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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7)
글쓴이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E-mail send mail 번호 328
날짜 2013-07-15 조회수 2234 추천수 81
파일  1373862008_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17 .hwp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5장 인도 국민회의: 초창기















Ⅰ. 영국 지지자들










교양 있는 중간계급이 개시한 봄베이, 캘커타, 마드라스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 정치시위는 영국인들 중 일부의 지지도 얻었다. 실제로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 정치적 시위가 발전하고 조직화하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 영국인들 가운데, 알란 오토비안 흄(Allan Octovian Hume: 1829-1912)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흄은 영국 급진당1)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의 아들로 인도 행정관료가 되어 인도에 왔다. 그는 여러 고위직을 맡았다. 흄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여러 교양 있는 중간계급의 친구를 두었다. 그는 인도인들 사이에서 발전되고 있던 민족주의 정서를 이해했고 그런 결과로 나타나는 운동도 지지했다. 그는 공직에서 은퇴하자마자, 그런 정치적 운동에 동조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한 흄은 1885년에 인도 국민회의 결성과 결부된 초기의 사업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역사가들은 그에게 “국민회의의 설립자”라는 별칭을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흄만 그런 게 아니다. 국민회의가 결성되던 때 인도 식민지 총독인 듀퍼린(Dufferin) 경도 교양 있는 이들 사이에 발전하던 그 운동에 동조하는 심경을 친구들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흄이 국민회의 결성 계획을 고안했을 때, 듀퍼린은 이를 인정하고 호의를 보냈다.





후자와 관련해 흄에게 하나의 특별한 조건이 있었는데 그의 역할이 공직에서 물러나 인도를 떠날 때까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흄과 듀퍼린의 이런 태도는 그 둘이 개인적으로 우연하게 행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그런 태도는 실제로는 상대적으로 긴 역사 발전의 결과이다.





거대한 나라, 인도가 영국의 직접 통치하에 놓인 이후 지배자들 사이에는 수억이 살고 있는 이 나라 인도에 어떻게 지배력을 행사할지에 대해 두 개의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법과 폭력의 잔인한 무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영국 문화에 물든” 대중 세대들을 만들고 이들을 부르주아 자유주의 이념으로 육성하게끔 고무하고 조력하여 그런 이념으로 채워진 분파들과 조직들을 고무시켜서 영국 지배의 사회적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대체로, 영국 정치에서 적극적인 힘을 행사하는 보수당과 자유당이 그런 두가지 접근의 상징이었다. 보수당은 “강철주먹(iron fist)” 정책을 그리고 자유당은 “회유(conciliation)” 정책을 상징했다. 노동계급이 영국정치에서 무시못할 세력이 되었던 19세기 중반에, 노동계급을 대표했던 차티스트 운동은 인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서 따뜻한 공감을 보였다.





혁명가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 1819-69)는 차티스트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그로 인해 투옥되었다. 1857년 인도에서 세포이 반란과 인민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자신의 신문 칼럼을 통해 전심전력으로 그 운동을 환영하였다. 존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할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폴란드 인민들이 자유를 위해 러시아와 투쟁했을 때 그들은 누구의 편인가? 헝가리 인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러시아와 투쟁했을 때 그들은 누구의 편인가? 이탈리아가 독일, 프랑스 및 교황의 독재(authoritarianism)에 맞서 싸웠을 때 그들은 누구의 편인가. 이탈리아나 폴란드가 정의의 편이라면 인도 역시 정의의 편이다. 헝가리의 투쟁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인도도 정당하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지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 역시 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폴란드, 헝가리 또는 이탈리아가 획득하려고 했던 것을 인도 역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편에 확고히 서 있던 어니스트 존스뿐만 아니라 영국의 부르주아 정치인들 중에도  이런 접근을 채택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층 내부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초기에 몇몇 고위 관료들과 의원들은 1857-59년 투쟁이 세포이들의 반란이 아니라 인민봉기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영국 정부는 이런 견해에 대항하여 정반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견해는 여전히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그것은 보수당과 자유당의 대인도 정책에 반영되었다. 인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당의 노선을 좇고 그들의 조력을 간청하는 관료들뿐만 아니라 자유당 지도자들과도 극진한 관계를 유지하여 인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도 정치 지도자들은 1853년 인도 법안이 상정되었을 때 영국 의원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언론법과 인도인 공무원 임용 금지 같은 예민한 쟁점이 떠오를 때 인도의 시위자들은 인도에 우호적인 영국의 대중여론을 일으키려는 노력을 반복하였다.





인도인들의 이런 태도가 지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대인도 정책은 집권당의 성격에 따라 바뀌었다.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식민지 총독과 인도에 파견된 관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보수정권이 임명한 총독 리튼(Lytton) 경과 자유당 정권 시기의 총독 리폰(Ripon) 경은 특별히 언급될 만하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과 같은 입법수단들을 도입해 인도 인민들에게서 저항을 받았던 때가 리튼 정권 때이다. 반면에 그 법이 철회된 것은 리폰이 정권을 인수한 이후의 일이었다.





더 나아가, 리폰 정권 시기에 시 지방자치위원회(municipalities)와 자치구위원회(taluk boards) 같은 지방자치 기구를 만들었다.2) 그렇게 함으로써 입법과 일상의 행정 영역에 인도인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에 초보적인 형태로 응답하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인도 정치지도자들은 리폰에게 특별한 고마움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1884년 그가 임기를 끝내고 인도를 떠날 때, 여러 지역에서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군중모임이 열렸다. 이런 현상은 영국 관료들에게 새로운 일이었다. 그런 관료 중에 재무부의 일원인 오클랜드(Auckland) 경은 이런 태도에 놀랐고 그것에 관해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영국 행정가들끼리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인도 인민의 관계에는 증오감과 다정함이라는 분명히 다른 두 요소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언급되었다. 그런 요인들은 영국 전임 관료인 인도국민회의의 설립자 흄과 듀퍼린 총독의 태도에 반영되었다.





그들의 태도를 유발한 객관적인 환경을 정확히 진술하지 않는다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흄과 듀퍼린 경이 직접 입증한 정치적 현실은 자유주의 이념이 영국의 부르주아 지배자들의 일 분파에 영향을 끼친 것 만큼이나 의미 깊은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강제하였다.





공직에 충분한 인도인 할당, 헌법적 조직, 입법부에서 권리와 힘 등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 교양 있는 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급격하게 자라고 있었고, 이와 더불어 생활의 현안 문제에 대한 인민의 불만이 때때로 집중되었는데, 이것이 흄 같은 사람이 인식했던 실제 정세였다.





일반 대중들과 교양 있는 중간계급의 불만족이 전국을 뒤덮었다. 1859년 서벵갈 인디고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어난 폭동들은 이런 두 경향이 집중된 결과였다. 그 영국인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을 잔인하게 대했다. 이로 인해 여러 지역에서 교육받은 인도 중간계급 사이에 저항의 물결이 일어났다. 벵갈 문예부흥운동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디나 반두 미트라(Deena Bandhu Mitra)는 “닐 다르빤(Neel Darpan)3)” 극을 썼다. 이 작품은 대농장주의 잔인한 착취를 폭로하였다. 문예부흥운동을 이끌던 또 다른 지도자 마이클 마두수단 듀트(Michael Madhusudan Dutt)가 그 드라마를 영어로 번역했는데 그 일 때문에 그는 고발당해 법정에 세워졌다. 이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규모 지역으로 시위의 물결로 퍼져 나갔고 이는 대플렌테이션 농장주와 인디고 농부들 사이의 관계변화에 영향을 끼치게끔 정부를 압박하였다.





1870년대 인도 전지역에 몰아닥친 기근으로 인해 지식인들과 대중들이 시위를 이끌지 않았음에도 인디고 농민들의 운동 사례처럼 농촌지역에서 폭발하는 정세가 형성되었다. 여러 지역들에서 올라오는 정부 보고서들이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때 고위직에 있었던 흄은 한 지역의 봉기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될까봐 걱정하였다. 또한 그는 만약에 교양 있은 지식인들과 새로운 지주들이 그 봉기에서 지도력을 지니게 된다면 영국 지배자들에게 위험한 상황을 야기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많은 영국의 관료들, 그리고 듀퍼린 총독 같은 사람조차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흄과 의견을 공유한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그의 충실함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앞에 닥친 위기로부터 영국지배를 보호하려는 간절함 때문에 인도의 교육받은 정치인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인도의 지식인 계층의 지도로 조직되는 단체가 인도 전체에 급속히 퍼지는 불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묶어줄 것임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서 흄은 인도국민회의 설립에 노력한 반면에, 수렌드란쓰 바네르지(Surendranth Banerji)는 1883년 12월 캘커타에서 열린 민족협의(national conference)로 평행으로 나아갔다. 나중에 두 번째 민족협의도 개최되었다.





그 두 번째  민족협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인도국민회의 결성을 위한 첫 회의가 1885년 봄베이에서 열렸다. 그 당시에 수렌드란쓰 바네르지는 인도 전체에서 환호를 받는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반면에 캘커타 민족협의와 거리를 두었던 W. C. 바네르지(W. C. Banerji)는 봄베이 회의에 참석했으며 그 회의의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평행한 두 개 조직(민족협의와 국민회의: 역자)이 결성될 수 있었던 환경은 논쟁적인 쟁점이었다. 흄과 듀퍼린이 고위 공직에서 해고당했고 점점 군중 시위의 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아가는 수렌드란쓰 바네르지의 지도적 역할이 그들이 생각했던 조직을 만드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인식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바로 이점을 근거로 수렌드란쓰 바네르지가 이끄는 민족협의가 열리는 장소에서 국민회의가 소집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 인도의 여러 다른 지방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조직들의 소통부족 때문에 의도치 않게 같은 시기에 두 개의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와 관련해서는, 이 두 견해는 올바른 문제제기와는 관련이 없다. 인도국민회의 설립 당시의 환경이 어떠했든지 간에 수렌드란쓰 바네르지와 그의 동료들은 곧 국민회의에 참여했고 캘커타 민족협의에서 했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85년 봄베이에서 국민회의가 시작된 이후부터 1917년 그들이 국민회의를 탈퇴할 때까지 자신과 그의 온건파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회의에 참석했다고 직접 명언하였다.





1885년에는 공개적인 활동으로 잘 알려진 모든 사람들은 수렌드란쓰 바네르지가 이끄는 2차 캘커타 국민협의에 참가하거나 또는 인도국민회의 첫 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으로 불리는 인도의 모든 조직들은 1885년~86년에 생겼다. 부르주아 근대화 운동 즉, 브라마 사마즈(Brahma Samaj) 형태의 사회 개혁운동들 그리고 부르주아 근대화를 추동하는 여타 조직들과 문예부흥운동들, 그런 문화와 사회운동들의 일부분으로써 나타난 정치이념과 시위, 그리고 나로지와 다른 이들에 의해서 시작된 인도 정치경제학이 인도의 정치적 형태를 명확히 규정하는 일과 같이 서로 다른 분야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운동의 출현에는 영국 자유당과 그 당을 지배하던 자유주의적 정치 접근법의 영향하에 있었던 흄과 듀퍼린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사과연>






1) 편집자: Radical Party. Radicals라고도 하며 18세기부터 노동계급 일부와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의회개혁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휘그당이 자유당으로 변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2) 역주: 영국 식민지배 시기의 지방행정체제는 질라(Zila)-따실(Tashil)-딸루크(Taluk)로 구성되었다. 질라는 주(state)를 여러 지역으로 나눈 것으로 우리의 군(郡)에 해당된다. 그 아래에 면(面) 쯤 되는 따실이 있고 리(里)와 비슷한 딸루크가 있다.





오늘날 인도 지방행정체제는 군(District)-면(Block)-촌락(Village)로 이루어져 있다. 인도는 1993년 제73차 헌법개정을 통해 인도 전지역에서 3단계 지방자치제를 만들었다. 군단위에는 질라 빠리샤드(Zila Parishad), 면 단위에는 빤쨔야뜨 사미띠(Panchayat Samiti) 그리고 제일 아래인 마을 단위에는 그람 빤쨔야뜨(Gram Panchayat)가 있다. 군, 면, 마을 빤쨔야뜨 의원들은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이런 인도의 지방자치제를 빤쨔야뜨(Panchayat) 제도라고 한다.





편집자: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은 이병진의 박사 학위논문 “인도지방자치에 대한 일 고찰 : 펀잡(Punjab) 빤짜야뜨(Panchayat)사례를 중심으로”를 보라.





3) 편집자: 닐 다르빤은 디나 반두 미트라(1829-1873)가 1859년 벵갈 농민봉기를 배경으로 집필한 극작품으로 1860년 다카에서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벵갈어 그대로 ‘닐 다르빤’으로 옮기거나 ‘인디고 플랜테이션의 거울’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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