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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6)
글쓴이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E-mail send mail 번호 325
날짜 2013-06-18 조회수 2011 추천수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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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Ⅶ. 인도 정치 경제학의 출현










산업자본가 계급이 성장한 결과 “인도 정치 경제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과학적 연구가 출현했다. 영국의 인도에서의 초기 활동은 대중들 중에 신흥 (자본가) 지주와 근대 교육기관을 통해 유럽 문화 및 기타 과학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 이들이라는 새로운 두 계층을 만들었다. 후자의 다수는 신흥 지주 집안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조직적 힘이 증대하자, 사회 개혁과 문예 부흥운동이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 계층이 꾀한 사회생활의 근대화는 가족관계와 문화운동의 영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사회 개혁가들과 문화적 저항을 이끄는 지도자들 가운데 유럽처럼 근대화의 기초가 되는 산업혁명을 일으키려는 관점을 지닌 이들이 없었다. 그런 관점을 갖는 계층은 1890년대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다다브하이 나로지(Dadabhoy Naoroji, 1825-1917)이다. 초기 지도자 및 민족주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는 그는 인도의 “대인(Grand Old Man)”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단순히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근대 부르주아 정치 경제학의 시각에서 인도 경제의 문제점을 조사하였고 그런 조사를 근거로 인도 민족의 이익을 옹호한 인도 경제학 연구의 창시자였다. “유출이론(theory of drain)"으로 알려진 그의 연구 결론은 영국 같은 자유국가들과 인도 같이 예속된 국가들 사이에서는 부의 생산, 그것들의 분배와 활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론의 핵심은 영국에서는 국민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부를 생산하는 반면에 인도에서 인도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부의 상당한 비율이 영국으로 유출된다는 것이다.





다다브하이의 연구는 정부와 근대 정치 경제학 이론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통계 자료에 기초하였다. 영국의 행정가들은 모두 영국인들이었다. 그들이 버는 봉급과 수당은 그들 국가 안에서 쓰여진다. 결과적으로, 그들 국가에서 부담하게 되는 지출은 영국인의 어느 계층 또는 어느 사람에겐 수입이 된다. 반면에 인도는 행정 관료가 대부분 영국인들이다. 그들의 봉급과 수입의 일부분만 인도에서 지출된다. 상당한 부분이 영국으로 빠져나간다. 더군다나 영국인 관료의 봉급은 같은 일을 하는 인도인보다 아주 많았다. 게다가, 인도는 영국이 일으킨 전쟁에 돈을 대야 하는 책임과 결코 인도가 원하지도 않는 제국주의 침략 목적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비 지출에 돈을 내야만 했다.





그는 수입과 수출, 상업, 공공부채, 인도 수공업의 몰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인도의 경제생활의 발전을 조사했다. 다다브하이는 인도인들이 매년 세금으로 내는 5천만 파운드 가운데 2천만 파운드가 영국으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밝혔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인도가 이런 식으로 수십 년 동안 “유출”되어 점점 더 피폐해졌음을 보여주었다.





다다브하이의 연구와 함께 부르주아 경제학이 발전한 다른 나라들에서 유행하는 것과 비슷한 인도 국민소득을 측정하는 기법이 시작되었다. 유명한 경제학자 라오 (V.K.R.V. Rao)는 다다브하이가 계산한 국민소득은 당시 계산기법이 미성숙했음에도 훗날의 계산법에 비추어 봐도 오류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예속된 상태에 있던 인도에서는 그런 모든 계산들에 적실성이 있었다. 다다브하이도 인도의 정치적 노예화로 인해 경제 몰락과 빈곤이 야기되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연구로 인해 인도에서 사상 최초로 정치적 선동을 위해 경제를 분석하고 기초를 형성하는, 새로운 결합된 조사 기법이 대두되었다. 다다브하이의 경제 분석이 포함된 논문과 소책자들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는 ≪빈곤과 비영국적인 지배(Poverty and Un-British Rule)≫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책의 제목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영국 경제 정책(솔직히 이야기하면, 바로 이러한 정책들이 인도를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런 잔인한 착취가 “비영국적”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발표인 것이다. 이런 입장이 국민회의의 지도자들과 국민회의를 창당한 지도자의 한사람이었던 다다브하이 나로지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갖고 있었던 기본적인 접근법이었다.1)





다다브하이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었다. 많은 그의 동시대 사람들 역시 그 방식의 분석을 하였다. 근대 인도(부르주아지) 정치경제학은 그런 사람들의 주도로 새로운 지식의 분파가 되었고 인도 민족주의 운동이 진전하면서 함께 발전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근대 정치경제학은 유럽의 전반적인 상황을 특히 영국의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담 스미스, 데이빗 리카르도 및 다른 영국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기원하였다. 맑스는 노동계급의 이익에 기초해 그것을 풍성하게 하였다. 인도 역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부상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르주아지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인도의 상황을 연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영국지배가 인도의 민족적 이익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관점을 수립한다는 측면에서 인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학문을 태동시켰던 이들 중에 다다브하이 외에도 특별히 언급되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라메시 찬드라 듀트(Ramesh Chandra Dutt, 1841-1909)는 농촌문제에 특별한 기여를 했고, 마하데브 고빈드 라나데(Mahadev Govind Ra-nade, 1842-1901)는 다다브하이와 듀트가 내린 결론을 풍성하게 만들었고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들이 만든 이론은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영국에게는 강경한 도전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또 그들을 따르던 부르주아지 경제학자들 중 누구도 혁명가− 우리가 오늘날 그 용어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 는 아니었다. 그들은 군주제에 충성하지만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자료들로 영국지배 아래에 있는 인도가 가난해지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들 3명의 경제학자 나로지, 듀트 그리고 라나데의 사회적 배경은 모두 관심을 끌 만한 것이며 교육적이었다.





다다브하이는 산업자본주의를 개척한 봄베이의 무역 가문(파르시 공동체에 속한)의 대표 및 제휴자로서 영국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상업회사를 위해 일하면서, 무역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다양한 문제들을 연구하였고 영국에서 정치적 활동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자유당과 접촉했다. 그는 자유당의 이념과 인도에 대한 영국정부 정책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 그의 동료들에게 호소했다. 그가 행했던 경제 분석과 정치적 선동은 그 결과였다.





다다브하이는 19세기 중반 인도에 등장한 산업자본주의를 직접 대표하였다. 다다브하이처럼 라나데 역시 봄베이에 속했다. 하지만, 그는 산업자본주의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었다. 그는 경제학 선생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판사를 포함하여 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그런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는 공직에 있을 때나 또는 다른 일을 했을 때에도 농촌에서 생활 조건들을 연구하려고 하였다. 그런 연구 결과, 라나데는 인도 인민들의 번영을 위해서는 집중적인 산업화 계획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유럽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였고 서너 권의 책도 저술했다. 또한 그는 산업화를 위해서 여러 조직들을 만들었고 그가 연구한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적 진보를 주도하였다.





라나데에 의해서 진보된 중요한 경제 이론의 하나는 경제 발전에서 정부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그에 의하면 영국이 신봉하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원칙을 따른다면, 인도 같은 국가는 결단코 진보할 수 없으며 영국에서도 자유방임주의는 그쳐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라나데 역시 인도 같은 약한 국가와 강력한 영국 사이의 경쟁에서 인도의 이익을 보호하려면 적극적인 국가개입을 주장하였다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그런 주장은 50년 후에 인도식 계획경제에 관한 책을 쓴 엠 비스웨스와라이야(M. Visweswarayya)와 뒤이어 타타-비를라 계획(TaTa-Birla Plan)의 창시자들에 의해서도 옹호되었는데, 그런 입장을 독립 이후 국민회의가 공공부문 형성을 위해 채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성취였다.





라메시 찬드라 듀트는 벵골 사람이었다. 듀트는 신흥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근대 교육을 받았고 공무원으로 근무도 했고 그 당시에 인도인으로서 오르기 힘든 위치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인민들의 문제들에 근거해서 그는 인도인의 관점에서 인도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와 영국지배 아래에서 특별히 농촌에 대해서 조사하고 연구했다. 듀트는 통계 자료를 근거로 반박할 수 없는 이론을 세웠다. 그 통계 자료들은 영국이 농민들과 수공예업자들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을 펼치는 한 전 인도를 휩쓰는 되풀이되는 굶주림이 피할 수 없는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들 세 사람 외에도 몇몇이 그 당시 인도의 지배적인 상황을 분석하였고 영국지배를 비판하였다. 그들 가운데 고팔 크리쉬나 고칼레(Gopal Krishna Gokale)처럼 초기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론을 여기에서 일일이 밝히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론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의 세 사람이 발전시킨 이론만으로도 인도에서 산업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부상하게 되는 인도의 (부르주아지) 정치경제학의 본질을 충분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고대에도 예를 들어 마우리아 시대의 카우틸리아의 아르타사스트라(Arthasastra)2)와 같은 정치경제학 저작이 있었다.  그런 모든 저작들에는 각각의 시대에서의 지배적인 상황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인도에 영국 지배가 수립됨으로써 앞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지배적인 상황이 찾아왔다. 기존의 낡은 지배계급은 소멸되었다. 인도인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체제가 나타났다. 외국인 지배를 끝장내고 과거의 체제를 다시 세우려는 모든 노력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패배에 직면하였다. 그런 시도를 하였던 과거의 지배 계급을 대신해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던 새로운 계급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산업 부르주아지는 그런 신흥 계급의 최선봉에 섰다. 초기 활동에서 부르주아지를 직접 대표한 다다브하이와 그들 계급의 사상을 직접 대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이익을 공유했던 라나데와 듀트는 인도 부르주아지의 성숙을 선포하였다. <노사과연>






1) 역주: 원문에서는 “Congress”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명칭은 “Indian National Congress (인도국민회의)”이다. 이 단체는 인도 부르주아지들이 중심으로 만든 대중적인 인도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독립 이후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인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인도국민회의당’으로 불린다. 인도국민회의에 관해서는 뒤의 5장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편집자: 이하 Congress를 국민회의로 표기한다.)





2) 역주: 카우틸리아는 기원전 300년경에 활동한 인도 정치가・철학자이다. 아르타사스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집필된 것으로 가축과 경작 등에 관해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로 인해 찬드라 굽타와 아소카 왕 통치하의 마우리아 제국의 통치 기반이 구축되었다. 여기서 저자의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은 근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그것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 보기보다는 당대 시대와 경제관계를 반영한 저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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