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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5)
글쓴이 그로버 퍼(Grover Furr) E-mail send mail 번호 330
날짜 2013-07-15 조회수 8525 추천수 111
파일  1373863077_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5).hwp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21-24. S. V. 꼬시오르(S. V. Kosior); Ia, 츄바르(Ia. Chubar); P. P. 뽀스띠쉐프(P. P. Postishev); A. V. 꼬사레프(A. V. Kosarev)










흐루쇼프










이러한 극악무도한 날조된 “재판”의 결과로, 모든 종류의 중상적인 “자백들”이 받아들여졌던 사실의 결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강제된 고발의 결과로, 수천 명의 정직하고 무고한 공산주의자들이 죽었다. 같은 방식으로 당과 국가의 뛰어난 일꾼들에 대한 “재판들”이 날조되었다 ― 꼬시오르, 츄바르, 뽀스띠쉐프, 꼬사레프와 다른 사람들.










(뽀스띠쉐프와 관련된 내용을 보려면 3장과 9장을 보시오)





꼬시오르, 츄바르, 뽀스띠쉐프, 꼬사레프는, 쏘련 대법원 군사부문위원회(the Military College of the Supreme Court of USSR) 의장이었던 V. V. 울리끄(Ul'rikh)가 스딸린에게 보낸 1939년 3월 6일의 편지에서 위의 정확한 순서대로 목록에 올라 있으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은 팩시밀리로 재생된다:





http://www.memo.ru/history/vkvs/images/ulrih-39.jpg





연관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군사부문위원회





대법원





쏘련





- - - -





1939년 3월 15일





No. 001119...





Re: No. I-68/112





극비문서





Copy No.1





공산당중앙위원회





J. V. 스딸린 동지에게










1939년 2월 21일에서 3월 14일 사이에 모스끄바에서 완료된 재판에서 쏘련 대법원 군사부문위원회는 426명에 대한 사건들을 진행했다.





413명은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총살형선고는 1934년 12월 1일 법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었다. 군사부문위원회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완전히 자백했다: 꼬시오르, 츄바르, 뽀스띠쉐프, 꼬사레프, ...










울리끄 기록의 나머지 부분에 의하면 피고인들 중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자백을 부인했지만, “재판에서 다른 증거들이 드러났다.” 즉, 꼬시오르, 츄바르, 꼬사레프, 뽀스띠쉐프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자백을 부인했던 것이 아니라, 재판에서 그들의 자백을 재확인하였다.















꼬시오르와 츄바르










1939년 4월 26일 그의 자백-심문에서, 예조프는 독일정보국 ― 쉬운 말로 독일 스파이 ― 에 정보를 넘겨주고 있었던 쏘련의 많은 고위 관리들 중 두 명으로 츄바르와 꼬시오르의 이름을 댄다. 예조프는 독일 공작원 노르덴(Norde-n)이 “아주 많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1)





흐루쇼프를 위해 준비되었던 뽀스띠쉐프의 복권자료들에 의하면, 꼬시오르는 뽀스띠쉐프를 결부시키고는 자신의 자백을 철회했으나, 곧 다시 그의 자백을 반복했다.2) 뽀스띠쉐프는 그의 자백에서 야끼르(Iakir), 츄바르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꼬시오르를 결부시켰다. (Ibid, 218). 우파-뜨로츠끼파 음모에서, 안띠뽀프(Antipov), 꼬시오르, 쁘람네끄(Pramnek), 수꼬믈린(Sukhomlin), 뽀스띠쉐프, 볼디례프(Boldyrev)와 다른 사람들은 츄바르를 결부시켰다.3)





펠릭스 츄예프(Felix Chuev)가 인터뷰했던 노인 라자르 M. 까가노비치(Laz-ar M. Kaganovich)는 자신이 꼬시오르와 츄바르를 변호했지만, 츄바르가 손으로 쓴 장문의 자백을 보았을 때 변호를 포기했다고 말했다.4) 몰로또프는 츄에프에게, 안띠뽀프와 츄바르의 친구들이 츄바르를 고발했을 때 그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츄바르는 흥분하여 그것을 부인했고 안띠뽀프에게 화를 냈다. 몰로또프는 그 두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5)





흐루쇼프를 위해 준비되었던 뽀스뻴로프 보고서에 의하면, 꼬시오르는 1938년 5월 3일 예조프의 지휘 아래 체포되었다. 그리고 고문을 당했고(자세한 내용이 주어진 것은 없다), 한 번에 14시간 지속되는 장시간의 심문을 당했다. 꼬시오르의 54개의 심문서 중에서 단지 4개만이 보존되어 있다.6) 지금까지 이것은 예조프가 저지른 날조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꼬시오르는 예조프가 축출되고 난 후 석 달 뒤인 1939년 2월 26일에 선고를 받았다. 이때쯤 사건들은 재검토되고 있었고, 예조프와 그의 사람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했다는 것이 오랫 동안 인정되었다.





위에서 인용된 울리끄의 편지로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재판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꼬시오르와 츄바르는 재판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다는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나 뽀스뻴로프 보고서나 복권자료 둘 다에서 이 재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공개된 것은 없다. 다시 한 번 더 말해 흐루쇼프 시대의 자료들은 조사 자료들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기소된 모든 사람들이 “무죄”였던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속이기 위한 시도였던 것 같다.





1938년 10월 자백의 긴 복사본 ― 스베르들로프스크주(州) 비밀경찰의 전임 수장이었던 드미뜨리예프의 심문 ― 에서, 드미뜨리예프는 “우끄라이나 우파의 가장 비밀스러운 사람 중의 한 명이었던 꼬시오르가 이끌었던 반혁명 지하조직”을 말한다.7)





더욱 상세한 정보가 없더라도, 예조프의 자백은 어느 것보다도 더 명확하게, 츄바르와 꼬시오르가 우파의 지하조직에 연루되었던 것 때문에 유죄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심지어 그것이 없더라도 그에 대한 아주 많은 증거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흐루쇼프는 그 증거를 공개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그 증거는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꼬사레프










흐루쇼프가 언급했던 것처럼 복권자료들이 꼬사레프에 대한 재판이 날조되었다는 것을 확립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출판된 복권자료들에 꼬사레프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다. (Reabilitatsiia Kak Eto Bylo 1, 79-80; 219; in future RKEB 1) 그는 자백을 실제로 했고 짧은 부분이 출판되었다 ― 1954년의 복권보고서는 꼬사레프가 베리아에게 고문을 당해 자백을 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167,). 심문, 재판 등등의 그의 사건기록을 조사자들은 결코 이용할 수가 없다.





꼬사레프는, 1939년 3월 16일 울리끄의 편지에서,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한다는 것을 확인했던 피고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위를 보라). 우리는 역시 뽀스띠쉐프가 꼬사레프를 고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복권보고서에 따르면, 베리아가 그루지아 공산당의 서기장이었을 때 꼬사레프는 베리아에게 적대적이었다. 꼬사레프는 고문을 당해 자백을 했고, 역시 아마도 누명을 썼다고 보고서는 계속 적고 있다. 꼬사레프는 법정에서 실제로 자백을 했다. 복권보고서에 따르면, 꼬사레프는 속아 넘어가서 이것(자백:역자)이 그를 구해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피고인들이 심문을 당하는 동안 구타를 당해 자백을 했다고 주장하고, 재판에서 그 자백을 부인했다는 것을 예들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에 대해 재판에서 자백을 하는 이유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53년 12월 꼬사레프의 미망인이 편지에서 적었던 것처럼, 꼬사레프에 관한 복권자료들은 모든 일들에 대해 베리아를 비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 당시에 베리아는 필경 재판 중이었다. (RKEB 1, 79-80). 그리고 흐루쇼프는, 비밀경찰의 수장으로 베리아가 재임하는 동안 체포되어 기소된 사람은 누구든지 사실상 “누명을 쓴 것”이라고 재빨리 주장했다.





예조프가 성공적으로 축출된 후, 1939년 11월 29일 꼬사레프가 체포되었다. 그는 예조프와 몇 번의 접촉을 했는데, 그는 예조프의 아내가 일했던 공산주의 청년동맹(Komsomol) 신문의 편집장이었다. 얀센과 빼뜨로프는 이것이 가능성이 낮다고 주의를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꼬사레프가 몇 가지 일에서 예조프와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185)





그러나 최근에(2006년 2월) 출판된 심문서에서, A. N. 바불린(Babulin) ― 예조프의 살아 있는 조카, 공모 추종자, 예조프와 예조프의 아내인 예브게니아(Evgeniia)의 “도덕적 타락”을 목격한 사람 ― 은 예조프와 함께 나중에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던 뺘따꼬프(Piatakov), 유리츠끼(Uritsky), 미하일 꼴초프(Mikhail Kol'tsov), 글리끼나(Glikina), 야고다,(Iagoda) 프리노프스끼(Frinovski), 미로노프(Mironov), 아그라노프(Agranov), 다른 비밀경찰들과 함께, “예조프의 집을 가장 빈번하게 방문한 손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꼬사레프의 이름을 댔다. 공산당 청년동맹의 “무고한” 지도자가 계속 유지하기에는 이상한 교제였다! 최근에 출판된 그의 심문에서, 예조프 자신이 그의 나중의 아내 에브게니아와 함께, 영국의 스파이로 “가장 빈번하게 방문한 손님들”이라는 바불린의 목록에 올라 있는 두 사람 꼴초프와 글리끼나의 이름을 댔다.





바딤 로고빈(Vadim Rogovin)은 꼬사레프가 공산당 청년동맹 수장의 지위에서 해고되었고 공산당 청년동맹 회원들에 대한 불공정한 억압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적었다. 많은 기사들이 대중언론에 나타났으며 몇몇 기사는 꼬사레프의 가족이 쓴 것이었다. 그 기사들은 꼬사레프가 불공정하게 체포되었다는 관점과, 그가 학대했다던 공산당 청년동맹 회원 올가 p. 미샤꼬바(Ol'ga P. Mishalova)가 부당하게 그를 고발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8)





누가 잘못을 저질렀든지 간에, 므겔라드제(Mgeladze)가 그의 회고록에서 그 내용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꼬사레프를 체포한 근거인 것 같다. 1954년 복권 보고서는 그 내용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1954년 복권 보고서는, 꼬사레프가 베리아에 관하여 말했던 몇 가지 부정적인 평가들 때문에, 베리아가 꼬사레프를 개인적으로 증오하여 체포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1953년 6월 베리아를 체포한 후에,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나머지 사람들의 지원을 받은 흐루쇼프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베리아를 악마화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복권 보고서가 꼬사레프의 체포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언급하는 데 이렇게 실패한 것은, 탄압당한 사람들에 대한 증거를 진지하게 조사를 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 때문에 날조를 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우리는 꼬사레프가, 예조프와 그의 아내, 예조프의 많은 다른 동료들 등 예조프의 비밀경찰이 중심이 된 우파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과 매우 의심스러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상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꼬사레프에 관해 ― 일화나 소문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꼬사레프에 대한 복권 보고서는 그가 고문을 당했다고 우겨댄다. (RKEB 1, 79-80; 166-8;219). 쁘리노브스끼가, 예조프가 자신의 음모에 대한 조사를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몇몇 친구를 포함하여 무죄인 사람뿐만 아니라 유죄인 사람을 고문하도록 시켰다고, 말하기 때문에, 예조프가 역시 꼬사레프를 고문하도록 시켰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위의 16. 예조프를 보라).





우리는 확실히 스딸린과 베리아 두 사람 어느 누구도 꼬사레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어떠한 증거도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일화에서는, 단지 스딸린이 사람들을 너무 쉽게 믿는다고 추궁당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흐루쇼프와 “복권 위원회”가 많은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 그랬던 것처럼 꼬사레프에 관한 아주 많은 정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꼬사레프의 경우에, 흐루쇼프와 복권 위원회는 꼬사레프의 파멸의 원인으로 보이는 예조프와 꼬사레프의 관계를 숨긴다. 흐루쇼프 시대의 복권 자료들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심지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결론은, 흐루쇼프가 꼬사레프가 유죄냐 무죄냐에 대한 어떤 진지한 조사도 하지 않고 “파렴치하게 진실을 무시하며” 꼬사레프를 무죄라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지도적 인물이었고 나중에 그루지아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아까끼 므겔라드제(Akakii Mgeladze)는 꼬사레프가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수장이었을 때,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1960년대에 작성했지만 최근에 출판된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므겔라드제는 1947년 스딸린과 함께 꼬사레프에 관해 토론을 했다(p. 165). 스딸린은 므겔라드제의 말을 듣고 나서 꼬사레프의 유죄는 짜다노프(Zhadanov)와 안드레예프(Andreev)에 의해 주의깊게 입증되었다는 내용을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9)





이 내용, 즉,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정치국 위원들이, 지도적인 당원들에 대한 비밀경찰의 체포와 고발을 조사하는 데 배치되었다는 내용은 다른 자료들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10) 꼬사레프가 전적으로 무죄였는데 개인적인 이유로 베리아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썼거나, 아니면 단지 약간의 몇몇 실수를 했다는 둘 중 하나를 분명히 믿고 싶어 했던 므겔라드제는, 토론에서 그 자신은 쉬끼리아또프(Shikiriatov)가 쓴 보고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고서들을 읽었으며, 이 보고서들이 말했던 것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스딸린에게 말했다.





므겔라드제의 설명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므겔라드제가 꼬사레프가 유죄라는 것을 믿는 데 커다란 ―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비록 정중한 태도를 갖추었지만, 스딸린에게 대립할 정도로 ―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스딸린이 꼬사레프가 유죄였다는 자신의 믿음을 조사에 기초하여 차분하게 므겔라드제에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므겔라드제의 의하면, 사람들은 모두 실수를 하고, 특히 1937년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스딸린은 계속해서 설명을 했다. 그러나 스딸린은 이것을 꼬사레프의 재판에 적용하지는 않았다.





오늘날까지 꼬사레프의 해고, 체포, 조사, 재판과 연관된 모든 문서자료들은 러시아정부에 의해 비밀로 유지되고 있다. 꼬사레프는 1938년 11월 19-20일 모스끄바에서 개최되었던 공산주의 청년동맹 제7차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비판받고 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도자 직위에서 제거되었다. 그 총회의 복사본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 총회에서 연설을 했던 게오르기 M. 뽀뽀프(Georgii M. Popov)의 최근의 전기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문서자료들은 흐루쇼프 시대에 존재했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그 문서자료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11)















25. 목록들










흐루쇼프:










재판이 군사부문위원회(Military Collegium)의 사법권하에 놓여 있거나 선고가 사전에 미리 준비된 사람들의 목록을 비밀경찰로 하여금 준비하게 했던 사악한 관행들이 용납되었다. 예조프는 제안된 처벌을 스딸린에게 승인받기 위해 개인적으로 스딸린에게 이 목록을 보내곤 했다. 1937-1938년 사이 당, 쏘비에뜨, 공산주의청년동맹, 군대, 경제부문 일꾼들 수천 명의 이름이 담겨 있는 383개의 그러한 목록들이 스딸린에게 보내졌다. 그는 이 목록들을 승인했다.










이 목록들은 존재하며, “스딸린주의자들의 ‘총살’ 목록”으로서 처음에는 CD로,12) 지금은 인터넷상으로 편집이 되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의도적이고 부정확한 이름인데, 이 목록들은 결코 “총살을 당할” 사람들의 목록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 이 목록의 바로 그 반스딸린주의 편집자들은 그 목록들을 사전에 미리 준비된 “선고”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조사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목록들에는 개인들이 유죄가 입증된다면 검찰이 추구해야 할 선고가 주어져 있다 ― 즉, 검찰이 법정에서 (판사에게: 역자) 적용하도록 요구할 선고이다. 사실은 이 목록은 “재검토” ― rassmotrenie: 목록들의 소개에서 여러번 사용된 단어 ― 를 하기 위해 스딸린(그리고 다른 정치국원들이나 서기국원)에 보내진 목록이다. (http://www.memo.ru/history/vkvs/images/intro1.htm)





유죄가 입증되지 않았거나 약한 범죄로 입증되어 총살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의 많은 예들이 주어져 있다. 흐루쇼프가 나중에 연설에서 이름을 언급한 A. V. 스네고프(A. V. Snegov)는 이 목록에서 적어도 두 번 이름이 나온다.





http://stalin.memo.ru/spiski/pg13026.htm에서





  No. 383;





http://stalin.memo.ru/spiski/pg05145.htm에서





  No. 133.





이 두 번째 문헌에서 스네고프는 유죄가 입증될 경우 최고 사형선고를 의미하는 “제1 범주”로 특별히 들어간다. 그의 죄에 대한 검사의 증거의 간단한 요약이 제공되었고, 검사의 증거는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네고프는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으며 대신에 노동수용소에서 긴 기간을 보내도록 선고를 받았다.





이 목록들의 편집자들에 의하면, 목록에 이름이 올라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처형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예를 들어, 1938년 9월 29일 서명된 꾸이비셰브주(州)(Kuibyshev oblast)에 대한 목록의 선별 연구는, 이 목록에 있는 사람 중에서 대법원의 군사부문위원회(VKVS)에 의해 유죄가 입증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과, 많은 수의 사건이 전적으로 기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http://www.memo.ru/history/vkvs/images/intro.htm





그러므로 흐루쇼프는 스딸린이 어떤 사람도 “선고하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스딸린)가 이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대비하여 그 목록을 재검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1954년 2월 3일 내무부(MVD)장관 S. N. 끄루글로프(S. N. Kruglov)가 흐루쇼프에게 보낸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흐루쇼프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 기록에는 “사전에 미리 준비된 선고”에 관한 말은 전혀 없고, 오히려 진실을 전해준다:










이 목록은 쏘련의 비밀경찰에 의해 1937년과 1938년 수집되었고, 즉시 재검토하기 위해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내졌다. [강조는 그로버 퍼]13)










검사는 증거뿐만 아니라 유죄의 경우 판사에게 제안할 선고문을 가지고 재판을 계속해나갔다.





비당원의 이름이 아니라 당원의 이름이 재검토되기 위해 보내졌던 것 같다. 부정직한 소개는 목록에 서명한 사람들이 “모든 정치국원들이 아니라 정치국원 중 스딸린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14) 그러나 증거에 의하면, 목록이 제출되었던 사람들은 정치국원들이 아니라 당의 서기국원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심지어 편집자들은 예조프 ― 정치국원이 아닌 서기국원 ― 가 “중앙위원회의 서기”로서 서명했다고 지적한다.15)





흐루쇼프는 스딸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 목록에 포함할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제시되는 처벌의 범주를 선택하는 데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흐루쇼프는 비밀경찰이 그 목록을 준비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비밀경찰이 당의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과 이 목록에 올라 있는 많은 사람들이 ― 아마도 쏘련의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더 많이 ― 흐루쇼프가 권력을 쥐고 있던 지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1938년 1월까지 흐루쇼프는 모스끄바당과 모스끄바주(Moscow oblast)당의 서기장이었다. 그 후 그는 우끄라이나의 서기장을 지냈다. 8,500명의 사람들을 총살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며 스딸린에게 보낸 편지(section 4를 보라)는 모스끄바에서 첫 번째 “총살목록”이 나온 날과 똑같은 날인 1937년 7월 10일의 날짜로 되어 있다.16)





같은 편지에서 흐루쇼프는 역시 모스끄바 비밀경찰국의 수장 S. F. 레덴스(S. F. Redens), 검사보 K. I. 마슬로프(K. I. Maslov)와 함께, 이 이름들을 선택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삼인방에 자신이 참여한 것을 확인한다. [흐루쇼프는 “필요할 때”, 제2서기 A. A. 볼꼬프(A. A. Volkov)가 대신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볼꼬프는 벨로루시당의 서기장으로 근무하기 위해 떠날 때인 1937년 8월초까지 모스끄바 지역 쏘련공산당의 제2서기로 근무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흐루쇼프의 부하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는지도 모른다.17) 마슬로프는 1937년 11월까지 모스끄바주의 검사직을 유지했다. 반혁명적 전복 활동의 죄가 발견된 후, 그는 1938년 체포되어 1939년 3월 처형되었다.18) 마슬로프의 지위를 처음 차지했던 마모노프(K. I. Mamonov)도 같은 운명에 처했고, 나중에 마슬로프와 같은 날 총살을 당했다.19) 레덴스 역시 처벌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폴란드 반정부활동가-스파이활동 그룹”의 회원으로서 1938년 11월 체포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어 선고를 받았으며 1940년 1월 21일 총살을 당했다. 얀센과 뻬뜨로프는 레덴스를 “예조프의 사람”으로 묘사한다.20) “해빙기” 동안 레덴스는 흐루쇼프의 강력한 주장으로 복권되었지만 법적인 절차를 거칠게 위반했기 때문에 1988년 레덴스의 복권은 철회되었다 ― 거대한 복권의 물결이 밀려오던 그 시기에!21)





즉, 볼꼬프를 제외하고 모스끄바와 모스끄바주에서 탄압에 참여했던 흐루쇼프와 가장 가까웠던 모든 동료들은 가혹하게 처벌을 받았다. 그러한 처벌로부터 흐루쇼프는 어떻게 겨우 빠져나왔을까? 이것에 대한 답은 풀리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모스끄바당의 지도자로서 흐루쇼프의 계승자인 A. S. 쉬쩨르바꼬프(A. S. Shcherbakov)와 관련된 흥미 있는 사실들을 조사할 것이다.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26.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의안










흐루쇼프:










1938년 공산당총연맹(볼세비끼)[All-Union Communist Party(Bolsheviks)] 중앙위원회의 1월 총회의 결의안은 당 조직의 개선에 대한 몇 가지 조치를 내놓았다. 그러나 1938년 역시 폭넓은 탄압은 존재하였다.










흐루쇼프는 그 탄압을 스딸린이 추동한 것으로 암시하며, 약간 더 나아가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증거는 예조프와 주도적인 “탄압자들” 중의 한 명으로서 흐루쇼프 자신을 포함한 많은 서기장들에 의해 탄압이 추동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스딸린과 우파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던 중앙당의 지도자들은 탄압이 제한되기를 원했다. 결국 그들(예조프, 흐루쇼프, 서기장들: 역자)은 날조된 재판인 것으로 판명되었던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처벌했다.





게티(Getty)와 나우모프(Naumov)는 이 1938년 1월 총회에 대하여 지금까지 가장 많은 연구를 하였다.22) 그들의 설명은 스딸린의 중앙당 지도자들이 무책임한 탄압에 대하여 매우 걱정을 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 뽀스띠세프가 그러한 근거로 제거되었던 것이 바로 이 총회에서였다. 서스톤(Thurston)의 논의는 스딸린이 서기장들, 비밀경찰의 탄압을 억제하려고 전반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23)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말렌꼬프는 스딸린에 공감을 하면서, 너무나도 많고 예측할 수 없는 추방이 발생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서는, 뽀스띠세프가 가장 최악의 범죄자로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다는 것은 가장 큰 의미가 있다. 1938년 1월 9일의 결의안은 특별히 이 점 때문에 뽀스띠세프를 비난했고, 그를 징계했으며 꾸이비세프주(Kuibyshev Oblast)(시위원회)의 서기장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박탈했다.





1938년부터 1953년까지 농업분야의 고위관리(농업부 인민위원 혹은 제1차관)였던 I. A. 베네딕또프(I. A. Benedictov)에 의하면, 중앙위원회에서 그리고 정치국 모임에 빈번히 참가하여, 스딸린은 이 총회에서 탄압의 불법성을 정정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의 날조를 연구한 레브 발라이안(Lev Balaian)은 불완전하지만 아주 유용한 추가적인 자세한 설명을 제공해준다.





1938년 1월부터, A. I. 유스뻰스끼(A. I. Uspensky)는 흐루쇼프 휘하의 우끄라이나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다. 예조프의 경고를 받은 후, 유스뻰스끼는 1938년 11월 14일 체포를 피해 도망쳤고, 드네프르강(Dnepr River)에 투신하겠다는 메모를 남겨두는 것으로 자살을 위장했다. 유스뻰스끼는 결국 1939년 4월 14일 위치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스딸린은 흐루쇼프에게 건 자신의 전화를 예조프가 엿듣고, 예조프가 유스뻰스끼에게 경고를 했다고 믿었다.





유스뻰스끼의 죄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흐루쇼프가 역시 무고한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운 데 대해서는 유죄임에 틀림 없었다 ― 두 사람 모두 똑 같은 삼인방 중의 2인이었다.24)오늘날 조사자들에게 더 이상 이용가능하지 않은 심문 자료에 의하면, 유스뻰스끼는 대규모로 사건들을 날조하라는 예조프의 지시를 폭로했다.25) (얀센과 뻬뜨로프 84; 148)















27. “베리아(Beria) 패거리”










흐루쇼프:










반면에 국가안보기관을 관장했던 베리아 패거리들은 체포자들의 유죄와 그 기관이 날조했던 자료들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데 있어서 그 기관 자체를 능가했다.










이것은 거짓이다. 서스톤은 베리아가 일단 비밀경찰을 넘겨받았을 때 정말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흐루쇼프의 왜곡과 베리아 아래에서 즉시 시행되었던 “놀랄 만한 자유주의”에 대해 논의한다. 고문은 끝이 났고 피수용자들은 다시 특권을 회복했다. 예조프의 사람들은 직무에서 제거되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탄압에 대해 유죄임이 확증되었다.26)





뽀스뻴로프 보고서에 의하면, 1937년과 1938년과 비교해보았을 때 1939년과 1940년에는 체포자들이 거의 90%만큼 크게 줄어들었다. 1939년과 1940년의 처형은 1937년과 1938년의 대규모 처형수준의 1%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27) 베리아는 1938년 12월 비밀경찰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이것은 베리아가 지휘하던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흐루쇼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밀연설”에서 이 사실을 빼버렸으며 그의 청중들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





불법적인 탄압, 대규모 살육, 고문과 날조에 대해 유죄가 입증된 사람들의 재판과 처형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베리아의 재임기간 동안이었다. 부당하게 탄압을 받은 많은 사람들 ― 확실히 100,000명 이상의 사람들 ― 이 노동수용소(GULAG)와 감옥에서 풀려났다.28) 흐루쇼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이 사실을 숨겼다.










28. “고문 전보”










흐루쇼프:










1939년 대규모 체포의 물결이 감소하기 시작했을 때, 지역당조직의 지도자들이, 체포된 사람들에 대해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비밀경찰 직원들을 고발했을 때, 스딸린은 1939년 1월 10일 주와 지방(krais, 쏘련의 행정단위: 역자) 위원회 서기들, 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들, 내무부 인민위원들, 비밀경찰 조직의 수장들에게 암호로 된 전보를 발송했다. 이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총연합(볼세비끼)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총연합(볼세비끼) 중앙위원회의 허락에 의해서, 비밀경찰이 직무수행에서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방법들을 적용하는 것이 1937년부터 허용되었다고 설명한다.... 모든 부르주아 정보조직들이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에 대해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것과 부르주아 정보조직들이 가장 수치스러운 형태로 그러한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왜 사회주의 정보조직이, 노동계급과 꼴호즈(kolhoz) 노동자들의 치명적인 적들에 대하여, 부르주아지의 맹렬한 첩자들에 대하여, 더 인도주의적이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떠오른다. 공산당총연합(볼세비끼) 중앙위원회는 육체적인 압박은, 밝혀지고 집요한 인민의 적들에 대해 예외적으로 적용하여, 공정하고 적절한 방법을 통해, 여전히 의무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스딸린은 공산당총연합(볼세비끼)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사회주의 합법성의 가장 무자비한 위반, 고문과 탄압을 허가했고, 이것은 우리가 본 대로 무고한 인민들의 자기고발과 중상모략을 초래했다.










흐루쇼프는 적어도 세 가지 방법으로, 어쩌면 네 가지 방법으로 그의 청중들을 고의적으로 속였다.










• 그는 전보내용에서의 중요한 부분들을 빼버렸는데, 그것은 그의 주장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










• 그는 그의 청중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전보”가 분명히 결코 발송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가진 전보의 글은 1956년에 만들어진 복사본인 것 같다.










• 흐루쇼프는 이 전보라고 주장되는 것의 내용의 의심스러운 성격을 폭로하지 않았다. 말렌꼬프, 몰로또프, 까가노비치를 처벌하기 위해 소환된 1957년 6월 후반 중앙위원회총회에서 그 내용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내용을 알고 있다.










• 사실 흐루쇼프는 이 위조된 “전보”를 가지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 이 전보의 “원본”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은 1990년대에 출판되었다. 전보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완전한 하나의 논문작성에 필요한 만큼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전보가 가진 문제들 중 몇 가지는 아래의 논의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당의 서기들을 천사처럼 보이게 만드는 첫 번째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비밀연설의 이 “전보”부분의 전체 내용이 대단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그의 연설에서 정확하게 이 점을 밝힌다 ― “지역당조직의 지도자들”이 고문에 관하여 불평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모두 스딸린과 베리아의 잘못이라는 것! 그의 심복인 베리아와 스딸린은 “나쁜 놈들”이었다는 것 ― 당의 서기장들은 그들에게 저항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Inoy Stalin≫라는 책으로 출판된 쥬꼬프의 주요한 문서 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실 무엇보다도 대규모 처형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 당의 서기장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딸린과 중앙당의 정치국 지도자들(쥬꼬프의 표현대로, “소수의 지도자들”)는 대규모 처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쥬꼬프는 흐루쇼프가 “범주 1”(최고 사형에 해당되는 중범죄자 :역자)에 포함될 사람 수를 ― 이름이 없이 숫자로 ― 20,000명으로 올리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구한 문서를 보았다고 주장한다. 게티는 두 개의 범주에 41,000명의 사람들을 넣어달라는 그의 요구를 인용한다.29)





그러므로 “비밀연설”의 주된 목적은 그 자신과 같은 서기장들의 피에 굶주림을 덮어버리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흐루쇼프는 어쨌든 예조프를 비난한다 ― 그는 몇 번이나 예조프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그가 정말로 싫어했고 실질적으로 예조프시대(Ezhovshchina, 예조프에 의한 대숙청시기: 역자)를 멈추게 했고, 선고를 재검토함으로서 그것의 남용을 정정했던 베리아를 주로 비난한다. 그리고 물론 흐루쇼프는 스딸린에게 주된 비난을 맞추는데, 스딸린은 탄압을 멈추게 하는 데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역할이 컸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것은 흐루쇼프가 (전보에 있는 내용 중: 역자) 빼버렸던 것이다 ― 굵은 글씨로 된 전(全)구절(인용문을 보라30)). 이 구절은 몇 가지 내용을 보여준다:










• 그 내용은 “육체적 압력 수단”이 사용되어질 수 있는 상황을 선별하고 한계와 제한을 둔다.










• 그 내용은 예조프와 가까운 동료들인 잘 알려진 고위직 비밀경찰 직원들을 호명하며 그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짜꼬프스끼(Zakovskii)가 포함되어 있는데, 흐루쇼프가 로젠블럼(R-ozenblium)을 통하여 허위 기소의 주요 날조자로서 인용했던 자이다 (위의 18부분을 보라). 흐루쇼프가 전보의 내용에 있는 이 부분을 인용했었다면, 그것은 스딸린이 대규모 탄압을 억제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대규모 탄압을 조장하고 있었다는 “비밀연설”을 통한 흐루쇼프의 주요 주장의 토대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최근에 공개된 자백-심문에서 예조프는 자기에게 가장 헌신적인 사람으로서 짜꼬프스끼의 이름을 대고 있고, 예조프는 자신과 부하들이 연루된 날조와 살인에 관하여 자꼬프스끼가 베리아에게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꼬프스끼를 죽이도록 자신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확인한다.





“고문 전보”는 흐루쇼프의 기만을 보여주는 복잡한 한 예이며, 장기간의 분석적인 연구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목적의 주된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가진 문서 ― “1939년 1월 10일 문서 ― 는 기껏해야 초안의 복사본이다. 그것은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다. 그 문서에는 스딸린이나 다른 사람들의 서명이 없다. 가장 최근의 반(半)공식적(semi-official)인 편집본에는 스딸린이 그것에 “서명했다”는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손으로 직접 쓴 교정이 스딸린의 필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31) 이것은 순전히 허세이다; 편집자들은 이것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명백한 것은 편집자들이 독자들에게 이것이 1939년의 진짜 문서라는 것을 납득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2. 그것이 위조된 문서가 아니라면, 아마도 그것은 송출되지 않은 “초안”이거나 혹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그 문서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져 있듯이, 그것은 1956년 타이프 쳐진 복사본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1956년에 추가된 부분의 활자체와 전보의 나머지 부분의 활자체가 동일하게 보인다.





이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이 문서나 혹은 쏘련의 소멸 이후로 발견되었다고 하는 정확성에 의문이 가는 많은 다른 문서들에 대한 이러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는 바대로 복사본이라면, 그 복사본의 원본 문서는 어디에 있을까?





3. 1957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몰로또프, 말렌꼬프, 까가노비치, 쉐삘로프의 “반당 그룹”이 전 해에 흐루쇼프를 축출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그 죄를 추궁받았을 때, 몰로또프는 몇몇 체포당한 사람들에 대한 “육체적인 압박”을 사용하기 위한 결정은 존재했었지만, 모든 정치위원들이 그것에 서명했다고 진술했다. 그때 흐루쇼프는 두 개의 문서가 있었고 그가 두 번째 문서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첫 번째 문서의 주제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이 첫 번째 문서는 무엇일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가정된 두 번째 문서에 대해서는, 이 토론에서 다른 중앙위원회 위원에 의하면, 원본은 파괴되었지만, 복사본 하나가 다게스딴주(Dagestan Obkom)(지역위원회)에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서는 어떤 공식 문서에도 있지 않고, 잘해야 초안이거나 그 초안을 나중(1956년)에 타이프 친 복사본거나, 심지어 전적으로 위조된 문서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복사본은 확실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사본은 아니다. 그것에 관한 다른 복사본이 나타났던 적은 없고, “다게스딴주” 문서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확실히 흐루쇼프는 스딸린에 적대하는 그런 가치 있는 증거를 결코 파괴하지 않았을 것이다 ― 어떤 식으로든 그 증거가 그 자신에게 죄를 씌우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이 애초에 존재했다면. 이 사건에서 “다게스딴주 복사본”에 대한 A. B. 아리스또프(A. B. Aristov)(중앙위원회에서 흐루쇼프의 주요한 지지자 중 한 사람)의 언급은 중앙위원회 나머지 사람들 앞에서 “반당 그룹”을 협박하기 위한 허세였다.32)





게티는 1939년 7월 27일 날짜의 유사한 전보 전문을 발견했다고 진술했다.33) 그것이 진짜라면(그것은 출판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든 정치국 위원들이 그 전보에 서명을 했다는 1957년 7월의 몰로또프의 말이 옳다면,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회의 후에 (실각한 뽀스띠에프의 자리를 차지한) 후보위원이었고, 1939년 3월 22일 정치국 위원이 되었던, 흐루쇼프도 역시 그 전보에 서명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흐루쇼프가 몰로또프, 말렌꼬프, 까가노비치와 똑같이 책임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비밀 연설”에서 흐루쇼프가 말한 대로 전보가 정말로 1939년 1월 10일 발송되었다면, 그는 그 전보에 서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확실히 보았을 것이고(a), 그것을 실행했던 것에 대한, 즉, 그는 우끄라이나의 서기장이었고 거기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억압”을 죄수들에게 적용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b).





그러므로 흐루쇼프가 1939년 7월 27일 전보의 원본의 복사본들을 찾아내려 했고,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파괴하도록 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일을 하기 전에, 그는 같은 문서로부터 만들어진 복사본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만(나중의 판본에는 있었던 예조프의 이름은 빼버린 채로), 그가 정치국에 합류하기 전 기간으로 날짜를 앞서게 만들었다. 우리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학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흐루쇼프가 많은 문서들을 파괴하도록 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유리 쥬꼬프(Iuri Jukov), 니끼따 뻬뜨로프(N-ikita Petrov), 마르크 준게(Mark Junge), 롤프 비네르(Rolf Binner) 모두는 흐루쇼프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문서들을 파괴했던 것 같다는 사실을 입증한다.34) 전 농업부 장관 베네딕또프는 1989년 출판된 기사에서 똑같은 사실을 말했다. 이러한 각본에 따른다면, 게티가 발견했던 문서는 흐루쇼프가 발견하지 못해 파괴하지 못했던 복사본이다. 우리가 정말로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적어도 흐루쇼프가 그의 청중들을 속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문서로부터 선별적으로 인용을 했다는 것이다.










29. 로도스(Rodos)는 베리아의 명령에 따라 츄바르(Chubar)와 꼬시오르(Kosior)를 고문했다










흐루쇼프:










얼마전 ― 현재의 전당대회보다 단지 몇 일 전 ― 우리는 중앙위원회 최고 간부회의(Central Committee Presidium)를 소집했고, 조사담당 재판관인 로도스를 심문했는데, 그는 재직시 꼬시오르(Kossior), 츄바르(Chubar), 꼬사레프(Kosarev)를 조사하고 심문했었던 사람이다. 그는 새 대가리를 가진 비열한 사람이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사람이다. 그리고 당의 뛰어난 일꾼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의 “범죄”를 규명하면서, 그것과 함께, 정치적으로 연루된 중요한 사건이 그려질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이 일들에 있어서 정치적 문제와 연관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한 지적능력을 가진 사람이 꼬시오르 등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한 조사를 혼자서 할 수 있었을지 아닐지에 대하여 의문이 떠오른다. 아니다. 그는 적절한 지시 없이 그것을 수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앙위원회 최고 간부회의에서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꼬시오르와 츄바르가 인민의 적이라고 들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사담당 재판관으로서 그들에게서 자신들이 적이라는 자백을 받아내어야만 했다.”





(좌중은 분노했다.)





그는 베리아로부터 세세한 지시를 받으며, 오직 장시간의 고문 ― 그는 고문을 했다 ― 을 통해서 이것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말해야 한다. 중앙위원회 최고 간부회의에서 그는 냉소적으로 말하였다: “나는 당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체포자들에 대한 육체적 압박의 사용과 관련된 스딸린의 지시는 실제로 수행되었다.





올바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당의 모든 규범이 무력화되고, 한 사람의 의도에 모든 것이 의존했다는 것을 이러한 것과 다른 많은 사실들이 보여준다.










여기서 흐루쇼프의 기만은, 로도스가 고문하여 받아낸 자백에만 오직 근거하여 츄바르와 꼬시오르가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되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츄바르와 꼬시오르에 대해서는 “육체적 압박 수단”을 통해 얻어낸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많은 증거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파 음모 조직원과 독일 스파이로서, 1939년 4월 26일에 예조프는 자백-심문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대었다.





흐루쇼프는 로도스가 베리아의 사람임을 암시했다.35) 그러나 복권자료는 예조프의 재임 기간 동안에도 그가 용의자들의 수사에 참여했었다는 것을 기술한다. (RKEB 1, 176).





로도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명령에 따랐을” 수도 있다. 만약 흐루쇼프와 “고문 전보"가 주장하듯이, 중앙위원회에서 고문을 재가하였다면, 그리고 그가 시인했다고 보이는 것처럼 몇몇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을 지시받았다면, 그러면 그는 단순히 지시에 따랐던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그의 진짜 범죄는 예조프의 재임기간뿐 아니라 베리아 재임기간에 조사자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흐루쇼프는 베리아의 모든 것에 대해 가장 맹렬히 비난하였다.





로도스는 1956년 2월 21~26일 동안 ― 20차 전당대회 기간 동안 ― 재판받고 선고받았다!36) (RKEB 1, 411, n. 13). 왜? 이것은 로도스가 “재판받고”, 입 다물 것을 지시받았음을 암시한다. 비밀경찰의 조사부서(Investigation Secti-on)의 수장으로서 로도스는, 예조프의 활동에 대한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삭 바벨(Isaac Babel), 브세볼로드(Vsevolod), 메이에르홀드(Meierkhol'd)와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예조프의 부인 주변 조직의 사람들의 사건을 담당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사람들에게 흐루쇼프의 “복권”에 협조하라고, 흐루쇼프가 원하는 말을 하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도로 그의 운명이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베리아의 부하 중 한 명인 빠벨 수도쁠라또프(Pavel Sudoplatov)는 베리아에 대한 혐의를 위조하는 것을 거절한 이유로 15년간 투옥되었고, 몇 년 간 정신이상인 척 가장하는 어려운 술수를 통해서 겨우 처형을 면하였다.





로도스의 재판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을 고문하고, 사건을 날조한 다른 많은 비밀경찰 직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예조프의 해고 이후에 기소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로도스와 베리아를 탄압 때문에 비난을 당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흐루쇼프에게는 확실히 편리했다.





로도스를 제거하기 위한 이러한 거센 공격은,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남아 있는, 흐루쇼프가 서기장으로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의 예조프와 흐루쇼프 사이의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빠벨 수도쁠라또프 장군은, 쏘련 검찰총장(head Soviet Prosecutor)이자 흐루쇼프의 사람인 로만 루덴꼬(Roman Rudenko)로부터, 베리아가 죽은 이후에 그에 대한 거짓 증언을 써줄 것을 요청받았다. 수도쁠라또프가 그것을 거절했을 때, 그는 베리아에 대한 가상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수도쁠라또프의 기술에 따르면, 쏘련의 영웅인 이반 I. 마슬레니꼬프(Ivan I. Maslennikov) 장군은 같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자살을 했다. 수도쁠라또프는 정신이상을 가장하여 겨우 처형을 피하였으나 15년 동안 투옥되었다.37) 로도스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4장 끝) <노사과연>











1) Lubianka 3, p. 57.





2) RKEB 1, p. 219.





3) bid, p. 251.





4) F. I. Chuev. Kaganovich. Shepilov. Moscow: OLMA-PRESS, 2001, p. 117.





5) Chuev, Molotov, pp. 486-7.





6) RKEB 1, p. 326.





7) Lubianka 3, p. 590.





8) 울리끄의 편지는 그가 자백을 했다고 분명히 진술을 하는 반면에, 흐루쇼프 시대의 복권자료들은 꼬사레프가 “꾀임에 빠져” 자백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들 중의 몇 개는 결코 자백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들은 결코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심문자료들과 재판자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증거가 없이는, 우리는 말할 수 없다.





9) A. I. Mgeladze. Stalin. Kakim ia ego znal. Stranitsy nedavnogo proshlogo N. pl., 2001, pp. 165; 172.





10) Sovetskoe Rukovodstvo. Perepiska 1928-1941. Moscow: Rosspen. 1999, reprints a number of letters by both Andreev and Zhadanov.





11) E. V. Tatanov, "Partiinii gubernator Moskvy Georgii Popov (Moscow: Izd-vo Glavarkhina Moskvy, 2004), 12-14 and note 17 p. 104.





12) Zhertvy politicheskogo terrosa v SSSR. Na 2-kh diskakh. Disk 2. Stalinskie rasstrel'nye spisky Moscow: Zven'ia, 2004. http://www.memo.ru/history/vkvs/





13) At http://www.memo.ru/history/vkvs/images/inrto1.htm





14) “정치국 모든 회원들이 아니라, 오직 스딸린과 가장 가까웠던 위원들이 목록을 재검토(사실은 공동서명)하는 데 참여했다.” At http:///www.memo.ru/history/vkvs/images/inrto.htm





15) “목록 8에서 우리는 예조프의 서명을 발견한다(분명히 여기에서 그는 내무 인민위원회위원이 아니라 중앙위원회의 서기로 활동하고 있었다)”, ibid.





16) Cf http://www.memo.ru./history/vkvs/spiski/pg02049.htm





17) 1937년 8월 11일 볼꼬프(Volkov)는 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1938년 10월부터 1940년 2월까지 벨로루시 공산당 추바슈주(Chuva-sh Obkom)의 서기장의 지위를 겸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 그는 1941년이나 1942년에 죽었다. 볼꼬프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은 2001년 4월 21일자 Sovetskaia Belorussia 신문에 실려 있다.





Cf http://sb.by/article.php?articleID=4039





18) Cf. http://www.mosoblproc.ru/history/prokurors/7/ and





http://www.memo.ru./memory/d39.htm





19) Cf. http://www.mosoblproc.ru/history/prokurors/8/ and





http://mos.memo.ru/shot-63.htm





20) Jansen & Petrov, pp. 84; 148.





21) RKEB 3, p. 660.





22) Getty & Naumov 498-512.





23) Rovert Thurston. Life and Terror in Stalin's Russia, 1934-1941. (Yale U-niversity press; 1998), p. 109, 112;역시 그의 책의 Part 4를 보라.





24) Khrushchev, Vremia, Vlast'. Kn. I chast'1 (Moscow: Moskovskie Novosti, 1999), pp. 172-3





25) Jansen & Petrov p. 84; p. 148.





26) Thurston, pp. 118-119.





27) RKEB 1, p. 317. Cf. http://www.alexanderyakovlev.org/almanah/inside/alma-nahdoc/55752





28) See the note by Okhotin snd Roginskii in Danilov, V.,et al., ed., Trsgediia Sovetskoi Derevni. 5 No. 2 (Moscow: ROSSPEN 2006) 517. Also Mark Iunge, Gennadii Bordiugov, Rol'f Binner, Vertikal' Bol'shogo Terrora (Mosvow: Novyi Khronograf, 2008), 490, n. 55.





29) Komsomolskaia Pravda December 3 2002; J. Arch Getty. "Excesses are not permitted.: Mass Terror and Stalinst Governance in the Late 1930s". The Russian Rebiew. Vol. 61 (January 2002), p. 127.





30) 역자주: 인용문에는 굵은 글씨가 없다. 부록에 실린 전보전문에는 굵은 글씨가 있는데, 필자가 “부록을 보라”라고 쓸 것을 착각한 것 같다.





31) Lubianka 3, No. 8, pp. 14-15 and n. o. 15.





32) Molotov, Makenkov, Kaganovich, 1957. Srenogramma iiun'skogo plenuma TsK KPSS I drugie dokumenty. Ed. A. N. Iakovlrv, N. Kovalrva, A. Korotkov, et al: MDF, 1998, pp. 121-2.





33) Getty, "Exesses" p. 114, n. 4.





34) IU. Zhukiv, "Zhupel Stalina", Part 3. Komsomolskaia Pravda, Nov. 12, 2002), Nikita Petrov, Ivan Serov, Moscow 2005, pp. 157-162; Mark Junge and Rolf Binner, Kak terror StalBol'sbim. Moscow, 2003, p. 16, n. 14.





35) 니키따 뻬뜨로프는 로도스가 1953년 10월 5일에 체포되었다고 진술했는데, 그 기간에 “베리아 패거리”의 다른 사람들도 체포되어 심문받고 있었다. N. Petrov, Pervyi predsedatel' KGB Ivan Serov. Moscow, 2006, p. 393.





36) RKEB 1, p. 411, n.ote 13. 로도스의 조사기록은 아직 기밀해제되지 않았다. 모스크바 중앙도서관 보관소(the Exhibition Hall of the Federal Archives in Moscow)의 "1953 god. Mezhu proshlym i budushchim"(2004) 보관소에, 로도스에 대한 2개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다음을 보라. http://www.rusarchives.ru/evants/exhibitions/stalin_sp.shtml, Nos 269 and 270. 로도스 조사파일은 아직 존재하는 것 같다.





37) Pavel Sudoplatov, Spetsoperatsii. Lubianka i Kreml' 1930-1950 gody. Moscow: Sovremennik, 1997. 이 문제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있다. http://www.hrono.ru/libris/lib_s/beria1.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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