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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자본론] 2권 해제 (6)
글쓴이 에르네스트 만델 E-mail send mail 번호 123
날짜 2009-05-06 조회수 3174 추천수 124
파일  1241616512_자본론 해제.hwp

  













자본론











6.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맑스의 재생산이론은, 그의 재생산표식이 공통의 척도(numéraire), 노동시간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재생산표식이 측정하고 표현하는 것이 물질적 생산의 상이한 부문들과 분야들 사이에서 사회의 이용가능한 노동력의 분배(와 운동)이라는 의미에서도 그의 완성된 노동가치이론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다. 가치는, 맑스의 이론에서, 사회적 추상노동이다.





미치오 모리시마는 강단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맑스를 집계기법(aggregation technique)의 주요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복권시키는 데 많은 노력과 재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계에 기초한 거시경제적 가치이론과 미시경제적 가치이론 사이의 모순을 찾아낸다. 그는 맑스에 대한 강단 비판자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문제삼았던 ��자본론�� 제1권과 제3권 사이의 진부한 ‘모순’을 기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모순으로부터 꽤나 그럴듯한 허수아비를 만들어낸다.1) 그러나, 우리가 볼 때, 그가 맑스의 ‘두’ 노동가치이론을 세심하게 구별하는 것은 단순한 개념적 혼란에 기초해 있다. 맑스에게 있어 가치와 가치생산은 명백히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사회적 질이지, 사물에 한 번 부착되면 고정불변한 ‘물리적’ 특성이 아니다. 따라서 맑스가 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이 체화된 것이라고 쓰고, 계속해서 한 상품의 가치는 그 안에 포함된 사회적 필요노동과 동등하다고 쓸 때, 그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명제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소비된 노동 중에서 사회적 평균(평균적 노동생산성과 사회적으로 인정된 평균적 욕구)에 조응하는, 다시 말해 사회적 필요노동으로 사회가 인정한 부분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상품의 생산에 지출되었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은 그 상품의 소유자에게 가치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그러나 가치와 가치생산이 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의 이용가능한 총노동력의 분배 및 재분배와 관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거시경제적 집계량[사회적 총노동시간-역자]은 기초적인 경제적 실체, 기초적인 ‘현실’(fact of life)이다. 만약 5백만 명의 노동자가 1년에 2천 시간씩 물질적 생산을 위해 노동한다면, 각 개별상품의 사회적으로 인정된 가치가 그것의 생산에 지출된 실제 노동시간 수와 동일한가, 또는 그보다 크거나 작은가와는 독립적으로, 총 가치생산물은 1백억 시간이다. 이것으로부터 만약 특정 상품의 가치가 그것의 생산에 실제로 소비된 노동보다 작다면, 그 안에 실제로 체화된 노동량보다 그 가치가 큰 다른 상품이 최소한 하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노동지출의 사회적 인정 실제 노동지출은 개별 상품에서만 다를 수 있으며, 총량에서는 다를 수 없다.3) 이러한 의미에서 모리시마가 [최종 분석에서는, 그리고 (소상품생산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맑스의 가치법칙은 근본적으로 집계적, 거시경제적 개념이라고 강조한 것은 올바르다.4)





재생산표식(그리고 자본 일반의 유통 문제)과 노동가치이론 사이의 연관은 맑스주의 경제이론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인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의 엄밀한 구분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끈다. 표식이 가치 표식인 한, 그것은 오직 가치생산만을 표현하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경제활동들은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 문제의 해결은 맑스 자신에 의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편으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잉여가치학설사��의 긴 절과 다른 한편으로 같은 주제를 취급하는 ��자본론��(특히 제2권)의 핵심적인 구절들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단지 뉘앙스의 차이라고만은 하기 어려운―차이가 있다. 이에 대한 하나의 주목할만한 실례는 상업적 중개인과 방문판매원에 관한 분석이다. 그들은 ��잉여가치학설사��에서는 생산적 노동자로,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에서는 비생산적 노동자로 분류된다.5) 최근에는 맑스주의자들 사이의 길고도 종종 혼란스러운 논쟁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6) 또한 이 문제는 이른바 서비스 산업에 대한 판단의 차이와 얽혀 있다―하나의 예로 서비스 산업은 쏘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국민 계정에는 국민소득에 기여하는 것으로 포함되지 않는데, 이것은 맑스의 생산적 노동 이론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명해야 하는가?





우리가 도출해야 하는 예비적 구분이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한다. 맑스가 특정한 형태의 노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그리고 다른 형태의 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분류할 때, 그는 도덕적 판단을 거치거나 사회적(또는 인간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을 채택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러한 분류를 객관적인, 즉 몰역사적인 것으로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분석 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고 그는 단순히 그 체제의 작동, 그 체제의 원리, 그리고 그 체제 자체에 있어 무엇이 생산적이고 무엇이 비생산적인지를 결정한다. 사회적 유용성 또는 필요라는 측면에서 의사는 어떤 인간사회의 생존에도 필수불가결한 노동을 제공한다. 따라서 의사의 노동은 지극히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본의 생산 또는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생산적 노동이다. 반대로, 덤덤탄, 습관성 마약, 혹은 포르노 잡지의 생산은 인간사회의 전반적 이익에 비추어 무용하고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들이 준비된 소비자들을 발견한다면, 그것들에 체화된 잉여가치는 실현되고, 자본은 재생산되고 확장된다. 따라서 그 상품들에 지출된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틀에서 본다면, 생산적 노동은 수입이 아니라 자본과 교환되는 모든 노동, 즉 하나 또는 몇몇 자본가들로 하여금 가치를 생산하는 임금노동 총량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 총량의 일부를 전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부유하게 하는 모든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8) 우리는 이것을 ‘개별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본 생산적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고용된 모든 임금노동―사적인 가사와 소비욕구의 충족을 위해 기능하는 노동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은 이 범주에 포함된다. 여기까지가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다루고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론�� 제2권에서 동일한 문제로 돌아왔을 때, 총체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관점, 특히 자본의 성장 또는 축적의 관점에서 맑스는 개별 자본가에게 생산적인 노동과 총체로서의 자본에 생산적인 노동을 구별한다. 총체로서의 자본에게는 잉여가치 총량을 증대시키는 노동만이 생산적이다.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잉여가치 총량을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그 일부를 전유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임금노동은, 그 노동 덕분에 파이의 일반적 분할에 참여할 수 있는 상업, 금융 혹은 서비스 분야의 자본가에게는 ‘생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총체로서의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그 노동은 파이의 전체 크기를 증가시키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이다.





오직 상품생산만이 가치와 잉여가치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직 상품생산의 영역 안에서만 생산적 노동이 수행된다. 유통과 교환의 영역에서는, 증권거래나 은행창구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떠한 새로운 잉여가치도 부가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만 이전에 창조된 잉여가치의 재분배 혹은 재분할일 뿐이다. 이 점은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에서 명백해진다.9) ��자본론�� 제2권에서 이와 관련된 대부분의 구절은 엥엘스가 원고 II와 IV로부터 뽑아낸 것이다[��자본론�� 제2권은 ��자본론�� 제1권이 출간된 1867년 이후 맑스가 집필한 여러 개의 원고들을 엥엘스가 편집한 것이다-역자]. 다시 말해, 그것들은 1861~3년 사이에 ��잉여가치학설사��를 쓴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그리고 심지어 ��자본론�� 제3권의 미완성 초고 이후)인 1870년[원고 II-역자]이나 1867년과 1870년 사이[원고 IV-역자]에 쓴 것이고,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맑스의 최종적 입장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언급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적어도 총체로서의 자본의 관점에서는, 임금을 받는 상업사무원이나 방문판매원이 생산적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적 원칙을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네 가지의 추가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이른바 ‘비물질적 재화’의 문제가 있다: 콘서트, 서커스, 성매매, 교육 등.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맑스는 이것들을,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위해 일하는 임금노동자에 의해 생산되는 한, 상품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비록 ��자본론�� 제2권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연에 작용하고 자연을 변형시키는 노동과정을 통해] 상품에 체화된 사용가치와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 사이의 관련을 거듭 강하게 주장한다.10) 더욱이 그는 ‘개인 서비스 산업들’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을 생산적 노동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함축하는 일반적 정식화를 제공한다: ‘그 자체로서는 비생산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의 하나의 필수적인 계기인 어떤 기능이, 분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의 부업으로부터 소수의 사람들의 전업[또는 특수산업]으로 전환되더라도, 기능의 성격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11) 만약 이러한 정식화가 상업적 방문판매원이나 회계사무원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교사나 세탁서비스에는 더더욱 잘 적용된다.





생산적 노동을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을 결합시킨 (즉 사용가치의 창조와 교환가치의 생산을 결합시킨) 상품생산노동으로 정의하는 것은 ‘비물질적 재화’를 가치생산의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배제한다. 더욱이 이 결론은 다음과 같은 ��자본론��의 기본 명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산은, 인간에게 있어, 자연과 사회 사이의 필연적인 매개이다; 어떠한 생산도 (구체적) 노동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구체적 노동도 물질적 대상에 대한 전유나 변형 없이 존재할 수 없다.12)





이것은 맑스가 ��자본론�� 제2권에서 운수업을 유통영역이 아니라 가치와 잉여가치의 생산영역으로 분류한 이유를 보면 명백해진다. 맑스의 주장은 다음 문단에 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생산물의 양은 그것의 운송에 의하여 증가되지 않는다. 또 운송에 의하여 야기될지도 모를 생산물의 자연적 성질의 변화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의도된 유용효과가 아니라 불가피한 해악이다. 그러나 물건의 사용가치는 그것의 소비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것이고, 그것의 소비를 위해서는 장소의 변동, 따라서 운수업이라는 추가적인 생산과정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운수업에 투하된 생산자본은 수송되는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한다.”13)





이제 이 논의들 중 어느 것도 여객수송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객수송은 사용가치의 실현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아니며 어떤 상품에도 새로운 가치를 추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자본가이든 노동자이든) 개인이 그의 수입을 소비하는 것과 관련된 개인 서비스이다. 따라서 임금노동에 기초하여 조직되었든 아니든 간에, 여객수송산업은 [상업, 은행, 보험 분야에 고용된 임금노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가치와 잉여가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자본론�� 제2권 6장 3절[만델이 가리키는 내용은 1장 4절에 해당한다-역자]에서 맑스는 위의 문단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의한 사람 수송은 어떤 종류의 상품이나 사용가치도 창조하지 않는다고 명시하면서도, 맑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산적 부문’이며, 그 ‘유용효과’(Nutzeffekt)가 오직 생산과정 중에서만 소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지적한다.14)





이 문제를 이른바 서비스 산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한다면, 우리는 일반적인 원칙으로서, 생산물(물질들)에 외화되고 그럼으로써 생산물에 가치를 추가하는 모든 형태의 임금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따라서 총체로서의 자본주의에 생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제조업과 광산업뿐만 아니라 재화의 수송,15) 물이나 모든 형태의 에너지(예컨대 가스와 전기) 생산과 수송과 같은 ‘공공 서비스’ 산업, 식당에서의 음식 판매, 주택과 사무실의 건설과 판매뿐만 아니라 그 건축에 필요한 재료들의 공급, 그리고 물론 농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서비스 산업’이라는 명칭 하에 속해 있는 많은 부문들이 물질적 생산의 일부이고 생산적 노동을 고용한다. 반대로 아파트나 호텔방의 임대, 버스, 지하철, 철도 등을 통한 여객수송 서비스, 의료, 교육, 오락 활동과 같이 노동자 외부에서 객체화되지 않는 임금노동(상품의 판매가 아닌 특정한 형태의 노동 판매), 상업사무원과 은행원, 보험회사나 시장조사회사의 피고용인의 노동―이것들은 생산된 사회적 가치와 잉여가치의 총계에 아무것도 부가하지 않고 따라서 생산적 노동의 형태들로 범주화될 수 없다.





텔레비전은 하나의 흥미로운 실례를 제공한다. 텔레비전 수상기나 영화(그 영화의 복제본도 포함)의 생산은 명백히 상품생산의 한 형태이며, 그 생산에 고용된 임금노동은 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의 임대나 소비자에게 텔레비전 수상기를 대여하는 것은 생산적 노동의 특징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광고(advertising films) 제작에 고용된 임금노동은 생산적이지만 그 광고를 구매 또는 주문하도록 잠재적 고객을 구워삶는 것(cajoling)은 상업적 대리인 일반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비생산적이다.





둘째 문제는 총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영역과 유통영역 사이의 정확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자본론�� 제2권에 나타난 맑스의 견해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 상품에 사용가치를 추가하거나 그 사용가치의 실현과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노동만이 그 상품에 체화된 사회적 추상노동의 총량을 증가시킨다(가치 생산적이다).16) 제2권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다루는 문단들은 상품에 대한―상품의 해소 불가능한 이중성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모순들에 대한―기본 분석의 계속적인 전개일 뿐이다.





셋째, 생산과정 자체 내에서 수행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여기서 맑스는 후대의 몇몇 사도들보다 훨씬 덜 단순한 태도를 취한다. 그의 기본적 원칙은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결과��17)에서 전개된 ‘집단적 노동자’라는 기준이다. 생산적 노동은, 상품생산 영역에서 지출된 노동으로서, 그 생산과정에 필수불가결한 모든 임금노동이다; 다시 말해,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기술자들, 연구소 노동자들, 감독관들, 그리고 심지어 관리자들과 재고담당 사무원들의 노동조차도, 그 노동 없이 상품의 물리적 생산이 불가능한 한, 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상품의 특정한 사용가치와 무관하며 다만 총노동력으로부터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뽑아내려는 목적으로 수행되는 임금노동(예컨대 계시원(計時員)의 임금노동)이나 사적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수행되는 임금노동(공장 안팎의 경비원);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수한 사회적이고 법률적인 형태와 관련된 노동(제조업 회사에 봉급을 받는 직원으로 고용된 변호사); 금융회계사무원; 과잉생산의 경향 때문에 추가로 필요해진 재고관리자―이것들 중 어느 것도 자본에게는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그 노동은 (비록 자본주의 체제, 혹은 총체로서의 부르주아 사회의 전반적 작동에는 필수적일 수 있지만) 생산된 상품에 가치를 부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소상품 생산자들, 소규모 자영농과 수공업자의 노동이다. 비록 상품을 생산하고 따라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생산하지만, 이 계층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예컨대 자신들의 값싼 노동을 통해 식품의 가치를 낮춤으로서 사회적 잉여가치량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이 점에 관해서는 맑스가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제시했던 입장을 고수했다고 믿는다: 그와 같은 계층들은,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관점에서는 생산적이지도 않고 비생산적이지도 않은 노동을 수행한다.18)










[역자의 말: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의 구분에 대한 만델의 논의는 해당 주제에 대한 맑스의 서술들을 체계적으로 재배치한 결과이다. 그러나 역자가 보기에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에 대한 만델의 논의는 의도적으로 상품의 범위를 좁게 설정함으로써 처음부터 생산적 노동으로 취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반드시 맑스의 주장을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만델도 언급하고 있는, 여객수송 서비스를 생산적 노동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 ��자본론�� 제2권 1장 4절의 내용은 1877년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원고 V로부터 나온 것이며, 만델이 맑스의 최종적인 입장이 표현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원고 II나 IV보다도 더 이후 시기의 것이다. 한편,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관해 체계적인 서술을 제시하면서도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이 생산적 노동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최근의 논의로는 Sungur Savran and E. Ahmet Tonak, “Productive and Unproductive Labour: An Attempt at Clarification and Classification,” Capital & Class, 68, Summer 1999를 참조할 수 있다.] ― (다음호에 계속) <노사과연>





 





[역자 주: ��정세와 노동��은 펭귄 판 ��자본론��에 실린 에르네스트 만델의 해제(Introduction)를 번역ㆍ연재 중이다. 이번 호에는 제2권 해제의 6절(Capital, Volume 2, Penguin Books, 1978, pp. 38~46)을 번역하여 싣는다.]















번역: 강성윤 (교육위원장)





















1) Michio Morishima, Marx’s Economics, Cambridge, 1973, pp. 11-12. 칼 맑스/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 백의, 2000, p. 111을 참조하시오: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물에 합체된 노동시간의 양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시점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다.”






2) ��자본론�� 제3권 10장, 특히 다음 구절을 참조하시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경우에-역자] 평균가치에 의하여 규제되는 상품 총량의 시장가치는 사실상 . . . 상품들의 개별가치의 합계와 같다 . . . 가장 나쁜 조건에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상품을 개별가치 이하로 판매해야 하며 가장 좋은 조건에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개별가치 이상으로 판매하게 된다”(칼 맑스/김수행 옮김, ��자본론�� III(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pp. 216-217). 또한 다음을 보시오(칼 맑스/김수행 옮김, ��자본론�� II(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p. 150): “상품이 그 가치대로 팔리지 않더라도 전환된 가치의 총액은 그대로 불변인데, 한 쪽에서의 플러스는 다른 쪽에서의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3) 나[=만델]는 ��자본론�� 제3권 해제에서 이른바 전형 문제를 다룰 때 이 명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4) Morishima, 앞의 책, pp. 2-3.






5) 칼 맑스, ��잉여가치학설사�� 1, 아침, 1989, p. 240; ��자본론�� 제3권 17장; 그리고 ��자본론�� 제2권, pp. 151-154를 보시오. ��잉여가치학설사��의 제1편 내부에서조차 이 문제에 대한 주목할만한 모순들이 존재한다. 즉 p. 171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예컨대 연극배우나 심지어 어릿광대조차도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일한다면 생산적 노동자이다.” 그리고 p. 187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 구매자 또는 고용주 자신에게 생산적인 노동―예컨대 극장 기업주를 위한 배우의 노동―에 관한 한, 그 노동은 구매자가 그것을 대중에게 상품 형태로서가 아니라 오직 연기 그 자체의 형태로서만 판매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비생산적 노동으로 될 것이다.”






6) 그 중에서도 Jacques Nagels, Travail collectif et travail productif dans l'évolution de la pensée marxiste, Brussels, 1974; S. H. Coontz, Productive Labour and Effective Demand, London, 1965; Arnaud Berthoud, Travail productif et productivité du travail chez Marx, Paris, 1974; Ian Gough, ‘Marx and Productive Labor,’ in New Left Review, No. 76, November-December 1972; Peter Howell, ‘Once Again on Productive and Unproductive Labour,’ in Revolutionary Communist, No. 3/4, November 1975; Mario Cogoy, ‘Werttheorie und Staatsausgaben,’ in Probleme einer materialistischen Staatstheorie, Frankfurt, 1973, pp. 164-71; P. Bischoff 외, ‘Produktive und unproduktive Arbeit als Kategorien der Klassenanalyse,’ in Sozialistische Politik, June 1970; Altvater and Huisken, ‘Produktive in unproduktive Arbeit als Kampfbegriffe,’ 같은 저널, September 1970; Rudi Schmiede, Zentrale Probleme der Marxschen Akkumulations- und Krisentheorie, 학위논문, Frankfurt, 1972; I. Hashimoto, ‘The Productive Nature of Service Labour,’ in The Tokyo University Economic Review, October 1966; K. Nishikawa, ‘Productive and Unproductive Labour from the Point of View of National Income,’ in Osaka City University Economic Review, No. 1, 1965; K. Nishikawa, ‘A Polemic on the Economic Character of Transport Labour,’ 같은 저널, No. 2, 1966을 보시오. 또한 Critiques de l'économie politique 10호(January-March 1973)와 11/12호(April-Semtember 1973)에 실린 Elisaburo Koga, Catherine Colliot-Thélème, Pierre Salama와 Hugues Lagrange의 논문들; Science and Society 22호(1958)와 24호(1960)에 실린 J. Morris와 J. Blake의 논문들; 그리고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Capital & Class의 전신-역자]에 1973-5년 동안 실린 Fine, Harrison, Gough, Howell과 다른 저자들의 논문들을 보시오. 현재 맑스주의 경제이론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7) 예컨대 Jean Marchal and Jacques Lecaillon, La Répartition du revenu national: Les modèles, Vol. III, Le modèle classique. Le modèle marxiste, Paris, 1958, pp. 82-5; Bronislaw Minc, L'Économie politique du socialisme, Paris, 1974, pp. 159-65, 그리고 다른 많은 저술들을 보시오.






8) ��잉여가치학설사�� 1, 아침, 1989, 제4장, 3을 보시오[제4장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관한 제이론” 중, “3. 생산적 노동에 관한 스미스의 개념의 이중성. 문제에 대한 첫째 설명: 생산적 노동은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이라는 견해”-역자].






9) ��자본론�� 제2권, pp. 151-154; ��자본론�� 제3권 16장과 17장을 보시오.






10) ��자본론�� 제2권 제6장을 보시오. 이 문제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분석들 중에서 나이젤스(Nagels)와 비쇼프(Bischoff)(각주 6을 보시오)는 우리와 유사한 입장을 채택하였다. 고우(Gough)는 특히 맑스가 사적 자본을 위해 일하는 임금노동자(교사와 같은)를 생산적 노동의 영역에 명시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자본론�� 제1권의 구절(김수행 옮김, ��자본론�� I(제2개역판), 비봉 출판사, 2001, pp. 684-5)에 기초하여 반대의 견해를 지지한다. 이 구절은, 우리의 견해로 볼 때, ��잉여가치학설사��에 있는 몇몇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맑스가 ‘생산적 노동’의 모순적 결정요인들―한편으로는 수입이 아닌 자본과 교환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모순적 통일을 포함하는) 상품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정교화를 아직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임금을 받는 교사가 생산한 ‘비물질적 재화’가 임금을 받는 세탁노동자(자본주의적 세탁공장에서 일하는)나 임금을 받는 백화점 점원이 생산한 ‘비물질적 서비스’와 개념적으로 대조될 수 있는가?






11) ��자본론�� 제2권, p. 151을 보시오.






12) ��자본론�� 제1권, p. 235 이하를 보시오. 자끄 구베르뇌르(Jacques Gouverneur)는 이 한계를 넘어서려는,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잘못된, 시도를 한다. ‘생산적 노동’의 범주에 임금노동에 의한 ‘비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는 앞서 언급한 맑스의 정식화를 ‘자연 또는 세계의 변형’으로 확장하는데, 여기서 ‘또는 세계’는 ‘또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임금을 받는 교사는 ‘자연의 변형’ 없이 ‘사회를 변형시키기’ 때문에,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Jacques Gouverneur, Le Travail 'productif' en régime capitaliste, Louvain, 1975, p. 41 이하).






13) ��자본론�� 제2권, p. 173[6장 3절-역자]을 보시오.






14) ��자본론�� 제2권, pp. 61-63[1장 4절-역자]을 보시오.






15) ��자본론�� 제2권 6장을 보시오.






16) ��자본론�� 제2권, pp. 172-173을 보시오.






17) 이 텍스트는 펭귄판 ��자본론�� 제1권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국역본은 칼 맑스/김호균 옮김, ��경제학 노트��, 이론과실천, 1988, pp. 45-194]. 이 부록에 대한 만델의 해제[Capital Volume 1, Penguin Publishers, 1976, pp. 943-7]와 ��자본론�� 제1권 14장을 보시오.






18) ��잉여가치학설사�� 1, 아침, 1989, pp. 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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