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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케인즈주의는 왜 인기가 있는가 (2)
글쓴이 에브게니이 바르가 E-mail send mail 번호 119
날짜 2009-03-25 조회수 3449 추천수 142
파일  1237937569_케인즈.hwp

  













에브게니이 바르가











II










이러한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데도 왜 오늘날까지도 케인즈가 부르주아 경제학이나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정책에서 최대의 권위로 되어 있는 것일까?





케인즈가 그 주저(主著)를 쓴 것은 1930년대 전반, 즉 1929년에 시작되는 사상 최대의 경제공황과 그에 이은 길고 심각한 불황의 시기,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대량실업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존재하고 있음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맑스주의자가 확인한 바이지만, 이것은 이미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고전파 부르주아 경제학의 아류가 주장하던 자본주의의 조화성이라는 학설, 결국 발생하는 모든 곤란들을 자본주의의 내적인 힘이 모두 자동적으로 극복한다고 하는 학설은 파산해버렸다.1) 자본주의의 질환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케인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경제사회의 현저한 결함은 완전고용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과 부 및 소득의 자의적이고 불공정한 분배이다.”2)





케인즈가 과제로 삼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자본주의의 결함들, 특히 만성적인 대량실업은 자본주의 제도 그 자체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심리적 법칙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고, 따라서 그 책임은, 지배적인 대(大)부르주아지, 독점자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와는 관계가 없는 영구적인 요인들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2) 실제로는 독점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봉사하면서도 외형상으로는 개량주의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책들을 권고하는 것.





W. 포스터는 이를, “케인즈주의는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 대한 자본주의 경제의 해답이다”3)라고 규정했다.





케인즈는 어떻게 해서 자본으로부터, 부르주아지로부터, 자본주의의 결함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면제할 수 있을까?





그는 우선 모든 종류의 불로소득을 정당화한다. 불로소득의 원천은, 그에 의하면, 물론 잉여가치의 취득, 즉 착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계효용설적 의미에서의 생산요소들의 희귀성에 있다. 부르주아지는 자본이 ‘희소’하기 때문에 소득을 취할 자연권을 가지고 있고, 토지소유자는 토지도 역시 ‘희소’하기 때문에 지대를 취할 자연권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자본의 소유자는 그의 자본의 ‘유동성’을 일시 넘겨주는 것에 대한 보수(報酬)로서 이자를 취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여기에서는 낡은 ‘제욕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회사의 수뇌자(首腦者)인 자본가는 그들의 일이 고도의 숙련을 요함과 동시에, 기업에 투하함으로써 그 자본을 리스크(risk,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에 이윤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대량실업과 거기에서 생기는 노동자계급의 궁핍은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케인즈 이론에서 크게 선전되고 있는 진부한 설(說)을 기초로 하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용노동자의 수는 ‘유효수요’, 즉 소비지출과 신규투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만일 소비성향과 신규투자율이 유발하는 유효수요가 불충분하다면, 현실의 고용 수준은 현존의 실질임금으로 잠재적으로 사용 가능한 노동공급량에 달하지 않을 것이다.”4)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실업이 설명된 게 아니다.





케인즈에 의하면, 기업가가 보다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면, 각 노동자가 가져다주는 이윤은 그만큼 적어지는(“수익체감의 법칙”) 것이기 때문에 실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5) 노동자의 고용이 증가하면, 수행된 일에 비해서 임금의 지출이 많아지고, 마침내는 이윤 일반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업의 두 번째 원인은 모든 사람이 그 소득을 전부 개인소비 또는 투자에 쓰지 않고, 소득의 일부를 화폐 형태로 보유하는 길을 취하고, 그 소득부분에 대해서 일정한 이자를 요구하여 수취하는 점에 있다. 대부자본에 이자를 지불하는 것은, 노동자의 사용에 충당된 자본이 자본가에게 가져다주는 소득이 대부자본에 대하여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자 이하로 내려갈 때에는,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사용을 중지시킨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자율은 “고도로 심리적인 현상”6)이다. 그러나 “대출자와 대부자를 결합시키기 위한 비용과 ... 장래의 이자율에 대한 불확실성이 최저의 한계를 규정한다. 그것은 현상적(現狀的)으로는 장기대부의 경우 아마 2% 내지 2.5% 정도의 높이일 것이다.”7)





구제 불능의 절충주의자인 케인즈는 여기에서 한계효용설과 크나프(Knapp)의 화폐수량설을 뒤섞고 있다.





케인즈는 장황하고 무내용한 논의 끝에 대부자본과 이자율이 자본의 한계수익률을 규정하고, 그에 의해서 고용의 감소와 실업의 증대가 야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산업자본으로부터 실업의 책임이 면제된다.





이 논증은 둘 다 모두 절대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공황에 앞선 호황국면에서 고용이 거의 완전고용 상태에 있고, 시간외 노동이 널리 행해지고 있을 때에는 임금 지출이 약간 증대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된 생산물의 한 단위당의 총 비용은 감소하고, 더욱이 ―이것이 결정적이지만― 가격은 등귀한다. 생산과 고용이 감퇴하는 것은, 임금과 이자의 지불에 다액이 지출되는 결과 이윤이 감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품의 과잉생산 때문이다.





이자의 역할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자는 이윤의 일부분이고, 이자율의 높이는 수요공급에 의해서 규제되며 또한 많든 적든 이윤율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케인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거꾸로 이윤이 이자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은 맑스주의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를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용공황의 짧은 시기만은 예외이다.





케인즈의 명제가 오류임은 이제 통계자료에 의해서도 입증할 수 있다. 어떤 임의의 자본주의적 대 회사의 상세한 결산표를 분석해보면, 이자지불을 위한 지출은 생산비의 사소한 부분을 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분기마다 ��에코노미스트��지에 발표되는 영국의 거대 회사들의 기말 결산표를 보면, 중역의 보수에 할당되는 금액만으로도 사채(社債) 이자 지불액을 상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미국의 500대 회사에 관해서 본 “투하자본 이윤율”9)은, 10.3%였다.10) 비교적 소액의 차입금에 대하여 지불할 이자의 율이 어떻게 해서 고용 수준을 규정하는 요인일 수 있겠는가?





미국의 (은행과 보험회사를 제외한) 총 자본에 관해서 보더라도 상태는 마찬가지이다.





1962년에 관한 자료는 [표2]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표2] 미국 회사들의 자금 원천의 구성1)       (단위: 억 달러)



































회사들의 자금 총액





         576





        그 가운데  사채(社債)



                   기타 차입금



                   은행 차입금





          50



          25



          30





               [외부자금] 소계





         105



1) Survey of Current Business, May 1963, p. 10. 여기에서는 무이자 유동부채는 계산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부채의 평균이자율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령 6%였다고 한다면―이는 대단히 고율이다―, 이자 총액은 6억 달러가 된다. 미국의 (은행과 보험회사를 제외한) 주식회사의 이윤 총액은 1962년에는 약 400억 달러였다. 이들 주식회사가 이자를 전혀 지불하지 않아도 좋았다고 하더라도 이윤에 대한 그 영향은 극히 사소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는 차입금의 이자율이 결정적인 영향을 가지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그의 저서의 많은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실업의 기본적 원인이 자본주의 제도 그 자체에 있다는 것,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적 자본주의적 취득과의 모순―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산을 무제한으로 확대하려고 하는 자본의 욕망과 소비의 한정된 틀, 혹은 일상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시장의 만성적인 협소함과의 모순11)에 있다는 것은, 맑스주의자라면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자본주의 하에서 농촌과잉인구라고 하는 형태로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실업, 또한 산업의 과잉생산공황 때에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실업은 전반적 위기의 시기에는 만성적인 대량실업으로 변해간다. 실업은 생산의 합리화, 기계화, 자동화에 의해서 강화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시(戰時)의 비상한 인적 손실이나, 출생률의 저하, 수천만의 인간이 군대 및 군수생산에 흡수된 결과 만성적 대량실업은 일시적으로 감퇴했다. 실업은 이제 2ㆍ30년 내에 자본주의의 최대의 난문제가 될 것이다. 케인즈가 고안해낸 설명은 실업의 진실한 원인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이다.





케인즈가, 완전고용의 달성과 그 때문에 생겼다고 하는 이윤의 감소라고 하는 것으로 과잉생산을 설명하는 것은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우는 것이다.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본의 축적에서의 이 절대적 운동들이 착취 가능한 노동력의 양에 있어서의 상대적인 운동들로서 반영되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력의 양 그 자체의 운동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12)





대부르주아지, 특히 산업 대부르주아지가 왜 케인즈를 그들의 예언자라고 불렀는지, 그 이유는 전적으로 명백하다.





국가자본주의적 방책의 도움에 의해서 부르주아 제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케인즈는 선언한다. 그는 경제에의 국가 개입을 지지하고, 그것을 “현존하는 경제적 형태들의 전면적인 붕괴를 회피하는 유일한 실행 가능한 수단임과 동시에 개개인의 창의를 효과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조건을 이루는 것”13)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자본주의의 주요한 결함인 과잉생산공황과 대량실업의 책임은, 부르주아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고임금’에 있다고 주장한다.





무수한 실례(實例) 중에서 하나만을 들어 부르주아지가 케인즈의 이 학설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를 보자. 록펠러 재단 최대의 콘체른인 미국의 ‘체이스 맨허튼 은행’ 부행장인 윌리엄 버틀러는, 미국에서 1960년에 시작된 공황은 다음과 같은 원인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은 1인 1시간당 산출고보다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단위 노동비용을 연율 약2% 정도 상승시켰다. ... 그리하여 단위 노동비용이 증대했기 때문에 이윤은 압축되었다. 이윤율의 감퇴는 언제나 새로운 공장과 시설을 위한 지출의 삭감을 초래한다. 업계는 수익률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고정자산의 성장률을 인하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커다란 수익을 약속하는 투자계획만이 순조롭게 진척될 수 있는 것이다.”14)





이것과 거의 한 자 한 구 다르지 않은 명제가 케인즈파의 교과서에도 보인다.





케인즈가 실업을 줄이는 수단으로서 대부르주아지에게 하고 있는 권고는 독점체의 이익에 완전히 합치하고 있다. 임금을 인하하기 위해서 그는, 통제 인플레이션에 의해서 가격을 천천히 인상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명목임금을 인하할 때에는, 노동자의 소비물자의 가격이 등귀한 결과 임금이 간접적으로 인하되는 경우보다도 노동자의 저항이 훨씬 크기 때문에 자본가는 명목임금을 인하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사실, 화폐임금 계약을 낮은 수준으로 바꾸려고 하는 고용주의 운동은 물가등귀의 결과 실질임금이 서서히 또한 자동적으로 인하되는 경우보다도 훨씬 강한 저항을 받을 것이다.”15)





전후(戰後) 시기에는 대다수 국가의 부르주아지가 실로 이러한 정책을 실행했다[표3].










[표3] 소비자 물가지수1)                          (1953년=100)













































































연도





미국





영국





이태리





프랑스





서독





인도





캐나다





일본





1948





 90





 77





 86





  70





 99





 91





  87





 63





1960





111





121





115





 134





111





116





 111





114



1) Statistical Yearbook of the United Nations, 1961, p. 480 여기저기; Monthly Bulletin of Statistics, June 1963, p. 144 여기저기. 격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의 숫자는 들고 있지 않다.










이들 국가의 물가등귀의 정도는 다양하지만, 일반적 경향은 마찬가지이다.





경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케인즈는 자본가에게 적자재정에 의한 공공사업의 실시(와, 덧붙여 말하자면, 국가로부터 유리한 주문을 받을 가능성)을 권고하고 있다.





그는 생산설비능력을 과도하게 확대하지 않도록 기업가에게 충고하고 있다. “... 자본은 그 수명과 같은 기간에 걸쳐서 적어도 이자율―그것은 심리적 그리고 제도적 사정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과 같은 한계효율을 갖는 데에 충분할 만큼 장기간에 걸쳐서 희소 상태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된다....”16)





그러나 과잉자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케인즈는 생산영역에서의 과잉자본은 사치품의 사적 및 사회적 소비에 비생산적으로 지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는 그는 노골적으로 맬더스의 입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질비오 게젤(Silvio Gesell)의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게젤에 의하면, 사람들이 유동성을 가진 형태로 화폐를 보유하지 않고 그것을 소비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화폐를 교환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동성을 가진 형태로 화폐가 보유되면, 대부자본의 이자율이 높아지고, 그 결과 생산자본의 유리한 신규투자의 가능성이 감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재앙의 원인으로서 케인즈는 지나치게 높은 임금 외에 “유동성을 높이려는 지향”과 대부자본 및 높은 이자를 들고 있다. 여기에서는 히틀러 식의 ‘창조적’ 자본과 ‘약탈적’ 자본으로의 자본의 분류로 곧바로 통하고 있다.





이자율이 자본주의 경제와 실업에 주는 결정적인 영향에 관한 케인즈의 이 끝없는 지껄임의 계급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업독점자본에게 있어서는 이자율의 높이의 문제는 작은 의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거대 독점체가 이용하고 있는 차입자본은 비교적 소액이기 때문이다. 대독점체의 신규투자는 주로 사내유보(社內留保)로 조달되고 있다. 원가와 이윤에 대하여 이자율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많이 있다. 원료와 연료의 가격, 철도와 선박의 운임, 수입관세, 생산설비의 가동률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라 산업자본과 (보험회사를 포함한) 은행자본의 유착이 더욱 더 긴밀해지는 결과 이 양자를 지배하는 금융과두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취득하는 이윤의 총액이 산하 회사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는가 하는 것은 갈수록 어떻든 상관이 없어진다고 하는 사정도 있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가난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생활력이 없는” 중소 자본주의 기업들이 수십만이나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들은 자본의 집중과정의 결과 파멸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들 기업은 언제나 부채를 지고 있어서 은행과 고리대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정의 기한까지 부채와 그 이자를 지불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 파산의 직접적인 외부적 원인인 경우가 매우 많다. 이자율의 결정적 역할에 관한 케인즈 학설의 계급적 의미는 소자본가, 농민, 수공업자의 대량 몰락에 대한 자본주의 일반 및 특히 독점자본의 책임을 면제하는 데에 있다.





이들 모두는 독점자본이 온갖 속류경제학자들을 제쳐놓고 특히 케인즈를 중요시하고, 그를 독점자본의 기수로 키워낸 것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명제들이 관념론적으로 해석된다든지 기타 곡해된다든지 하지 않도록 차제에 어디까지나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독점자본이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적자재정을 실시하고 소매물가의 끊임없는 상승에 의해서 임금을 간접적으로 인하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케인즈가 그것을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점자본은 케인즈라는 인물이 전혀 없었더라도 역시 이 정책을 취했을 것이다. 케인즈는 독점자본의 실제상의 정책에 어떻게 해서든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초를 제공하고, 흑색선전에 의해서 이 정책을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계급들에게도 받아들이게 하려고 기도했음에 불과한 것이다.




















III










바로 지금부터 우리는 이제 하나의 문제에 부딪친다. 그것은, 독점자본뿐 아니라 개량주의적 정당들이나 노동조합 관료들도 또한 케인즈주의의 신봉자로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개량주의와 케인즈주의의 동맹의 기초는 개량주의자와 수정주의자가 맑스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지칭하고 있는 점에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현대 독점자본주의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는 개량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하면서도(이는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서다), 그 비판을 극히 미온적인 것에 한정하고,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에게 부르주아지와의 협력의 여지를 남겨두는 확고한 부르주아 이론이 필요하다. 케인즈 학설은 개량주의자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은, 케인즈가 다른 온갖 속류 경제학 교수들과 달리 맑스를 논박하려고 하지 않고, 그에게 논전을 걸려고 하지 않고, 단지 암묵 중에 맑스를 회피하고 있는 점에서17) 케인즈를 특히 높이 사고 있다.





오늘날 맑스에게 논전을 걸어 개량주의자에게 어떤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한 논전을 걸면, 맑스의 혁명적 학설에 노동자들의 관심을 촉구하게 되고, 개량주의적 지도자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고, 인텔리겐차 사이에서의 그들의 입장을 악화시키게 될 것이다. 맑스주의를 이론적으로 논파하려고 하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났음을 그들은 스스로 경험하여 알고 있다. 인류의 3분의 1이 자본의 속박을 끊어버리고 맑스-레닌주의의 기치 하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오늘날, 맑스의 학설은 ‘공상적’이라든가, 현실의 생활에 적용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은 보다 단순한 방식으로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단언한다. 맑스주의는 가난한 저개발국에 관해서는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부유한,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그들이 맑스주의와의 논전은 일절 하지 않고 그들과 많은 점에서 공통된 바가 있는 케인즈의 입장으로 이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기본적인 점들만을 지적해두자.





(1) 개량주의자도 케인즈도 자본주의를 사회제도의 가장 좋은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2) 개량주의자도 케인즈도 자본주의는 개량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이 개량은 ‘계급 위에 서 있는’ 국가의 손으로 수행할 수 있고, 혁명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케인즈는 국가의 개입에 의해서 초래될 자본주의의 미래를 그 특유의 애매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의 것을 실제로 목표로 할 수 있다(무릇 여기에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어떤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 투자가가 이미 특별보수를 받지 않게 되도록 자본량을 그것이 희소하지 않게 될 만큼 증가시킬 것, 나아가 금융가, 기업자, 기타 등등(그들은 확실히 자신의 직업을 크게 즐기고 있기 때문에 현재보다도 훨씬 싸게 그들의 노동을 입수할 수 있을 것이다)의 지능과 결단과 실천적 기능을 합리적인 보수(報酬) 조건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일에 이용할 수 있는 직접과세의 방식을 실시할 것, 이것이다.”18)





여기에는 케인즈 특유의 혼란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 앞에서 그는 자본은 ‘희소’하기 때문에 이윤을 가져다준다고 말해두고 있으면서, 여기에서는 자본이 이미 희소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는 자본주의를 그리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적 기업가가 그의 봉사에 따른 높은 ‘임금’을 받을 뿐인, 이윤이 없는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 잠꼬대는 개량주의자들에게는 노동자를 기만하는 수단으로서 아주 안성맞춤인 것이다.





(3) 개량주의자도 케인즈도 국가자본주의의 발전에 찬성한다. 케인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경상투자량을 지시할 의무를 개인의 수중에 맡겨두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19)





거기에서 그는 일부의 생산수단의 ‘평화로운’ 사회화, 즉 부르주아적 사회화를 주장한다. 케인즈는 “필요한 사회화의 방책은 서서히 사회의 일반적인 전통을 파괴하지 않고 도입할 수 있다”20)고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는 이러한 입장은 대부르주아지의 이익과 개량주의적 지도자의 선전상의 필요에 완전히 부응하는 것이다.





(4)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케인즈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사회의 계급적 분열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는 계급투쟁을 애매하게 하고, 노동자의 의식 속에서 계급투쟁을 쫓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의 소원에 부응하는 것이다.





(5) 현재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임금 문제가 아니라, 만성적인 대량실업이다. 대량실업은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갈수록 확대되고 있고, 갈수록 사무직원이나 관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전후(戰後)에는 노동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되었음에 비해서 노동일의 길이가 비교적 조금밖에 단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르주아지가 취득하는 잉여가치의 총량은, 가치로도 현물로도, 현저하게 증대했다. 그 결과 대부르주아지는 ―계급투쟁의 격화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이윤을 줄이지 않고도, 조직률이 높은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노동자에 대하여 때로는 임금 면에서 약간의 양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양보도 물가등귀에 의해서 많든 적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자본가도 개량주의자도 갈수록 증대하는 대량실업에 대해서는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그들에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이 케인즈이다. 국가는 적절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자본주의 하에서 실업을 없앨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조치란, 국가예산의 커다란 적자를 수단으로 삼아 조달되는 공공사업, 저금리의 유지 등이다. 개량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결론은 케인즈의 최대의 ‘공적(功績)’이다.





이 문제를 더 상세히 검토하기 전에 예비적인 주의를 하나 얘기해두고 싶다.





케인즈가 이러한 약속을 하고 나서 이미 30년이 지나고 있다. 부르주아 정치가들이나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이나 부르주아 교수들은 케인즈주의의 적극적인 신봉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실업을 없앨 수는 없었다.21)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의 실업의 진정한 원인을 분석하면, 지금부터 앞으로 실업은 (순환적 변동을 도외시하면) 감소하지 않고, 현재의 수준에 비해서 현저하게 증대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케인즈가 제안하고 있는 방책의 본질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금리의 높이가 생산과 고용의 규모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다 할 것이 아님은 이미 앞에서 말해두었다. 공공사업이나 국가의 발주가 고용량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하는 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 유휴 생산설비와 고용되어 있지 않은 노동력이 있다고 하면, 신규의 국가발주(공공사업)는 고용의 증가를 자극할 수 있다. 신규의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고 소비물자를 구입한다. 이것이 소비물자의 생산 확대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것이 이어서 생산수단의 생산의 증가를 촉진할 수도 있다. 생산이 증대하면 고용을 한층 증가시킬 필요가 있게 되고, 그것이 실업의 감소를 초래할 수도 있다. 맑스주의자는 누구도 이에 의문을 품고 있지 않다.





실제로 실업이 감소되는가 어떤가, 또 그것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많은 구체적인 사정에 달려 있다. ―결국 경기(景氣)의 ‘마중물 정책’이 시작되었을 때에 확대된 수요를 채우기 위한 소비물자의 재고가 어느 정도인가, 생산설비가 어느 정도 유휴상태에 있는가에 의해서, 즉 자본가를 자극하여 추가적 투자를 하게 할 정도의 시장의 확대가 필요한가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장기간을 내다본 조치의 경우에는 국가지출의 재원을 무엇에서 구하는가, 결국은 (조세와 물가의 인상을 통해서) 근로자의 소득에서 구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본가와 금리생활자의 소득에서 구하는가 하는 점 등등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사정들을 모두 고려하고 나서 비로소 경기의 ‘마중물 정책’이 무엇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발주와 고용증가를 수단으로 하는 어떠한 ‘마중물 정책’도 일시적인 성공밖에는 거둘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적 시장의 수용력은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내적 법칙성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하는 것은 의문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 구체적인 사정에 케인즈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그는 저 유명한 ‘승수’라고 하는 것(그는 그것을 함수 k로 표현하고 있다)을 발명했는데, 오늘날 케인즈파는 도처에 이것을 적용하고 있다. 함수 k는 “총 투자가 증가한 경우에는 투자 증가분의 k배의 크기만큼 소득이 증가할 것임을 말하는”22) 것이다. 소득이 늘어나면, 고용도 증대되고 실업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일반적인 형태로는 올바르다. 그렇지만 곤란은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이동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가 다른 경우 함수 k의 값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케인즈파는 (케인즈가 대단히 엄밀한 ‘과학적’ 수식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1963년에 어떤 자는 ‘승수’를 2.5라고 생각하고, 다른 자는 3.8에나 달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들은 케인즈 이론에 따라서, 기술의 진보에 수반하여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갈수록 많은 신규투자가 필요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AFL-CIO의 지도적 경제학자인 N. 골드핑거(Goldfinger)의 추산에 의하면, 새로운 일자리를 하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투자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23)










        1954―1956년 ...... 11,000달러





        1958―1960년 ...... 21,000달러





        1961―1962년 ...... 40,000달러










케인즈 자신은 단 한 번만 숫자를 든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고용량이 520만 명으로 저하되어 있는 경우에 만일 공공사업에 10만 명이 추가로 고용되었다고 하면, 전체 고용량은 640만 명으로 증대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추가의 10만 명이 공공사업에 고용되었을 때에 고용량이 이미 900만 명이라고 하면, 전체 고용량은 겨우 20만 명 증대하는 데에 불과할 것이다. 그 때문에 설령 효용이 의심스러운 공공사업이더라도 격심한 실업시대에는 ... 몇 배나 보상을 받을 것이다.”24)





개량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는 대량실업 시대에 공공사업을 확대하라고 하는 요구의 훌륭한 기초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꿈과 같은 커다란 고용의 증가가 언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도래하는 것인가, 반 년 후인가, 아니면 10년 후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케인즈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어떤 한 나라에서의 공공사업에서의 고용자수가 10만 명 증가하면, 종국적으로는 고용의 총 증가수는 120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 케인즈의 주장이 전적인 잠꼬대이자 흑색선전임은 초보적인 분석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영국인데, 그의 예에 의하면, 이 나라에서는 고용은 520만 명 이하로 저하하고, 실업은 120만 명을 넘고 있었다. 그래서 보자면, 실업자는 전체 취업자의 20%를 넘고 있었고, 이는 장기적인 과잉생산 공황의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상이한 두 개의 구체적인 경우를 검토해보자.





(1) 공공도로의 건설에 10만 명의 노동자가 채용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수작업의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하고, 매월 15파운드의 임금을 받는다. 이 15파운드는 1936년으로서는 명백히 지나치게 높은 임금이다. 새로 고용된 10만 명의 노동자는 매월 150만 파운드의 새로운 소득을 받는다. 나는 이 경우에는 함수 k 즉 ‘승수’는 아마 1 이상은 되지 않고, 그 이상의 고용 증가는 거의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긴 공황과 지속적인 대량실업 동안에 노동자들은 충분한 영양도 취하지 못하고, 의복은 낡고, 집주인이나 소매상에는 차입금이 쌓여 있다. 그들은 새로 번 150만 파운드를 식량, 의복, 구두의 구입과 차입금의 지불에 거의 전부 사용해버린다. 식량수요의 작은 증가는 기존의 재고상품에서 용이하게 충족할 수 있다. 이들 부문에서 노동력을 더욱 추가할 필요가 생기기까지는 몇 개월이나 걸릴 것이고, 또한 생산수단 생산 영역에서 고용의 확대가 일어나기까지는 (생산설비의 만성적인 유휴가 있기 때문에) 다시 몇 배나 긴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2) 10만 명의 노동자가 기업 혹은 대수력발전소의 건설, 또는 예컨대 잠수함의 건조 등에 사용되는 경우에는 사태는 다르다. 이 경우에는 극히 단기간 중에 기계공업과 계기공업(計器工業)의 고용이 증대되고, 조금 늦게 철강업과 석탄산업에서 고용이 증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당초의 10만 명의 고용이 확대된 결과로서 고용의 총 증가수가 120만 명에 이르는 등의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의 실업의 절멸을 약속하여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케인즈와 개량주의자들은 모든 구체적인 분석을 회피하는 것이다.25)





케인즈는 얼핏 보면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심으로 그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완전고용은, 혹은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조차 드물게밖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단명한 것이다....”26)





그는 완전고용을, 노동자의 이익이라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본의 충용이라는 입장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는 말하고 있다. “완전고용이 실현되는 것은 산출고가 다음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증가한 경우이다. 즉, 생산요소들의 대표적인 한 단위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한계수익이 이 산출고를 생산하는 데에 충분한 수량의 생산요소들의 사용을 허용하는 한에서 최저치로까지 저락해 있는 수준이 그것이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즈의 사상이 개량주의적 노동운동에 어느 정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다.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 중에서도 가장 개량주의적인 정당이 혹은 단독으로, 혹은 무언가 부르주아 정당과 연립하여 1930년대 이후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합치한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스웨덴에서는 1938년 이후 주식회사는 이윤의 40%를 사내유보할 수 있다는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이윤의 이 부분은 면세되고 있다. 이 금액의 약 반절은 국립 ‘리스크뱅크’[위험은행]에 무이자로 예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황기에는 이 예금은 노동대신(勞動大臣)의 동의를 얻어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다.28)





스웨덴의 개량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의 신봉자임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1963년 5월에 낸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의 한 팜플렛은 스웨덴의 지방자치단체 노동조합의 서기장이 쓴 것인데, 그 속에서 필자는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케인즈의 저서 ��고용ㆍ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 출판되기 전부터 이미 “케인즈의 정책을 수행해왔다”고 쓰고 있다.29)




















IV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학에서 케인즈의 견해가 지배적인 이유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독점자본의 이익에 합치해 있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케인즈는 표면적인 현상만을 취급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의 고전파나 맑스가 요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표현하는 카테고리들을 연구해야 하는 노고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는 점만으로도 부르주아 교수들에게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전혀 의미가 없는 주장을 케인즈는 막연한 용어로 표현된 일견 극히 과학적인 규정으로 포장하고 있는 점에서, 또한 동어반복에 수학적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을 과학적인 발견이라고 제시하는 점에서 부르주아 교수들에게 귀중한 것이다.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케인즈주의가 지배적이라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전체의 타락을 증명하는 것이다.





케인즈의 ‘과학성’에 관해서 조금만 예를 들어보자.





실업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업자란 그 나라에서의 통상적 임금으로 일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케인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과학적’으로 규정한다. “임금재의 가격이 화폐임금에 비해서 조금 등귀한 경우에 이때의 화폐임금으로 일하길 바라는 총 노동공급과 그 임금으로 고용하려고 하는 총 노동수요가 모두 현존 노동량보다도 크다면,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실업하고 있는 것이다.”30)





또 하나의 예. 자본주의 하에서는 개인소비의 규모는 무엇보다도 우선 임금과 이윤의 총액에 의존한다고 하는 단순한 주지의 사실을 케인즈는 ‘과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기타의 요인들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만(그리고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금 단위로써 측정된 총소득이야말로 통상 총 수요함수의 구성요소로서의 소비를 좌우하는 주요한 변수이다.”31)





자본가는 추가적인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전망이 있는 경우에만 추가 노동력을 고용한다고 하는 단순한 주지의 사실을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총 수요함수는 여러 가정적(假定的) 고용량을 그것의 산출고로부터 획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매상금액32)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또한 유효수요라고 하는 것은 공급 조건들과의 관련에서 보아 기업자의 이윤 기대액을 극대화하는 고용수준에 대응하기 때문에 유효해지는 총 수요함수 상의 점이다.”33)





이 ‘과학적인’ 복잡한 표현법과 애매함은 교수들에게 그들 자신의 ‘과학성’을 자랑할 충분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밀의 이자율’, ‘구리의 이자율’ 등 케인즈의 무의미한 잡담은 얼마나 ‘과학적인’ 여운을 가지고 있는가? 맑스의 이른바 ‘현인(賢人)들’의 전형이다.





이 복잡한 표현형식은 케인즈 학설의 계급성을 베일로 가릴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완전고용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인플레이션의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케인즈는 그것을 말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을 논할 때마다 으레 그것을 임금 상승의 결과라고 하는 오늘날의 자본가들과 같은 조잡한 표현 방식은 쓰지 않는다. 케인즈는 훨씬 ‘델리키트’[섬세]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유효수요량이 더욱 증가하더라도 이미 산출량은 증가하지 않고, 단지 유효수요의 증가와 정비례하여 비용단위의 증가를 초래함에 불과한 경우에는 우리는 진정한 인플레이션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한 상태에 달한 것이다.”34)





케인즈의 절충주의도 또한 교수들에게 안성맞춤의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이전의 이론들로부터 차용해온 곳을 발견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케인즈주의의 역사적 근원을 파내려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케인즈주의의 도움을 빌어 자본주의를 ‘보다 델리키트하게’ 옹호할 수조차, 아니 비판할 수조차 있다. 그들은 케인즈의 뒤에 붙어서 자본주의 하에서 근로자가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에 유감의 뜻을 표할 수 있다. 하지만 케인즈를 따라서 그들은 곧 그곳에서 빈곤의 원인은 착취나, 국민소득의 극도의 불균등한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마디로 하자면,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언명할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이 수천 년간에 걸쳐서 꾸준히 개인적으로 저축해온 끝에 세계가 누적된 자본자산 속에 있는데도 현재처럼 이처럼 가난하다고 하는 사실은 ... 이전에는 토지의 소유에 대하여 높은 유동성 프리미엄이 부여되고, 또 지금은 화폐에 대하여 그것이 부여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35)










또한 한편에서 케인즈는 소득과 소득 분배의 불균등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믿는 바로는 소득 및 부의 현저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ㆍ심리적 이유는 존재한다....”36)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그는 소득 분배의 불균등은 너무나 지나치게 크다고 말하고 있다.37) 이런 식으로 교수들은 필요한 경우에는 ‘급진’ 소부르주아 식으로 케인즈를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케인즈가 그의 ‘과학성’을 각인시키려고 제시하는 다양하고 자주 극히 복잡한 수식은 자본주의 경제의 인식을 조금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 수식은, 그것이 없어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수학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그가 ‘총 공급함수’38)라고 부르고 있는 그의 첫 번째 수식을 분석해보자.39)





자본가는 이윤을 획득할 것을 기대한다(케인즈는 이 기대치를 Z40)로 표현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사람수[N]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노동자는 (이 과정을 현물형태로 고찰하는가, 혹은 화폐형태로 고찰하는가에 따라서) 일정량의 생산물, 혹은 가치 및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생산된 생산물[의 가격]을 케인즈는 Or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 추가 노동력의 고용은 그것에 따른 생산의 확대를 의미한다. 이 대단히 단순한 의존관계를 케인즈는 다음 수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P(공급곡선)는,































           P=





Zr





=





Φr(Nr)





Or





Ψr(Nr)







로 표시된다. 이는 생산된 생산물의 양은 (일정한 이윤이 확보된다고 하여) 고용 노동자수에 의존한다고 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본래 알고 있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수식들도 이것과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조금도 넓혀주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과학성’이라는 외관에 불과하다.




















V










아퀴를 짓자.





케인즈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가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본주의 옹호에 초계급적인 과학성스러움과, 금기를 피한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케인즈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의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성에 있고, 사상의 새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충주의에 있다.





그가 인기가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멸망으로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대하여 독점자본이 더 나은 해답을 찾을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케인즈주의의 지배는 독점자본주의의 사상적 파산을 의미하고 있다. <노사과연>










번역: 편집부










[역자 주: 이 글은 옛 쏘련의 헝가리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였던 E. 바르가(Evgenii S. Varga, 1879-1964.10.8.)의 저서 ��자본주의 경제학의 제문제��(1965) 가운데 “케인즈주의는 왜 인기가 있는가”를 일본어 번역판(1966)으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최근 발발한 대공황을 계기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까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케인즈주의 그것의 독점자본의 탐욕ㆍ착취를 영구화하기 위한 이론으로서의 천박한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에, 따라서 그것은 결코 진보적인 이론이 아니라 반동적인 이론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간접적이지만, 특히 신자유주의적 이론ㆍ정책이 결코 신자유주의자 자신들의 주장처럼 케인즈주의와 다른 것이 아니며, 케인즈주의 (극)우파의 이론ㆍ정책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집필된 지 40년이 훨씬 넘은 글이기 때문에 특히 미 달러화의 가치 등에서는 시대적 상황의 차이를 감안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2회 연재 중 2회분이다.]






1) 케인즈는 맑스가 “무미건조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불렀던 쎄(Say)를 포함한 많은 속류경제학자들을 전혀 제멋대로 경제학의 고전파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조화성에 관한 그들의 학설을 비판함으로써 진짜 고전파, 무엇보다도 우선 자본주의의 본질에 관해서 많은 올바른 발견을 했던 리카도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2) J. Keynes,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p. 372.






3) Political Affairs, January 1948, p. 47.






4) 케인즈, 같은 책, p. 30.






5) 같은 책, p. 17.






6) 같은 책, p. 202.






7) 같은 책, p. 219.






8) 이들 결산표에는 단기 은행신용에 대한 이자지불을 위한 지출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이렇다 할 것일 수가 없다.






9) [신투자에 의해서 발생한 추가순이익을 추가투자총액으로 나누어 산출한 것.]






10) Statistical Abstract of the United States, 1961, p.482.






11) 이 모순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케인즈조차 그것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극히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의 균형을 투자의 증가에 의해서 확보할 때마다 우리는 내일의 균형을 확보하는 곤란을 증대시키는 것이다.”(J. 케인즈, 같은 책, p. 105.)






12) K. Marx u. F. Engels, Werke, Bd. 23[��자본론�� 제1권], S. 648.






13) J. 케인즈, 같은 책, p. 380.






14) U. S. News and World Report, 19, IX, 1960, p. 68.






15) J. 케인즈, 같은 책, p. 264.






16) 같은 책, p. 217.






17) 케인즈는 그의 주저(主著) 속에서 맑스에 관해서는 지나가는 중에 3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맑스에 대해서 과학의 사기꾼 게젤을 대치시키고 있다. “미래의 사람들은 맑스의 정신보다는 게젤의 정신에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J. 케인즈, 같은 책, p. 355).





     그의 저서의 하나에서 그는 맑스는 “싫증난다”고 쓰고 있다. 케인즈는 맑스의 학설에 관해서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18) J. 케인즈, 같은 책, pp. 376-377.






19) 같은 책, p. 320.






20) 같은 책, p. 378.






21) [역자 주] 1970년대 후반 이후 그들이 대대적으로 신자유주의로 ‘전향’했던 이유의 하나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22) 같은 책, p. 115.






23) The New Republic, 25, V. 1963, p. 14.






24) J. 케인즈, 같은 책, p. 127.






25) 생산의 추가적 확대가 새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나 현존하는 실업의 규모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투하된 자본의 크기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은 맑스주의자라면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이다.






26) 같은 책, pp. 249-250.






27) 같은 책, p. 303.






28) The Economist, 15. IV. 1963, p. 1175.






29) Labour Monthly, May 1963, p. 321.






30) J. 케인즈, 같은 책, p. 15.






31) 같은 책, p. 96.






32) [케인즈의 용어법에서 ‘매상금액’(proceeds)이란 통상적인 용어에서의 ‘매상금액’으로부터 ‘사용자비용’(user-cost) 결국 지출된 불변자본의 가치를 뺀 것이다.]






33) 같은 책, p. 55.






34) 같은 책, p. 303.






35) 같은 책, p. 242.






36) 같은 책, p. 374.






37) [바르가는 “다른 곳에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며, 케인즈는 같은 문장 속에서 “... 이유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만큼의 커다란 격차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계속하고 있다.]






38) [케인즈의 용어법에서 ‘총 공급함수’라고 하는 것은 기업가가 어떤 수의 노동자의 고용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총 공급가격’(판매가격의 기대치로부터 지출된 불변자본의 가치를 공제한 것)과, 위의 고용수의 관계를 가리킨다.]






39) 같은 책, p. 44.






40) [케인즈에 의하면, Z는 ‘기업자 이득’ 즉 이윤과 ‘요소비용’(factor-cost) 즉 임금의 합이라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바르가의 설명은 약간 단순화되어 있지만, 논지에는 영향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 뒤의 수식도 케인즈의 원서에서는,

































       





P =





Zr + Ur(Nr)





=





Φr(Nr) + Ur(Nr)





   Or





    Ψr(Nr)









    로 되어 있다. 이 경우 Ur(Nr)은 고용수준, Nr에 대응하는 ‘사용자비용의 기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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