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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한스 아이슬러 선집: 음악의 반란자 (2)
글쓴이 한스 아이슬러 E-mail send mail 번호 122
날짜 2009-04-20 조회수 3410 추천수 123
파일  1240231166_아이슬러.hwp

  













역자 주
















[역자 주: 첫 번째 연재분이 나가고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나하고 물어오는 분이 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아이슬러의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이미 우리는 아이슬러의 선율에 익숙하다. 번안가요뿐만 아니라, 전교조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참교육 함성으로> 같은 곡의 도입부는 <통일전선의 노래(Einheitsfrontlied)>의 도입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아이슬러의 작품은 근래에 들어 활발하게 CD라는 상품으로 발매가 되고 있으며, 각종 포털 싸이트에서 그의 이름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로 검색하면 여러 관련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다.





새롭게 건설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예술론은 결코 무(無)라는 진공의 상태에서 수립할 수 없는 것이며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투쟁의 패배 이후 지배계급으로 투항하는 우익 청산주의와 애초부터 20세기 사회주의 유산을 부정하는 좌익 청산주의만이 창궐하고 있다. 현시기 우리의 과제는 우선 단절된 이론을 절충이 아닌 변증법적 비판에 근거하여 수용하고 보급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또한 아이슬러 음악의 혁명적 의의를 제거한 채로 또 다른 고전음악의 틀 속에 그의 음악적 성과를 가두려는 시도를 극복하고, 현실의 예술운동에 있어 계승해야 할 유산을 가려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집은 시기 순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연재는 선집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주석은 원주라는 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모두 역자의 것이다. 독어 원문은 아직 구하지 못해서 중역을 해야 했고 부족한 실력이라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영 거슬린다. 이번 연재에서는 지난번에 미처 완결하지 못한 영어판 아이슬러 선집에 있는 만프레드 그랍스의 서문을 마치고 아이슬러의 1935년 에쎄이 「노동자의 노래가 탄생하다」로 이어가겠다. 그리고 추가로 자료입수에 도움을 주신 김화선님, 장민성님에게 감사드린다.]















이론가로서 그는 미학적 질문과 관련해 자신의 고유한 창작물보다는 음악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독자적인 미학적 견해를 옹호했다. 이런 점들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아이슬러의 문화-정치적 견해와 미학적 견해는 각별히 귀중한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노련하며 비판적인 음악가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미학은 추상적이지 않다. 새로운 조류와 음악의 질1)을 언급하는 경우에조차도 그것들을 현실적 가능성의 반영으로 다룬다. 이것들은 사회주의 음악 건설에 있어서 변증법적이고, 다채로우며, 개인적인 개입의 중요부분이다. 아이슬러가 맑스주의 음악미학에 대해 공헌한 것은 음악미학의 개념적 완결성을 확립하기 위한 서술이 아니었다.2) 그것들은 상이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실질적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며, 당연히도 사회적 역사적 배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순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아이슬러의 사고의 변증법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아마도 이미 취득한 바를 정밀하게 조사하는 데 있어 혹은 오늘날 처한 비슷한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격려하고 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역사적 맥락과 떨어져서 보거나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잘못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을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서 고려해야 하며 더욱 더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아이슬러는 그의 작곡가 동료들을 위해, 음악가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또 그가 청중이나 협력자를 넘어서길 바라는 일반 대중을 위하여 곡을 썼다. 그는 단지 음악에 관하여만 말하지 않았다. 음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지, 음악 작품과 그것의 진로와 그 정치적 기능에 관하여서도 발언했다. 그는 공연이라는 방법으로, 그의 독자와 청자가 실제적인 문제로 자기화하여 무엇보다 스스로를 깨닫게 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아이슬러는 “음악의 위기”3)라는 주제로 1935년 12월 7일 뉴욕 타운홀에서 강연했고, 마크 블릿츠쉬타인4)이 1936년 6월 23 󰡔신 대중(New Masses)󰡕에 아이슬러의 이념적, 미학적 견해를 다루는 기사로 작성하였다. 이에 따르면 “아이슬러는 최초의 작곡가이다. 그의 기법과 이론이 뿌리를 두고 있는 음악보다 훨씬 더 크게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5) 그것은 당신에게 다른 것보다 진정으로 ‘미학적’이며 명료한 것이다. 획득하고 실제적인 것이고, 가공된 것이 아니며, 독단적이지 않고, 사태를 유도하거나 일어나게 하기 위해 가꾸어진 것도 아니다. 쇤베르크가 전형적인 이론가에 대해서 말한 바 있다. ‘작품에 대해서 그것을 알고 있는 이보다 누구도 더 자세하게 바라볼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작품이 그의 소유물은 아니다’6) 아이슬러의 작품은 그의 독자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세계의 노동계급과 공유했다.”7) 





파시즘에 의해 독일에서 축출된 아이슬러는 이주기간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의 10년간의 미국생활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서 중요한 시기였다.8) 그가 “가장 적나라하고, 야만적이며 잔인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알게 된 것이 바로 여기에서였다. 미국은 그에게 “상부구조 없이도 독재가 행해질 수 있는 곳이며9), 세대가 난파하고 파멸하는 곳”이었다. 아이슬러는 “미국을 보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진보세력의 용기 있는 투쟁과 농촌의 근로인민들에게 각인된 역동적인 생활상을 찬양했다. 이윽고 그의 미국에 대한 기억은 보다 이상적으로 되었고 이는 그의 오페라 대본 <파우스트>10)에 드러나 있다. “지난 날을 상기하노라면, 즐거웠노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틀란타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했는가!” 










이때는 그에게 가장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시기였다. 아이슬러는 이 시기의 권태에 대해 아주 간결히 언급했다. “브레히트와 나는 권태로워지지 않기 위해 창작을 했다... 이주 기간 중 주요한 영감은 우리의 순수하길 바라는 계급관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사회주의를 향한 진실한 투쟁에서뿐만 아니라 권태로움에서도 온 것이다. 맑스주의자라면 누구라도 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12시간을 자신만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망명에서 오는 고통스런 권태였다.”11)





아이슬러는 영화음악 작곡가와 교사로써12) 생계를 유지했다. 록펠러 재단의 연구 보조금은 그에게 영화에 음악을 이용하는 것의 새로운 잠재력을 기반으로 실험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13)





그럼에도 그와 동시에 대규모의 독주와 합창 그리고 관현악을 위한 <독일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었다. 그는 <우드베리 노래집(Woodbury Songbook)>을 우드베리에 있는 한 학교에 선사했다. 그것은 무반주 성악 모음집이었다. 그는 피아노 곡과 음악 일기인 <할리우드 노래집>14)을 작곡했다. 이주에서 오는 제한으로 인해 그는 나날의 정치적 투쟁에 쓰일 수 있는 곡들을 더 이상 작곡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그가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것들, 미래를 위해 일했다. 그에게 있어 미래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았을 때를 말한다. 나중에 스스로 지적했는데 그 취지와 목표들 문에 <독일 교향곡>15) 같은 곡은 “우리가 오늘날 독일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르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만 연주해야 한다. 이 작품은 미래의 사회의 발전을 희망하면서 테마와 예술성에 있어서 아이슬러의 힘겨운 망명 기간 중의 진실하고 의식적인 태도의 기록물로 남았다.





같은 견해를 지닌 사람들 중에서도 아이슬러는 존중받았고 높은 영예를 누렸다. 첫 미국 방문 중에 강의를 했고 반파시즘 동맹을 조력하기 위해 공연 여행을 하였고, 이를 조 포스터가 󰡔매일 노동자(Daily Worker)󰡕 1935년 3월 1일 자에 기록하였다. “세계의 모든 도시에서 수십만의 노동자가 도로를 울리며 진군하며, 대중 투쟁에서 폭정과 지배계급의 착취에 대해 발언한다.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힌 동지들, 말 못한 수많은 고통과 잔인함을 기억한다. 수천의 목소리가 행진을 하며 투쟁과 해방을 향한 싸움을 노래하는 결연한 투쟁가를 열렬히 따라 불렀다. 이들 혁명가의 심장 박동과 같은 선동적인 리듬에서 그들의 공동의 도전을 앞세워 간다. 그들의 도전은 바로 적들 지배계급의 장벽에서 소리 높이 내던져진다. 이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아이슬러는 최일선의 혁명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모든 지역의 대중들이 그를 사랑한다. 프라하, 네덜란드, 비엔나, 자르브뤼켄, 빠리, 런던 그리고 다른 도시에서 아이슬러를 듣는 수천의 대중에 둘러싸인다. 그건 놀랄 일도 아니다. 그의 음악은 대중의 삶의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여 반영하여,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더욱 심화된 투쟁을 고무하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가 맨 먼저 사라져야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음악을 파괴했고, 레코드를 폐기했다.”





당국은 경쟁적으로 아이슬러의 이주 비자를 조사하였고, 불명예스러운 스캔들16)로 비화되었다. 2년 동안 아이슬러는 비자를 위해 투쟁했다. 제한된 방문 비자가 갱신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2년을 보내야 했다. 추방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비자가 무효가 될 경우에 체포하겠다는 경고장이 작성되었고, 그는 안전을 위해 멕시코로 가야 했다. 마침내 1940년 10월 아이슬러는 대통령 부인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를 비롯한 저명인사의 도움으로 이주 비자를 받았다.





미국 정부가 불청객을 제거하려고 할 때 마찬가지의 스캔들이 일어났다. 루즈벨트 사후 증대되는 반공주의와 반쏘비에트주의로 인해 할리우드 영화계 인사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이 하원의회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에 불려갔다. 아이슬러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의 형 게하르트가 “모스크바의 대리인”이며 “공산주의자 스파이”라고 고발당하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17) 한스 아이슬러는 미국을 떠나려했지만 강제 수용소로 보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지루하고 품위없는 심리였고, 혐의를 입증하면 추방하겠다고 예고하였다. 마침내 세계적인 연대 캠페인으로 인해 미 하원위원회는 응당한 판결을 내렸고 추방 위험은 종결되었다.18)





그의 친구들이 그의 영예로운 작품으로 구성된 눈부신 작별 연주회를 열었다.19) 󰡔데일리 뉴스(Daily News󰡕는 아이슬러가 그의 편이 되어주고 지지해준 이들의 행동에서 제2의 고향을 찾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지상주의(Americanism)’라는 이름으로 증오와 옹졸함을 퍼뜨리는 이들로부터는 아니다”. 아이슬러는 언제나 그러한 희망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오랜 기간 싸워온 독일의 지역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회주의 음악 문화를 건설하는데 경험의 자산과 새로운 작품과 여러 작곡가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조력하였다. 그의 음악이 연주되고 이해될 때 그는 높은 경의와 만족을 얻었으며, 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생애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광범한 출판을 통해 접근이 용이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신뢰하는 친구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아이슬러가 직접 노래를 배열하고 정리한 노래모음집 제1권 서문에 이렇게 썼다. “기본 태도에서 혁명적인 고견을 보여준다. 이 음악은 청자와 연주자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발생시키며 모든 작품이 종류의 원천이 의지와 교훈으로 가득찬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민감성과 힘을, 인내력과 유연성을, 조바심과 심사숙고를, 막대한 요구와 자기희생을 일으킨다...”





“그의 작품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당신은 이제 형성 중인 세계의 동기와 전망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베를린, 1976





만프레드 그랍스





 



































노동자의 노래가 탄생하다20)





1935















파펜부르크는 북부 독일의 동(東) 프리슬란트에 있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이다. 여기에는 5천명의 독일 노동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수용소21)는 온통 습지와 폐허로 둘러싸여져 있어 불길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그들은 수렁 속에 들어가 물이 빠져나갈 수로를 파내는 작업을 해야 했다. 두 시간 동안 행진하여 작업장에 갔다가 다시 두 시간 동안 행진하여 막사로 돌아와야 했다. 작업은 지독하게 고되었다. 수용자들은 무릎까지 차는 물에서 하루 종일 서서 무거운 삽으로 수로를 파내어야 했는데, 삽은 작업교본 중에서 가장 무거운 도구 중 하나였다. 고무장화도 장갑도 없이 일해야 했기에 류머티즘, 통풍(痛風), 심장병, 습진, 종기와 같은 질병이 급속도로 퍼져 갔다. 수용자들은 경비대의 심히 혹독한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음식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담배조차 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일요일 오후에만 담배가 허용되었다. 작업장으로 오가는 노정은 끔찍했다. 많은 수용자들이 도중에 쓰러졌고, 경비대는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쓰러진 이들을 가격했다.22)





5천명의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23), 사회주의자, 무당적자와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수용소의 현실은 그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위한 멋진 노래를 만들었다. 거기서 탄생한 노래를 <탄지의 병사들>24)이라고 불렀다. 가사는 경비대들 앞에서도 부를 수 있도록, 말하자면 위장된 채로 써야 했다. 부르주아 민요 전문가들이 꾸며대는 것과 달리 이 노래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용자들 중 핵심인자들이 조직적으로 이 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노래의 주요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왜 시와 음악에 대해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던 5천명의 프롤레타리아가 이 곡을 만드는 수고를 택하였는가? 왜 그들은 이를 해야 했으며 어떻게 이런 비범한 노래를 창작할 수 있었는가? 우리 혁명적 직업 음악가들은 경의와 존경을 표하며 그들에게 머리를 숙인다. 나는 이 노래를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혁명가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적 전선에서 계급의식화한 노동자들의 그룹이 던진 거대한 충격은 우리 혁명가들에게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 노래의 목적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동지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행진 중에 공동체 의식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 돌격대(SA)는 수용소의 처음 몇 달간 수용자들에게, 애국적인 노래, 군가 등을 부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흥겨운 행진곡풍의 노래는 비참한 수용자들의 정신상태, 특히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와 극히 대조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존 군가의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넣는 것에서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는데, 정치적으로 성숙한 동지들 간의 소조에서 각기 다른 가사초안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목적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모르는 이들이 가사를 읽게 된다면 여기서 무엇이 혁명적인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곡을 듣는 순간, 갇혀진 우리의 동지들이 혁명적인 노래를 위장하는 문제를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를 깨닫고 압도될 것이다. 이 노래의 1절25)은 자신들이 처한 우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절!















그럼에도 우리에게 불평은 없다





영원히 겨울은 사라지리라





언젠가 우리는 기뻐 말할 것이다:





고향이여, 그대는 다시 나의 것.










이제 늪지의 병사는





더 이상 삽을 메지 않고 저 늪으로 간다





이제 늪지의 병사는





더 이상 삽을 메지 않고 저 늪으로 간다26)















수용자들은 ‘더 이상’이라는 가사를 특히 강조했고 ‘고향이여, 그대는 다시 나의 것’을 고조하여 불렀다. 이곡의 가사는 훌륭한 선율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선율은 16~17세기 독일의 옛 노래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떻게 현대의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중세의 노래를 잘 알았고 특별한 음악 교수도 없는데 그 양식을 빌려올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 대답은 이렇다. 노동자계급 청년운동을 통해 그들은 16세기 농민 봉기의 노래와 스웨덴 약탈자들의 침략에 대항한 30년 전쟁의 노래를 즐겨 불렀기 때문이다.<늪지의 병사들>의 첫 네 마디의 선율은 아래와 같은 가사의 30년 전쟁 당시의 노래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이들아,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라





창문에 부딪치는 울부짖음을.





아이들아, 틸리가 대파괴를 앙갚음 할 때





유령이 거기에 떠돈단다.















틸리27)는 30년 전쟁 당시의 유명한 장군이다.





노래의 다음 소절은 이 인용구를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다. 후렴은 보다 현대적인 형식으로 되어있으며, 군가를 연상케 하고 <늪지의 병사들>이라는 내용에 적합한 형태로 되어 있다. 본절은 단조로 후렴은 장조로 하는 독특한 구성은 러시아의 혁명적 장송행진곡을 연상하게 한다. 거기에도 후렴은 장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합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방식의 효과를 지닌다고 할지라도, 이 곡의 음악적 형식은 다양한 요소의 몽타쥬의 일종이라 개괄할 수 있다.





이 선율을 따라 부를 때 가사는 비통함을 느끼게 하지만, 맹렬한 절정으로 상승하게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후렴에서는 언제나 낙관적인 감정이 드러난다는 것인데, 종결부의 ‘더 이상 삽을 메지 않고’라는 구절에서 더욱 격렬해진다.





이 노래를 내게 가르쳐 준 동지는 이 소절이 각별한 열정으로 불렸으며 곡 전체가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라고 말했다. 우리의 동지들은 나치 돌격대와 경찰 경비대가 수용자들의 행진에서 새로운 노래가 불릴 수 있음에 흠칫 놀랐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들은 제1 캠프의 막사(파펜 부르크에는 다섯 캠프가 있었다)에서 이 노래를 배웠고, 수용자의 큰 그룹들은 이를 신선하고 활기차게 불렀다. 새로운 노래가 탄생했다는 소문이 작업분대와 다른 캠프에도 들불처럼 번져갔다. 모든 수용자들이 이 노래를 배우고 싶어 했고 캠프에서 캠프로 곡을 몰래 들여왔다. 경비대들은 매우 당황했는데 감시의 돋보기로도 공산주의적인 것이나 사회주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곡이 멋졌기에 경비대들도 열광했다. 많은 나치 돌격대와 나치친위대(SS) 요원이 이곡을 베껴줄 것을 요청하고 집에 가져가서 외우는 것이었다. 들은 바로는 이 노래는 나치 돌격대 경비대들에게 뜻밖의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다음의 사건과도 관련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나치 돌격대의 캠프 경비대가 해체되고 믿을 만한 경찰들로 대체되었을 때 나치 돌격대의 몇몇 요원들은 수용자들에게 모든 캠프가 네델란드 접경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수용자들은 이를 도발로 간주하였고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감시의 날 밤에 나치 돌격대 요원 일부가 막사로 몰래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물론 이것은 노래 한 곡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치 돌격대에 영향을 준 원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노래는 혹사당하고, 지치고, 굶주린 동지들이 행진하는데 힘을 주었으며, 인민들에게 그리고 경비대들에게도 도전과 힘과 불굴의 의지의 화신을 전했던 것이다. 일군의 수용자들이 이곡을 부를 때 그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하나의 사건임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늪지의 병사들>에서 어떤 정치적 암시도 찾을 수 없었음에도 관할 군 지휘자가 이 곡을 금지했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 노래는 수용소 바깥의 독일 노동자들이 이미 알고 있기에 금지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으며 수년 내로 세계를 일주할 것이다. 이것은 지대한 의미를 지닌 혁명적 기록이며 혁명적 노동자 계급이 창조한 가장 경이로운 혁명가 중 하나다. 















출처: Bericht u"ber die Entstehung eines Arbeiterliedes(한 노동가요 탄생에 관련한 보고), 타이프 원고, 한스 아이슬러 자료실.





EGW28) Ⅲ/i, pp. 274-278 .





이 글은 1935년 아이슬러가 연대를 위한 여행 중(역자: solidarity tour. 파시즘의 위협으로 인한 정치적 망명기의 활동을 뜻한다.) 뉴욕에서 쓴 것으로, 아마도 위원회(역자: 미국 반전 반파시즘동맹의 지역위원회) 조직을 위한 선전활동으로 작성된 듯하다. 영어 요약본의 등사본은 아이슬러의 유고집이 출처다. <노사과연>















번역: 최상철(운영위원)











1) quality of music. quality가 음색(timbre)이라는 좁은 의미로 쓰인다면 음질로 번역되는 게 맞다. 그러나 여기서는 맥락상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가치판단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이점에 있어서는 맑스와 엥엘스도 마찬가지였다. 맑스와 엥엘스도 예술에 관해서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저작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예술분야에 관한 탁월한 식견들은 맑스와 엥엘스의 저작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맑스-엥엘스의 문학‧예술 분야의 탁견은 1976년 쏘련의 프로그레스 출판사에서 끄릴로프(Б. Крылов)의 편집으로 나온 On Literature(이는 1967년 Marx and Engels, On Art와 1958년 Marx and Engels의 On Literature를 기본으로 편집한 것이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국내 번역은 김영기의 번역으로 논장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을 보면 된다. 노사과연 미학세미나 팀에서 공부를 진행해본 결과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았고, 군데군데 오역과 오류가 많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새로 번역하는 작업도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3) 앞으로 번역할 선집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4) Marc Blitzstein 1905-1964. 미국의 작곡가로 정치적으로 미국 공산당과 가까웠다. 브레히트와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시의 번영과 몰락> 그리고 브레히트와 파울 데싸우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번역 각색하였다.






5) 아이슬러는 혁명적 내용을 담기위해 당대의 발전하는 음악이론과 기법을 적극 수용하였다. 이점과 관련해서 당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일반적으로 주안점을 두었던 고전에 대한 옹호와 일정부분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비화된 것이 루카치와의 갈등이었다. 아이슬러와 루카치의 예술관은 서로 대립하였고 이는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의 리얼리즘 논쟁에서 구체적인 이론투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당대의 논쟁을 형식주의자 대 ‘쏘비에트 공식이론’의 대변가의 대립구도로 단순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 예술논쟁의 지양과정은 당대의 시대 역사적 배경은 도외시한 채 어느 특정한 부분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 논쟁의 지형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하면서 각각의 의의와 한계를 진단하는 과정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자의 생각은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대립과 논쟁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에게 다소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대립된 양측의 주장의 합리적 핵심을 총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우리에게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의 작품은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이미 주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6) 쇤베르크의 이 인용문 이전에는 “음악만큼 그 능력을 개발함에 있어 선생에게 방해를 받는 예술은 없다. 왜냐하면”이라는 내용이 있다. 인용문에서 ‘그’는 음악 선생을 의미한다. 독어 원문은 찾지 못했고 영역은 아래 싸이트에 있다. http://www.modelmayhem.com/519712






7) 나치 집권 후 쇤베르크도 아이슬러처럼 미국 망명을 택한다. 쇤베르크의 제자 중 베베른 같은 이는 독일에 남았고,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같은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치에 동조하였다. 아이슬러는 1920년대에 소부르주아 예술지상주의자 스승을 비판하고 노동계급의 운동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했다. 스승의 12음 기법을 받아들이나 그것을 시공을 초월해 물신화하지 않는다. 






8) 이와 관련해서는 이경분 저의 Musik und Literatur im Exil: Hanns Eislers dodekaphone Exilkantate, Peter Lang, 2001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한국어판이 없는 게 아쉽다.






9) 상부구조가 없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언급한 표현이 아니다. 아이슬러는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에 비해 황량한 미국의 문화를 언급하는 의미로 발언하였다.. 아이슬러가 브레히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계급과 계급이 대립하고 있으나 투쟁은 지극히 초보적인 형태를 띠고 있’고 ‘호화로운 실용주의 이론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닌’ 미국을 묘사하고 있다. 󰡔혁명의 음악 음악의 혁명󰡕, p. 146.






10) 당시 동독 교육과정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는 필독서였다. 사회주의 건설과 반파시즘을 위한 노동계급이 중요한 주체로 떠올랐고 여기에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한스 아이슬러는 오페라 대본 <요한 파우스트>에 제기된 비판과 관련논쟁은 이러한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11) 영어판 선집의 서문에 출처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고백의 원출처는 아래 책이다. Hanns Eisler, Fragen Sie mehr u"ber Brecht, Gespra"che mit Hans Bunge, Leipzig, 1975, p. 72 영역이 그다지 좋지 않아 원문을 보고 다시 손보긴 했는데 독일어 실력이 일천해서 대담형식으로 구성된 원문의 맛을 살리지 못함은 물론 그다지 좋지 않은 옮김이다. 양해를 구한다.






12) 뉴욕의 신사회전문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잠깐 교편을 잡았다. 이경분, 󰡔망명 음악, 나치 음악—20세기 서구 음악의 어두운 역사󰡕, 책세상, 2004. p. 41.






13) 당시 아이슬러는 생계를 위한 상업영화 제작뿐 아니라 노동계급들의 투쟁을 고무하기 위한 비영리 영화의 제작에도 힘썼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4억>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며, <사형 집행인도 죽는다(Hangman also die> 같은 작품도 히틀러를 풍자한 내용이다. 






14) 주로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인 49개의 독립적인 곡의 모음집이며 망명과 관련한 내용이 많으며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실용주의가 판치던 당대 미국에서 이곡은 출판되지 못했고 유명한 바리톤 가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불러 유명해졌다. 이경분, 󰡔망명 음악, 나치 음악—20세기 서구 음악의 어두운 역사󰡕, 책세상, 2004. p. 71. 개인적으로는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아이슬러의 가곡은 특유의 긴장감이 사라진 밋밋함 때문에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추천음반은 1996, Germany, Berlin Classics 0092292BC이다. 노사과연 미학 세미나 게시판에 수록곡 중 브레히트의 희곡 󰡔씨추안의 선인󰡕에 나오는 <자살에 관하여(Über den Selbstmord>를 올린 적이 있으니 관심있으시면 들어 보시면 된다.






15) 1935년부터 작곡하기 시작한 곡이며 1959년 동독에서 초연되었다. 가사는 브레히트를 주로 하고 있으나 아이슬러 자신의 가사와 율리우스 비트너의 가사도 있다. 이 작품은 아이슬러 작품 중 가장 난곡으로 꼽힌다.  CD로는 막스 포머(Max Pommer)가 지휘한 베를린 라디오 합창단 및 베를린 라디오 교향악단의 1988년 녹음으로 들을 수 있다. , Berlin classics 0093262BC.






16) 아이슬러도 브레히트처럼 “신발보다 더 나라를 자주 바꾸었다”. 파시즘의 위협 하에서 망명에 실패하여 결국 자살하는 발터 벤야민과 처형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에른스트 부쉬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스캔들이란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자 미정부가 아이슬러의 사상을 심문하고 여권법 위반을 조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17) 형 게하르트는 망명이전 독일 공산당내에서 중앙조정파였다. 아이슬러와 게하르트를 매카시즘의 광기로 내몬 이 중에는 누이인 루트 피셔도 있다. 루트 피셔는 독일 공산당의 서기였으나 1925년 정치국에서 축출당한 바 있다.






18) 당시 아이슬러를 위해 연대했던 이들 중에는 피카소, 콕토(프랑스 영화감독), 채플린, 코플랜드(미국 작곡가), 번스타인(미국 지휘자)과 같은 저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챨리 채플린은 매일 법정에 아이슬러를 데려다 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이에 반해 한때 친구였던 아도르노는 매카시즘의 공포에 눌려 아이슬러를 피한다. 결국 아도르노는 전후 서독을 택하고 아이슬러와 대척점에 선다. 애초에 아도르노는 필명을 바꾸어서라도 독일에서 나치와 타협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이경분, 󰡔망명 음악, 나치 음악—20세기 서구 음악의 어두운 역사󰡕, 책세상, 2004. p23, p. 69.





   FBI 싸이트를 검색하면 당시 아이슬러와 관련한 기록 문서를 볼 수 있다. 문서는 PDF 파일로 되어 있는데 검게 삭제된 부분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이슬러는 매카시즘 선풍이 있기 이전에도 FBI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었는데, FBI의 끄나풀 중에는 토마스 만의 큰 딸인 에리카 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분, 󰡔망명 음악, 나치 음악—20세기 서구 음악의 어두운 역사󰡕, 책세상, 2004. pp. 203-204






19) 당시 연주회에는 아론 코플랜드, 레너드 번스타인, 로저 세션스(미국 작곡가. 브레히트의 희곡에 의한 <루쿨루스의 심판>작곡.) 등이 참여하였다. 뉴욕 시 음악당에 모인 청중은 우익 언론이 ‘헐리우드 작곡가’로만 표현했던 아이슬러의 진면목에 감탄했다. 󰡔혁명의 음악 음악의 혁명󰡕, pp. 203-204.






20) 이 글의 번역은 기존에 출판된 󰡔혁명의 음악 음악의 혁명󰡕, pp. 249-253.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약간의 역주를 추가했고 오역과 누락 오류를 정정하였다.






21) 당시 나치 수용소의 입구에는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걸려있었다. 이 구호는 우익 민족주의자인 로렌츠 디펜바흐(Lorenz Diefenbach)의 1872년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좌파 재즈록 밴드인 아레아(Area)는 이 구호를 자신의 1973년 첫 번째 음반 제목으로 가져왔는데 음반 커버는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여 멋지게 패러디 하고 있다.






22) 이상의 묘사를 보면 독일 나치의 수용소보다 오히려 한국 파쇼 정권 하의 삼청교육대나 청송감호소가 더욱 혹독한 것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23) 공산주의자만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기에 강조하였다.






24) 원주: 모르데케 바우만(역자: Mordecai Baumann. 뉴욕 브루클링 대학의 교수였으며 바리톤 가수였다. 이 당시에는 쥴리아드 음악원을 막 졸업한 학생이었다.)에 따르면 ‘<탄지의 병사들>의 노래’는 모든 집회의 음악적 절정에 도달케 하는 것이었고, 전국적으로 퍼졌다고 한다. 이곡은 1933년 8월 북부 독일의 파펜부르크 인근 뵈르거무어(Bo"rgermor)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이 만든 것이다. 에세르(Esser)라는 이름의 광산노동자와 후일 베를린 독일극장의 총감독이 된 볼프강 랑코프(Wolfgand Langhoff)가 작사하였다. 남성 4부 합창은 사무직 노동자 루디 고구엘(Rudi Goguel)이 작곡하였다. 수용소 수감자들의 써커스(Circus Conzentrani)라 불린 공연에서 16명의 합창단이 최초로 불렀다. 수용소 석방자들은 이 노래를 널리 보급하였다. 아이슬러는 1935년 1월 런던에서, 후일 게슈타포의 정보원임이 판명된 이로부터 이 곡을 들었다. 아이슬러는 이 곡의 선율을 편곡하여 피아노 반주를 붙였다.





   역주: 이곡의 원제는 이며 유명한 에른스트 부쉬도 이곡을 불렀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이곡을 불렀는데 이는 그 당시의 투쟁가를 모은 레코드를 발견하고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스페인 내전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에른스트 부쉬같은 인물이 이곡을 널리 알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원제 또는 영어 번안 제목 ‘Peat bog soldiers(탄지의 병사들)’로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또 http://wikipedia.org에서 검색을 하면 원 독일어 가사와 영어 스페인어 번역까지 볼 수 있다. 이곡은 독일의 진보적인 가수인 하네스 바더(Hannes Wader)의 1976년 음반 에도 실려있는데 그 곡 파일은 조만간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미학 세미나 게시판에 올려 놓겠다. 이 음반 파일을 전해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25) 독일어 원곡 1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 어디에도/늪지와 황야만이 빙 둘러 있네/새들의 노래로도 위로되지 않고/헐벗고 굽은 나무만이 서있네






26) 가사 번역은 독일어 원가사를 기준으로 하였다. 선집에 있는 영역은 많은 부분 의역이 되어 있다. 후렴부 가사가 3절에서 바뀐다. 1, 2절의 후렴은 “우리는 늪지의 병사/그리고 삽을 끌고 저 늪으로 간다(반복)”이다.






27) 30년전쟁 중 3기 스웨덴 전쟁(1630-1635)이 배경이다. 신교를 옹호하던 스웨덴군은 프랑스의 후원 하에 독일을 침략한다. 스웨덴군은 신성로마제국 군대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틸리도 전사한다. 1632년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도 전사하고 1635년 프라하 화의가 성립한다. <늪지의 병사들>이 탄생한 배경이 이러하기에 스웨덴에서는 잘 불리지 않는다고 한다.






28) 한스 아이슬러의 전집(Hanns Eisler, Gesammelte Werke)의 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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