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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자본론」 2권 해제 (5)
글쓴이 에르네스트 만델 E-mail send mail 번호 120
날짜 2009-04-20 조회수 2889 추천수 131
파일  1240226125_만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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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맑스의 자본주의 일반분석에서 제2권이 차지하는 지위





2. 자본의 세 가지 형태





3. 맑스의 경제이론에서 자본회전의 이중적 특성





4. 맑스의 재생산표식이 갖는 중요성




















5. 재생산표식의 이용과 오용










맑스의 재생산표식은 그 분석적 유용성이 추종자들과 적대자들 모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한 이래, 지난 70년 동안[이 해제는 1978년에 씌어졌다―역자]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고 남용되었다. 우리는 이미 표식을 남용한 가장 역설적인 형태 중 하나, 즉 부문들 간의 올바른 ‘비례’(‘균형조건들’)가 유지‘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는 조화롭고 제한 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재생산표식을 이용한 것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러한 탈선에 책임이 있는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맑스의 기본 전제를 간과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바로 그 구조, 그리고 그 운동법칙들은 ‘균형조건들’이 필연적으로 파괴됨을 의미한다는 것; ‘균형’과 ‘조화로운 성장’이란 불균형(두 부문 사이의 ‘오버슈팅’(overshooting)[경제에 어떤 충격이 가해졌을 때 가격과 수량 등이 변화된 조건에 조응하는 새로운 균형상태로 부드럽게 수렴하지 않고 극단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는 현상을 가리킴.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장기균형수준으로 수렴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실제 진행은 오히려 끊임없는 오버슈팅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역자])과 불균등성장이 정상적인 조건인 상황에서 드문 예외(또는 장기간에 걸친 평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이 문제를 다른 곳[��정세와 노동�� 2006년 11월호에 수록된 ��자본론�� 2권 해제(3)을 참조-역자]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동일한 논의를 여기서 반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가치결정의 동학소비지출의 비결정성으로 인해 조화로운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두 부문 사이의 정확한 비례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자본주의 하의 확대재생산―자본주의적 재생산―이 갖는 본래적 특성은 생산이 더 확대된 규모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변화된 기술적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과 생산비용의 끊임없는 혁신은 맑스가 (자본주의의 숭배자들과 아첨꾼들을 포함한)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적확하게 강조한 체제의 기본적 특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끊임없는 혁신은 사회적 규준(datum)인 상품가치의 주기적 변동을 수반한다. 이것은 투입 수준에서의 가치가 산출 수준에서의 가치를 자동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입물’의 특정 부분이 사회적으로 낭비되었는지 아닌지는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야 밝혀질 것이다. ‘독점체들’이나 ‘국가’의 주관적 의지조차도, 신케인즈주의(neo-Keynesian) 계획가의 영민함조차도 사적 소유와 경쟁이 지배하는 곳에서 가치법칙이 관철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어떤 것도 이러한 상품가치의 장기적 변동이 상이한 생산분야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노동 투입을 재분배하는 것(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생산수단까지도 재분배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잉생산공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부문간 비례뿐 아니라 산출과 ‘최종소비’ (다시 말해 임금과 봉급 소득자 대중에 의한 소비, 무엇보다도 현대 산업사회에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총 소비자 수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사이의 비례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불가능하다. 첫째로 노동자들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임금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임금을 소비하는지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심지어 95% 옳은 예측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판매되지 않은 나머지 5%의 소비재가 남아 있게 되며, 이것만으로도 눈사태(avalanche, 과잉생산공황을 가리킴-역자)가 시작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둘째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들은 그 생산양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워진 사람들의 구매력을 제한하는 한계를 넘어서까지 (소비재 생산을 포함한) 생산능력을 발전시키는 내재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비례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다.1) 그러나 산업순환과 공황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에서는 그러한 내재적 불비례의 실체를 입증하는 것(지난 150년 이상 동안 과잉생산공황이 주기적으로 재발해 왔음을 고려할 때, 이것은 결국 거의 자명한 이치로 되었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주기적 불균형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운동법칙들을 연관시키는 정확한 메커니즘을 또한 발견해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타도된 쏘련과 다른 나라들에서, 맑스의 재생산표식은 ‘사회주의적 계획’의 도구로서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우리는 재생산표식이, 유추를 통해, 모든 종류의 사회에서 부문간 구조와 동학의 특정한 문제들을 연구하는 유용한 도구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우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반복하지만, 재생산표식은 상품생산에 관련된 것이며 상품과 화폐소득의 이중적 흐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재생산표식의 이용을 일반화된 상품생산을 넘어선 사회, 생산수단들의 가장 중요한 대부분이 그 ‘가치’에 기초해 판매되는 상품이 아니라 계획에 따라 국가(계획 당국)가 분배하는 사용가치인 사회2)로까지 확장하는 것―이것은 그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 역설의 축적을 야기한다.





고인이 된 모리스 돕이 좋은 예이다. 1950년대에 그는 스탈린의 이른바 ‘사회주의에서 생산수단 발전의 선도성 법칙’과 양 부문 최적성장률의 설정을 둘러싼 쏘련과 동유럽 경제학자들 사이의 ‘대논쟁’에 참여하였다.3) 맑스의 재생산표식이 상품들의 가치계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잊고, 돕은 I부문의 현재 성장률이 II부문보다 높지 않다면 미래의 소비재 성장률 증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다섯 번째 세대부터 시작되는 소비성장률의 증가를 위해 네 세대 동안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소비를 희생하는 정책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적 규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순전히 정치적으로 발생한 사고(事故)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합리적으로 동기를 유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돕의 주장이, 당연하게도, 완전히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계산은 기껏해야 I부문의 가치가 지금 즉시 II부문보다 더 빠른 비율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x년 후에 생산된 소비재의 가치가 점증하는 비율로 증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 개별 노동자도, 노동계급 전체도 (사회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소비재 가치 성장률의 지속적 증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반대로, 그들은 노동생산성의 증가를 통해 가능한 한 그 ‘가치’를 감소시키고 상품생산과 시장경제를 소멸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기본적 관심은 합리적 소비욕구의 충족을 가장 빨리 최적화하는 것, 다시 말해 소비재의 최적 바스켓을 가능한 최저의 비용으로 생산하는 것[그것에 의해 생산자 노동 경제(economy of the labour of the producers)의 극대화와 소비자 욕구 충족의 극대화를 결합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상품가치(또는 이윤)의 극대화와 동일하다고 믿는 것은 중대한 이론적 오류일 뿐 아니라 재앙적인 정치적 사회적 오산이다.





I부문이 II부문보다 더 빠르게 확장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에 의거해 이른바 ‘사회주의’의 ‘구조법칙’을 부활시키려 한 1960년대의 시도들은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4) 이 모든 시도들은 재생산표식의 가치적 특성을 추상하였으며, 사회적 욕구충족의 최적화를 위해서는 생산수단 산출을 지속적이고 무제한적으로 확대하는 것과 함께 (건강, 교육, 예술적 창조, ‘순수’ 과학 연구, 육아 등등과 같은 사회적 서비스보다) 물질적 생산재의 창조에 사회의 총노동잠재력의 더욱 많은 부분을 할당해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들 중 어느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의 변호론적인 기능―쏘련과 ‘인민민주주의공화국들’의 현재적 실천에 대한 직접적인 합리화―은 어떤 비판적 연구자에게도 명백하다.





오스카 랑게와 브로니슬라브 민크(Bronislaw Minc)는 둘 다, 자본주의적 재생산표식과 사회주의적 재생산표식의 차이를 명확히 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기술진보는 반드시 I부문이 II부문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재 (연간)생산물 단위당 생산수단에 대한 현재 지출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올바르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추가해야 한다.5)





로자 룩셈부르크는 재생산 표식의 형태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가치생산에만 적용될 수 있으며, 이 형태에 상응하는 운동법칙들은 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표식으로부터 도출된 ‘균형비율들’에 그것들에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비역사적이고 영속적인 타당성을 부여하는 잘못을 저질렀다.6)





사회적으로 전유된 잉여생산물이 잉여가치를 대체한다면, 균형공식은 [변화된 사회구조에 대응하는 재생산의 상이한 사회적 목표를 표현하는] 새로운 형태를 취할 것이다. 잉여가치는 단순히 자본주의에서 생산된 총상품가치의 일부분이 아니며, 새롭게 생산된 가치생산물(국민소득)의 일부분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목적이다. 이처럼 잉여가치는 [현실을 높은 추상수준에서 묘사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재생산표식에서 단순한 기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맑스에게 있어 표식은 수량화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특정한 비율로 재생산되는 것을 다룬다. 그러나 표식은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의 재생산을 표현한다.7) 모든 것은 v + Ⅰs = Ⅱc 라는 공식에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하에서 s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





더욱이 상품생산이 소멸하고 잉여노동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서비스와 경제성장의 개념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는, ‘비례공식’으로부터 도출된 ‘균형’ 개념의 의미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상품생산사회에서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비례가 어긋나게 되면 양자 모두의 생산이 감퇴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는 이와 같은 고정불변의 연관은―심지어 노동 투입과 사용가치 투입 사이의 필수적 비율(이라는 ‘영속적 법칙’의 형태)로서조차도―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본론�� 제2권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의 폐지 이후에는 생산설비, 원료, 식료품의 “끊임없는 상대적 과잉생산”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맑스는 “이러한 종류의 과잉생산은 사회가 그 자체의 재생산의 물질적 수단들을 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8)





일정한 소비수준에 도달해 있고, 노동부담의 감소라는 단일한 목적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하도록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사회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거기서는 점점 더 적은 노동투입으로 ‘이상적인’ 사용가치 묶음의 생산과 분배를 보장하는 데 노력이 집중될 것이다. 사용가치 수준에서 ‘단순재생산’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이것은 예컨대 매년 (인구가 1%씩 증가하고 노동생산성이 5%씩 증가할 경우) 4%씩의 노동일 감축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을 ‘축소재생산’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사용가치를 기준으로 계산할 것이기 때문이고, 맑스의 재생산표식에서 ‘축소재생산’이라는 개념은 공황, 경제적 균형의 교란과 생활수준의 하락이라는 관념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에 방금 서술한 조건들은 물질적 생산과 재생산의 원활한 지속, 안정적 생활수준, 어떠한 종류의 공황도 없는 상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부문 간의 노동, 생산수단, 소비재 흐름에서 특정한 비율을 유지하지 않고도 계획된 사회주의적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원의 이와 같은 비례적 배분이야말로 사회주의적 계획의 본질이다. 이것은 단지 가치계산과 노동시간 계산 사이에―한편에서 잉여가치의 전유와 축적의 동학과, 다른 한편에서 [연속적인 생산국면들에서 달성되고 고정된 길이의 시간 동안 생산된 사용가치의 양으로 측정되는] 효율성(노동생산성) 증대의 동학 사이에―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9)





민크는 룩셈부르크보다 훨씬 더 나아가, 두 세대에 걸친 스탈린주의 및 스탈린 이후 동유럽과 쏘련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재생산표식에 표현되어 있는 맑스의 확대재생산 이론의 기본 테제들은 사회주의에서도 완전히 유효하다.”10) 맑스와 엥엘스의 명시적인 이론과 정반대로, 이와 같은 ‘사회주의적 생산’은 일반화된 상품생산, 다시 말해 일반화된 가치생산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어떤 종류의 내재적인 잉여노동 증가의 ‘법칙’이 통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맑스는 이와 같은 법칙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루고 있는  확대재생산표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1)










[역자의 말: 이번 호의 연재를 읽을 때 약간의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만델이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재생산표식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애초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을 위해 고안된 재생산표식을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에까지 수정 없이 확대적용함으로써 발생한 오류에 대한 만델의 비판은 분명히 타당하다. 그러나 1928년부터 시작된 쏘련의 중공업 우선정책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포위된 상태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했던 쏘련이 유럽에서 파시즘의 신장과 제국주의의 침략 위험성 증대라는 엄혹한 현실을 급속한 생산력 발전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던 사실상 강제된, 필연적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이에 관해서는 바만 아자드 저/채만수 역,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노사과연, 2007, p. 77이하를 참조하시오). 그러한 선택을 재생산표식을 이용하여 정당화하려 했던 시도가 잘못이었고, 또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절대 다수의 근로인민에게 충분한 소비재를 공급하려는 노력이 불충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델과 같이 ‘단순한 정치적 사고(事故)’로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외에도 ��자본론�� 해제 전반에 걸쳐 언뜻언뜻 드러나는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만델의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에 대해서는 만델이 정치적으로 트로츠키주의의 적자임을 자임하는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인물이었음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다음호에 계속) <노사과연>















[역자 주: 그간 번역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2년 이상 연재가 중단되었던 에르네스트 만델의 ��자본론�� 해제(Introduction) 번역을 재개한다. 펭귄 출판사 판 ��자본론�� 영역본 각 권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이 해제는 ��자본론��에서 전개된 맑스의 이론과 이후 전개된 논쟁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자본론�� 1권 해제는 ��정세와 노동�� 창간호(2005년 5월호)부터 2006년 6월호까지 연재되었으며, ��자본론�� 2권 해제의 일부는 2006년 8, 9, 11월호와 2007년 1월호에 연재되었다. 앞으로 남은 2권 해제와 3권 해제까지 꾸준히 연재할 것을 약속드린다. 이번 호에는 제2권 해제의 5절(Capital, Volume 2, Penguin Books, 1978, pp. 31~38)을 번역하여 싣는다.]















번역: 강성윤 (교육위원장)











1) 칼 맑스/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I, 백의, 2000, p. 25를 보시오. 또한 ��자본론�� 제3권 15장 3절에서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특정한 생산 분야의 균형은 끊임없는 불균형의 과정으로서 나타난다’고 언급하고 있는 부분(칼 맑스/김수행 옮김, ��자본론�� III(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p. 308)을 참조하시오.






2) 협동농장과 소규모 수공업자들이 판매하거나 암(유사)시장으로 불법적으로 흘러드는 생산수단들은 예외이다.






3) 모리스 돕, On Economic Theory and Socialism, London, 1955, pp. 330-31, 150-51, 그외 다른 곳들.






4) 그 중에서도 P. Mstislawski, ‘On the Methodology to Justify Optimal Proportions of Social Reproduction’, in Voprosy Ekonomiki, No. 5, 1964; Helmut Koziolek, Aktuelle Probleme der Politischen Ökonomie, Berin, 1966; Rudolf Reichenberg, Struktur und Wachstum der Abteilungen Ⅰ und Ⅱ im Sozialismus, Berlin, 1968을 보시오.






5) 오스카 랑게, Theory of Reproduction and Accumulation, Warsaw, 1969, pp. 32-3, 그리고 Bronislaw Minc, Aktualne zagadnienia ekonomii politicznej socialismu(��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현재 문제들��), Warsaw, 1956을 보시오.






6) 로자 룩셈부르크, The Accumulation of Capital, London, 1963, pp. 84-5. 그러나 앞부분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모든 계획생산체제에서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의 모든 노동과 생산수단 사이의(우리의 공식에서 v+s와 c 사이의) 관계, 즉 총 필수소비재(다시, 우리의 공식에서 v+s)와 c의 관계가 규제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에서는, 죽은 생산수단의 유지와 또한 살아 있는 노동력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사회적 노동은 수행된 잉여노동과, 다시 말해 잉여가치 s와 대비되는 하나의 실체, 자본으로 취급된다. 이 두 개의 양 c와 (v+s) 사이의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명백히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관계이다: 이것이 평균이윤율이다”(같은 책, p. 79).






7) ��자본론�� 제3권 51장[분배관계와 생산관계-역자]을 보시오.






8) 김수행 옮김, ��자본론�� II(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p. 568을 보시오.






9) 엥엘스의 ��반뒤링론��에 있는 다음 문단을 참조하시오: “사회가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그것을 직접 사회화하여 생산에 이용한다면, 각인의 노동은 그 특유하게 유용한 성격이 아무리 상이하더라도 처음부터 직접 사회적 노동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생산물에 들어있는 사회적 노동의 양을 확정하기 위해서 우회로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 날마다의 경험이 평균적으로 얼마만큼의 사회적 노동이 필요한가를 직접 알려준다. 사회는 증기기관 한 대에, 최근에 수확된 일 부셸의 밀에, 일정한 질의 백 평방 야드의 천에 얼마만큼의 노동시간 수가 들어 있는지를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사회가 생산물에 투입된 노동량을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알고 있는 이상, 그 노동량을 자연적 척도, 적합한 척도, 절대적 척도, 즉 시간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전히 상대적일 뿐인 척도, 동요하는 척도, 불충분한 척도, 예전에 임시변통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척도, 즉 제3의 생산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사회의 머릿속에 생겨날 리가 없다. 이는 마치 화학이 원자량을 절대적으로, 그 적합한 척도로, 즉 일조분의 일 그램 혹은 일조의 제곱분의 일 그램이라는 실제적 무게로 표현할 수 있게 될 경우에 원자량을 수소 원자라는 우회로를 거쳐서 상대적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화학의 머릿속에 생겨날 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위에서 말한 전제에서는, 생산물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사회는 백 평방 야드의 천을 생산하는 데 예컨대 천 노동시간 수가 필요했다는 간단한 사실을, 이 천은 천 노동시간 수의 가치가 있다는 애매하고 무의미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에도 사회는 각 사용대상의 제작에 얼마만큼의 노동이 필요한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는 생산수단에 의거하여 생산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특히 그 생산수단에는 노동력도 속한다. 서로 다른 사용대상들의 유용효과들, 즉 서로를 계량기준으로 하고 또 그러한 대상들의 제작에 필요한 노동량을 계량기준으로 하여 측정된 유용효과들이 결국 계획을 결정할 것이다”(��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1994, pp. 338-9 또는 김민석 옮김, ��반듀링론��, 새길, 1987, pp. 329-30). 또한 다음과 같은 맑스의 관찰을 참조하시오: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 . .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중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몫의 척도가 된다”(김수행 옮김, ��자본론�� I(제2개역판), 비봉출판사, 2001, pp. 100-1).





   라이헨베르크(Reichenberg, 앞의 책)는 자본주의적 재생산표식과 사회주의적 재생산표식에 대한 혼동이 필연적으로 어떤 이론적 왜곡을 야기하는가를 적확하게 보여준다. 우선 그는 조용히 서비스 분야(sector)의 물질적 도구들을 소비재를 생산하는 II부문에 포함시킨다(p. 16). 다음으로 그는 ‘과학기술혁명’의 결과로 인한 ‘확대재생산의 강화’에 관해 언급한다―이 강화는  “(v+Ⅰs)와 Ⅱc 사이의 차이가 동일하게 유지된다면, 점증하는 축적과정이 가능하다”(p. 21)는 사실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는 이 축적의 목적을 명시하지 못하고 있다. c가치가 그 목적인가?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두 가치량 사이의 차이는 그 양들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변경될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사용가치들의 축적이 그 목적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주어진 사회적 필요노동량으로 더 많은 양의 (소비재 산출을 위한) 원료와 도구를 생산한다는 것은 명백히 노동생산성 증가의 정의 그 자체이다. 그리고 동시에 라이헨베르크는 이 재화들의 가치가 (따라서 가치 측면에서 본 확대재생산의 동학도) 변하지 않았다고 시사하고 있다!






10) Bronislaw Minc, L'Économie politique du socialisme, Paris, 1974, p. 167.






11) “이리하여 개별자본가들이 점점 더 큰 노동자집단을 지휘하게 되며(가변자본이 불변자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아무리 감소하더라도), 그들이 취득하는 잉여가치량[따라서 또 이윤량]은 이윤율의 저하와 함께 그리고 그 저하에도 불구하고 증대한다”(��자본론�� 제3권 13장, 김수행 옮김, ��자본론�� III, pp. 262-3, 강조는 만델). 인용문의 바로 앞 문장에서 맑스가 명시적으로 자본축적, 따라서 확대재생산을 언급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문장은 사회주의에서의 경제성장을 고려하는 조금도 덜 명시적이지 않은 다음 문장과 대비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임금이 그것의 일반적인 근거, 즉 노동자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 자신의 개인적 소비에 들어가는 부분으로 환원된다면; 만약 이 몫이 그것의 자본주의적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현존의 사회적 생산력(즉 현실적으로 사회적 노동인 자기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허용하며 그리고 개성의 완전한 발달이 요구하는 소비 범위로까지 확대된다면; 만약 잉여노동과 잉여생산물이 주어진 생산조건에서 한편으로는 보험재원과 준비재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재생산을 사회적 욕구에 따라 결정되는 수준으로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로 축소된다면 . . . 다시 말해 임금과 잉여가치로부터 그리고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부터 특수하게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모두 벗겨 버린다면 이러한 형태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러한 형태들의 토대들―모든 사회적 생산양식에 공통되는 것―만이 남을 것이다”(��자본론�� 제3권 50장, 김수행 옮김, ��자본론�� III, p. 1063, 강조는 만델). 이 인용으로부터, 맑스에게는 형태의 차이가 양, 특히 성장 추세에 있는 동학적인 양의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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