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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스딸린 바로 보기(18)
글쓴이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 E-mail send mail 번호 329
날짜 2013-07-15 조회수 3152 추천수 79
파일  1373862349_스딸린 바로 보기(18).hwp

  

























번역 : 편집부




















10장 스딸린에서 흐루쇼프까지















1946년 2월 9일, 스딸린은 자신의 선거구민들에게 반파시스트 전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쟁은 인민들의 모든 힘이 성공적으로 시험받았던 거대한 학교였습니다.’










스딸린은 붉은 군대가 승리의 주요한 요인이었다고 자처하는 군사주의 경향을 간접적으로 공격했다. 뚜하체프스끼 시대에 만연했던, 군대가 공산당보다 상위라는 사고는 전쟁이 끝날 무렵 주꼬프의 집단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물론 스딸린은 군대의 엄청난 업적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승리를 거둔 것은 바로 우리 쏘비에뜨 사회체제였습니다.... 전쟁은 우리 쏘비에뜨 사회체제가 진정한 인민의 체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승리는 ‘우리의 쏘비에뜨 정치 체제에 기인합니다.... 우리의 다민족 국가는 모든 전쟁의 시험에 맞섰고 그 생명력을 입증했습니다.’1)





스딸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승리를 오로지 우리 군대의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군대의 영웅주의는 인민들이 군인들을 위하여 만든 엄청난 수의 탱크와 대포, 군수품들이 없었다면 단지 헛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산은 ‘13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달성한’ 공업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단기간 안에 우리 농업의 불변의 후진적 상태’를 종식시킨 집산화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다. 스딸린은 또한 공업화와 집산화에 반대했던 뜨로츠끼파와 부하린파가 주도한 투쟁을 회상했다:










‘우리 공산당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계획적으로 공산당을 후퇴시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보통의’ 길로 밀어넣으려고 했습니다.’2)










이렇게 스딸린은, 방위와 전쟁에 대비하여 공산당과 노동 대중들에 의해 수행된 핵심적 역할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1946년 2월, 새로운 5개년 계획이 승인되었다.





독일 군대는 후퇴하는 동안 고의로 쏘비에뜨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질렀다: 2000곳의 도시, 7만 곳의 마을,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들이 전부 혹은 일부분 파괴되었다.3)





군대가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쏘련이 나찌가 공업 기구들에 가했던 상처들을 모두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3년 후인 1948년에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다.4) 1940년을 기준(100으로: 역자)으로 비교하면, 석탄 생산량은 123, 전기는 130, 합판 제품은 102, 차와 트럭은 161, 공작기계는 154, 시멘트는 114를 기록했다.5)





네 번째 5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50년에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73% 능가했다. 소비재의 생산이 23% 증가한 반면, 자본재의 생산은 두 배로 늘었다.6)





1951년에서 1955년까지 기간의 다섯 번째 5개년 계획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추진했다. 5년 동안 자본재가 80%의 성장을 하는 동안, 소비재 생산이 65%라는 눈에 띄는 성장을 보인 것은 새로운 변화였다.7) 경제 정책의 이러한 변화는 1946년 스딸린의 요약 연설에서 이미 발표되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8)















나찌 독일이 떠난 곳을 미국이 접수하다










심지어 반파시스트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많은 수의 미국 장군들이 동맹관계를 변화시켜서 쏘련을 공격하고자 했다. 이러한 모험을 위해서, 그들은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을 추방한 후에 나찌 군대를 이용하려고 했다. 전직 비밀 요원이었던 쿠크리지(Cookridge)는 1945년 여름에 있었던 토론의 일부를 회상했다:










‘패튼(Patton) 장군은 두 개의 독일 친위대 사단을 재무장하여, 자신의 미국 제3군에 통합시켜서 “붉은 군대에 맞서 그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패튼은 독일의 미군정 장관 조셉 맥나니(Joseph T. McNarney) 장군에게 매우 진지하게 이러한 계획을 제출했다.... “당신은 저런 빌어먹을 볼쉐비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염려되십니까?” 패튼이 말했다. “우리는 조만간 그들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온전하고 우리가 붉은 군대를 러시아로 쫓아버릴 수 있는데, 왜 지금이 (쏘련을 공격할 시기가: 역자) 아닙니까? 우리는 나의 독일인들과 함께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빨갱이들을 싫어합니다.”





‘이후에 머피(Murphy)는 이렇게 적었다. “그는, 러시아가 미국을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그가 30일 내로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한, 모스크바로의 진격의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9)















겔렌(Gehlen), 나찌, 그리고 CIA










겔렌 장군은 쏘련에 대한 첩보활동을 담당하는 나찌 정보부의 수장이었다. 1945년 5월, 그는 자신의 문서를 가지고 미국에 투항했다. 그는 브래들리(Bradle-y) 장군의 군대를 위한 정보부 수장인 루터 시버트(Luther Sibert) 소장에게 보내졌다. 시버트의 요구에 따라, 나찌 겔렌은 129쪽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후, 겔렌은 ‘미국 기관의 보호하에 쏘련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는 비밀기관을 조직하는 그의 거대한 계획을 진전시켰다.’10) 겔렌은 최고위직 미군 당국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당시는 쏘비에뜨 대표자들이, 송환해야 하는 두 명의 전쟁 범죄자인 겔렌과 쉘렌베르그(Schellenberg)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자 미국이 그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답했던 시기였다. 1945년 8월 22일, 그들은 은밀하게 겔렌을 미국으로 보냈다.11) 나찌 겔렌은 앨런 덜레스(Allen Dulles)를 포함한 미국 정보기관의 고위층과 ‘협상’을 했고, 그들은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겔렌의 첩보 조직은 계속해서 쏘련 내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미국 정보부와의 연락’은 미국 장교들에 의해 계속 유지될 것이다. 게다가 ‘겔렌의 조직은 오로지 쏘련과 공산주의 세력권의 위성 국가들에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만 이용될 것이다.’12)





1946년 7월 9일, 겔렌은 미국의 보호하에 그의 나찌 정보기관을 재가동시키기 위해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많은 고위급 게쉬타포(비밀경찰, Gestapo)와 나찌 친위대 장교들을 고용했고, 그들에게 거짓 신분증을 제공했다.13)





전쟁이 끝날 무렵, 전직 나찌를 추적하는 임무를 맡은 전직 미군 정보부 요원인 존 로프터스(John Luftus)는 ‘경쟁 관계’의 정보기관이 수많은 우끄라이나, 크로아티아, 헝가리 파시스트들을 미국으로 잠입시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프터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만 명 정도의 나찌 전쟁 범죄자들이 미국에 들어왔다.’14)










미국이 냉전을 시작했던 1947년 직후부터 이러한 ‘전직’ 나찌들은 반공주의 선전활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나찌의 확장주의의 직접적인 연속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쏘련을 위협하는 핵폭탄










포츠담(Postsdam)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45년 7월 21일, 트루먼(Truman)은 미국의 첫 번째 핵실험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마가렛 트루먼(Margaret Truman)은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아주 뻔뻔스럽고 무례한 스딸린과 교섭하는 나의 아버지를 해방시켰다.’15)










그녀는 이어서 적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제 원자 폭탄에 대해서 스딸린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는 곤란한 문제에 착수했다.... 아버지는 러시아 지도자와 산책을 하며 그에게 미국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파괴력을 가진”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국의 수상 처칠과 미국의 국무 장관 번스(Byrnes)는 단지 몇 야드 떨어진 곳에 서서, 스딸린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는 놀랄 만큼 태연했다.’16)










주꼬프는 스딸린과 몰로또프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몰로또프는 즉시 반응했다. “그들이 경매가를 올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스딸린은 웃었다.





“올릴려면 올리라지. 내가 오늘 꾸르차또프(Kurchatov)와 그것에 대해서 의논해서 그에게 일을 빨리 진척시키라고 해야겠네.”





‘나는 그들이 원자폭탄의 개발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임을 알아챘다.’17)










스딸린은 결코 두려움이 없었던 단호하고 침착한 인물이었고, 심지어 핵공갈에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최초의 원자폭탄 제조 직후에, 트루먼은 그것을 미국의 세계 패권을 보장하는 대량 학살의 무기로서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폭탄을 하나의 군사 무기로 여겼고, 이것을 실제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처칠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나에게 주저 없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지지한다고 말했다.’18)










7월 말, 쏘련은 일본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일본의 패전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핵무기를 사용할 군사적 필요성이 전혀 없었지만, 미국은 그들의 핵무기를 인류에게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심지어 나찌들조차 하지 않았었던 수준으로, 자신의 적들에게 테러를 자행하기를 원했다. 핵무기가 일본인들을 대량으로 죽였을 때, 제국주의의 주된 목적은 쏘비에뜨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주된 메시지는 스딸린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처칠이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그는 쏘련에 그 무기를 사용하길 원했다!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 교수는 이렇게 기술했다:










‘앨런 브룩(Alan Brooke) 육군 원수는 수상의 유치한 열정이 거의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 (처칠: 역자)는 이미 자신이 러시아의 모든 공업중심지를 절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9)










포츠담에서, 처칠은 ‘그들이 러시아인들에 대해서 이것을 외교적인 지렛대로 삼을 것을 충동질했다.’20)





1945년 8월 6일, 핵폭탄에 의해 히로시마가 파괴된 사실을 알게 된 후, 트루먼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이 ‘역사에 있어 체계적인 과학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선언했다. 트루먼은 뻔뻔스럽게도 그의 회고록에 그렇게 적었다! 수억 명의 일본 시민을 마구잡이식으로 몰살한 미국 제국주의의 결정은 그 비인간성과 야만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파시스트 권력이 치켜세운 횟불이었다. 같은 날, 트루먼은 공식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지금 당장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금껏 이 지구에서 보지 못했던 하늘에서 내리는 파멸의 소나기를 맞게 될 수도 있다.’21)










8월 9일, 두 번째 도시인 나가사키가 트루먼이 약속한 원자폭탄 소나기로 인해 파괴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44만 3000명의 시민들이 대학살 당했다.22)





장래에 세계 패권을 잡을 유일한 국가인 미국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어떠한 반제국주의 운동, 인민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에도 맹렬하게 적대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폭정’으로부터 (시장 및 착취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선전 문구를 내세우는 무제한적 간섭주의 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의 의미이다. 여기 트루먼이 1947년 3월 12일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나와 있다:





‘이것은 무장한 소수집단이나 외부 압력에 의한 지배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 인민들을 지원하는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합니다.’23)










이러한 간섭주의 정책은 주로 ‘러시아 전체주의의 위협’에 의해 “정당화”된다. 트루먼은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위협은 어느 모로 보나 나찌 독일의 위협 만큼 중대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공언했다.24) 세계 패권의 경쟁자인 히틀러를 제거한 이후, 트루먼은 나찌의 모든 반공주의 중상을 다시 사용했다. 트루먼이 쏘련에 대해 어떻게 발언했는지 여기 나와 있다:










‘하나의 국가 종교라는 장식을 통해 독재 정권을 수립한 잔인하지만 능숙한 광신자들의 집단 ... 개인은 영원한 노예로서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5)










따라서 나찌가 전쟁에서 패배하자마자, 트루먼은 반공주의와 반쏘비에뜨주의를 주요 방침으로 채택했다. 사실, 1944년 8월 31일, 미국에 이것의 시작을 제안한 인물은 바로 히틀러 자신이었다.










‘우리 적들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유럽을 공산주의로 만들 것이다.’ ‘우리 적들의 연합은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 한편에서는 초자본주의 국가들과, 다른 한편에는 초공산주의 국가들이 있다.’ ‘언젠가 연합은 붕괴될 것이다.’ ‘정세가 아무리 심각해도,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26)










나찌는 필연적인 패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쟁이 끝나가자 그들의 역겨운 반공주의의 중상을 강조했다. 18개월 후에 트루먼은 그것들을 채택했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평화를 향한 투쟁










이러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1945년에서 1953년까지 스딸린이 추진한 국제정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스딸린은 미제국주의와 미국의 전쟁 계획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반대했다. 그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여러 인민들의 혁명 운동을 도왔다.





스딸린은 세계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네 개의 투쟁 전선을 이끌었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근거지인 쏘련의 방어력을 보강했다; 그는 인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정에 있는 인민들을 도왔다; 그는 독립을 원하는 식민지 국가의 인민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군사적 모험에 대항하여 평화를 위한 광대한 국제 운동을 고무했다.





스딸린은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의 목적이, 그들의 세계 패권 전략에 통합시키기 위해, 나찌에 협력했었던 쏘련 주변 국가의 반동 계급을 ‘구하기 위한 것’임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러한 방침은 이미 전쟁 중에 명확했다.





1944년 8월 1일에, 런던에 있는 폴란드 정부는 바르샤바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동분자들은 단지 붉은 군대가 폴란드 수도를 해방시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범죄적 모험을 저질렀다. 겨우 600㎞를 전진한 붉은 군대는 많은 병력과 상당한 군수품을 잃었다.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로 전진해서 반란을 돕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폴란드의 반동분자들은 반란을 일으킬 그들의 계획을 고의적으로 쏘련에 숨겼다. 그러나 바르샤바에 이미 여러 사단을 집결시켜 놓았던 나찌는 주민을 대량학살하고 수도를 파괴했다.27)





스딸린은 이것을 전쟁 속의 전쟁으로 보았다. 그는 처칠과 루즈벨트(Roosev-elt)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권력을 잡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모험을 저지른 죄인들에 대한 진실이 조만간 밝혀질 것입니다.’28)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는 처음으로 헝가리의 한 마을을 해방시켰다. 2일 뒤, 1919년 이래로 권력을 쥐고 있었던 호르티(Horthy)의 파시스트 정부는 새로운 상황을 다루게 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앵글로 색슨족 본인들이 헝가리를 차지하기 전까지 헝가리 인민들이 러시아인들을 저지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9)





호르티와 그 패거리는, 쏘비에뜨 군대에 맞서 부다페스트를 ‘방어’하기 위해 준비한 35개의 파시스트 사단들만으로 ‘붉은 제국주의(Red imperilalism)’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헝가리 반동들은 미국에 의해 구원받기를 소망했는데, 미국은 ‘쏘비에뜨의 팽창주의’로부터 ‘헝가리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었다. 모든 중앙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민족 독립’은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민족의 이익과 싸우기 위한, 또한 세계 지배라는 미국의 전략으로 더 효과적으로 통합되기 위한 반동 계급들의 경쟁적 외침이었다.





그리스에서 공산주의 정당이 이끈 민족적 저항은 나찌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1944년 10월 12일, 독일이 아테네에서 철수하자, 7만 명의 무장 저항세력들이 거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다. 영국 군대가 그리스 인민들이 혁명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간섭했다. 12월 5일, 처칠은 스코비(Scobie) 장군에게 이런 글을 썼다.










‘그러나, 당신이 마치 지역적인 반란이 진행 중인 정복된 도시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데 주저하지 마시오.’30)










그리고, 그리스 반파시스트 세력에 맞선 영국과 미국의 장기간의 전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앙 유럽과 동유럽 국가의 파시스트 무장 세력을 진압함으로써, 붉은 군대는 노동자, 농민, 반파시스트들의 투쟁의 전개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도움 덕분에, 공산주의 정당이 이끄는 대중들은 사회주의 정권을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래서 진정한 민족적 독립을 이루었다. 그들은 그러한 국가들을 미국의 신식민지로 만들어 정권을 유지하려 시도하던 파시스트와 부르주아 세력의 음모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나찌가 1941년 전쟁 초에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고안한 ‘붉은 제국주의’ 이론은 1946년 미국에 의해 채택되었다. ‘독립’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해석은 반히틀러 전쟁을 이끌었던 세력을 대량학살한 그리스에서 잘 알 수 있다.





파시스트 정권의 패배 이후, 국제 정세에 대한 스딸린의 분석은 그의 가까운 동료이자, 900일간의 파시스트 봉쇄 기간에 레닌그라드의 정치 지도자였던 쯔다노프에 의해 소개되었다.





이것은 1947년 9월 폴란드에서 9개 공산주의 정당의 정보회의에 쯔다노프가 제출한 내용이다. 이러한 입장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적절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9년 후 흐루쇼프의 쿠데타 이후 하나 하나 모두 기각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확장주의 정책의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 세계 지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은 미국의 독점을 공고히 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경쟁자들인 독일과 일본이 소멸하고, 미국의 자본주의 동료인 영국과 프랑스가 약화되면서 확립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은 대규모 군대, 경제, 정치 계획에 달려 있는데, 이러한 방식을 적용하여 목표로 하는 모든 국가들에서 미국의 정치 및 경제 지배를 완성할 것이며, 이로써 그러한 국가들을 위성 국가로 격하시키고, 미국 자본이 이러한 국가들을 착취하는 것을 막는 어떠한 장애물도 제거할 국내 정권을 설립할 것이다.’





‘처칠을 따르는, 가장 격분하고 불안정한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미국이 일시적으로 독점한 핵무기를 쏘비에뜨 인민들에 대해 사용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며, 가능한 빨리 쏘련에 대항하는 예방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전략 계획은 평화 시기에 미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쏘련과 신민주주의 국가들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고안된, 다수의 군 기지와 무기 저장소의 건설을 요구한다.’





‘미국의 독점자본은 독일의 자본주의 복구에 그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는데, 그것이 유럽에서의 민주주의 세력에 맞선 투쟁의 성공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 지배의 야망으로 가는 과정에서, 미국은 반제국주의와 반파시스트 정치의 요새로서 국제적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쏘련과 맞서야 하고, 영국 및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신민주주의 국가들과, 모든 국가들의 노동자들과 맞서야 한다.’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의 이러한 새로운 정책에 대해 양보한다면, 이 정책을 고안한 자들은 더 거칠고 호전적으로 될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 정당들이 모든 방면에서 제국주의의 팽창과 침략에 맞선 저항을 이끌어야 하는 이유이다.’31)










스딸린은 항상 쏘비에뜨 인민들의 저력과 전 세계의 혁명적인 반자본주의 세력을 신뢰했다. 이러한 태도는 1950년 몰로또프에 의한 공식 선언에서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전쟁광들의 무기더미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고 누구도 믿지 말게 하라. 공포에 떠는 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제국주의자들과 침략자들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이 전쟁이 고립된 자본주의 국가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라는 점에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있는가?’32)










1947년, 쏘련은 자신의 핵무기를 제조했다. 스딸린은 악몽 같았던 미국의 핵무기 외교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쏘련과 전 세계 공산주의 정당들은 미국의 전쟁계획을 반대하고 핵무기를 금지하는 커다란 국제 운동을 시작했다. 세계평화협의회(World Peace Council)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평화 운동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회의 폐회 시에 선포된 그들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점점 더, 전 세계의 인류는 그들 자신에게, 스스로의 확고함과 의지에, 자신들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투쟁은 당신의 투쟁입니다. 평화를 외치는 수억 명의 열성 지지자들이 협력하고 있고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평화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입니다. 스톡홀롬 호소문에 서명한 5억 명의 깨어 있는 영혼과 더불어, 우리는 원자 폭탄의 금지, 대대적인 군비축소 및 이러한 조치들의 이행을 관장하는 것을 주장합니다.’33)















티토의 수정주의와 미국










1945-1948년 동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격렬한 투쟁을 이끌었던, 중앙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은 쏘비에뜨 공산당에 비해 경험이 훨씬 적었다. 사상적으로 그들은 견고하지 못했다: 종종 사회민주주의 집단 출신의, 수십만 명의 새로운 당원들이 입당했다는 사실은, 그들을 쉽사리 기회주의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게 만들었다.





일찍이 1948년에 반쏘비에뜨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정당의 지도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1948년에, 티토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촉구함으로써, 스딸린은 명석하고 자신의 원칙에 확고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45년 후에, 역사는 완벽히 그의 예언을 확인했다.





1941년 독일 침략 시기에 유고슬라비아 지하 공산당에는 1만 2000명의 당원이 있었고, 이들 중 8000명은 전쟁 중에 살해당했다. 그러나 저항 시기에 14만 명이 입당했고, 1948년 중반 이전에는 36만 명이 넘었다. 수만여 명의 꿀락들, 부르주아, 쁘띠 부르주아들이 공산당에 입당했다.34) 티토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그의 투쟁에서 점점 더 이러한 분자들에 의지했다. 공산당에는 정상적인 내부 활동이나 정치 토론이 없어서, 맑스-레닌주의적 비판이나 자아비판이 없었다: 지도자들은 선거가 아닌 지명에 의해 정해졌다.35)





1948년 6월, 8개의 정당을 포함한, 공산주의 정당의 정보국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비판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티토가 지방에서의 계급적 차이의 증대와 국가에서의 자본주의 요소들의 증대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강조했다.36) 부르주아 민족주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제국주의에 맞선 사회주의 연합 전선을 깨뜨렸음을 확인했다. 결의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한 민족주의 노선은 유고슬라비아를 단지 평범한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퇴보시킬 수 있을 뿐이다.’37)










일단 이러한 비판이 발표되자, 티토는 대규모 숙청을 시작했다. 공산당 내의 모든 맑스-레닌주의 분자들이 일소되었다. 중앙위원회의 두 위원인 쥬비크(Zh-ujovic)와 헤브랑(Hebrang)은 일찍이 1948년 4월에 체포되었다. 빨치산 부대의 참모총장이었던 알소 조바노비크(Arso Jovanovic) 장군은 슬라브꼬 로딕(Sl-avko Rodic) 장군처럼 체포되어 암살당했다.38)





런던의 신문인 ≪더 타임즈(The Times)≫지는 꼬민테른 결의문을 지지하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체포를 보도했다: 신문은 수감된 사람의 수를 약 10-20만 명 사이로 추산했다.39)





1948년 개최된 제8차 공산당 대회의 보고서에서 까렐(Karelj)은 유고슬라비아가 ‘꿀락 분자들을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으며 결코 ‘반쏘비에뜨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수많은 사례에 대해 스딸린을 인용했다.40)





그러나 몇 달 후, 티토주의자들은 계급투쟁 없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간다는 낡은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채택했다! 외무부 차관인 베블러(Bebler)는 1949년 5월에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에게는 쏘련에 있었던 꿀락들이 없다. 우리의 부농들은 인민 해방 전쟁에 한꺼번에 참전했다.... 만약 우리가 계급투쟁 없이 꿀락들을 사회주의로 넘겨주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 될 것인가?’41)










1951년 티토 집단은, 쏘비에뜨 ‘꼴호즈들이 국가 자본주의를 반영했고, 국가 자본주의는 봉건제도의 잔재와 함께 섞여 쏘련의 사회적 기초를 형성했다’라고 선언했다. 부하린의 사상을 발전시켜, 티토주의자들은 계획경제를 자유시장으로 대체했다:










‘외부의 어느 누구도 협동조합(the co-operative)의 생산 목표나 범주를 설정할 수 없다.’ 티토주의자들은 ‘객관적인 경제 법칙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체제로 가는 통로’를 조직하였다. ‘우리 경제의 사회주의 분야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수단으로 자본주의 경향들에 승리를 거둘 것이다.’42)










1953년, 티토는 토지를 매매하고 농업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유를 재도입하였다.





블라디미르 다쁘세비크(Vladimir Dapcevic)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 티토는 충실한 맑스-레닌주의자로 남아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을 히틀러의 제5열에 비유했고, 이런 논리로 20만 명 이상의 공산주의자들의 체포를 정당화했다. 티토는 이렇게 적었다.










‘파시스트 침략자들의 공격은 새로운 분자인 제5열에 상당한 중요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침략을 준비하는 중에 행동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정치적 군사적인 분자다. 오늘날 무언가 비슷한 것이 다른 형태로, 특히 꼬민테른 국가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에서 시도되고 있다.’43)





 





1950년대 초기에, 유고슬라비아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봉건 국가였다. 그러나 티토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국가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격했다. 195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수정주의자들은 ‘국가의 소멸문제와, 특히 경제 분야에서 국가의 역할의 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시작했다. 부르주아 국가로의 회귀를 정당화하기 위해 질라스(Djilas)는 쏘비에뜨 국가를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괴물 같은 조직 체계’라고 지칭했다. 질라스에 따르면, 여전히 스딸린은 ‘그의 국가 자본주의 제국의 확대와, 내부적으로는 관료제도의 강화’를 위해 싸웠다. ‘철의 장막,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패권, 호전적인 정치적 노선은 그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질라스는 ‘“상부의”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와 관료들의 특권을 위해 일하는 노동 계급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날 쏘련이 객관적으로 가장 반동적인 권력이다.’ 스딸린은 ‘국가 자본주의를 실행했고, 관료주의적 독재 정권의 우두머리이자 정신적 및 정치적인 지도자이다.’ 미제국주의를 위한 첩보원처럼 행동하면서, 질라스는 계속 이어갔다:










‘히틀러의 이론 일부는 스딸린의 이론과, 그 내용과 결과적인 사회적 실천의 관점 모두에서, 동일하다.’44)










이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질라스가 이 글에서 뜨로츠끼의 ‘스딸린주의 체제 비판’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추가하자!45)





1948년 까르델즈(Kardelj)은 여전히 반제국주의 투쟁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2년 후, 유고슬라비아는 한국에서의 미국의 전쟁을 지지했다! ≪런던 타임즈(The London Times)≫는 이렇게 보도했다.










‘데디예르(dedijer)씨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 세계를 지배할 쏘비에뜨의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만약 이것이 성공적으로 저지된다면... 전 세계 노동자들은 ‘세계 지배를 주장하는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하고, 쏘련이 이른바 민주주의 및 평화 세력을 대표한다는 환상을 제거해야만’ 한다.’46)










그래서 티토는 미국 반공주의 전략의 어리석은 앞잡이가 되었다. 티토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New York Herald Tribune)≫에 이렇게 선언했다. ‘쏘비에뜨가 유럽의 어디라도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비록 유고슬라비아 국경에서 먼 곳이라 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는 즉시 서방의 편에 서서 전투를 할 것이다....유고슬라비아는 스스로를 쏘비에뜨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건설된 집단적 방어벽의 일부라고 여긴다.’47)





경제 분야에서 유고슬라비아가 1948년 이전에 취했던 사회주의 조치들이 폐지되었다. ≪데일리 메일 (the Daily Mail)≫의 특파원 알렉산더 클리포드(Ale-xsander Clifford)는 1951년에 채택된 경제 개혁들에 대한 기사를 썼다:










‘만일 이것이 실현된다면, 유고슬라비아는 결국에는 영국보다 훨씬 덜 사회화된 채 끝나게 될 것처럼 보인다.’: ‘시장에 의해, 즉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의 가격’; ‘기업의 수입이나 이윤을 근거로 정해지는 ... 임금과 급료’; ‘어떤 제품을 얼마나 생산할지를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경제 기업; ‘그 모든 것에서 고전적인 맑시즘은 없다.’48)










영국과 미국의 부르주아지들은 그들의 반공주의 투쟁에서 티토가 매우 효과적인 무기임을 곧 인식하였다. 다음은 1950년 4월 12일, ≪비즈니스 위크 (Busi-ness week)≫의 기사이다:










‘특히 미국에게 그리고 서방 전반에게, 이렇게 티토를 후원하는 것은 이제 러시아 공산주의를 억제하는 가장 값싼 방법 중에 하나임을 임을 입증했다.’





‘현재까지 티토에 대한 서방의 원조는 5170만 달러에 이른다. 이것은 미국이 동일한 목적으로 그리스에 사용한 10억 달러에 비하면 훨씬 더 적다.’49)










이러한 부르주아지들은 티토를 이용하여 수정주의를 조장하고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의 전복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1949년 12월 12일 이든(Eden)은 ≪데일리 텔러그라프 (Daily Telegraph)≫에 이런 글을 실었다:










‘티토의 사례와 영향력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사태의 전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50)










티토의 공산주의에 대한 악선동을 실제로 이해한 ≪런던 타임지(the London Times)≫는 이런 기사를 썼다:










‘그러나 티토주의는 티토 원수가 공산주의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기간에만 효과를 유지한다.’51)










1948년 티토주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으로서 권력을 잡았다. 유고슬라비아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모든 원칙을 버린 것은 바로 민족주의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뜨로츠끼주의와 부하린주의자 이론이 성장하는 토양이다.





제2차 대전 이후,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다른 공산주의 정당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스딸린이 죽고 나서, 대(大)러시아 민족주의가 모스크바에서 발전하였고, 그에 대한 반발로, 광신적 민족주의가 중부 유럽과 동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원칙들을 살펴보자. 1923년, 스딸린은 다음과 같은 말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이미 정식화했다:










‘민족 자결권에 대한 민족의 권리 외에도 또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노동계급의 권리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때때로 민족 자결권이 더 높은 권리와 ―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권력을 잡은 노동계급의 권리 ― 충돌하는 그런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민족 자결권은 ― 이것은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 노동계급의 독재를 실행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전자는 후자에 양보를 해야 한다.’52)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서 출발한 스딸린은 대러시아 민족주의에서 시작된 모든 민족주의의 확고한 적수이다. 1923년에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의 단일한 연합으로의 공화국들의 합병을 방해하는 주된 힘은 ... 대러시아 민족주의이다. 스메노베크주의자들(Smenovekhists)이 쏘비에뜨 공직자들에서 상당히 많은 지지자들을 충원했던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53)





‘스메노베크주의는 새로운 부르주아 사상으로, 이것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꾸준히 꿀락과 관료주의 지식인들과 함께 하는 세력으로 결집되고 있다. 새로운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만들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정당이 반드시 타락하고, 새로운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을 굳건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바라보는 것 같다. 우리 볼셰비끼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민주 공화국의 입구를 향해 가고, 그리고 그 입구에 들어설 것이고, 이후, 군부나 시민 계급 출신에서 등장하게 될 카이사르(Caesar)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보통의 부르주아 공화국의 입장에 서게 될 것이라고.’54)










그러나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간의 전 세계적 투쟁에서, 스딸린은 또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강력한 반사회주의 무기로서 이용될 수 있음을 이해했다:










‘프롤레타리아 러시아와 제국주의 협상국 간에, 생사를 건 투쟁이 벌어져 확대되고 있을 때, 그 경계 지역에서는 단지 두 개의 대안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러시아와 합세하여, 경계 지역의 고생하는 대중들이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되거나;





‘또는 협상국 세력에 합세할 수 있다. 그때는 제국주의의 멍에는 불가피하다.’





‘세 번째 대안은 없다. 소위 독립국가인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폴란드, 핀란드 등의 이른바 독립은 단지 환상이며, 이런 저런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종속을 이러한 변명으로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현 상태에서, 경계 지역의 분리(예, 그루지아의 쏘련에서의 분리를: 역자)를 요구하는 것은 인민 대중들의 이해의 견지에서 볼 때 완전히 반혁명적인 것이다.’55)










쏘비에뜨 변방의 반봉건적 공화국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볼셰비끼 공산당을 내부에서 부패시키는 부르주아의 사상의 주된 형태를 구성하고 있었다.










‘오직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제거할 때에만, 경계 구역들과 공화국들과 지역들에서 우리 공산주의 조직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으며, 진정한 국제 공산주의자, 맑스주의자 기간요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경계 지역들과 공화국들에서, 민족주의는 맑스주의자 기간요원과 맑스주의 전위의 단련에 주요한 사상적인 장애물이다.... 이러한 조직들과 관련해서 민족주의는, 멘셰비끼주의가 볼셰비끼 공산당과 관련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들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단지 민족주의라는 보호막 아래서만, 멘셰비끼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부르주아적 영향력이 경계 지역의 우리 조직에 침투할 수 있다. 공화국의 우리 조직들은, 오직 경계 지역에 있는 우리 공산당으로 강제로 주입되는 민족주의 사상에 저항할 수 있을 때만 맑스주의 기간요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들이 되살아나고 있고, 신경제정책(NEP)이 퍼져나가고 있으며, 민족주의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 민족주의를 확산시키기 쉬운, 대러시아 민족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모든 방면에서 민족주의를 육성하고 있는, 외국의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56)





‘지역적 민족주의로의 일탈의 본질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자신의 국가적 테두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시도에, 자신의 국가 내에서 계급 차이를 묵살하려는 시도에,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전반적 흐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대러시아 민족주의에 저항하는 시도에, 쏘련의 민족들 내의 고통받는 대중들을 모아 통합하는 것에는 자신의 눈을 감고 단지 그들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것만 보려는 시도에 있다.’





‘지역적 민족주의로의 일탈은, 이전에 억압받았던 민족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로 인해 소멸해가는 계급의 불만족과, 스스로를 자신들의 민족 국가로 분리하고 그들 자신 계급의 우월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반영한다.’57)










1930년에 스딸린은 국제주의에 대한 문제으로 돌아왔다. 그는 브레즈네프(B-rezhnev) 시대 동안 명명백백해진 원칙을 정식화했다:










‘대러시아 민족주의로 일탈하는지, 또는 지역적 민족주의로 일탈하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 민족주의로의 일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족주의로의 일탈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책에 노동계급의 국제주의 정책을 순응시키는 것이다. 민족주의로의 일탈은 쏘비에뜨 체제를 약화시키고 자본주의를 복원시키려는 “자신의”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시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일탈의 근원에는 ...하나의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레닌주의적 국제주의에서 이탈이다....’





‘주요한 위험은, 일탈과의 투쟁을 그만둠으로서, 그것이 국가에 대한 위험 요소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58) (10장 후반부는 다음호에) <노사과연>






1) Staline, Discours 9 février 1946, uvres (Éditions NBE, 1975), vol. XIV, pp. 189-191.





2) Ibid. pp. 193-196.





3) Maurice Dobb, Soviet Economic Development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6. 6th edition, p. 301.





4) Ibid. p. 313.





5) Bettelheim, op. cit. pp. 148, 151.





6) Dobb, op. cit. p. 316.





7) Ibid.





8) Staline, op. cit. p. 198.





9) E. H. Cookridge, op. cit. pp. 127-128.





10) Ibid. p. 122.





11) Ibid. p. 125.





12) Ibid. p. 135.





13) Ibid. pp. 144-145.





14) Mark Aarons and John Loftus, Ratlines: How the Vatican's Nazi networks betrayed Western intelligence to the Soviets (London: Heinemann, 1991), pp. 269-270.





15) Margaret Truman, Harry S. Truman (New York: William Morrow & Com-pany, 1973), p. 273.





16) Ibid. pp. 275-276.





17) G. Zhukov,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 (Moscow: Progress, 1985), vo-l. 2, p. 449.





18) Harry S. Truman, Memoirs (New York: Signet Book, 1965), vol. 1, p. 462.





19) Gabriel Kolko, The Politics of War: The World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1943-1945 (New York: Pantheon, 1990), p. 559.





20) Ibid. p. 560.





21) Truman, Ibid. p. 466.





22) Déborine, op. cit. p. 265.





23) Truman, op. cit. vol. 2, p. 128-129.





24) Ibid. p. 124.





25) Ibid. p. 314.





26) Adolph Hitler, Hitler parle à ses généraux (Paris: Éditions Albin Michel, 1964), pp. 279, 264, 283.





27) K. K. Rokossovsky, op. cit. pp. 254-263.





28) Staline, op. cit. p. 376.





29) L'armée soviétique libératrice dans la Seconde Guerre mondiale (Moscow: Éditions du Progrès, 1977). p.309.





30) Kolko, op. cit. p. 188.





31) André Jdanov, Rapport d'André Jdanov sur la situation internationale (Pari-s: Imprimerie Maréchal, 1947), pp. 5-7, 14, 21, 7, 26.





32) Malenkov, Le XXXII anniversaire de la grande révolution socialiste d'Octo-bre (Moscow: Éditions en langues étrangères, 1950), p. 23.





33) `Manifeste aux peuples', Revue mondiale de la Paix (Paris), Nov. 1950, 21:121-122.





34) James Klugmann, From Trotsky to Tito (London: Lawrence & Wishart, 1951), p. 13.





35) Ibid. p. 22.





36) Ibid. p. 9.





37) Ibid. p. 11.





38) Ibid. p. 43.





39) Ibid. p. 143





40) Rapport: Le PCY dans la lutte pour la Yougoslavie nouvelle (Belgrade, 1948), pp. 94, 25.





41) Klugmann, op. cit. p. 129.





42) `Directives du CC', in Questions actuelles du socialisme (Paris: Agence Y-ougoslave d'Information, Jan.-Feb. 1952), 10:160, 161, 145.





43) Ibid. p. 85.





44) Ibid. Oct.-Nov. 1952, 14:2, 5, 18, 35-36, 30, 37, 44, 47.





45) Ibid. p. 44.





46) The Times, 27 December 1950. In Klugmann, op. cit. p. 111.





47) New York Herald Tribune, 26 June 1951. In Klugmann, op. cit. p. 98.





48) Daily Mail, 31 August 1951. In Klugmann, op. cit. p. 150.





49) Business Week, 12 April 1950. In Klugmann, op. cit. p. 175





50) Daily Telegraph, 12 December 1949. In Klugmann, op. cit. p. 191.





51) The Times, 13 September 1949. In Klugmann, op. cit. p. 194.





52) Stalin, Marxism and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 (London: Lawrenc-e & Wishart, 1936), p. 168.





53) Ibid. p. 153.





54) Ibid. p. 300, n. 43.





55) Ibid. pp. 79-80.





56) Ibid. p. 178.





57) Ibid. pp. 262-263.





58) Ibid. pp. 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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