약화시키고 상품-화폐 관계를 강하게 하는 조치나 후에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로 거꾸로 전화하는 길을 열었던 조치는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추진되고 있었다.





금후 특별한 비교 검토를 요구하는 문제는 중앙에서의 계획 및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적 성격의 실현 사이의 관련에서 쏘비에트정권의 여러 시기―레닌 시대의 노동자위원회33), 고르바쵸프 하의 “자주관리평의회”와 대립하였던 스타하노프운동―에서 노동자 참가의 조직화 형태,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검토하는 일환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형태는 인민민주주의에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노동자계급과 쁘띠 부르주아 계층 사이의 동맹 및 양자 간의 투쟁. 권력을 잡은 공산주의당들,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 유고슬라비아공산주의자동맹의 일부 정책에서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영향, 1945년 이후의 사회민주주의의 층과의 통합이 권력을 잡았던 공산주의당들, 예를 들면 폴란드통일노동자당,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헝가리근로자당의 성격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전개와 그 전략










27. 세계적인 계급투쟁에서 그리고 힘 관계의 형성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전개와 그 전략의 문제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34) 사상적‧전략적 통일의 문제들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전 과정에서 보여 졌다. 그것은 혁명의 성격, 독일에서 파시즘이 부흥한 후의 당면 전쟁의 성격35),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볼셰비키공산당 내의 기회주의집단(뜨로쯔끼스트, 부하린주의자)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전략에 관해서 코민테른의 내부에서 전개되었던 투쟁과 결부되어 있었다.





1920년대의 종반에 부하린은 코민테른의 의장으로 “자본주의의 안전화” 및 새로운 혁명이 고양할 가망성이 없음을 과도하게 강조하였던 공산주의당들과 코민테른의 세력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와의, 특히 그 “좌파” 등과의 타협정신을 표명하였다.





통일의 중심으로서의 코민테른의 기능 약화는 그 해체(1943년 3월)의 몇 년 전에 표면화되었다.36) 국제적인 운동에서의 네거티브한 전개는 제국주의전쟁이나 외국의 점령에 대한 투쟁을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으로 전환하기 위한 혁명적 전략을 협력해서 꾸려낼 수 있는 중심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바로 각 나라의 독자적 상황에 있는 공산주의당들에게 중요하고 공통의 임무였다.37)





코민테른의 해산을 초래하는 요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이 통일된 혁명적 전략을 형성하고 그 행동을 계획‧조정하기 위한 객관적 필요가 있다.





코민테른 해산에 관한 보다 깊은 검토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전개를 고려해야 한다.38) 1937년의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날의 활동 정지. 그 각 부문의 대다수는 대중적인 개량주의 노조와 합동한다든지 그 같은 노조에 가입한다든지 했기 때문이다. 청년공산주의인터내셔날 제6회 대회(1935년)의 결정. 그것에 따르면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공산주의청년노조의 성격을 개조함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일부에서는 공산주의청년노조의 사회주의청년노조로의 통합을 초래하였다(스페인, 리투아니아 등에서).





전쟁은 많은 나라에서 국내 계급모순의 더더욱 첨예화를 가져왔으나, 적군(the Red Army)으로부터 아주 중요한 지원을 받아 반파시스트투쟁이 인민 운동으로 부르주아권력의 전복을 가져왔던 것은 중동구의 나라들에서만 이었다.





자본주의의 서구에서는 공산주의당들은 제국주의전쟁 내지 민족해방투쟁을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투쟁으로 전화하기 위한 전략을 꾸리지 못했다. 공산주의운동의 전략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전망이 자본주의의 야만에 대한 유일한 대안해결책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몇 개의 나라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순이 반파시스트민족해방투쟁과 불가분한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점을 활용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중간적인 사회체제는 없으며 따라서 부르주아 국가권력과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사이에 중간적인 정치권력은 없다고 하는 테제로부터의 후퇴가 있었다.





이 테제는 힘 관계와 관계없이 유효하며 발전의 가속을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들―예를 들면, 제국주의 간의 모순의 첨예화, 제국주의전쟁, 일어날 수 있는 부르주아국가권력의 형태 변화― 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28.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맹국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자본주의 나라들과 각 나라의 민족해방운동에 가했던 부르주아‧기회주의 세력(예를 들면 사회민주주의세력)은 결속하여 공산주의운동을 벌이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도중에 있는 나라들과 대립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일부에서 기회주의의 침식이 격화됨으로 초래되었던 네가티브한 결과는 더더욱 선명하게 되었다. 코민테른의 해산 후 공산주의당들 사이에 조직적 결속이 없어지고 사상적 통일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국제제국주의의 전략에 대해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통일된 전략을 작성할 수가 없었다.





1947년에 설립되었고 1956년에 해산되었던 코민포름(COMINFORM)39) 도, 그것에 이어지는 공산주의당들의 국제회의도 이런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 세력이 의심 없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제국주의 체제는 전쟁 후에도 강한 채로 살아남았다. 제국주의는 전쟁이 종결된 후 곧 바로 아메리카합중국의 패권 아래에서 냉전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꾸려지고 있는 전략이었다.





“냉전”의 내용은 심리전쟁의 조직화, 쏘비에트연방을 경제적으로 피폐시키기 위한 군사지출의 증대, 사회주의 체제를 내부에서 파괴하고 침식하는 네트워크, 공공연한 도발과 반혁명적 전개의 선동(1947~1948의 유고슬라비아, 1953년의 독일민주공화국,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등) 등등이다. 쏘비에트연방과의 동맹관계를 끊고 기회주의적 퇴폐로 물들이는 상황을 강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한 여러 가지 경제적‧외교적 전략이 계속되었다. 한편 제국주의체제는 아메리카합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련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동맹과 국제적인 대부기관들(international lending organisations; NATO, EC, IMF, 세계은행, 국제적인 통상협회)을 만들었다. 그것들은 자본주의 나라들의 조정을 보장하고 자본주의 나라들 간의 모순의 일부를 해결하였다. 그것들은 사회주의체제에 압력을 가하여 목을 졸라 숨이 막히게 한다고 하는 공통의 전략목표의 이행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들은 제국주의의 개입이나 체계적이고 다면적인 도발, 반공캠페인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최첨단의 사상적 무기를 사용하고 인민들을 조작하여 사회주의 나라들과 공산주의운동 전반에 대해서 적대적인 조류를 만들어내었다. 그것들은 기회주의적 이탈과 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적 통일의 문제들을 이용했다. 쏘비에트연방공산당 및 쏘비에트연방에 대한 모든 형태의 불만과 불화가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으로 지지되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은 국가예산으로부터 몇 십억 달러를 사용했다.










29. 제2차 세계대전 후,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19회 대회(1952년 10월)에서 어느 정도 전개되었고40), 제20회 대회(1956년)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던41) “평화공존”이라는 방침은 아메리카합중국과 영국,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일정부분과 그것에 대응하는 서유럽의 자본주의 나라들의 정치세력의 제국주의적 야만과 공격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을 독점자본주의의, 제국주의의 불가분한 요소로 인정하지는 못했다. 그런 것에 의해서 그 방침은 제국주의의 세계지배를 단절시키는 세력과의 공존을 제국주의가 오랜 동안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공상적인 견해의 전개를 허락했다.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회 대회 이래, 이 견해는 유럽에서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가능성과도 결합되었다.





공산주의운동의 (정권을 잡았든 잡지 못했든 간에) 어떠한 부분도 사회주의체제의 힘을 과대평가하였고 전후의 자본주의의 재건이 지닌 강한 힘을 과소평가하였다. 동시에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그런 것은 최초에는 쏘비에트연방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관계 단절에서 나타났고 나중에는 현재 “유로코뮤니즘”으로 알려져 있는 것의 창조에서 보여 졌다.





서유럽에서는 각 나라의 민족적 독자성을 구실로 삼아 많은 공산주의당들의 대열에서 유로코뮤니즘으로 알려진 기회주의 조류가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의 과학적 법칙을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과 혁명투쟁 전반을 부정하였다. 유로코뮤니즘은 사회주의로의 “의회를 통한 길”, 즉 개량주의의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채용하였다. 대체로 사회민주주의가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는 견해가 공산주의당들 안에서 지배적인데, 그런 견해는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사상투쟁을 약하게 하였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당들은 일련의 사상적‧정치적 양보를 했으나, 그런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 측으로부터의 통일에 관한 성명은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사상의 영향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떼어내고 계급으로서 소원하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와의 관계에서 많은 공산주의당들의 태도는 “반독점정부”라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반독점정부”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단계이며, 사회민주주의와 동맹하여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정부에도 그것이 표현되었다. 이런 전략은 당초 모든 자본주의나라들이 아메리카합중국에 대한 “종속과 의존”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평가에 기초하고 있었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위계의 최상위에 있는 나라인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아메리카합중국공산당까지도 그런 전략을 채용했다.





이런 전략은 특히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회 대회(1956년) 후에 그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의 여러 가지 형태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테제에 의해서 지배적으로 되었다. 이 테제는 본질적으로 쏘비에트 혁명의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나라들과 자본주의 나라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자본주의의 통일전략이 과소평가되었다. 자본주의 나라들 간의 모순은 물론 의존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나, 제국주의의 피라미드 속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정확하게 분석되지 못했다. 따라서 공산주의당들은 부르주아세력을 포함한 동맹정책을 선택하였다. 그런 동맹정책은 부르주아세력을 국외의 제국주의의 봉사자(앞잡이)로 여기는 방침에 반하는, “민족적 사고”로 정의하였다. 그 같은 견해가 공산주의운동의 일부에서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1960년 이래 중국공산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 나라들의 공산주의당들과, 정권당인 공산주의당들 사이의 현대 기회주의의 상호작용은 사회주의 나라들에 대한 핵공격의 위협, 사회주의 나라들(중동유럽)의 내부에서의 계급투쟁의 격화, 새로운 제국주의전쟁(베트남, 조선)이라는 상황에서 강화되었다. 제국주의의 유연한 전술은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산주의당들 안에서의 기회주의의 진전에 영향을 주었고 사회주의 건설의 침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자본주의의 유럽 및 세계 속의 혁명투쟁의 침식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들에 대한 제국주의의 직접‧간접의 압력이 강화되었다.















그리스공산당의 입장에 관한 평가










30. 그리스공산당 제14회 대회(1991년)와 전국협의회(1995년)는 다음과 같은 것에 관한 자기비판을 하였다. 우리는 당으로서 20세기에 건설되고 있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 그 이상화를 회피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했던 문제들을 과소평가하였고 그것들을 오로지 객관적 요인의 탓으로 돌렸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회주의 발전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라고 변명하였으나 그것은 현실에 대응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의 당이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제한되었다. 필요한 주의란 이론적 수준을 획득하고 우리 이론의 창조적 검토와 이해를 추진하며 발전 와중에 있는 상황에 기초하는 사상적‧정치적 테제의 창조적인 발전에 당의 세력과 함께 공헌해야 할 필요성에 관한 주의이다. 우리는 당으로서 극도로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이 범했던 이론적 평가와 정치적 선택지를 채용하였다.





우리는 공산주의당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내실없는 형식화를 채용하고 감수하였으며 또 이론과 사상의 문제에 관한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의 테제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하였고 감수하였다. 그런 경험으로부터 다른 정당들의 경험에 대한 존중은 그 방침과 실천의 객관적인 판단 및 과오에 대한 동지적 비판과 이탈로의 반대와 결부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분명하다.





1995년의 전국협의회는 우리 당이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그것을 사회주의에 유익한 개혁정책으로 평가하였던 사실을 비판하였다. 그런 사실은 그 시기의 당 대열 속에 기회주의가 강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에 관한 그리스공산당의 입장이 중대하게 후퇴함은 우리 당이 그 역사에서 일관해서 국제주의의 성격을 보유하고 몇 천 명이라는 당원과 간부가 생애를 바쳐 20세기 사회주의의 건설과정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당은 사회주의의 공헌을 전투적으로 선전하였다. 20세기 사회주의의 공헌을 옹호하는 일은 과거에서도, 부정적인 전개를 걸친 오늘에서도 우리 당의 의식적인 선택이다.





그리스공산당은 공산주의 운동 속에서 그리고 쏘비에트연방과 다른 나라들에 대한 비판을 명목으로 등장하여 이들 나라들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고 제국주의의 선전을 수용하기에 이른 세력의 편에는 서지 않았다. 비록 약점이 있었을지라도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일을 수정한 일은 없었다.















D.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적합성, 우리 당의 강령에서 사회주의 개념의 강화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적합성










31. 우리 당은 강령에서 “반혁명에 의한 전복은 이 시대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21세기는 세계 혁명운동의 새로운 고양과 새로운 일련의 사회혁명의 세기가 된다”라고 쓰고 있다.





일부의 성과를 수호하는 일에 한정되는 투쟁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진정한 해결책을 가져올 수는 없다. 20세기 말의 패배는 있으나 유일한 해결책, 불가피한 전망은 여전히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의 필연성은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모순, 제국주의 체제의 모순이 첨예화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독점의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더 우수한 사회경제체제로의 이행을 필요로 하는 물질적 조건이 충분히 성숙해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전례가 없는 수준으로까지 사회화하여 왔다. 그렇지만 생산수단과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은 자본가의 사적 소유이다. 이 모순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위기현상의 근원이다; 경제위기의 시기에는 폭발적인 수준으로 도달하는 실업과 빈곤, 노동생산성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일일노동시간의 연장,  교육과 직업상의 전문화에 대한 지금의 사회적 요구와 현대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기초하고 있는 의료에 대한 현대의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함, 공중위생과 노동자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막을 수 없는 환경파괴, 새로운 과학‧기술에 의한 발전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의 결여, 제국주의 전쟁에 의한 파괴, 마약거래나 장기매매 등등.





한편으로 이들 자본주의의 모순은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생산관계를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적합한 것이게 하는 일이다. 특히 집중된 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생산관계의 사유를 폐지하고 사회화하며 사회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사회적 생산을 계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노동자의 지배에 의한 경제의 중앙계획화이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현실적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발전 속에 뿌리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현은 힘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혁명적 활동이 발전하는 상항, 발전을 빠르게 한다든지 늦게 한다든지 하는 상항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는 처음에는 일국 내지는 몇 개 나라들의 집단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정치적 불균등성이라는 법칙의 작용으로부터 생겨난다.43)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은 세계 속에서 동시에 성숙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의 사슬은 그 가장 약한 고리에서부터 끊어진다.





각 나라 공산당의 특수한 “국가적” 임무는 자기나라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의 실현과 사회주의 건설이고 그것은 세계의 혁명과정의 일환이다. 그것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협력”의 테두리 안에서 “전면적으로 실현된 사회주의”의 창조에 기여하게 된다.44)





약한 고리에 관한 레닌주의의 테제는 혁명과정에서의 국가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공산주의의 최고 단계로의 이행은 사회주의의 전 세계에서의 승리 내지는 적어도 발달한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지배적인 나라들에서의 승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여 진다.















우리 당의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개념의 강화










32.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조건의 성숙도는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의 법칙의 결과로서 여러 가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달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의 기본적 척도는 임노동의 확대와 집중이다.





제국주의라는 조건 아래에서는 자본주의의 상대적인 후진성이 모순의 돌연한 첨예화를 터지게 하여 그것에 의해서 혁명적 위기에 이르고 승리의 전망이 열리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가 후진적이면, 그 정도에 따라 장래의 사회주의 건설은, 낡은 것에 대한 새로운 것의 투쟁은 보다 곤란하게 된다. 사회주의 건설의 속도는 그것이 계승한 것의 영향을 받는다.45)





어떠한 경우에도 혁명적 노동자의 정권이 물려받은 자본주의의 과거 수준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기본법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 법칙은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고 20세기의 사회주의 건설 도상에 의심 없이 존재하였고 장래의 사회주의 건설에서도 당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지는 특수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33. 그리스공산당 제15회 대회는 그리스에서 다가올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게다가 반제국주의, 반독점, 민주주의 전선의 성격에 대해서 노동자계급과 다른 인민계층사이의 동맹으로 규정하였다. 그 후의 대회, 특히 제16회 대회에서 이 전선의 강령 상의 개념이 강화되었다.





사회주의에 관한 우리의 기본 테제는 그리스공산당 강령에서 표현되어 왔으며, 오늘날 우리는 제2장에서 전개되었던 맑스-레닌주의의 테제에 기초하여 20세기의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결론을 활용함46)으로써 이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










34. 고도의 독점, 특히 근래의 그것은 공업, 소매업, 관광업에서의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생산된 부를 사회적 소유물로 하기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이다. 의료, 복지, 사회보장, 교육의 분야에서는 모든 형태의 사적 사업이 곧바로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소유와 중앙에서의 계획은 실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집중화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기초하는 경제의 중앙계획이 공산주의의 생산관계이다. 국가의 계획은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적 번영의 계획 입안에 즈음해서는 장기‧중기‧단기의 목표를 대상으로 한다.





중앙계획의 실시는 부문별로 단일의 통일된 정부당국에 의해서 지역별로, 산업별로 조직된다. 계획은 다음과 같은 목표와 지표의 전체에 기초하는 것이 된다.





§ 에너지에서: 중앙에서 계획된 생산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기반설비의 보장, 나라의 에너지의존도의 경감, 충분하고 값싼 대중소비의 보장, 부문과 거주지구의 노동자의 안전, 공공위생과 환경의 보호. 에너지 정책은 이런 방향으로 다음을 요점으로 한다. 국내의 모든 에너지자원(갈탄, 수력발전, 풍력 등)의 이용, 새로운 에너지원의 체계적 연구와 발견, 우호적인 국가 간의 협력추구.





§ 운수에서는, 개별의 수송보다 대량 수송, 나라의 본토의 철도수송이 우선된다. 모든 형태의 수송이 상호 결부와 보완을 기준으로 하고 다음을 목적으로 계획하게 된다. 사람과 물건의 값싸고 신속한 이동, 에너지의 절약과 환경보호, 계획적 발전과 불균등한 지역발전의 해소, 국가의 안전보장과 방위의 전면적 관리. 운수의 발전에서의 이것들의 목적을 실현하는 전제조건은 적절한 기반설비―항만, 공항, 철도역, 도로―의 계획과 수송수단을 생산하는 산업의 계획이다. 똑같은 것이 전기통신, 원재료의 가공, 제조업, 특히 기계의 생산에도 해당한다. 그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자립된 경제를 실현하고 이것들의 중요부문에서의 자본주의 경제권과의 대외무역 및 거래로의 의존을 작게 하는 일이다.





§ 토지는 사회화되고 자본주의적 대규모 농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원재료 내지는 소비물자로 농산물의 생산과 가공을 수행하는 국영생산단위가 설립된다.





§ 소규모 농업생산과 도시에서의 소규모 상품생산에서 생산협동조합이 추진된다. 생산협동조합은 소규모 상품생산의 집중, 그 조직화, 협동조합 안에서의 분업, 노동생산성의 향상, 새로운 기술의 이용을 통해서 경제의 전 부문에서 공산주의적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 낸다. 국영‧협동조합의 상품에서 협동조합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중앙에서의 계획은 협동조합시장에서 분배되는 생산물과 국가기구를 통해서 분배되는 생산물의 비율(및 그 가격)을 결정한다. 그 목적은 최종적으로 협동조합의 생산물 모두가 통일된 국가기구를 통해서 분배되도록 하는 것이다.





§ 생산협동조합은 정해진 생산목표 및 원재료, 에너지, 새로운 기계와 서비스의 소비계획을 통해서 중앙의 계획과 결부된다.





§ 기술과 과학의 새로운 성과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자유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이용되도록 한다. 자유시간은 노동자의 교육‧문화수준을 향상시키고 노동자가 관리운영이나 국가권력 기관에 실질적으로 참가할 수 있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 국가기관―고등교육기관, 연구소 등―에 의해서 과학연구가 조직되도록 하고 연구는 사회적 번영을 발전시키는 목적으로 중앙계획을 위해서, 사회적 생산의 관리를 위해서 이용된다.










35. 사회적 생산물의 일부는 무상의 공공서비스―의료, 교육, 사회보장, 여가, 아동‧고령자의 원호―에 의해서 또 대중소비지향의 값싼 (경우에 따라서는 무상의) 운수, 통신, 에너지, 수도 사업 등에 의해서 필요에 따라 분배된다.





현재에는 개인 내지는 가족의 수입으로 지불되고 있는 필요물(예를 들면, 직장이나 학교의 식당)이 만족되도록, 국유의 사회기반이 만들어지고, 고품질의 사회서비스가 제공된다. 취학연령에 도달하지 못한 아동에게 무상이자 공적이고 의무적인 취학 전 교육이 제공된다.





무상이고 공적인 전원참가의 기초적인 12년 동안의 교육이 통일된 기구와 교정, 관리운영, 기술설비, 훈련을 받은 전문 직원을 갖춘 학교에 의해서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다.





공립으로만 이루어진 무상의 전문교육이 기초적인 의무교육의 수료 후에 보장된다.





통일된 무상의 공적인 고등교육제도에 의해 교육기관에서 가르칠 능력을 갖추고, 연구, 사회화된 생산, 국가서비스의 분야에 전문 직원을 제공할 수 있는 과학인원이 형성된다.





전면적으로 무상이고 공적인 보건‧복지제도가 확립된다.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사회화된 생산수단, 중앙에서의 계획, 노동자 지배)이 물질적인 기초를 만들어 내고 발전도상의 사회주의 경제가―그 발전 단계에서―사회적 약속으로의 의료와 복지를 사회의 전 성원에게 평등하게 보장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만인의 육체적‧정신적 건강과 지적‧문화적 발달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공된다. 그 같은 조건은 각자가 노동 및 사회활동을 벌이는 능력에 영향을 주는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전면적인 환경조건과 사회조건에 의해서 좌우된다.










36. 최초의 국가계획의 작성과 실시에 의해서 상품-화폐관계의 기능은 그때까지 한정적인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완전한 소실을 전망하였던 계속적인 규제는 생산과 분배의 전체에서의 공산주의적인 관계의 계획적인 확대와 결부되어 있고, 개인소비의 필요물의 대부분을 더더욱 만족시키는 사회서비스의 확대와 결부되어 있다. 화폐는 가치형태로서의 그 내실을 서서히 잃어가고 상품교환의 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수행된 노동을 증명하는 한 형태로 변하고, 노동자는 그 노동에 따라서 분배되는 사회적 생산물의 일부를 획득하도록 한다.





이것들 생산물의 취득은 사회적으로 유익한 노동의 전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개인 노동의 공헌에 의해서 결정된다. 개인 공헌의 척도는 노동시간이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에 조응하여 계획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회적 생산물의 종합적인 필요(예를 들면 노동력의 특정지역 내지는 우선산업으로의 이동), 다른 특정한 사회적 필요(예를 들면 모성, 특별한 필요가 있는 사람), 노동을 조직화하고 실행할 때의 선구적 태도.





노동의 “임금” 구조에서의 각각의 방침은 전술한 원칙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상속받은 “가치” 결정(그것은 복잡한 전문화된 노동을 단순한 노동으로 환원한다)에 기초한 격차로서, 어떠한 편향이 존재하고 있어도, 계획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고 노동자 중의 최저소득층의 수입을 인상하는 것을 우선하게 된다.





중앙계획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노동자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달시키고 전문적인 노동이 생기며 기술적인 분업으로 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노동생산성의 전반적인 향상과 노동시간의 단축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역할과 기능이 변한다. 상품유통의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의 규제는 사회주의적 생산물과 농업협동조합의 생산물의 간의 교환에, 특정한 소비물자의 상품생산 일반에 한정된다. 그것은 상품생산이 최종적으로 소실할 때까지이다. 이런 것에 기초하여 농업 및 다른 생산협동조합과 일정한 소규모 생산자를 위한 일정한 전문적인 국영대부기구의 활동이 관리된다.





지구상에 자본주의 나라가 존재하는 한, 똑같은 일이 국제적인 국가 간의 거래(무역, 관광)에도 해당한다. 그러므로 국가계획의 일부문이 금준비고 내지는 세계통화로서 기능하는 다른 상품의 준비고를 규제한다.





전반적인 사회적 회계를 실행하는 가운데에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할이 형성되고 중앙은행의 기능 및 목적과 결부된다.










37. 사회주의 건설은 EU나 NATO같은 제국주의의 기구에 일국으로 참가하는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혁명적인 국가권력은 국제정세 및 지역정세에 부응하여 호혜적인 국가 간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한다. 그리스와 다른 나라들의 관계이고 특히 그 나라의 발전, 문제들, 당면 이익이 그와 같은 유익한 협력을 보장할 수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인 사회주의 국가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센터에 저항하는 일에 직접적인 이해를 지닌 나라들 및 인민들과의 협력을 추구하고 특히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인민과의 협력을 추구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혁명과 사회주의를 방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제국주의 간의 모순에 의해서 제국주의의 전선에 생기는 가능성의 모든 균열을 이용하려고 한다. 사회주의 그리스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충실하고 그 힘이 미치는 한, 세계의 반제국주의,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보루가 된다.










38.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의 정권은 자본가의 지배를 부활시키려 하는 부르주아 계급과 국제적 반동의 기도를 저지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폐지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의무를 진다. 그 역할―조직, 문화, 정치, 교육, 방위상의―은 당에게서 지도를 받는다.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은 그 기본적인 성격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국가권력 및 그 기관의 장악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의 해결에 노동자계급과 인민이 정력적으로 참가하는 민주주의의 더욱더 높은 형태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기관이고 계급투쟁은 다른 형태에 의해 새로운 상항에서 계속된다.





민주집중제는 사회주의 국가의 형성과 운영,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 생산단위와 모든 사회서비스의 관리에서의 기본원칙이다.





혁명적인 노동자의 권력은 노동자계급과 그 동맹자의 혁명적인 투쟁에 의해서 생겨나는 제도에 기초한다. 부르주아 의회제도는 노동자 권력의 새로운 제도에 의해서 교체된다.





노동자 계급의 국가 권력의 핵은 생산단위, 노동현장이고 거기를 통해서 노동자계급과 사회에 의한 관리가 실시된다. 노동자의 대표는 이들 “생산 공동체”로부터 국가권력의 기관들에 선출된다(필요하면 파면된다). 노동자와 사회에 의한 관리의 수행이 제도화되고 실천적으로 보증된다.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하는 결정 및 책략에 대한 방해받지 않는 비판, 공무원들의 주관적인 독단행위나 관료적인 행위에 대한 방해받지 않는 탄핵, 그 밖의 부정적인 현상과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협동조합의 농민과 소규모 상품생산자의 대표는 노동자계급과의 동맹을 지킨다. 최고기관의 구성은 대응하는 조직을 통해서 하위기관으로부터 선출된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이들 기관으로의 대표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적인 생산 및 공공적인 사회서비스의 단위로부터의 노동자로 구성되도록 보장된다.





국가권력의 최고기관은 활동하는 기관이고―입법과 행정을 동시에 행한다―그 테두리 안에서 행정당국과 입법당국의 배치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의회가 아니다. 그 대표자는 종신제가 아니고 파면되기도 한다. 대표자는 생산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으나 대표자로서의 임무에 필요한 조건에 부응하기 위해서  임기 중에는 각자의 노동으로부터 일시 해임된다. 국가권력 기관에 참가하는 것에 의한 특별한 경제적 이익은 없다. 최고 기관인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행정당국(성청, 행정부, 위원회, 기타)의 장이 선출된다.





혁명헌법과 혁명법규가 제정된다. 그것들은 새로운 사회관계―사회적 소유, 중앙계획, 노동자지배―에 부응하는 것이 되고, 혁명의 합법성을 옹호한다. 그것에 기초하여 노동법, 가족법과 모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강고한 것으로 하는 법률이 작성된다. 새로운 사법제도가 형성되고 그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인민의 관습에 기초한 것으로 된다. 새로운 사법당국은 국가권력의 기관들에 의한 직접적 지휘 아래에 놓인다. 선출된 파면 가능한 인민의 재판관 및 상근직원으로 구성된 사법단이 만들어지고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기구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의 임무로서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에 불가피하게 상속받게 된 부르주아 국가의 행정기구를 근본적으로 “오버홀(overhaul)”하는 일이 있다. 노동시간,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는 혁명법규에 따라 규정된다. 당의 지도부는 어떤 특권도 갖지 않으며 공공행정의 혁명적 변혁을 수호한다.





새로운 혁명적인 치안과 방위의 기관은 노동자와 인민의 참가에 의거하여 상근의 전문 인원을 둔다.





부르주아 군대와 치안기구는 완전히 해체되고 그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제도가 창설된다. 그것은 착취자의 저항을 파괴하고 혁명을 방위하기 위한 무장된 혁명투쟁에 기초한다.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에 의한 군대와 혁명방위부대에 대한 직접의 지배가 보장된다. 그 간부단은 혁명에 대한 태도에 기초하여 설립된다. 서서히 새로운 군사학교를 경유하여 주로 노동자계급출신의 청년으로 구성되는 새로운 부대가 창설되어 간다. 그것은 새로운 국가권력의 도덕기준으로 교육받는다. 사회주의건설의 적극적인 경험이 활용된다. 과거의 사회주의 건설에서는 혁명을 방위하는 임무가 특별한 상설부대만이 아니라 노동자위원회 등을 통하여 인민의 책임으로도 수행되고 있었다.










39. 그리스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모든 사회관계를 공산주의 관계로 전면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설 의무를 진다.





전위로서의 당의 혁명적 역할은 맑스-레닌주의, 과학적 공산주의의 이해를 심화 발전시키는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강화된다. 그와 아울러 현대의 과학적인 성과를 흡수하고 공산주의적인 사회경제의 편성을 추진하는 가운데 표면화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계급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일도 필요하다.





모든 단계에서 중요한 점은 프롤레타리아중심의 당의 구성을 보증하는 일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균질적인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사회모순도 있다.





전위로서의 당의 혁명적‧지도적 역할은 노동자계급이 공산주의적인 자주관리의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단위(노동현장)와 사회서비스에서 노동자의 참가와 노동자지배를 활성화시키는 당의 역량에 의해서 생긴다.





당의 역할은 단순히 사상적‧교육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을 지닌 계급의 당이다. 국가권력을 행사할 때의 당의 지도적인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딕테이터싶의 모든 기구와 직접적 조직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당은 국가권력의 행사를 다루어야 하는 모든  중요한 정치문제들에 관여해야 한다. 당은 국가권력의 장악과 생산의 관리에 노동자계급을 결집해야 한다. 당은 부차적인 문제로 벗어남이 없이 전략적 지시를 주어야 할 의무를 진다.















결어 










우리 당은 우리가 내린 결론의 더 좋은 체계화를 향해서,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문제들을 포함하여 검토와 연구를 금후에도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한 우리 현재의 노력 성과가 모든 당원과 공산주의청년동맹원에 의해서 이해되는 일이다.





이 임무야말로 혁명적 노동자의 권력 취득과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하는 당의 전략에 관해서 당의 전략과 일상투쟁을 충분히 결부하고 근로인민의 초미의 문제에 대한 목표를 책정하는, 그 당의 역량을 결정하게 된다. <노사과연>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





2008년 10월 19일















<힘있는 그리스공산당, 반격의 18회 대회>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2)





―제18회 대회에서의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테제―















번역 : 김성칠(편집위원)











1)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전에는 러시아에서는 당시로서는 중요한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집중이 있었다. 노동자의 총인구는 1500만 명으로 추정되었고, 그 중 400만 명이 공업과 철도의 노동자였다. 게다가 공업노동자의 56.6%가 노동자 500명 이상의 대공장에 집중해 있었다고 추정된다. 러시아는 세계의 공업생산고에서 제5위, 유럽에서는 제4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공업생산의 증대는 20세기 최초의 10년 동안의 종반에 시작하고 있었다. 생산수단 부문의 생산은 1909년부터 1913년까지의 기간에 83% 증가하였다(전체 평균은 13%의 증가). 그러나 대자본에 의한 생산은 다음의 6개의 지역에 집중해있었다. 중앙부, 북서부(페트로그라드), 발트해연안, 남부, 폴란드, 우랄이고 이곳들에서 공업노동자의 79%, 공업생산의 75%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러시아제국의 경제를 특징지우고 있었던 큰 폭의 불평등은 당시의 통계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자료에 여러 가지 결여가 있지만. 노동자계급은 전 인구의 20% 정도였다(자료에 따르면 17% 내지 19.5%라는 폭이 있다). 소규모상품생산자(농민, 숙련공 등)는 66.7%를 차지하고 착취계급은 16.3%, 그 중에서 12.3%가 쿨락(부농)이었다(쏘비에트연방국립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 Cypraiou Publications, 1960, p. 542;��쏘비에트대백과사전�� 제31권, pp. 183-185).






2) 1913년의 러시아 1인당 GNP(국민총생산)은 아메리카합중국의 그것의 11.5%였다. 총인구의 거의 3분의 2가 읽고 쓸 수가 없었다.






3)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의 역사로부터 추정할 수 있는 바로, 제20회 대회의 1년 후의 1957년 6월에 개최되었던 중앙위원회의 간부회(1966년 이래의 정치국을 말한다-역자)에서는 격렬한 투쟁이 벌여졌다. 간부회원 중 Malenkov, Kaganovitch, Molotov는 국내정치과 관련해서도 대외정책과 관련해서도 제20회 대회의 방침을 반대했다. 즉 연방구성공화국에게 경제와 문화의 건설에 관하여 권한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국가기구를 제한하고 공업부응성의 재편을 제한하는 조치에 반대하였으며 콜호즈의 개개의 세대에 의한 농업생산물의 의무적 인도를 폐지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Molotov는 미개간의 처녀지를 개척하는 일에도 반대하였다. 세 명 모두 당의 국제적인 정치방침에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했다. 결국 Malenkov, Kaganovitch, Molotov 그리고 Shepilov 이 네 명은 6월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간부회원으로부터 해임되었다. Bulganin에게는 중대한 경고가 내려졌다. 그 외에 처별을 받았던 위원이 있었다. Pervukhin는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정회원에서 회원후보로 강등시켜졌다. Saburov는 간부회의 회원후보에서 해임 당했다. 1959년 10월에 새로운 멤버의 가입으로 간부회와 서기국이 확대되었다(��쏘비에트연방공산당사��, Political and Literary Editions, 1960, pp. 861-865).






4) 제15회 당 협의회(1927년)에서 채택되었던 방침.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은 중소규모의 세대에게 생산성과 기술설비를 제공함을 증대시키는 것을 중시하였다. 토지의 국유화는 중소농민의 토지 사용권과 대립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규모 농업세대 및 가장 단순한 “companionship”으로부터 “artel”(콜호즈의 한 형태로 농업생산협동조합)에 이르기까지의 산재해 있는 농업세대의 협동조합의 이익이 되었다. 소규모 농업세대, 소규모 생산에 대한 태도는 대립이 아니라 지원이었다. 대규모화를 명목으로 하였던 하급 형태의 생산조직의 파괴는 거부되었다. 한편 콜호즈와 소프호즈의 이점이 추정되었다. 그와 아울러 농촌부의 쿨락 일정부분을 타도하고 그 후에 쿨락계급을 일소하는 것이 목표로 정해졌다.






5) 소프호즈는 농업생산의 기계화에 기초하여 조직된 국영농업기관이었다. 최초의 소프호즈는 1918년에 대토지소유자로부터 접수하였던 토지로 창설되었다. 그 생산물은 모두 국가에 양도되었다. 소프호즈의 노동자에게는 임금수입이 있었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유되어있는 노동자로 간주되었으나, 농업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소규모 사적인 농업세대를 계속 보유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콜호즈농민과 마찬가지로 자기 세대의 생산물 일부를 내다 팔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21,600개의 소프호즈가 존재하여 1200만 노동자가 있었다(콜호즈는 26,400개이고 1300만명)고 추정되고 있다(��농업경제��, Novosti Publications, 1983).






6) 1930년 3월 15일의 중앙위원회결정 및 I. V. 스딸린의 개인논문(「성공에 따른 현혹」, I. V. 스딸린전집 제12권, pp. 218-227). 거기에는 노농동맹의 안전을 악화시킨 오류가 기록되어 있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지역과 상황에서 오류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 잡을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들 오류는 이탈한 노선이나 잘못된 노선으로부터 뒤집을 수 없는 현실을 산출해오지는 않았다.






7) "샤프띠 사건"은 돈바스(Donbass)지역의 탄광산업에서 부르주아전문가와 산업 간부들에 의해서 벌여졌던 파괴활동에 관한 것인데, 이들은 생산을 조직관리하기 위해서 쏘비에트정권에 의해서 고용되고 있었다. 1928년에 열린 재판에서 이들 간부들이 국외로 도망갔던 구래의 자본가인 탄광소유자와 결부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파과활동은 사회주의산업과 쏘비에트정권을 침식하는 전체적인 계획의 일환이었다.






8) 뜨로쯔끼와 그 지지자들(후에는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은 일련의 선진자본주의나라들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지 않으면, 쏘비에트연방은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고 쏘비에트정권은 필연적으로 퇴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혁명 초기에 농업 생산은 공업에 강제적으로 종속시켜져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기에 이른다(“공업의 틱테이터싶”). 그러나 후에(1932년), 그는 집단화와 공업화의 대처를 “관료주의적 모험주의”라고 비난하였다. N. 부하린은 쏘비에트연방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위해서 경제의 후진적인 부문, 특히 농업생산에서 자본주의가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농업생산의 집단화 추진을 반대하였고 소비 공급 협동조합과 시장자유화를 통해서만 농업생산은 사회주의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하린과 그 지지자들은 쿨락은 서서히 사회주의로 흡수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네프의 계속을 지지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런 조류는 쏘비에트사회 내의 쿨락, 네프맨, 쁘띠 부르주아지 조류의 이해를 충실히 표명하고 있었다. 부하린의 견해가 1988년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채용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9) 이런 것은 1930년대 중반 반혁명센터의 발각에 의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같은 센터에 대응하기위한 조치에 약간의 지나침이 있었을지라도 1936년과 1937년의 재판에서 이 같은 센터와 군 부문(Tukhasevsky 사건, 그는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회 대회 후에 명예 회복되었다) 사이의, 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첩보기관들과의 협력이 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자본주의 나라들로부터의 정보는 그와 같은 계획이 존재하고 부하린과 같은 지도적 간부가 그것에 참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전형적인 예는 부하린 재판에 관한 Joseph Davies(당시 모스크바주재 합중국대사)의 보고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재판을 방청했다. 1938년 3원 17일, Davies는 워싱톤의 합중국국무장관에게 비밀비망록을 보냈다. “피고인에게는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재판제도에 대해서는 반감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증인을, 그들이 증언하는 상태를 관찰하고, 무의식적인 확증된 증언이나 그 밖의 사실, 재판기록에 남겨진 사항들을 관찰하여 보면, 나의 견해로서는 기소된 자들 중에서 정치적인 피고들에 관한 한, 쏘비에트법에 비추어 충분한 범죄가 입증되고 반역죄로 유죄라는 판결과 쏘비에트형법에 의한 처벌의 판결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 증거에 의해서 정당한 의문은 없다. 재판을 자주 방청했던 외교관들의 의견은 대체로 끔찍스러운 정치적 반대자가 있고 매우 중대한 음모가 있었다는 점이다.”(Joseph Davies, ��모스크바파견의 임무��, Simon&Schuster Publications, New York, 1941, pp. 271-272; L. Martins “Another Look at Stalin", Sychroni Epochi Publications, p. 241.)






10) J. I. Stalin, “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 Sychroni Epochi Publications, 1988, p. 44.






11) 같은 책, pp. 77-78.






12) 고스플랜(GOSPLAN): 국가계획위원회. 쏘비에트연방에서의 중앙계획의 국가기관






13) N. A. Voznesensky, “The War Economy of the USSR during the Period of the Patriotic War", Moscow, 1947, p. 118.






14) J. I. Stalin “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 Sychroni Epochi Publications, 1988.






15)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나라에서의 자본주의 및 착취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사회주의 제도의 강화와 함께 도시와 농촌사이의, 공업과 농업사이의 이해관계의 적대성도 또한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 그것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 물론 노동자와 집단농장 농민은 그 지위에서 서로 달리하는 두 계급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친선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이익은 하나의 공통의 선을 따라 간다. 사회주의 체제의 강화와 공산주의의 승리라는 선이다. ...





   예를 들면 농업과 공업사이의 차이를 보라.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농촌에서의 노동조건들이 공업에서의 노동조건들과 다르다는 것에 귀결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주로 공업에서는 우리에게는 생산수단과 공업생산물의 공적 소유가 있는데, 한편 농업에서는 공적이 아니라 집단의, 집단농장의 소유가 있다는 것에 귀결한다. 이미 기술하였듯이 이런 사정은 상품유통을 존속시키고 있으며 공업과 농촌의 이런 차이가 소멸하고 나서 상품생산과 그것에 수반하는 모든 결과가 소멸할 수 있다. 따라서 농촌과 공업의 이런 본질적 차이의 소멸이 우리에게 제1의적인 의무를 지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J. I. Stalin, “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 Sychroni Epochi Publications, 1988. pp. 50-52.)






16) 소규모 토지의 10 내지 30세대로 이루어진 소규모 콜호스가 대단히 많았다. 거기에서는 기술수단이 적절히 이용되지 못하고 관리비가 대단히 많이 든다.






17) 제4차 5개년계획(1946~1950년)의 실시에 의해서 완수되었던 성공에도 불구하고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지도부는 그 기간에 다음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일련의 공업부문과 농업생산에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도입하는 비율이 낮았다는 것, 구식의 기술설비를 갖춘 생산성 낮은 공장, 시대에 떨어진 기술에 의한 공작기계나 기계류의 생산. 공장관리의 감속, 틀에 박힘, 타성화 현상, 생산력의 향상을 위한 항상적인 자극으로서의 기술진보의 도입에 관한 무관심, 농업생산의 회복이 늦어짐, 가축생산의 생산성이 낮음, 그 총생산량은 전전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결과 육식, 우유, 버터, 과일, 야채가 부족하여 사회적 번영의 수준을 높인다고 하는 전체 과제에도 영향을 미쳤다(G. Malenkov, ��제19회 당대회에서의 쏘비에트연방의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원회의 보고��, 그리스공산당중앙위원회출판, pp. 48-64).






18) 경제의 각 분야부문 사이의 진정 필요한 비율을 중앙에서의 계획 속에 반영해야 하는 기구의 발전이 늦어짐.






19) 1965년의 개혁을 부르주아세력이 당시에 어떻게 특징지우고 있었는가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1. 부르주아 경제사상은 그것을 자본주의로의 복귀로 특징 지웠다(��Economist��, ��Financial Times��에 게재되어 있다).





   2. 그들은 구미의 케인즈학파나 사회민주주의의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개혁’을 계획의 진보이자 관료주의와의 투쟁이라고 특징지우고 있었다.






20) 그때까지 트랙터 등은 국유로 되어 있었다. 스테이션(기계트랙터 스테이션=MTS)에 집중되있었고 노동자들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었다.






21) 1958년 2월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총회는 MTS를 해체하고 그 기술설비를 콜호스에 매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런 정책의 결과, 사회적 소유를 희생하여 콜호스 소유가 대폭 확대되었다.






22) 소브나르코즈(Sovnarkhoz)는 1965년에 폐지되었고 각 분야의 관청들(branch ministries)이 회복되었다.






23) 1965년 3월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의 L. Breznev의 보고 「쏘비에트연방에서의 농업경제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긴급조치」.






24) 1958년까지 쏘비에트연방에서는 농산물이 콜호스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조달되었고 그럼으로써 시장의 요소는 제한되고 혹은 형식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내용은 따르지 않았다. 낮은 공급가격으로의 강제적인 조달은 과세의 효력을 갖고 계약, 즉 공급조합과의 계약에 기초하는 콜호스에 의한 생산물의 판매, MTS의 노동을 위한 지불, 조달가격보다 조금 높은 가격으로의 강제적인 조달물의 구입. 조달제도는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서 제도화되었다. 계약은 아주 빠른 시기에 등장하였고 전문적인 작물의 공급으로 확대되었다.






25) 1970년에는 쏘비에트연방의 보충적 세대(supplementary houshold)는 야채의 38%, 식육의 35%, 계란의 53%를 생산하고 있었다. 보충적 세대 전체에서 전 농업 생산물의 14%가 생산되었고, 그것들은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었다(가축상품의 14%, 비가축 상품의 8%). 보충적 세대는 감자의 41%, 야채의 13%, 식육의 17%, 계란의 9%, 우유의 6%, 양모의 15%를 생산하였고, 그것들은 상품으로 판매되었다(로모노소프 기념 모스크바대학경제학부, ��정치경제�� 제4권, 구텐베르크 출판, 아테네, 1984, p. 319).






26) “공업관리의 향상, 계획의 완성, 공업생산의 경제추진력의 강화를 위해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던 1965년 9월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총회. 코스이긴 개혁(Kosygin Reforms)은 197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27) 공업에서 이 계획은 1962년 Liebermann교수가 제안했던 관리시스템(Kharkov System으로 알려져 있음)에 따라서 두 개의 의료품제조기업체의 운영에서 실험적으로 적용되었다. Liebermann은 계획의 초과달성에 비례하여 관리자에게 지급되는 특별수당의 계산이 관리자의 이익과 쏘비에트사회전체의 이익사이의 모순을 초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관리자들이 기업체의 실제 생산력을 숨기고 원재료와 물품을 비축하고 또 “불필요한 물품”의 생산을 정지하는 것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생산의 지표인 “노르마(Norms)”를 바꾸지 않도록 신기술의 도입을 방해했다. 계획의 달성도는 노르마에 기초해서 평가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예를 들면, 얇은 종이가 아니라 두꺼운 종이가 생산되었다. 노르마가 중량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올바른 의견도 기술하였으나 잘못된 정책을 제안하였다. 이것에 기초하여 공산당원과 노동자는 이 같은 조치의 필요성을 확신하였다.






28) ��KOMEP��(공산주의평론) 2005년 제1호 게재의 V. M. Glouskov의 기사와 ��KOMEP��(공산주의평론) 2005년 제3호 게재의 N. D. Pihorovich의 기사를 참조하라.






29) 그리스공산당 전 그리스협의회(1995년)의 문서 「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결정지었던 요인에 관한 견해.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유효성」의 23-24쪽을 보라.






30) 러시아공산주의노동자당-러시아공산당의 제1서기인 V. Tiulkin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10월사회주의대혁명 80주년 국제회의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19회 협의회는 정치적 복수제를 선언하였다.





   ․ 시장정책으로의 길은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8회 대회에서 개시되었다.





   ․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1991년 4월)는 사유화정책으로의 길을 열었다.





   ․ 민족 “독립”(쏘비에트연방으로부터의 분리) 정책은 쏘비에트 대회에서 공산당원의 집단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 쏘비에트연방의 해체는 최고쏘비에트에서 소위 공산당다수파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승인되었다.





   Tiulkin는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8회 대회 소집의 10주년을 맞이하는 2000년 논설에서 (쏘비에트연방공산당의 테두리 안에서) 러시아연방공산당을 창설하였던 전 러시아 협의회에서 처음으로 파벌 “콤뮤니스트 인니셔티브운동(Movement of the communist initiative)”이 등장하였고 다른 자들과 함께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8회 대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31) Russian Soviet Federal Socialist Republic의 약어






32)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회의(1937년 2~3월)에서 A. Zhdanov의 보고는 새로운 선거제도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당과 쏘비에트 간부들 속에 있는 유해한 심리를 극복해야 한다. 그들은 인민의 신뢰를 간단하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자고 있다가 의회의 지위가 쉽게 주어지고, 자신들의 예전 공로에 대해 터무니없는 박수를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비밀투표에 의해서 인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우리 당과 쏘비에트 조직에는 중요한 간부층이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완수하는 것은 쏘비에트에 선출되었을 때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은 쏘비에트 회의, 의회집단, 쏘비에트 성청에 출석하지 않는 아주 많은 간부들에 의해서 목격되고 있다. 그들은 기본적인 의회의 의무수행을 회피하고 있다. 쏘비에트에 있는 많은 우리 간부들이 관료적인 성질을 몸에 익히고 있는 경향이 있고 그 활동에서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폐쇄된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당의 사무국에서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서 10배의 보수를 즐겨 받고 있다. 쏘비에트 의회에 등장하여 자기비판을 하고 인민대중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당연히 승인하고 있는 바이다.”(��KOMEP��(공산주의평론), 2008년 제4호)






33) 노동자위원회는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노동자지배의 기관이었다. 이 기관은 1917년 3월에 등장하였다. 노동자지배는 1917년11월에 내놓았던 포고에 기초해서 실시되었다. 1919년, 노동자위원회는 노동조합에 통합되었다. 그 후 1920년대에는 생산평의회가 공장에서 노동자지배의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34) 이 문제에 관한 결론은 2005년 4월의 「인민의 대파시스트승리 60주년에 대한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테제」를 보라.






35) 1939년 9월 9일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은 이 전쟁을 쌍방 모두 제국주의적이고 약탈적인 것으로 특징지었고, 전쟁에 개입하고 있는 각 나라의 코민테른지부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36) ��제3인터내셔날의 역사��(쏘비에트연방과학아카데미)의 그리스어판 428쪽을 보라.






37) 특필해야 할 것은 그리스공산당 제7회 대회(1945년)에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던 점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리스공산당 제7회 대회는... 사회주의를 내건 세계 모든 노동자정당이 견해의 차이를 뛰어넘어, 될 수 있는 한 조속하게 노동자계급의 통일된 국제정치조직에 가맹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한다.”






38) 이미 1935년에는 코민테른 제7회 대회가 “기본적인 정치테제와 세계 노동운동의 전략에 관한 테제의 입안으로 활동의 중심을 전환하고 각 나라의 구체적인 상황과 독자성을 고려하도록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권고하였고”, 동시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대해 “각 나라 공산당의 조직 내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피하도록” 권고하였다. 제7회 대회 후, 소위 코민테른 기구의 재편이 시작되었다. 그럼으로써 “각 나라의 당의 운영상의 지도권은 각 개개의 당 자체에게 양도되었다. 약간의 운영상의 지도를 어느 정도 벌이고 있던 지역서기국은 폐지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각 부문을 대신해서 겨우 두 개의 기관이 설립되었다. 간부국과 선전대중조직이다.”(쏘비에트연방과학아카데미, ��제3인터내셔날의 역사��(그리스어판), pp. 433-434.)






39) 코민포름(COMINFORM: 유럽공산당노동자당정보국)은 다음 나라의 공산당‧노동자당을 대표하고 있었다. 불가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쏘비에트연방,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40)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9회 대회로의 보고.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판의 28쪽을 보라.






41) ��쏘비에트연방공산당 제20회 대회��, Zioga editions, 1965, p. 8.






42) “새로운 전쟁의 준비는 유럽과 다른 대륙의 나라들이 아메리카합중국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음과 완전히 결부되어 있다. 마샬플랜, 서구동맹, NATO, 이것들 모두는 평화를 반대하는 범죄적인 음모의 사슬의 고리이고, 동시에 해외 독점이 인민들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의 고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나라들의 공산당노동자당의 임무는 민족독립을 지향하는 투쟁을 평화를 구하는 투쟁과 통일시키고, 합중국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되어버린 부르주아정부의 정책이 지닌 반민족적이고 배반적인 성격을 폭로하며, 모든 나라들에서 모든 민주적애국적 세력을 단결시키고 결집하는 일이다. 그 때에는 합중국으로의 참담한 종속을 정지시키고 인민들의 민족적 이해를 내세우는 내외정책으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슬로건을 내걸어야 할 것이다.”(그리스공산당 기록문서; ��공산당노동자당 정보국(코민포름)의 결의��, 1949년 11월 회의에서, 아테네, pp. 73-74)






43) V. I. 레닌, 「유럽합중국의 슬로건에 대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략적 강령」.






44) V. I. 레닌, 「좌익소아병과 소시민성」.






45) 레닌은 당시 자본주의 발전이 열등중등 수준의 나라들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개시하는 것은 더 쉽고, 계속하는 것은 더 곤란”하다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46) 제15회 대회(1996년)에서 채택되었던 당 강령의 D장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그리스공산당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개념은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고, 20세기 사회주의건설을 둘러싼 우리 당의 결론과 견해에 의한 그것의 강화에 기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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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2) ―제18회 대회에서의 그리스...[5] 번역 : 김성칠(편집위원) 2009-06-02 3441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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