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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스딸린 바로 보기(16)
글쓴이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 E-mail send mail 번호 321
날짜 2013-04-26 조회수 3130 추천수 121
파일  1366932052_스딸린 바로 보기(16).hwp

  

























9장





스딸린과 반파시스트 전쟁















1929년 경제 붕괴로 인해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휘청거렸다. 새로운 세계 대전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전쟁은 곧 발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디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의 규모로? 누가 누구와 싸울 것인가? 얼마 동안, 해답 없는 이러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1940년의 ‘공식적인’ (전쟁의: 역자) 시작 후에도,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불명확했다.





이러한 해답이 없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면, 1930년대 스딸린의 외교 정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독일-쏘련 불가침 조약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권력을 잡았다. 오직 쏘련만이 세계 평화에 위기가 닥쳤음을 알았다. 1934년 1월 당 대회에서 스딸린은 “‘새로운’ (독일의) 정책은 예전 독일 황제(Kaiser)의 정책을 상기시키는데, 당시 그들은 우끄라이나를 점령하고 발트해 국가들을 러시아로의 진군을 위한 거점으로 바꾼 뒤, 레닌그라드로 진군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렇게 언급했다:










‘만약 쏘련의 이해를 위해, 평화를 해치는 데에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 한 국가 또는 다른 국가와 친교를 맺어야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방침을 주저 없이 채택한다.’1)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 영국이 쏘련에 대항한 성전을 이끌고 있었다. 1918년, 처칠은 열네개 국가가 동원된 군사적 침략을 선동한 주요 인물이었다. 1927년, 영국은 쏘련과의 외교 관계를 파기했으며, 쏘련에 대한 수출을 금지했다.





1931년, 일본은 중국 북부를 침략했고 그들의 군대는 시베리아에 있는 쏘비에뜨 국경까지 도달했다. 당시 쏘련은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1935년,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팽창하는 파시스트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쏘련은 일찍이 1935년에 유럽의 집단 안보 체제를 제안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쏘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뜨로츠끼는, 스딸린이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와 세계 혁명을 ‘배신’했다고, 사악한 공격을 가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쏘련이 공격당한다 해도, 자신들의 국가는 쏘련을 도울 의무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936년, 이탈리아와 독일은 그들의 정예 부대를, 합법적인 공화국 정부와 싸우기 위해 스페인으로 보냈다.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을 채택하여, 자유로운 스페인을 파시스트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들은 히틀러를 회유하여, 그를 동쪽(쏘련 침략: 역자)으로 보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같은 해 11월, 독일과 일본은 반코민테른 조약에 서명했으며, 이탈리아도 곧이어 참여했다. 쏘련은 포위되었다.





1938년 3월 11일에 ≪라디오 베를린≫은 ‘오스트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발생했고, 독일군은 그 국가에 달려가 이틀 후에 합병했다고 보도했다. 쏘련은 오스트리아의 방어를 시작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게 집단 방어를 준비할 것을 요청했다. ‘내일은 아마도 너무 늦을 것이다’라고 쏘비에뜨 지도부는 강조했다.





5월 중순, 히틀러는 그의 군대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집결시켰다. 쏘련은 위협받은 국가와 맺은 조약의 의무로 인해 서부 국경지역에 40 사단을 주둔시켰고, 33만 명의 예비군을 소집했다. 하지만 9월,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에서 파시스트 정권인 독일, 이탈리아와 회담을 가졌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쏘련은 초대 받지 못했다.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Sudeten) 지역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배신적인 행위와 더불어, 영국은 9월 30일에 독일과 함께 선언문에 서명했는데, 이 선언문에서 두 정권은 이 조약을 ‘다시는 서로 간에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우리 국민들 여망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고 선언했다.2)





프랑스는 12월에 같은 일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련은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쏘련의 도움을 제안했으나, 이러한 제안은 거부되었다. 1939년 3월 15일에 독일군은 프라하를 점령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함으로써, 히틀러는 반동적인 폴란드 정부에 케익 한 조각을 던졌는데, 그들은 이 미끼를 탐욕스럽게 달려들어 물었다.





일주일 후, 독일군은 중요한 발트해의 항구인, 리투아니아 영토에 있는 클라이페다(Klaipeda)를 점령했다. 스딸린은, 괴물이 동부로 전진하고 있는 중이며 폴란드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939년 5월에 일본군은 몽고를 공격했는데, 몽고 또한 쏘련과의 군사적 원조 조약을 맺고 있었다. 그 다음 달에, 무명의 장교인 주꼬프가 이끄는 쏘련의 군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상당한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 일본은 200대 이상의 비행기를 잃었고, 5만 명 이상의 군인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1939년 8월 30일에 일본군은 몽고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그 다음날, 또 다른 쏘련의 인접 국가가 화염에 휩싸였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침략이 일어날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최적의 위치를 확보하고 영국 및 프랑스 또는 쏘련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폴란드의 운명을 해결’해야 했다. 그 전의 몇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1939년 3월에 쏘련은 반파시스트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이를 지연시켰다. 이러한 태도에 의해서, 이러한 위대한 두 ‘민주주의 국가들’은 히틀러가 서방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 없이 스딸린을 향해 진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39년 6월부터 8월까지, 영국-독일의 비밀 회담이 열렸다: (당시의 식민지를 포함한: 역자) 대영제국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을 보장받는 데 대한 대가로, 영국은 히틀러가 동부 유럽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7월 29일에 노동당의 찰스 로덴 벅스톤(Chlares Roden Buxton)은 챔벌린 수상을 대신해서 독일 대사관과 비밀 임무를 수행하였다. 다음 초안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영국은 국가 간 세력권의 한계 설정을 위해 독일과 기꺼이 협정을 체결할 의사를 표현한다....’










‘1) 독일은 대영제국의 내정(식민지를 포함한 영국의 세력권 보장: 역자)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2) 영국은 동부 및 남동부 유럽에서 독일의 세력권을 전적으로 존중한다. 이에 따라 영국은, 독일의 세력권 내에 있는 특정한 국가들에 대해 보장했던 것들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영국은 더 나아가서, 프랑스가 쏘련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남동부 유럽국가들과의 연관을 단절하도록 프랑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약속한다.’





‘3) 영국은,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현재 진행 중인 쏘련과의 협상을 포기한다.’3)










쏘비에뜨의 정보부를 통해 스딸린은 이러한 계략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1939년 8월, 영국, 프랑스, 쏘련은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의 두 정권은 협상을 마무리할 권한이 없는 하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보로실로프(Voroshilov)는, 새로운 독일의 침공이 발발하면 동맹국들이 함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구속력이 있고 구체적인 협정내용을 주장했다. 그는 만약 독일이 쏘련에 침입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국과 프랑스의 사단이 히틀러와 싸울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그는 또한 폴란드와 협정을 맺어, 독일이 침공하는 경우에 쏘비에뜨 부대가 폴란드 영토 내에서 나찌와 교전할 수 있기를 원했다. 폴란드는 이를 거절했고, 그것으로 (독일과의 굴욕적인: 역자) 어떠한 협약체결이라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스딸린은, 프랑스와 영국이 히틀러가 쏘련을 향해 진군할 것을 고무하면서, 폴란드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새로운 뮌헨조약(굴욕적 타협: 역자) 준비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간파했다. 미국 내무부 장관인 해롤드 익스(Harold Ickes)는 그의 업무 일지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영국은)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싸우게 만들어 그 결과 자국이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가망이 없는 가능성에 기대를 계속 걸고 있었다.’4)





‘프랑스 또한, 독일이 쏘련과 전쟁을 벌이기를 기대하며 독일에 유리하도록 중부와 동부 유럽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랑스는 마지노선 뒤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 것이다.’5)










쏘련은 모든 제국주의 정권으로 구성된 단일한 반쏘련 전선이라는 생사가 걸린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암묵적 지지로, 독일은 폴란드를 차지한 후에 계속해서 전진하여 쏘련에 대한 전격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본은 시베리아를 침략할 것이다.





당시에 히틀러는 이미 프랑스와 영국이 저항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쏘련을 침략하기 전에 서부 유럽을 손에 넣을 것을 결정했다.





8월 20일, 히틀러는 쏘련에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다. 스딸린은 이에 즉각 반응하였고, 8월 23일 조약에 서명하였다.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이 처 놓은 덫에 자신이 걸렸다. 이 두 국가는, 독일이 쏘련에 맞서기를 바라며, 히틀러의 모든 모험을 도왔다. 바로 1933년부터, 그들은 히틀러의 공산주의에 대한 전투를 칭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비록 실제로는 전쟁을 할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분노는 악의적인 반공주의 정치 운동에서 폭발했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타고난 동맹자이다’. 반세기 후, 이러한 어리석은 선동은 의문의 여지없는 진실로서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러나 역사는 독일-쏘련의 불가침 조약이 반파시스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열쇠였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조약은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사실, 쏘련은 머지않아 나찌 독일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며 이러한 조약을 채결했다. 일단 독일이 쏘련과의 협약에 서명을 하기로 결정하자, 스딸린은 히틀러에게서 최대한의 양보를 이끌어 내어, 닥쳐올 전쟁을 대비하여 최상의 조건을 확보했다. 1939년 9월 23일자 ≪쁘라브다(Pravda)≫지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유일하게 가능한 일은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서부 우끄라이나, 서부 벨로루시(1920년에 쏘련이 강탈당한 두 지역), 그리고 발트해 연안의 국가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쏘비에뜨 정부는 독일에 강요하여 타세(Thasse), 나류(Narew), 버그(Bug), 비스투라(Vistula) 강에 의해 형성된 국경선을 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6)










서방에서, 히틀러의 반공주의 정책에 동조하던 이들이 즉시 소리쳤다: ‘두 전체주의 정권인 파시즘과 볼셰비즘이 폴란드를 나눠가졌다.’ 그러나 쏘비에뜨 군대의 전진은 이러한 영토에 있는 대중들의 이해에 부합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파시스트, 지주 계급, 자본가들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진은 또한 전 세계 모든 반히틀러 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가장 현실적인 부르주아는, 쏘련이 그들의 부대를 전진시킴으로써 임박한 전쟁에서 더 나은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예를 들어, 1939년 10월 1일에 처칠은 이렇게 공언했다.










‘러시아 군대가 이러한 국경선에 주둔해야 하는 것은 나찌의 위협에 맞서 러시아의 안전을 위해 확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어쨌든, 전선은 그곳에 형성되어 있고, 나찌가 감히 공격하지 못하는 동부 전선이 만들어졌다.’7)










폴란드를 거쳐 쏘련까지 공격하는 것을 책임지는 나찌군대를 보려는 꿈을 이룰 수 없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어쩔수 없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서부 전선에는 나찌의 평온함을 어지럽히는 단지 한 개의 폭탄도 없었다. 그렇지만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실제적인 정치적 내전이 시작되었다: 9월 26일, 프랑스 공산당은 금지되었고 수천의 공산당원들은 투옥되었다. 앙리 드 께릴리(Henri de Kerillis)는 이렇게 적었다.










‘부르주아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다. 성전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라는 오직 하나의 외침만이 들렸다. 반공주의 정신착란이 정점에 달했을 때가 바로 이때였다.’8)










당시에 스딸린은 위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주꼬프(Zhukov)에게 말했다:










‘달라디에(Daladier)가 이끌어온 프랑스 정부와 영국의 챔벌린 정부는 히틀러와의 전쟁에 깊게 관여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히틀러를 부추기어 쏘련과 전쟁을 벌이기를 여전히 원하고 있다. 1939년에 우리와 반히틀러 연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함으로써, 그들은 히틀러가 쏘련을 공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9)










독일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쏘비에뜨 정부는 레닌그라드의 방어에 대해서 극도로 걱정을 했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핀란드 국경에서 단지 32㎞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10월 14일에 스딸린과 몰로또프는 레닌그라드 방어 문제에 대한 각서를 핀란드 정부에 보냈다. 쏘련은 ‘핀란드만으로 접근을 차단’할 수 있기를 원했다. 쏘련은 핀란드에 한코(Hanko) 항구와 4개의 섬의 임대를 요청했다. 핀란드의 방어를 보장하기 위해, 핀란드에 속하는 카레리아(Karelia)의 지협의 일부에 대해서도 임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쏘련은 핀란드에 쏘련에 속하는 카레리아 지역을 ― 제공받는 지역에 비하여 2배의 넓이 ― 제공할 예정이었다.10) 독일에게 포섭된 핀란드는 거절했다. 1939년 11월 30일, 쏘련은 핀란드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며칠 후, 히틀러는 쏘련과의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서 명령을 내렸다. 여기 발췌문이 하나 있다:










‘우리의 군사 작전에 있어서, 쏘련과 전쟁을 할 때 루마니아와 핀란드의 적극적인 개입(intervention, 독일을 군사적으로 지원: 역자)을 기대할 수 있다.’11)










이러한 ‘이상한 전쟁’에 휘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던, 영국과 프랑스는 볼셰비끼의 위협에 맞서 실제적인 전쟁으로 무모하게 돌격했다! 3개월 동안 영국, 프랑스, 미국,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700대의 비행기, 1500문의 대포, 그리고 6000정의 기관총을 ‘침략의 희생자’인 핀란드로 보냈다.12)





프랑스 장군 베강(Weygand)은 시리아와 터키로 가서, 남쪽에서 쏘련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프랑스의 참모총장은 바쿠(Baku) 유전을 폭파시킬 폭격을 준비했다. 그 당시 세리니(Serrigny) 장군은 이렇게 외쳤다.










‘사실, 매년 2,300만 톤의 석유를 생산하는 바쿠 유전은 정세를 좌우한다. 만약에 우리가 코카서스 점령에 성공하거나, 이러한 정유공장이 우리 공군에 의해 단지 불만 붙어도, 괴물은 지쳐 무너질 것이다.’13)










심지어 아직 히틀러에게 총 한 방 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쟁 국면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 5만의 원정군을 다시 모집했다! 챔벌린은 영국이 10만의 병력을 보낼 것이라고 공언했다.14)





그러나 이러한 부대는 붉은 군대가 핀란드에 승리하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평화 조약이 1939년 3월 14일에 채결되었다. 그 후 계속, 세계대전 동안에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에서 드골주의 출판물은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1939-1940년 겨울의 막바지에 챔벌린과 달라디에의 정치적 및 군사적 책략은 실패했다. 그것의 목적은 쏘련에 대한 반발을 일으키고, 타협과 반코민테른 동맹을 통하여 영국-프랑스 연합과 독일 간의 충돌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략은 핀란드를 돕기 위한 영국-프랑스 원정군의 파견과, 그것에 의해 쏘련과의 전쟁 상황을 야기하는 개입이었다.’15)










독일-쏘련 불가침 조약과 핀란드의 패배는 붉은 군대가 나찌에 대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사건은 네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들은 사회주의 쏘련에 맞선 제국주의 정권의 연합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했다. 1939년 독일의 공격(이 있었다면: 역자)은 분명히 시베리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촉발시켰을 것이다. 사실상 발생했던 사건은 쏘련이, 파시즘의 패배까지 계속 유지된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 내내 집단 안보 체제를 거부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일단 독일이 독일-쏘련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자, 쏘련과 사실상의 군사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쏘련은 150-300㎞까지 방어선을 전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요인은 1941년 말에 레닌그라드와 모스끄바의 방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쏘련은 21개월 동안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결정적으로 쏘련의 방위산업과 군대의 강화를 가능하게 했다.















스딸린이 반파시스트 전쟁을 부실하게 준비했는가?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공산당 노선을 완전히 반전시켰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는 스딸린과 스딸린의 맑스-레닌주의 정치를 중상했다. 그는 놀랄 만한 비난을 계속하면서, 심지의 반파시스트 전쟁을 대비하고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스딸린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1936-1941년도에 스딸린이 국가의 전쟁 준비를 부실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 그의 언급이 있다.










‘스딸린은, 비극이 쏘련에 대한 독일의 “예상치 못한” 공격의 결과로서 일어났다는 논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동지들, 이것은 완전히 거짓이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마자, 그는 공산주의를 청산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전쟁 이전 시기의 많은 상황들은, 히틀러가 쏘련을 공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우리의 산업이 적절하고 운용되고 군대에 필요한 물품이 제때 공급되었다면, 전시의 손실은 확실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우리 군대의 무장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쏘비에뜨의 과학과 기술은 전쟁 전에 전차와 대포의 훌륭한 견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대량 생산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16)










제20차 당 대회의 참가자들 중에 누구도 거칠게 항의하지 않고 이러한 중상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치적 퇴보가 이미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의장에서는 이 연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고 있는 몇 십 명의 원수들과 장군들이 있었다. 당시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편협한 전문가주의, 배타적인 군사주의, 군대 내부에서의 정치적 투쟁에 대한 그들의 거부, 그리고 군대에 대한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및 정치 지도에 대한 그들의 거부: 이러한 요소 모두가 그들로 하여금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로 기울게 했다. 주꼬프, 바실레프스끼(Vasilevsky), 로꼬쏘프스끼(Rokossovsky), 모든 훌륭한 군 지휘관들은 결코 1937-1938년 동안의 군부 숙청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하린의 재판에 대한 정치적 의미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흐루쇼프가 맑스-레닌주의를 멘셰비끼, 뜨로츠끼주의자들, 부하린주의자들의 이념으로 대체했을 때 그를 지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흐루쇼프의 거짓말에 대해 장군들이 침묵을 지켰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들은 그 후에 자신들의 회고록에서 이러한 거짓을 논박했는데, 그때는 더 이상 어떠한 정치적 의미도 없었고 이러한 문제들은 단지 학문적인 의미만 가지게 되었을 때였다.





1970년 주꼬프의 회고록에서, 그는 흐루쇼프의 주장에 반대하며, 실제적인 방어 정책은 1928년 스딸린의 공업화 결정과 함께 시작했다고 정확하게 강조했다.










‘우리는 5~7년 동안 가파른 중공업의 성장을 미루고, 인민들에게 더 많은 소비재를 더 빠르게 제공할 수도 있었다. 우리 인민들은 수천 번 이럴 권리가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발전은 매우 멋진 것이었다.’17)










스딸린은 1928년과 1941년 사이에 9,000개 이상의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또한 동부 지역을 강력한 산업 단지로 조성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쏘련의 방어를 준비하였다.18) 공업화 정책에 경의를 나타내며, 주꼬프는 결국에는 역사에 의해 증명된, ‘공산당 노선의 지혜와 통찰력’에 찬사를 보냈다.19)





1921년, 군수 생산의 모든 분야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야 했다. 제1차 및 제2차 5개년 계획 동안, 공산당은 군수 산업을 다른 공업 분야보다 더 빨리 성장시키는 계획을 마련했다.20)





여기에 최초의 두 가지 계획에 대한 중요한 수치가 나와 있다.





1930년에 연평균 탱크 생산 대수는 740대였다. 1938년에는 2,271대로 늘어났다.21)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비행기의 건조수는 860대에서 5,500대로 늘어났다.22)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인, 1938년과 1940년 사이에, 공업 생산력은 매년 13% 증가했으나, 방위 산업의 성장률은 39%였다.23) 독일-쏘련의 불가침 조약에 의해 제공된 숨 돌릴 틈은 스딸린에 의해 방위 산업의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데 사용되었다. 주꼬프는 이렇게 증언했다.










‘경험 많은 공산당의 노동자들과 걸출한 전문가들이 중앙위원회 공산당 조직책으로서 대규모 방어 계획 임무를 부여받아, 공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고 목표 달성을 보장했다. 나는 스딸린 자신이 방어 계획에 혼신을 다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는 수많은 감독관들, 공산당의 지도자들, 수석 기술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그는 종종 그들과 만나며, 그 특유의 집요함으로 계획의 완수를 요구했다.’24)










1939년 1월 1일과 1941년 6월 22일 동안에 일어난 군수산업의 생산량은 인상적이다.





2만 9,637문의 대포와 5만 2,407문의 박격포를 포함하여 포는 9만 2,578문이었다. 82㎜와 120㎜의 새로운 박격포가 전쟁 직전에 생산되었다.25) 공군은 1만 7,745대의 전투기를 보유했으며, 3,719대는 신형 전투기였다. 항공기 분야에서:










‘1939-1941년 사이에 취해진 조치들로, 전시에 양적 및 질적 우위를 빠르게 점하는 데 필요한 여건이 조성되었다.’26)










붉은 군대는 7,000대 이상의 탱크를 제공받았다. 1940년에, 독일의 탱크보다 우수한 중(中)형의 T-34와 KV 중(重)탱크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미 1,851대의 탱크를 생산하였다.27)





마치 흐루쇼프의 비난에 대한 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듯이, 이러한 업적들을 언급하며, 주꼬프는 자아비판을 했다:










‘평화로운 시기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우리 군사 지도자들이 공업 분야에 요구했던 것들을 회상해 보면, 나는 우리가 국가의 경제적 가능성을 항상 충분히 평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28)










실제적인 군사적 준비 또한 스딸린에 의해서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1939년 5월-8월의 일본 및 1939년 12월-1940년 3월 동안의 핀란드와의 군사적 충돌은 반파시스트 저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투의 경험들은 면밀하게 분석되었고 붉은 군대의 약점을 보완시켰다.





1940년 3월, 중앙위원회 회의는 핀란드를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을 평가했다. 주꼬프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토론은 날카로왔다. 전투 훈련과 군대 교육 체계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29)










5월, 주꼬프는 스딸린을 방문했다.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이러한 전투 경험이 있으니, 끼예프 군사 지구에 지휘관으로 임관하여, 이러한 경험을 부대 훈련에 이용해 보시오.”30)










스딸린에게 끼예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주된 공격이 끼예프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했다.










‘스딸린은, 나찌가 쏘련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지역을 빼앗고, 우끄라이나의 곡물, 도네츠의 석탄, 그리고 나중에는 코카서스의 석유까지 손에 넣기 위해서, 쏘련과의 전쟁에서 가장 먼저 우끄라이나와 도네츠 석탄 분지(Donet Coal Basin)를 차지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41년 봄에 있은 군사 작전에 대한 회의에서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다: “나찌 독일은 이러한 극히 중요한 자원 없이는 상당히 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31)










1940년 봄과 가을, 주꼬프는 그의 부대를 강하게 훈련시켰다. 그는 주위에 유능한 젊은 장교들과 장군들이 있다고 적었다. 주꼬프는 그들에게 프랑스를 상대하는 독일의 전법에서의 교훈을 익히도록 했다.32)





1940년 12월 23일부터 1941년 1월 13일까지, 모든 고위 장교들이 대규모 회의에 참석했다. 토론의 중심은 장차 있을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파시스트가 대규모 전차 부대를 운용하며 축척한 경험에 대해 주의 깊게 검토했다. 회의 이틀 후, 대규모 군사 작전과 전략 연습이 지도상에서 벌어졌다. 스딸린은 참여했다. 주꼬프는 이렇게 적었다:










‘전략적 상황은 독일이 쏘련을 공격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서부 전선에서의 전개 양상을 기초로 하였다.’33)










주꼬프는 공격하는 독일의 역할을 맡았고, 빠브로프(Pavlov)는 쏘련의 저항을 맡았다. 주꼬프는 이렇게 적었다:










‘전쟁모의 훈련을 할 때 동부지역에서 극적인 상황이 풍부했다. 이 상황들은 1941년 6월 22일 이후에 ― 파시스트 독일이 쏘련을 공격했을 때 ― 실제로 일어난 상황과 많은 면에서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모의 훈련에서: 역자) 파브로프는 나찌에 패배했다. 스딸린은 작정하고 그를 책망했다.’





‘작전 지구를 지휘하는 장교는 전술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한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는데, 당신은 이번 훈련에서 해결책을 찾는 데 실패했소.’34)










서쪽의 국경선을 따라 새로운 요새의 건설이 1940년에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2,500개의 시멘트 군사 시설이 건설되었다. 매일 14만 명이 이 시설의 건설에 매달렸다.





‘스딸린은 또한 그 작업을 우리에게 재촉하고 있었다’라고 주꼬프는 적었다.35)





1941년 2월 15-20일 동안의 제18차 당 대회는 전쟁에 대비한 공업 및 수송 준비 상황을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쏘련 각지에서 모인 대의원들은 중앙위원회에 다수의 추가적인 군사부문 대의원을 선임했다.36)





1941년 3월 초, 띠모센꼬(Timoshenko)와 주꼬프는 스딸린에게 예비군 보병대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스딸린은, 독일에게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주지 않기를 원하며 이 요구를 거절했다. 마침내 3월 말에 그는 80만 명의 예비군 소집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국경지방으로 보내졌다.37) 4월, 육군 참모 총장은 스딸린에게 발틱, 벨로루시, 끼예프, 오데싸(Odessa) 군사 지구 출신의 군대는 공격을 막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스딸린은 28개의 국경 사단을 4개 군으로 묶어 전진시키기로 결정하였고, 나찌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38)





1941년 5월 5일, 끄렘린궁에서 스딸린은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이상적인, 무적의 군대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였다.39)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스딸린에 대한 전형적인 중상을 논박한다:










‘그는 공격용 군대를 육성했지, 방어용 군대를 육성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독일-쏘련 불가침 조약과, 그의 공범자인 히틀러를 믿었다’; ‘그는 나찌와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중상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역사적 성과를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적인 나찌의 신망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1953-1957년 동안 흐루쇼프의 권력 장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주꼬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서가 거짓이라고 여전히 주장했다. 그는 국가의 전쟁 대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내가 보기에 국가의 방어는 그것의 기본적이고 주요한 특징과 방침에 있어서 올바르게 운영되었다. 여러 해 동안 경제적 및 사회적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것, 혹은 거의 모든 것이 수행되었다. 1939년과 1941년 중반 사이에 대해서 말한다면, 인민들과 공산당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 각별히 전력을 다했다.’





‘우리의 고도로 발달된 공업, 꼴호즈 체제, 보편화된 교양, 민족 간의 단합, 사회주의 국가의 위력, 인민의 위대한 애국심, 전방과 후방을 전체적으로 하나로 단결시킬 준비가 되었던 공산당 지도부 ― 이것이 국가를 방어하는 거대한 능력의 훌륭한 기반이었고,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우리가 획득한 위대한 승리의 기초였다. 4년의 전쟁 기간의 엄청난 역경과 손실에도 불구하고, 쏘비에뜨 공업이 거대한 병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 거의 49만개의 포와 박격포, 10만 2,000대 이상의 탱크와 자주포, 13만 7000대 이상의 전투기 ― 군사 및 방어의 관점에서 경제적 기초가 올바르고 견고하게 구축되었음을 입증한다.’40)





‘결국 전쟁에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고, 승리 혹은 패배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 근본적인 문제에서 ― 공산당과 인민들은 모국의 방어를 준비했다.’41)















독일 침공의 날










의문의 여지없는 반파시스트 전쟁의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인 스딸린의 거대한 명성을 공격하기 위해, 적들은, 침공의 정확한 날짜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그가 저지른 ‘커다란 실수’를 언급하길 좋아한다.





흐루쇼프는 그의 비밀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서에 따르면, 1941년 4월 3일 무렵에 처칠이 스딸린에게 독일이 쏘련을 공격할 의도로 군대의 재편성을 시작했음을 개인적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스딸린은 이러한 경고를 무시했다.’42)










흐루쇼프는, 베를린에 있는 쏘련 대사관 소속 무관이 쏘련에 대한 공격이 5월 14일 혹은 6월 15일에 발발할 것이라는 소문을 보고했다고 계속 진술했다.










‘이렇게 특별히 심각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파시스트 군대가 실제로 쏘련의 영토를 침략하고 군사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모스끄바는 독일의 발포에 응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몇몇 독일 시민들이 국경을 넘어와, 독일군이 6월 22일 밤 3시 정각에 쏘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스딸린은 이 정보를 즉시 보고받았지만, 이러한 경고마저 무시했다.’43)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부르주아와 수정주의자들 문헌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예를 들면, 엘렌스타인(Elleinstein)은 ‘스딸린이 만들어낸 독재적이고 사적인 체제 하에서 ...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다.’라는 글을 썼다.’44)





전쟁의 첫 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스딸린은, 전쟁이 극도로 잔혹할 것이며, 파시스트들이 쏘비에뜨 공산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절멸시키고, 전례 없는 테러를 자행하며 쏘비에뜨 인민들을 노예화할 것임을 정확하게 알았다.





히틀러의 독일은 유럽의 경제적 잠재력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매달, 매주의 평화는 쏘련 방어체계의 상당한 강화를 의미했다. 바실레프스끼(Vasilevsky) 원수는 이렇게 적었다:










‘정치 지도자들과 정부 지도자들은 전쟁이 임박한 것을 알았고 쏘련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늦추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었다. 이것은 분별 있고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국가들과 특히 침략국들과의 능숙한 외교전이 요구되었다. 군에는 ’나찌 지도자들이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군사적 도발을 야기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피하라는 엄격한 명령이 내려졌다.’45)










1941년 5월 이후, 국경의 정세는 매우 긴박했다. 독일의 도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냉정해지는 것이 중요했다. 바실레프스끼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국경 지역의 경계 상태는 극도로 고조되어 있다.’





‘부대의 너무 이른 경계태세는 때 늦은 경계 만큼 위험할 수 있다. 아주 빈번하게, 주변 국가의 적대적인 정책이 실제 전쟁으로 실행되기까지는 여전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46)










히틀러는 영국 침략에 실패했고, 타격도 주지 못했다. 대영제국은 여전히 세계의 지도 국가였다. 스딸린은, 히틀러가 두 전선에서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히틀러가 쏘련을 공격하기 전에, 영국을 격파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리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여러 달 동안, 스딸린은 쏘련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일주 혹은 이주 후에 발발할 것이라는 정보를 보고 받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의 상당 부분은 영국이나 미국에 의해 퍼진 소문이었는데, 그들은 파시스트 늑대들이 사회주의 국가에 맞서기를 원했다. 쏘비에뜨 국경의 방어 조치들은 미국의 우익에 의해서 조작되어서, 쏘련이 독일을 공격하는 것이 임박했다고 보도되었다.47)





주꼬프는 이렇게 적었다.










‘1941년 봄은 독일에 맞선 쏘비에뜨의 대규모 전쟁 준비에 관련해 서방 국가들에서 새로운 거짓 소문들이 급증하던 시기이다.’48)










영국과 미국의 우익은 파시스트가 쏘련과 싸우기를 촉구했다.





뿐만 아니라, 스딸린은 독일의 쏘련 공격에 대해 영국이나 미국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1941년 5월, 나찌의 2인자인 루돌프 헤스(Rudolf Hess)는 스코틀랜드로 방문했다. 대독일 선전 방송을 전문으로 하는 영국 라디오를 경영하던, 세프톤 데믈러(Sefton Demler)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










‘헤스는, 독일의 쏘련 공격시에 영국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면, 그의 스코틀랜드 방문의 목적은 “어떤 조건으로든” 영국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헤스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동맹국으로서 영국의 승리는 볼셰비끼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볼셰비끼의 승리는 조만간 독일과 전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를 의미할 것이다.’49)





영국에서 쏘련과 거래를 하는 흐름에는 깊은 뿌리가 있었다. 현재의 사건이 다시 한번 이를 설명해준다. 1993년 초에 영국에서 처칠에 대한 존 챔리(John Charmley)의 저서인 ≪영광의 종말(The End of Glory)≫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대처(Thatcher) 정권 하의 국방 장관이었던 앨런 클락(Alan Clarc)은 처칠이 1941년 봄에 독일과 평화를 이루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찌 독일과 볼셰비끼 러시아는 서로를 파괴시켰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영국이 자신의 제국을 유지했을 것이다!50)





1941년 초로 돌아가 보자. 스딸린은 당시 전 세계에서 다양한 정보를 보고 받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예고했다. 스딸린은 독일의 쏘련에 대한 임박한 공격을 전하는 보고서를 영국에서 받자, 이렇게 자문해야 했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정보가 어느 정도까지 거짓이며, 그들의 목적은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막으려는 것인가?’





전후에, 독일의 사령관인 카이텔(Keitel)은, 1941년 2월 3일 히틀러에게 받은 지시인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작전 명령’을 따랐다고 말했다. 주꼬프는 이렇게 적었다:










‘(독일에서: 역자) 영국의 지도가 대규모로 인쇄되었고, 영어 통역자들이 부대에 배치되었으며, 영국 해협, 도버 해협과 노르웨이 해협의 특정 지역을 “봉쇄”하기 위한 채비를 하였다. 가상의 “공수 부대”에 대한 정보가 퍼졌고, 거짓 “포병 부대”가 해안에 배치되었다. 적대적 선전의 물결이 영국으로 향했고, 쏘련을 향하던 일상적 비방이 멈추었다.’51)










이러한 모든 것은 스딸린이 극도로 조심했던 이유를 말해준다. 그는 엘렌스타인이 묘사한 맹목적인 독재자는 아니었지만, 모든 가능성을 살펴볼 줄 아는 아주 명석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주꼬프는 이렇게 증언했다:










‘하루는 스딸린이 나에게 말했다:





‘“어떤 인사가 나에게 히틀러 정부의 의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약간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쏘련의 유명한 간첩인)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52)










주꼬프에 따르면, 쏘비에뜨 정보부는 공격 날짜를 잘못 예측한 데 대해 책임이 있었다. 1941년 3월 20일, 정보부 지도자인 골리꼬프(Golicov) 장군은 스딸린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제출했다; 공격은 5월 15일에서 6월 15일 사이에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론에서 이것들은 ‘영국이나 심지어 독일 정보기관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라고 적었다. 골리꼬프는 공격의 시기는 아마도 ‘(독일이) 영국을 이긴 후’가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53)





6월 13일, 띠모센꼬(Timoshenko) 원수는 경계부대를 배치하기 위해 스딸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딸린은 ‘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라고 답하였다. 다음날, 띠모센꼬와 주꼬프가 돌아왔다. 스딸린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들이 군대를 동원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서쪽 국경으로 이동시키자고 제안한 것입니까? 그것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주꼬프는 그들의 정보기관에 따르면, 독일 사단의 이동은 이미 완료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다:










‘정보부의 보고를 모두 믿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딸린은 흐루쇼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꼬프는 이렇게 진술한다:










‘그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들이 농업에 관한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듣던 스딸린이, “좋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흐루쇼프는 수확 전망을 장밋빛으로 색칠했음이 틀림없었다.’54)










주꼬프가 전한 이러한 이야기들은 놀랄 만한 것이다! 우리는 흐루쇼프가 스딸린의 ‘경계심의 부족’과 ‘무책임함’을 공격했던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주꼬프, 띠모센꼬, 스딸린은 즉각적인 (독일의: 역자) 공격 가능성에 대해 평가하고 있었고, 주의 깊은 흐루쇼프는 곡물과 채소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6월 21일 저녁, 독일에서 온 탈영병은 다음날 밤에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고 했다. 띠모센꼬, 주꼬프 그리고 바뚜딘(Vatutin)은 스딸린에게 호출을 받았다.





스딸린이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만일 충돌을 유발시키려고 독일 장군들이 이 탈영병을 보냈다면?’





띠모센꼬: ‘우리는 탈영병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딸린: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띠모센꼬: ‘국경 지구의 모든 부대에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명령을 즉각 내려야 합니다.’










간단한 토론 이후, 군인들이 명령서를 작성했고, 스딸린이 약간 수정하였다. 여기에 핵심 내용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a) 1941년 6월 21일 밤에, 국가의 국경에 있는 요새화된 지역의 발사구역들에 은밀하게 군대를 배치하라.’





‘b) 1941년 6월 22일 새벽 전에, 전투기를 포함한 모든 비행기들을 여러 비행장에  분산시켜, 신중하게 위장하라.’





‘c) 모든 부대는 경계 태세를 갖추어라. 전군은 각각 흩어져, 위장해 있어라.’55)










띠모센꼬와 주꼬프가 서명했다. 전송문은 자정 직후에 여러 지역으로 전해졌다. 때는 이미 1941년 6월 22일(독쏘전쟁 시작일: 역자)이었다.





흐루쇼프는 전쟁 발발 후 첫 수개월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전선에서의 최초의 심각한 참사와 패배 이후에, 스딸린은 이것이 끝일 것이라 생각했다....’





‘스딸린은 오랫 동안 군사 작전을 실제적으로 지휘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몇몇 정치국 위원들이 그를 방문해서야 비로소 그는 적극적인 지도자로서 변모했다.’56)





‘1941년 10월, 중앙위원회 총회를 소집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당시는 국가 전역에서 온 중앙위원회 대의원들이 모스끄바에 모였다.... 스딸린은 심지어 중앙위원회 대의원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스딸린이 전쟁 첫 몇달 동안 얼마나 좌절했었는지를 보여준다.’57)










엘렌스타인은 여기에 이렇게 추가한다:










‘독한 보드카를 마신 그는 거의 11일간 취해 있었다.’58)










지난 11일간 취해 있었고, 추가로 4개월간 좌절했었던 스딸린으로 시야를 돌려보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40분, 주꼬프가 독일의 비행기들이 국경의 도시들을 폭격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스딸린은 그에게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라고 명령한다. 정치국 위원들은 4시 30분에 모였다. 바뚜딘은 그들에게 독일의 지상군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곧이어 독일의 선전포고가 전해졌다.59)





스딸린은 국가가 견뎌내어야 할 야만적인 상황해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는 오랫 동안 침묵했다. 주꼬프가 이러한 극적인 순간을 회상했다.










‘스딸린 본인은 강한 의지를 가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때가 내가 그의 다소 낙담한 모습을 본 유일한 순간이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전쟁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60)










주꼬프는 즉각 적의 부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스딸린은 그에게 작전 명령을 작성하라고 말하였고, 그것은 7시 15분에 발송되었다. 하지만 병력의 열세와 전세를 고려해 보면 명백히 비현실적인 것이 입증되었다 ― 따라서 결코 이 명령은 실행되지 못했다.‘61)





스딸린이 ‘독일의 발포에 응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는 흐루쇼프의 주장은 분명히 거짓이다.62)





만약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딸린이 영향을 받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1941년 6월 22일 이후, 그리고 전쟁 기간 내내 그는 견고하게 국가를 경영했으며, 중앙위원회 및 쏘비에뜨 정부와 함께 군사작전을 이끌고 국제적인 업무를 처리했다.’63)는 것이다.





이미 6월 22일에 스딸린은 아주 중요한 여러 결정을 내렸다. 주꼬프는 그날 오후 1시에 스딸린이 전화를 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증언했다:










‘우리의 전방 지휘관들이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확실히 다소 당황하게 되었소. 정치국은 당신을 남서부 전선의 최고 사령부 총본부의 참모총장(representative of the General Headquarters of the High Command)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소. 우리는 또한 샤뽀쉬니꼬프(Shaposhinikov) 원수와 꾸릭크(Kulik) 원수를 서부 전선으로 파견하기로 했소.’64)










최고 사령부(the High Command)는, 최고 지도자인 스딸린 주위에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날이 끝날 때 즈음, 주꼬프는 이미 끼예프에 당도해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스딸린이 반격 작전을 개시하는 명령을 이미 내렸음을 알았다. 주꼬프는, 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참모들이 충분한 정보가 없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그 작전 명령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24일에 주꼬프는 제8 그리고 제15기계화 군단을 공격 전선으로 보냈다. “적에 대한 그들의 첫 반격들 중의 하나는 성공적이었다”.65)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주꼬프는 ‘전쟁 초기의 대규모 국경 전투’에 주목하는데, 이는 그의 생각으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자신의 정치적 음모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흐루쇼프는 이 시기를 스딸린이 일련의 범죄적 잘못을 저지른 시기로 덧칠하는데, 그에 따르면 스딸린은 방어를 완전히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찌의 전격전에 직면하여, 혼란, 패배, 중대한 손실은 상당한 수준까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요한 점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군대와 군 간부들이 놀랄 만큼, 결연한 저항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첫날부터, 그들의 영웅적인 전투는 전격전의 패배를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상당 부분 스딸린의 투지 넘치는 저항 때문에, 이 모든 가능했다.





바로 6월 26일 이후, 스딸린은 전선에서 300㎞ 후방에 예비 전선을 건설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만약 적들이 방어를 뚫는 데 성공한다면 그들을 저지하는 용도였다.





바로 그날, 서부 전선은 무너졌고 나찌는 벨로루시의 수도인 민스크(Minsk)로 진격했다. 그날 밤, 스딸린은 띠모센꼬, 주꼬프, 바뚜띤을 소집하여 이렇게 말했다:










‘현재 이 상황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하고 결정해 봅시다.’










주꼬프는 이렇게 전했다:










‘이러한 모든 제안이 스딸린에 의해 승인되었다....’





‘모스끄바로 향하는 길목에 깊게 방어선을 구축하기, 지속적으로 적을 공격하여 괴롭히기, 방어선 하나 하나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그리고 나서 극동 지방의 부대들을 이동시키고 또한 새로운 부대를 만들어 그 힘을 모아 반격하기.’66)










6월 29일, 일련의 대책들이 채택되었다. 스딸린은 1941년 7월 3일의 그의 유명한 라디오 연설에서 이를 인민들에게 알릴 예정이었다. 승리를 위한 명료하고 완강한 의지가 쏘비에뜨에 전해졌다.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다:










‘적은 잔혹하고 무자비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땀이 깃든 우리의 땅을 점령하고, 우리의 노동에 의해 획득된 식량과 석유를 강탈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지주들에 의한 통치로의 복귀, 짜르 전제의 회복, 그리고 러시아, 우끄라이나,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레츠, 에스또니아, 우즈베크, 따따르, 몰다비아,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기타 쏘련의 자유로운 인민들의 민족 문화와 민족국가를 파괴하여, 그들을 독일화하고 독일 공작과 남작의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쏘비에뜨 국가의, 그리고 쏘련 인민의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즉 쏘련 인민들이 자유롭게 사느냐 아니면 노예로 전락하느냐라는 문제입니다...’





‘우리 인민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해방을 위한 우리의 애국 전쟁에,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파시스트에 맞선 우리의 전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 국가의 창립자인 위대한 레닌은, 볼셰비끼의 주요 미덕은 국가의 적들에 맞선 투쟁에서 두려움 없는 용맹과 용기, 인민과 함께 언제든지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붉은 군대, 붉은 해군 그리고 쏘련의 모든 시민들은 쏘비에뜨의 영토 한 치 한 치를 고수해야 하며, 우리의 도시와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쳐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붉은 군대의 후방을 강화해야 하며, 이러한 대의에 우리의 모든 사업을 종속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공업은 더 많은 소총, 기관총, 대포, 총알, 포탄, 비행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후방을 교란시키는 모든 이들, 이탈자, 공포를 야기시키는 자들,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에 대항하여 무자비한 싸움을 수행해야 하며, 우리는 간첩, 파괴활동가, 적의 낙하병들을 박멸시켜야 합니다....’





‘붉은 군대 부대가 어쩔 수 없이 후퇴할 경우에는, 옮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옮겨서, 적들에게 발동기 하나, 기차 한 량, 씨알 한 톨, 기름 한 방울도 내어줘서는 안 됩니다....’





‘적이 점령한 영토에서는 보병과 기병으로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야 하고, 파괴활동을 조직하여 적 부대와 싸우고, 모든 곳에서 게릴라전을 선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해 전진!’67)










7월 10일에 스몰렌스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점령한 후, 300㎞ 떨어진 모스끄바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몰렌스끄 전투는 두 달 동안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스몰렌스끄 전투는 위대한 애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의 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장군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25만 명의 장교와 사병을 잃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시간을 벌었고 전략적 증원병을 육성할 수 있었으며, 모스끄바 지역의 방어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68)










바실레프스끼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스몰렌스끄 전투는 ... 전격전을 분쇄하는 토대를 놓았다...’





‘이 전투는 쏘비에뜨 군인들과 고위급 지휘관들과 최고 사령부를 포함한 지휘관들의 전투 효율을 검증하는 데 있어서 아주 가치있는 기회였다.’69)










9월 30일, 나찌는 모스끄바를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75%가 여성인 약45만 명의 도시 거주민들이 동원되어 참호와 대전차 진지를 건설했다. 빤피로프(Panfilov) 장군의 부대는 볼로꼴람스끄 가도(Volokolam-sk Road) 방어에서 기념비적인 전투를 이끌었고, 알렉산더 벡(Alexander Bec-k)은 동명소설에서 그 불후의 명성을 남겼다.70)





모스끄바는 독일의 항공기에 의해서 폭격당했다. 시민들은 공포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찌는 겨우 80㎞ 앞에 있었다. 정부의 일부는 이미 소개되었다. 하지만 스딸린은 모스끄바에 남기로 결정했다. 전투는 더욱 더 격렬해졌고, 11월 초에 나찌의 공격은 멈추었다. 주꼬프와의 상의 후, 스딸린은 붉은 광장에서 전통적인 11월 7일 군사 퍼레이드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모스끄바의 입구에 자리 잡은 독일군에 대한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스딸린은 연설을 하였고, 이는 국가 전역에 방송되었다.










‘적은 레닌그라드와 모스끄바 입구에 주둔해 있습니다.’





‘적은, 첫 타격에 우리 군대가 곧바로 패주하고, 우리나라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적은 완전히 오판을 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을 내쫓기 위해, 우리 국가는 ― 우리 국가 전체는 ― 육군과 해군과 더불어, 단일한 하나의 전투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독일 침략자들에게 승리할 수 있을지 또는 틀림없이 승리할지 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습니까? 적은, 공포에 사로잡힌 사이비 지식인 몇몇이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그려진 것처럼 무섭지는 않습니다....’





‘동지들이여, 붉은 군대와 해군이여, 지휘관들과 정치적 지도자들이여, 남녀 게릴라 병사들이여...’





‘전 세계는 여러분을, 산적 떼와 같은 독일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세력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의 멍에 하에 노예가 된 유럽 인민들은 자신들의 해방자로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방을 위한 위대한 임무가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임무에 주목하십시오! ...’





‘레닌의 기치 아래 ― 승리를 향해 나아가자!’71)










11월 15일, 나찌가 모스끄바에 대해 2차 공격을 시작했다. 11월 25일, 일부 부대가 모스끄바의 남부 교외지역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2월 5일 공격은 저지되었다. 이 시기 내내, 국가 전역에서 오는 새로운 부대가 모스끄바에 보충될 수 있었다. 심지어 가장 극적인 순간에도, 스딸린은 그의 전략적 예비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꼬쏘프스끼(Rokossovsky)는 이렇게 적었다.










‘육군의 방어선이 너무 얇게 퍼져 있어서, 돌파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부대를 연속하여 순환(troop juggling)시키는 계책을 사용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했다.’72)










모든 지휘관들과 회의를 한 후에, 스딸린은 대반격을 결정했는데, 그것은 12월 5일에 시작되었다. 약 72만의 붉은 군대는 80만의 히틀러 부대를 100-300㎞ 패퇴시켰다.





처음으로, ‘무적의’ 독일 부대가 패배했다. 그것도 완전하게. 모스끄바 전선에서 파시스트들은 50만 이상의 병력, 1300대의 탱크, 2500문의 대포, 그리고 1만5000대의 자동차와 훨씬 더 많은 군수품을 잃었다. 히틀러의 군대는 지금까지 그러한 피해를 입어 본 적이 없었다.73)





많은 이들이 모스끄바 전투를 반파시스트 전쟁의 실제적인 전환점으로 여긴다. 그것은 전격전 발발 이후 6개월 만이었다. 스딸린의 단호한 의지, 거대한 조직화 능력, 대규모 전략적 문제에 대한 탁월함이 커다란 공헌을 했다.(9장 후반부가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1) Stalin, Works, vol. 13, p. 309.






2)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U.S.S.R., Documents and Materials Relat-ing to the Eve of the Second World War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8). vol. 1, p. 271.






3) Ibid. vol. 2, pp. 110-111.






4) Harold L. Ickes, The Secret Diary of Harold L. Ickes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54), p. 705.






5) Sipols and Kharmalov, A la veille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Mosco-w: Éditions Novosti, 1973), p. 262.






6) Grigori Déborine, Les secrets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Moscow: Éd-itions du Progrès, 1972), p. 35.






7) Winston S. Churchill, op. cit. p. 449.






8) Cited in La grande guerre nationale de l'Union soviétique (Moscow: Édition-s du Progrès, 1974), p. 20.






9) G. Zhukov, The Memoirs of Marshal Zhukov (London: Jonathan Cape, 1971), p. 171.






10) Ministère des Affaires Étrangères de Finlande, Documents sur les relation-s finno-soviétiques (Paris: Éditions Flammarion, 1940), pp. 93-95, 109.






11) Jacobsen, op. cit. vol. 1, p. 118.






12) Pavel Zhiline, Ambitions et méprises du Troisième Reich, (Moscow: Éditi-ons du Progrès, 1972), p. 74.






13) Bernard Serrigny, L'Allemagne face à la guerre totale (Paris: Éditions Gr-asset, 1940), p. 228.






14) Falsificateurs de l'Histoire (Brussels: Éditions ABS, 1948), p. 118.






15) Petite encyclopédie politique du monde (Rio de Janeiro: Éditions Chantecl-air, 1943), p. 136.






16) Khrushchev, Secret Report, pp. S36, S38.






17) Zhukov, op. cit. p. 107.






18) Ibid. p. 137.






19) Ibid. pp. 107.






20) Ibid. p. 138.






21) Ibid. p. 139.






22) Ibid. p. 140.






23) La grande guerre nationale, op. cit. p. 33.






24) Zhukov, op. cit. p. 191.






25) Zhukov, op. cit. pp. 198-199. La grande guerre nationale, op. cit. p. 33.






26) Zhukov, op. cit. p. 201. La grande guerre nationale, op. cit. p. 33.






27) Zhukov, op. cit. pp. 197. La grande guerre nationale, op. cit. p. 33.






28) Zhukov, op. cit. p. 192.






29) Ibid. p. 180.






30) Ibid. p. 170.






31) Ibid. p. 211.






32) Ibid. p. 173.






33) Ibid. p. 184.






34) Ibid. pp. 185-186.






35) Ibid. p. 213.






36) Zhiline, op. cit. p. 212. Zhukov, op. cit. p. 209.






37) Zhukov, op. cit. p. 196.






38) Ibid. 217-218.






39) Ibid. p. 225.






40) Ibid. p. 226.






41) Ibid. p. 227.






42) Khrushchev, Secret Report, op. cit. pp. S36-S37.






43) Ibid. pp. 37-39.






44) Jean Elleinstein, Staline (Paris: Fayard, 1984), p. 262.






45) Vasilevsky, op. cit. p. 84.






46) Ibid. p. 83.






47) Déborine, op. cit. pp. 73-74.






48) Zhukov, op. cit. p. 224.






49) Sefton Demler,  Black Boomerang (London: Secker & Warburg, 1962), pp. 59-60.






50) De Morgen, 23 January 1993, p. 21.






51) Zhukov, op. cit. p. 223.






52) Ibid. p. 228.






53) Ibid. pp. 228-229.






54) Ibid. p. 230.






55) Ibid. pp. 232-233.






56) Khrushchev, Secret Report, op. cit. p. S40.






57) Ibid. pp. S19-S20.






58) Elleinstein, op. cit. p. 269.






59) Zhukov, op. cit. pp 235-236.






60) Ibid. p. 268.






61) Ibid. p. 236.






62) Khrushchev, Secret Report, op. cit. p. S39.






63) Ibid. p. 268.






64) Ibid. p. 238.






65) Ibid. p. 242.






66) Ibid. p. 256.






67) Stalin, The German invasion of the Soviet Union. The Great Patriotic Wa-r of the Soviet Union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5), pp. 13-17.






68) Ibid. p. 275.






69) A. M. Vasilevsky, A Lifelong Cause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3), p. 96.






70) Alexandre Beck, La chaussée de Volokolamsk (Paris: Éditions Bordas, 1946).






71) Stalin, The twenty-fourth anniversary of the October Revolution, The Gr-eat Patriotic War of the Soviet Revolution, pp. 35-38.






72) K. K. Rokossovsky, A Soldier's Duty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5), p. 87.






73) Vasilevsky, op. cit. p.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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