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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3)
글쓴이 그로버 퍼(Grover Furr) E-mail send mail 번호 320
날짜 2013-04-26 조회수 2361 추천수 95
파일  1366931625_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3).hwp

  

























제 3장.





당에 대한 스딸린의 “독단”















10. “중앙위원회 최고회의 통제 아래 있던 당위원회”에 대한 언급:





숙청1) 시기 자료의 날조










흐루쇼프:










위원회는 내무인민위원회(NKVD) 문서들과 기타 많은 자료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공산주의자를 적대하는 사건들의 날조, 잘못된 기소, 사회주의 법의 극심한 남용과 ― 그것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 관계된 많은 사실들을 확증하게 되었다. 1937년-1939년 사이에 “적”으로 낙인찍힌 많은 당, 쏘비에뜨, 경제 활동가들이 실제적으로 적, 간첩, 파괴자 등이 아니었고, 항상 정직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 오명이 씌어졌고, 종종 야만적인 고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조사 담당 판사들-위조자들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모든 종류의 심각하고 있을 법 하지도 않은 범죄들을 인정했다.





[․ ․ ․]





17차 당대회에서 선출되었던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139명 중 98명, 즉 70%가 체포되었고 총살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대부분 1937년-1939년 사이에).





(강당은 분노의 분위기였다)... 중앙위원회 위원뿐만 아니라 17차 당대회 대의원들의 대다수가 똑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선거권이나 자문할 권리를 가진 대의원들 1,966명 중 1,108명은 반혁명 죄목으로 체포되었는데, 즉 명확하게 과반수 이상이었다.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내가 말하는 세 번의 “특별한 사례”2) 중의 하나이다: 흐루쇼프는 스딸린이 어떤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분명하게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서, “폭로”는 없고, 드러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진술은, 스딸린이 단지 이 당원들 모두를 죽였다는 것을 확실히 암시하려고 한다. 이 암시는 완전한 거짓이고, 이 장에서 논파될 것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이러한 암시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라 해도,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거짓이라고 해도, 스딸린이 명확하게 어떠한 죄목으로 고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맑스-엥겔스-레닌 연구소의 소장이자 중앙위원회의 비서였던 뻬트르 N. 뽀스뻴로프(Petr N, Pospelov)의 이름을 딴 뽀스뻴로프 위원회3)로 알려진 이 위원회의 보고서를 가지고 있다. 역사학자인 뽀스뻴로프는 이 위원회에 지시를 내렸고 나중에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의 첫 번째 초고를 썼다. 스딸린이 살아 있는 동안, 뽀스뻴로프의 글들은 “개인숭배”의 가장 눈꼴사나운 예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흐루쇼프의 친밀한 동맹자가 되었다. 뽀스뻴로프는 매우 정치 편향적인 역사학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게 자리가 주어졌는데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의 이름을 딴 보고서는 그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뽀스뻴로프 위원회 보고서는 처형된 많은 인물들이 무죄였다고 정말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인용된 증거가 그들의 무죄를 입증하지는 않는다. 위원회는 그들이 무죄라고 단지 선언만 했을 뿐이다. 보고서의 전체 구조는, 보고서의 목적이 대규모 숙청에 대한 스딸린의 범죄를 찾아내는 것과, 미리 정해져 있는 결론과 모순되는 증거들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역시 1930년대 동안 숙청당한 당 고위간부들의 “복권”을 위해 준비된 보고서들의 요약본들을 가지고 있다. 이 보고서들 중의 몇 개는 뽀스뻴로프 보고서 이전에 이미 준비가 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보고서들은 그 후에 준비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N. 야꼬프레프(Alexandr N. Iakovlev)의 “기념관(Memorial)” 기금으로 보고서들이 편집·출판되었을 때, 그 내용에는 뽀스뻴로프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역시 다른 많은 자료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기념관(Memorial)”은 매우 반공주의적이고, 스딸린에게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조직이다. 그 내용은, 스딸린이 무고한 사람들을 탄압했던 데 대해 유죄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면 어떠한 증거라도 모두 포함하려고 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4)





이 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룬다:










• 흐루쇼프가 탄압을 받았다고 언급했던 당 고위간부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결국 유죄였음을 시사하는 아주 많은 증거들이 있다! 적어도 뽀스뻴로프 보고서에 적혀진 그들의 재판에 대한 짧은 요약은 그들의 무죄를 입증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충분할 만큼, 그들의 범죄에 관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 예조프는 많은 쏘비에뜨 시민에 적대해 재판을 날조한 책임이 있다. 이 문제가 흐루쇼프가 언급했던 약간의 당원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은 가능하다. 예조프는 이 일을 했다고 고백했고, 그것 때문에 그는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이 책의 17장 예조프 부분을 보라)










•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수사에 있어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자백의 날조로 사실들을 입증했으며, 이는 1938년 말 경 예조프의 뒤를 이어 베리아가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동안 이루어졌다.










•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 인물들의 체포, 조사와 재판에 관한 정보, 처형에 대한 구체적 이유들을 숨기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뒤이어 숙청의 희생자들이 되어버린 1934년 17차 당대회의 대의원들과 거기서 선출된 중앙위원들의 높은 비율에 대해 언급을 했다. 나중에 출판된5) 중앙위원들의 더 자세한 “숫자”가 그러하듯이, 흐루쇼프는 언제, 왜 여러 부류의 대의원들이 체포되고 기소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의 설명방식은 (소위 말하는: 역자) “스딸린”의 방식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뽀스뻴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포함한 “복권” 보고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보고서들의 내용은 이러한 체포와 처형에 몇 가지 서로 다른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뽀스뻴로프 위원회에 따르면,










• “대부분”은 무죄이다. 이 말은, 위원회가 예조프를 제외하고 어떤 점에서 유죄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은 유죄라는 것을 의미한다.










• 몇몇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근거도 없이 연루되었다. 에이헤(Ei-khe)와 E. G. 예브도끼모프(E. G. Evdokimov) 두 사람 모두는 두들겨 맞고 여러가지 고문을 당했을 때, 그들이 중앙위원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허위로 고발했다.










• 몇몇 사람들은 고문으로, 허위 자백서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발에 서명했다.










뿐만 아니라 위원회는, 피고인들 중의 많은 이들의 자백과 심문 내용이 스딸린에게 보내졌고, 그가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냈다고 강조한다. 약간의 내용이 현재 출판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다.





흐루쇼프와 뽀스뻴로프 위원회는 모두, 예조프뿐만 아니라 베리아도 숙청에 대해 비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실들 ― 예조프 재임기간 동안 이루어진, 내무인민위원회의 범죄들과 과도한 행위에 대해, 베리아가 조사하는 동안 모아진 많은 자료들 ― 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통계치는 이 논리가 거짓임을 말한다. 사실은 베리아가 “예조프시나(Ezhovshina, 예조프에 의한 대숙청 시기: 역자)”를 종식시켰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을 완전히 숨겨 버리는 데 비해, 뽀스뻴로프 위원회 보고서는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을 드러낸다. 하지만 쏘련이 존재하였던 동안이나 1991년 이후에는 조사자들이 적절한 자료들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행되었던 일들의 진실은 계속 덮여져 있다. 그러한 조사는, 흐루쇼프와 위원회가 한사코 모든 것에 대한 비난을 계속해왔던 스딸린과 베리아의 무죄를 밝혀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흐루쇼프 바로 자신이 대규모 숙청의 대부분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의 한명이다. 이전의 장에서 이것에 대하여 간단하게 논의를 했고, 부록에 증거로서 문서들을 인용해 놓았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우리는 흐루쇼프가 이름을 밝힌 숙청당한 당원들 각각의 사건을 조사할 것이다. 이 사건들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뽀스뻴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포함한 “복권” 자료들이 그들이 무죄라는 것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사실은 많은 사건의 경우에 있어, 보고서 그 자체가 (무죄에: 역자) 상반된 증거의 존재를 인정한다.





쏘련의 해체와 몇몇의 조사자들에게 구쏘련 문서고가 부분적으로 개방된 이후로, 흐루쇼프가 언급했고 뽀스뻴로프 위원회 보고서에서 논의되었던 당 간부들의 죄목들과 관계된 몇 가지 증거가 빛을 보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 사람들 중 누구에 대해서도 전체조사 자료들을 공개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유죄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용 가능한 증거는 이 사람들이 무죄라는 뽀스뻴로프 위원회 결론이 전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 가능한 증거는 압도적으로 그들이 유죄였음을 가리킨다.















11. 1934년 12월 1일 예누끼제(Enukidze)가 서명한 “지령”










흐루쇼프:










1934년 12월 1일 저녁에 스딸린의 결정(정치국의 승인 없이 이틀 뒤에 통과되었다. 일상적으로)...










이것은 거짓된 진술이다. 흐루쇼프는 정부당국(Governmental body) ― TsIK의 최고간부회의 ― 은 이 법에 서명을 했지만, 당의 정치국은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당의 지도자들에게 불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쏘비에뜨 헌법은 당의 정치국에 관하여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당의 정치국이 이 결정을 통과시킬 이유는 전혀 없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의장과 서기를 맡고 있던 깔리닌(Kalinin)과 예누끼제가 그것에 서명을 했다. 흐루쇼프는 그것이 “스딸린의 결정”으로 통과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스딸린은 “발표에 찬성”이라고 초안에 기록했다. 이는 그것을 발표하는 것에 스딸린이 동의하는지를 물어보기 위해, 그것이 스딸린에게 제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스딸린에게 제출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 초안은 적어도 스딸린에게서 나왔을 리는 없다.6)





이 법령에 대한 문제는 1989년 흐루쇼프 연설의 공식적인 러시아 판에서 왜곡이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이 법령이 쏘련 중앙집행위원회의 회기에 승인을 위해 제출되지 않았다고 언급된다. 이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설령 그 내용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법령이 스딸린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스딸린은 중앙집행위원회(CEC)의 의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여부는 우리의 목적과는 연관성이 없다. 흐루쇼프는 정치국 ― 당 기관 ― 이 이전에 이 법령을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령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흐루쇼프가, 스딸린이 이 법령에 대해 정치국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고 불평했던 사실은, 스딸린을 공격하는 흐루쇼프의 동기 중의 하나가, 사회를 통치하고 경제를 운영하는 데서 당이 손을 떼게 하려는 스딸린의 시도였다는, 몇몇의 연구자들이 제기한 이론을 지지한다. 이 이론은 이글의 필자 자신뿐만 아니라 유리 주꼬프(Iurii Zhukov), 아치 게티(Arch Getty), 유리 뮤힌(Iurii Mukhi-n)과 같은 연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지지를 받았다.7)















12. 흐루쇼프는 끼로프(Kirov) 암살 사건에 스딸린이 연루되었다고 암시한다










흐루쇼프:










우리는 오늘날까지 끼로프의 암살을 둘러싸고 있는 정황이 불가사의하고 모호한 많은 것들을 숨기고 있고, 가장 조심스런 조사가 요구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끼로프의 암살자인 니꼴라예프(Nikolaev)가 끼로프를 보호하는 것이 의무인 사람들 중의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심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 암살이 일어나기 한 달 반전, 니꼴라예프는 의심스러운 행동 때문에 체포되었지만 풀려났고 심지어 조사도 받지 않았다. 끼로프를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은 체끼스트(Chekist)가 1934년 12월 2일 심문을 받기 위해 소환을 앞두고 있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그 사고에서 다른 동승자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정황이다. 끼로프가 암살된 후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회의 최고위직 관리들은 아주 가벼운 선고를 받았지만, 그러나 1937년에 총살을 당했다. 끼로프의 암살을 조직한 사람의 흔적들을 덮어버리기 위해 그들을 총살했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흐루쇼프는, 공공연하게 그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스딸린이 끼로프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아치 게티가 지적했던 것처럼, 여러개의 쏘비에뜨 위원회와 쏘비에뜨 이후의(쏘련 해체 이후의: 역자) 위원회들은 스딸린이 끼로프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했다. ≪테러로 가는 길(The Road To Terror)≫(pp. 141-7)의 더 긴 논의에서, 게티는 스딸린이 끼로프의 암살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현재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수도쁠라또프(Sudoplatov) 역시 이 암살 사건에서 스딸린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러시아 조사자들과 함께 게티는, 끼로프 암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가 확정되고, 처형되었던 반대자들을 스딸린이 “틀에 짜 맞추었다” ― 그들에 대한 거짓 사건을 날조했다 ― 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틀에 짜맞추어진 것이 아니라는 좋은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비록 끼로프 암살에 대해서 연구자들에게 공개된 조사자료가 미미하고, 출판된 자료들은 훨씬 더 적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암살자 니꼴라예프의 심문에 대한 복사본 일부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꼬똘리노프(Kotolynov)를 포함한 지노비에프주의자 비밀모임이 관련되었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니꼴라예프가 저지른 끼로프 암살에 대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그 전날의 꼬똘리노프의 심문자료 일부분을 가지고 있다.8)




















13. 1936년 9월 25일 공산당 정치국에 보낸





   스딸린과 쯔다노프(Zhdanov)의 전보










흐루쇼프:










1936년 9월 25일 소치(Sochi)에서라고 날인된 스딸린과 [안드레이(Andrei)] 쯔다노프의 전보가 까가노비치, 몰로또프와 정치국의 다른 위원들에게 보내진 후, 1936년 말경부터 대규모 숙청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예조프 동지가 내무부 인민위원회의 수장에 임명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긴급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야고다(Yagoda)는 뜨로츠키파-지노비에프파 연합을 폭로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결정적으로 증명했다. OGPU(쏘련의 비밀경찰기구, 내무인민위원회의 하부 부서: 역자)는 4년을 미적거리고 있다. 모든 당원노동자들과 내무인민위원회의 대표자들 대다수가 이것을 말한다.’










대규모 숙청을 하는데 “내무인민위원회가 4년을 미적거리고 있다”는 것과 태만한 작업과 관련해서 “따라 잡을” 필요성이 있다는 스딸린주의자의 공식화는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들을 직접적으로 대규모 체포와 처형의 길로 밀어 넣었다.










스딸린의 말은 숙청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하물며 대규모 숙청에 대해서는 더 더욱 언급하지 않았으며 단지 최근에(그 당시에: 역자) 발견된 뜨로츠키파-지노비에프파 연합의 조사에 대한 불만족을 언급했다. 게티는9), “4년을 미적거리고 있다”는 말은 리우틴 강령(Riutin Platform)사건으로부터가 아니라 1932년에 형성된 우파들과 뜨로츠키파들 연합의 발견부터인 4년을 의미함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야고다(Iagoda)에 대한 혐의를 의미한다. 서스톤(Thurston), 얀센(Jansen), 뻬뜨로프(Petrov)는 이에 동의한다.10)





사실 흐루쇼프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비밀연설”에서 그 사실을 숨겼다. 흐루쇼프 연설의 뽀스뻴로프-아리스또프(Aristov) 초안에서 “4년”은 1932년 (우파-뜨로츠키파: 역자) 연합의 형성 이후로부터의 4년이라고 직접적으로 진술했다(Doklad Khrushcheva, 125). 뽀스뻴로프와 아리스또프는 "태만한 것을 따라 잡기”(“naverstat' upushchennoe”)라는 말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발명품이었다. 스딸린은 이런 말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이 표현을 차용했지만, (우파-뜨로츠키파: 역자) 연합의 형성 이후 “4년”이라는 사실을 빼버렸다. 뽀스뻴로프 보고서는 “4년”을 숙청의 필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우파-뜨로츠키주파: 역자) 연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역시 빼버렸다(Doklad Khrushcheva, 220). 흐루쇼프와 뽀스뻴로프 보고서의 기본적인 전제의 중요한 부분은 (우파-뜨로츠키파: 역자) 연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딸린과 쯔다노프가 그들의 편지에서 의미했던 “태만한 작업”이, 우파-뜨로츠키파 연합에 대한 조사였고, 그들이 연관된 외국정부 대표자들의 “궁전 쿠데타” 계획과, 또한 그들이 관련된 “테러”(테러 = 암살, 살인)에 대한 조사였던 것은 분명하다. 게티와 저명한 뜨로츠키주의 학자인 피에르 부로우에(Pierre Broue)는 그러한 연합이 정말로 존재했다고 단언한다. 1980년에 개방된 하버드 대학에 있는 뜨로츠키 자신의 문서고에 대한 그들의 연구가 이것을 의심할 나위가 없이 증명한다.11)















14.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의 스딸린의 보고서










흐루쇼프: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스딸린의 보고서, ‘뜨로츠키파들과 다른 표리부동한 세력12)(two-facers)을 해소시키는 당의 사업과 방법들에 있어서 결함’은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할 때, 계급투쟁이 날카롭게(sharpen)되어야 한다는 구실 아래 대규모 테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려는 시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스딸린은 역사와 레닌이 그에게 이것을 가르쳤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중앙위원회 총회에서의 스딸린의 보고서는 어떠한 그러한 이론적인 정당화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스딸린의 말을 심하게 왜곡했다. 스딸린은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할 때, 계급투쟁은 날카롭게(sharpen)되어야 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스딸린이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더 멀리 전진하면 할수록, 우리의 성공이 더 크면 클수록, 분쇄된 착취계급 잔존자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것이고, 더 빨리 더 날카로운(sharper) 투쟁 형태에 의존하려 할 것이고, 그들은 더욱 더 쏘비에뜨 국가에 해를 입히려고 노력을 할 것이며 파멸될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마지막 의존수단으로서 가장 필사적인 투쟁 수단에 매달릴 것이다. 쏘련에 있는 분쇄된 계급의 잔존자들은 고립된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 한다. 그들은 쏘련의 영역 외부에 있는 우리의 적들의 직접적 지원을 받고 있다.13)










이어서 스탈린은 숙청이나 “테러”와 같은 형태가 아닌, (무차별적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역자) 개별적인 대처와 정치 교육을 요구했다. 그러나 “쏘련의 영역 외부에 있는 적들의 직접적인 지원”에 관해 지적을 한 것은 스딸린이 옳았다. 외국의 스파이들이 쏘비에뜨 시민들에게 파괴활동과 스파이활동을 시키고 있었다는 많은 증거들이 이미 수집되었고, 중앙위원회 총회가 있은 후 몇달 후에 더 많은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실 레닌은, 스딸린이 1929년 4월 연설에서 인용했던 구절과 아주 유사한 내용을 예전에 말했다. 심지어 이 연설에서 스딸린이 요구했던 해결책은 경계와 당의 일정한 지위 이상의 모든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교육과정이었다. 대규모 숙청이 아닌 정치교육에 대한 이 요구가 그의 연설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1937년 3월 5일 스딸린은 2-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또다른 최종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총회 폐회연설의 내용은 결코 “대규모 테러정책에 대한 이론적인 정당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스딸린은 “개별적이고 차별화된 접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더 나아가 보고서에서 스딸린은 무차별적인(mass) 접근에 반대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다시 똑같은 것을 강조했다. 쓰달린은, 뜨로츠키파에게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껏해야 수천 명의 당원들이 있고, “과거에 어느 정도 뜨로츠키주의에 공감했던 대략 12,000명의 당원들이 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뜨로츠키주의 신사분들의 전체세력을 본다.14)”고 주장했다.





스딸린은 “대규모 테러정책”을 요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반대하는 강력한 주장을 했다. 유리 주꼬프(Iurii Zhukov) (Inoi Stalin, 360 ff)는 스딸린의 연설은 아주 부드러웠다는데 동의한다. 보고서에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그것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출판되지는 않았다. 주꼬프는 문서고의 복사본으로부터 그것을 인용한다(362-3).





흐루쇼프가 거짓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대규모 숙청”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던 스딸린은 당 내부의 정치교육, 특히 중앙위원회 총회 구성원들과 같은 당의 지도자들에 대한 정치교육을 더 요구했다. 스딸린은, 각각의 당 지도자들이 자신의 대리자를 두 명 뽑고 (업무를 맡기고: 역자) 자신은 4개월간 계속되는 당 교육과정을 밟고, 더 하부의 당의 지도자들은 6개월 과정을 밟을 것을 요구했다.





중앙위원회 총회 구성원들의 많은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쏘련에 가맹한 공화국의: 역자) 지역당의 서기장들과 서기들이었다. 그들은 이 계획을 위협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 실제적으로는,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잠재적인 후임자를 뽑는 것이었다. 이 당 고위 간부자리를 두고 일종의 “경쟁”이 머지않아 있을 것 같았다. 당 비서들이 이 교육과정으로 가버린다면, 그들이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온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사실상, “대규모 숙청”에 착수한 사람들은 바로 ― 우리가 보았듯이 흐루쇼프 자신을 포함한 ― (지방의: 역자) 당의 서기장들과 국가 여기저기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교육과정들은 결코 착수되지 않았다. 1937년 6월 다음 총회에서 서기들은 그 대신에 반동들에 의한 위협과 꿀락(kulaks)이 돌아온다는 위협하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스딸린에게 의지했다. 그들은 수만 명의 인민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총살할 수 있는 특별한 권력을 요구했다. 이 내용은 다음에 더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일찍이 2월 27일 총회에서도 역시 스딸린은 부하린과 리꼬프의 조사에 대한 위원회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스딸린이 작성한 세 개의 보고서 전체를 포함한다 ― 그가 이전에 쓴 총회의 여느 보고서보다 뛰어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매우 부드러운 해결책을 추천했다. 게티와 나우모프(Naumov) (411-416)는 위원회가 투표한 내용을 조사하고, 스딸린의 추천이 모든 것 중 가장 부드러운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 국내 유배. 부디에니(Budienni), 마누일스끼(Manuilski), 쉬베르니크(Shvernik), 꼬사레프(Kosarev), 야끼르(Iakir)와 함께 보고서의 작성자인 예조프(Ezhov)는 모두 “그들을 총살하자는 추천으로 (그들을) 재판에 회부하는”데 투표했다.





스딸린은 처형을 하자고 했고 야끼르는 그것에 반대했다고 부하린의 미망인인 라리나(Larina)의 회고록을 통해 퍼져나간 소문을 조사한 기사에서, 블라디미르 보브로프(Vladimir Bobrov)와 이고르 삐하로프(Igor Pykharov)15)의 자세한 토론을 보라. ― 정확하게 정말로 발생했던 일의 정반대, 하지만 문서들이 쏘련 시대 이후 출판될 때까지 역사적인 “사실”의 지위로까지 상승했던 약간의 반스딸린 “신화”.





쓰달린은, 쏘련이 사회주의로 발전해가는 동안 계급투쟁은 날카로와져야 한다는 관점을 약술했다. 그러나 이것은 1937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28년 4월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총회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 주제는 여기에서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우리가 더 앞으로 전진하면 할수록, 사회주의 건설의 과업이 더 강력하게 발전하면 할수록, 자본가들의 반대가 더 강하게 된다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왜 자본가들의 반대가 더 강하게 되는가? 라는 것이다. (강조는 필자)16)










보르디우고프(Bordiugov)와 꼬즐로프(Kozlov)에 따르면, 이 테제는 1928년 9월 총회에서 발레리안 꾸이비쉐프(Valerian Kuibyshev)가 더 발전시켰다. 그들은 부하린이 1929년 4월 총회에서 그것에 반대했지만 애매한 입장에 있었다고 덧붙였다: 부하린은 계급투쟁이 어떤 시기에는 날카로와진다는 데 동의했지만 ― 그리고 1929년이 그런 시대라는 데 동의했다 ― 그것이 일반적인 원칙은 아니라고 말했다.















15.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 숙청(mass repression)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빠벨 뽀스띠쉐프(Pavel Postyshev)










흐루쇼프:










1937년 2월-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표리부동한 세력(two-facedness)"과 싸운다는 구실로 가해지는 대규모 숙청과 관련하여 설립된 과정의 정당성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했다.





뽀스띠쉬프 동지는 이러한 의문들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혹독한 투쟁의 수년은 지나갔다고 규정했다. 기개를 잃어버린 많은 당원들이 이탈하거나 적진에 합류했다: 건강한 분자들은 당을 위해 싸웠다. 이때는 공업화와 집산화의 시기였다. 이러한 혹독한 세월이 이미 지난 후에, 까르뽀프(Karpov)와 그와 같은 사람들이 적진에 합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까르뽀프는 뽀스띠쉬프가 잘 알고 지냈던 우끄라이나 중앙 위원회의 노동자였다.) 그리고 현재, 증언에 의하면, 까르뽀프는 1934년에 뜨로츠키파에 포섭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1934년에, 당과 사회주의를 위해서 적들과 무자비한 투쟁의 긴 여정을 함께 걸었던 한 정직한 당원이 지금 적들의 진영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어려운 시기를 당과 함께 했던 사람이 1934년에 뜨로츠키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해괴망측한 일이다...17)










1937년 2월-3월 중앙위원회총회(Central Committee Plenum) 내용을 기록한 문서들이 1990년대 중반에 마침내 출판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뽀스띠쉐프(Postyshev)로부터의 인용은 진실하지만, 흐루쇼프의 해설은 고의적으로 그것을 기만한다.





흐루쇼프는 자기가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흐루쇼프는 “많은 사람들이...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라고 말했다. 사실은, 단 한 사람도 정당성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뽀스띠쉐프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다! 흐루쇼프에 의해 인용된 부분이 있은 후에, 이어서 뽀스띠쉐프는 까르뽀프와 적들에 가담했던 사람이면 누구든지 비난했다.





뽀스띠쉐프는 실제로 누구보다도 가장 가혹하게 많은 사람을 축출했고, 이러한 이유로 1938년 1월의 중앙위원회총회(Central Committee Plenum)에서 정치국의 후보위원으로서의 직위를 박탈당했다. “당에서의 대규모 제명사태를 종결하기 위한 희생물로서, 과도하게 경계한 뽀스띠쉐프”를 언급하면서, 게티(Getty)는 그 총회에서 뽀스띠쉐프가 과도한 숙청에 대해 얼마나 엄중한 질책을 받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18) (Getty&Naumov 517;cf533ff.)





유리 주꼬프(Iuri Zhukov)의 분석은 1938년 1월 총회에서 스탈린 지도부가 (지방의 공산당: 역자) 서기장들의 불법적 탄압에 대해 다시금 제동을 거는 시도를 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뽀스띠쉐프가 무고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탄압하면서 추방하고 체포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그 문서는 게티와 나우모프에 의해 번역되어 상세하게 인용되었다.





흐루쇼프는 1938년 1월 총회에 참석했고, 뽀스띠쉐프의 운명과 그가 왜 파면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총회의 참가자로서 흐루쇼프는 “많은 사람들이” 그 숙청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틀림없이 알았어야 한다. 흐루쇼프 스스로가 1937년 2월-3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혹독하고 억압적인 연설을 하였고, 그는 숙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뽀스띠쉐프를 대신하여 정치국 후보위원이 된 것은 바로 흐루쇼프였다.19) 게티와 나우모프에 의하면 흐루쇼프 자신이 바로 “뽀스띠쉐프를 반대하며 강력하게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20)





그러므로, 흐루쇼프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대규모 숙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는커녕, 뽀스띠쉐프는 그 스스로가 가장 극악하게 그것을 실행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그로 인해서 정치국에서 가장 먼저 후보위원 지위를 박탈당했고, 곧 이어 당에서 축출되어 체포되었다. 현재 그 총회 기록의 일부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뽀스띠쉐프의 무법적이고 독단적인 숙청들은 1938년 1월 31일 안드레예프(Andreev)가 스딸린에게 보내는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뽀스띠쉐프는 곧 체포되었고, 후에 한 우익의 음모에 연루되었음을 자백하였고, 다른 서기장들과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포함된 사람들의 명단을 불었다. 블라디미르 까르뽀프(Vladimir Karpov)에 의하면, 뽀스띠쉐프는 몰로또프에게 그의 자백을 확인해 주었다.





위에서 인용된 기록 ―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료 중 일부, 그러나 아직 공개되지 않은 ― 을 보면, 뽀스띠쉐프의 체포와 재판, 처형이 정당함을 믿게 하는 모든 이유가 있다. 그의 처형은 체포된 지 1년 후에 이뤄졌다. 그에 관한 장황한 조사 기록과 재판 기록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이것들 중 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개되지 않고 있다. (3장 끝) <노사과연>






1) 역자 주: repression을 숙청으로 번역했다.






2) 이 내용과 흐루쇼프의 기만의 다른 범주들에 관한 논의를 보려면 10장, “흐루쇼프의 기만의 유형”을 보라,






3) Cr. Reabilitatsiia. Kak Eto Bylo. Dokumenty Prezidiuma TsK KPSS I drugie materialy. V 3-khtomakh. Tom I. Mart 1953-Fevral' 1956. Moscow: Mezhdunar-odnyi Fond Demokratiia, 2000, pp. 317-318. Also at http://www.alexanderyako-vlev.org/almanah/inside/almanah-doc/55752






4) Op. cit. 우리는 역시 “복권” 자료들에 관한 두 개의 더 많은 장을 연구했지만 그들이 20차 전당대회보다도 늦게 그 자료들을 출판했기 때문에, 그 자료들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5) In Izvesyiia TsK KPSS NO. 12, 1989, pp. 82-113.






6) 볼꼬고노프(Volkogonov)의 복사본에 따르면, 스딸린과 몰로또프가 그 결정을 발표하는 데 동의하였고, 그리고나서 예누끼제에게 그것을 돌려주었고, 그는 1934년 12월 2일 날짜로 두 번째로 서명을 했고, 그것을 신문으로 보냈다고 기록했다. See http://chss.monclair.edu/english/furr/research/12_01_34law.pdf






7) 이 모든 참고자료들을 보려면 그로버 퍼의 “Stalin and the Struggle for Demo-cratic Reform" (two parts) in Cultural Logic (2005)를 보라. At http://clogic.ese-rver.org/2005/furr.html and http://clogic.eserver.org/2005/furr2.html






8) Lubianka. Stalin I VChK-GPU-NIKVD. LAnvar' 1922-dekabr' 1936. Mosc-ow: IDF, 2003, Nos. 481 and 482, pp. 575-577. 블라디미르 보브로프와 나는 끼로프 암살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9) Getty, Origins, Chapter 5; Getty, "The Great Purges Reconsidered", Unpub. PhD diss. Boston College, 1979, p. 326.






10) Robert Thurston. Life and Terror in Stalin's Russia, 1934-1941. (Yale U-niversity Press; 1998), p. 35;Mark Jansen, Nikita Petrov. Stalin's Loyal Execut-ioner: People's Comissar Nikolai Ezhov, 1895-1940. (Hoover Institution Press, 2002), p. 54.






11) J. Arch Getty, "Trotsky in Exile: The Founding of the Fourth Internation-al." Soviet Studies 38 NO.1 (January 1986), 28 and n. 19 p. 34; Pierre Broue, "Trotsky et le bloc des oppositions de 1932." Cabiers Leon Trotsky 5 (1980) 5-37






12) 역자 주: 당 내부에 숨어 있는 반혁명 세력을 의미하는 것로 보인다.






13) J. V. Stalin, Mastering Bolshevism (New York: Workers Library, 1937), p.30. At http://www.marx2mao.com/Stalin/MB37.html






14) Ibid, 60.






15) "Iakir I Bukharin: Spletni I Documenty." http://delostalina.ru/?p=333 and e-lsewhere. It is reprinted in Igor' Pykhalov, Velikii Obolgannyi Vozhd' (Moscow: Yauza, 2010), Chapter 6, 355-366.






16) 1929년 4월 22일 AUCP(b)의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있은 스딸린 연설의 부정확한 복사본, in Kak lomali NEP. Stenogrammy Plenumov TsK VKP(b) 1928-1929gg. V 5 tomakh. Tom4. (Moscow; MDF, 2000), p.655.






17) 뜨로츠키와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비밀결사대(Ukrainian Nationalist undergro-unds)가 공모한 우끄라이나의 “Right-Leftist" 조직에 대해 아스란피안(Asranfian)을 심문한 기록을 1937년 2월 2일에 예조프에 의해 스탈린에게 보고한 다음 문헌을 보라. Lubianka. Stalin I Glavnoe upravlenie gosbezopasnosti NKVD 1937-1938. Mo-scow: MDF, 2004(이하 Lubianka 2) No.17, pp. 69 ff. 1937년 1월 14일 아스란피안(Asranfian)의 자백 복사본에서 스딸린은 까르뽀프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며 끝 부분에다가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적었다.






18) Getty, J. Arch and Oleg V. Naumov, The Road to Terror.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이하 Getty & Naumov)., 517;cf. 533 ff. 뽀스띠쉐프(Postyshev)의 축출과 체포를 확인하는 기록은 pp. 514-516에도 나온다.






19) Stalinskoe Politbiuro v 30-e gody. Sbornik dokumentov (Moscow: AIRO-XX, 1995), p.167.






20) Getty & Naumov,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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