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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4)
글쓴이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E-mail send mail 번호 317
날짜 2013-04-03 조회수 2320 추천수 103
파일  1364948430_Ⅴ.hwp

  

























Ⅴ. 지방어들의 발전










인도에서 베다시대 이래 수세기 동안, 여러 언어와 사투리가 사용되었다. 평민들은 다양한 사투리를 썼고 지배자들과 지식인들은 표준 문자언어를 이용했다. 예를 들면, 북인도에서는 몇 개의 프라크리트(Prakrit) 사투리들이 일상생활의 소통을 위해 평민들 사이에 사용되었다. 반면에 산스크리트는 행정 그리고 여러 분야의 지식을 처리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고대 산스크리트 극(dramas)에서, 왕과 귀족들은 산스크리트로 이야기한다. 반면에, 평민과 여성들은 프라크리트 사투리로 이야기했다. 이와 비슷하게 남인도에서도, 여러 종류의 사투리인 (코둠(Kodum)) 타밀어(Tamils)가 평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그런 사투리들 위에는 북인도의 산스크리트처럼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표준어로 센 타밀(Sen Tamil)어가 등장했다.





평민들의 사투리와 엘리트들이 사용한 표준어 사이의 차이점은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존재하는 방식에 있다. 프라크리트 사투리인 팔리(Pali)는 불교가 등장하고 성장하면서 산스크리트와 동등하게 표준 문어체 언어로 발전했다. 베다 문명의 매체가 산스크리트라면 불교의 언어는 팔리어이다.1) 서아시아에서 마호메트주의자들이 도래하고 그들의 왕조가 세워지면서, 페르시아어가 행정과 교육에서 사용되자 아랍어가 평민들과 종교제사장들 사이에서 종교적인 교육언어로 되었다. 인도에 살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고대 시리아어(Syriac)로 말하는 지역에서 이주해 왔는데 바로 그 언어가 종교적 교육언어로 이용되었다.





모든 문어체 언어들은 엘리트 계급의 사회와 문화적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계급사회가 발전하면서 행정체계는 복잡해지고 다양한 영역에서 문화적 삶이 발전함에 따라, 각각의 문어체 언어는 크게 발전하거나 또는 개별 언어의 고유한 특징에 따라 크게 쇠퇴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작품들이 그런 언어들로 쓰여졌는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고전”의 위치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낮은 단계에서 다양한 사투리들은 원형 그대로 그것들이 남아 있었다. 산스크리트 연극에서 엘리트가 아닌 등장인물들은 평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사투리로 말하였다. 소수의 운 좋은 개인들이 지위가 올라 엘리트 계급에 속하게 되어 행정이나 문화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 역시 산스크리트 같은 표준 문어체 언어를 사용했다. 표준 문어체 언어들 사이의 관계는 평민들과 엘리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지표였다.2)





그런 상황의 변화가 대략 12세기에 발생하였다. 몇몇의 사투리가 문자화되면서 표준화되었다. 예를 들면, 브라즈 바카(브라즈 어)3)는 그 당시에 프라크리트 언어의 하나였는데 힌디어로 발전되었다.4) 이와 비슷하게 북인도에서는 마라띠(Marathi), 구자라띠(Gujarati), 벵갈리(Bengali)어 등등이 발전했고 남인도에서는 뗄루구(Telugu), 카난다(Kannada), 말라얄람(Malayalam)어가 발전하였다. 이런 문자 언어들은 북인도의 프라크리트 사투리어와 남인도의 코둠 타밀어들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서 포함되었다. 새롭게 포함된 언어들로 쓰인 문학작품들은 종교적 내용이었다. 그 작품들의 작가들은 평민들이 이해하게끔 그들의 언어로 종교적 믿음들과 신념들을 쓰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앞의 시기에 산스크리트, 팔리, 아랍어, 시리아어로 쓰인 작품들과는 다른 시도였다. 따라서 엘리트 계급의 언어로 쓰인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그러한 새로운 문학 작품들은 쉽고 평민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녹아 있었다. 그런 작가들의 많은 사람들이 소작농, 농부들, 수공예가들 그리고 평민 계층에서 나왔다. 예를 들면, 말라얄람어 작품으로 잘 알려진 툰차투 에즈후타찬5)은 하층 카스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들과 그를 따르는 여타 시(詩)들은 박티(Bhakti)6)문학파에 속했는데 그 당시에 산스크리트로 쓰인 여타의 것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에즈후타찬의 작품들과 쿤찬 남비아르7)와 체루세리 남부티리8)같은 초기 시대의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문체와 양식과 작시법에는 구어체 사투리에 가깝고 산스크리트보다는 께랄라 지역에서 보이는 민속작품들의 요소가 녹아 있었다.





인도의 모든 여타 현대 문자 언어들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그러므로 작품들에서 그것이 쓰인 시기의 특징이 드러나고 그 당시 박티운동(헌신적인 문학운동 시대)의 특성이 드러났던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평민들과 함께 그들의 종교적 교의에 도달하려는 바이쉬나비테9) 시인들이 만든 노력의 결과였다. 박티운동의 영향은 종교영역에 한정되기보다는 대중들의 사회적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특별히, 엘리트와 평민들 사이에 거리감과 사회적 차이가 존재했음에도, 박티운동은 평민들의 언어 − 엘리트와 평민계층을 연결하는 새로운 고리 − 의 발전을 이끌었다.





팔리 문자가 산스크리트와 병행하며 발전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발전 양상이 있었다. 불교의 출현이 인도 사회의 지배적인 상층 카스트제도에 반대하는 인민들의 운동을 상징하였다는 주장은 오늘날 일반적이다. 똑같은 이유로, 프라크리트 언어의 하나였던 팔리는 종교적 교의를 가르쳤던 산스크리트 위치와 같은 지위로 상승하였고 산스크리트처럼 중요한 언어로써 지식을 전파하는 매개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존재하던 계급사회의 토대 아래서 산스크리트에 대항하면서 발전했던 팔리 문자도 “또 다른 산스크리트”로 전락하였다. 박티운동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지방 사투리들은 팔리 문자와 분명히 다른 확고한 기초에 근거하였다. 팔리 문자로 쓰인 철학적 작품들과 달리, 사투리 언어로 쓰인 작품들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평민들의 감성을 반영하였다. 툴시다스10), 카비르11), 투카라마12), 이즈후타찬 같은 시인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평민들의 보배로 추앙받았다. 산스크리트와 팔리 문학과 달리 박티문학 작품들의 광범위한 독자층이 평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이런 변화는 인민들의 사회-문화적 삶의 변화가 만든 결과였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고대와 중세시대의 사회는 대부분 자급자족적인 마을과 가족 중심의 공동체에 기초하였다. 주요 생산물들은 그들 자신의 노동으로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이 생산하였다. 그런 생산물들은 그들 자신들이 소비하였다. 오직 소량의 비율로 마을 내에서 다른 가족들과 잉여 생산물들이 교환되었다. 단지 낮은 비율로 이웃마을들과 잉여 생산물들이 교환되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인도 전체에서 생산된 생산물 가운데 매우 낮은 비율로 생산물이 상품처럼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중세 시대에 일어난 발전들이 연속됨으로써 상품들의 교환범위들이 차츰 늘어났다. 북인도의 무굴제국 아래서 그리고 역시 같은 시대의 남인도에서는 상품교환과 그런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 그리고 그런 활동을 촉진하는 고리 대금업자 같은 새로운 계층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무역업자들과 기업가들이 증가하는 만큼 그들과 관계 맺는 상품 생산자들도 늘어났고 다양한 분야에서 사상의 교류가 일어날 필요성도 늘어나게 되었다. 마을 사이의 자급자족적 관계는 약화되었고 반면에 상호 의존성의 범위는 커졌다. 그러므로 기존의 구어체 사투리뿐만 아니라 엘리트들끼리 독점적으로 소통하는 데 이용되는 언어와 다른 새 표준문자 언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인민들 사이에서 교환이 늘어나는 것에 상응하여 교환을 매개할 무엇인가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생각이 높아졌다. 그런 단계에서조차 행정, 예능, 문학, 문화, 지식을 가르치고 습득하는 데 관여했던 엘리트들은 낡은 표준문자에 의존하였다. 그런 문제들은 발전이 요구되는 새 문자 언어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와 동시에(새 문자 언어가: 역자) 차츰 교육문화 활동에서 표준언어처럼 쓰이자 보다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성격 그리고 최소한 종교적 교육에서 종교이념을 선전하는 데 적합한 언어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다.





영국 지배기 지방어의 발전은 이런 과정이 연속된 결과였다. 영국이 행정체제를 확립해가자, 마을과 마을 사이 그리고 마을 내의 가족들끼리의 내적 관계에 기초한 자급자족적 요소들이 파괴되어 빠른 속도로 상호의존성을 촉진시키고 가속화되었다. 상품들의 교환, 화폐의 사용 그리고 새로운 사회는 과거보다 광범위하고 빠르게 사회적 삶에 영향을 끼치는 그런 요인들에 기초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의 도래와 함께 인도 전체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을 꽁꽁 묶어서 시장에 또는 세계시장에 내모는 일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지배가 확립되고 강화됨으로써, 그런 과정은 계속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치열해졌다.





오래된 많은 구어체 사투리들이 융합되어 새 표준 문자 언어들로 발전된 일은 그런 단계를 의미했다. 박티운동 시기에 쓰인 문학작품들은 종교적 내용에 국한되는 대신에 새 언어들로 쓰인 작품들에는 세속적인 지식영역을 포함하였다. 그들은 새 문학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산업혁명으로 유럽을 깨워 발전시킨 근대과학 지식을 평민들에게 공급하였다. 일반적인 문학과 단편소설, 문예비평 등등, 특히 근대(부르주아) 문학을 포함하여 그런 각각의 새 언어들이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다.





외국 상인들에 의해서 인도의 문화적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포르투갈에서 영국 지배자들로 바뀌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사실, 외국 상인들은 인도의 문화전통, 언어들, 문학들에 대해서 아무런 공감도 보이지 않으면서 인도 사람들에게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강제로 주입하려 하였다. 인도에서 그들의 교육·문화 활동은 그와 같은 노력들의 일부분이었다.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인도의 힌두들과 무슬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다양한 인도 언어들로 근대 과학 지식들과 사전 등등을 제공한 일이다. 선교사들이 도입한 인쇄기술과 선교사들이 출판한 책들은 근대 산문체 언어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영국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영국 지배자들이 학교 교육의 시작을 결정하고 통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생산해내는 여타의 교육기관들을 설치하자 과학과 근대지식을 포함하는 교과서들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의도가 근대화된 인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인도를 최대한 착취하려면 인도를 과학기술이 낙후되게끔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영국의 착취를 교활하게 지속하기 위해서, 영국 지배자들은 고대인도 문명과 문화의 토대를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은 인도의 새 세대들에게 근대(자본주의) 문명과 문화를 주입하였으며 대중들에게 최소한의 문화와 문명을 퍼뜨렸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근대 산문체 발전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의 한 부분으로, 단편 소설, 소설, 문학비평, 과학기술서적들이 출판되었다. 박티운동 기간 발전된 근대 인도언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박티운동 기간에 보였던 양상과는 사뭇 달랐다.





결론적으로, 인도 전체에 영어와 문화적 지배권을 확립하여 인도를 말라 죽게 만들려는 영국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주도적으로 지방어들을 발전시켰다. 영국은 영어에 굴종하고 종속되는 언어로써 지방어를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런 지방어들의 발전은 영국지배에 대항하면서 발전했던 자유운동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사과연>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1) 역자 주: 석가모니는 대중들이 알기 쉽게 팔리어로 설법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석가모니의 뜻을 따라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팔리어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초기 불교의 경전들은 모두 팔리어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개된 불교경전은 팔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자로 번역된 것을 받아들였다. 그런 과정에서 본래의 석가모니의 참 가르침이 평민들과의 삶과 유리된 채 우리나라에서는 귀족들의 종교로 발전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최초의 불교는 카스트에 묶인 사회신분체제를 반대한 개혁적이고 민중지향적 이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지방 사투리였던 팔리어로 설교하고 팔리어로 경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불교계에서는 팔리어로 쓰인 초기 경전연구를 등한시 하고 있는데, 참 불교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도 모르는 무지몽매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한국의 불교계는 기득권 유지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연구하여 석가모니의 참다운 가르침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2) 역자 주: 저자가 표준어와 지방어를 사용하던 계층의 불화를 설명하는 이유는 고대와 중세 인도사회의 계급분화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인도는 마을 공동체주의적인 자급자족 봉건제를 유지하면서도 비교적 뚜렷한 지배와 피지배자 계급사회를 유지하였다. 사회신분에 따라 표준어와 사투리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런 계급으로 분화된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3) 편집자 주: Braj Bhakha. 현재 우타르 프라데시에 있었던 북인도 브라즈 지역의 언어.





4) 편집자 주 : 힌디어는 북인도의 대표언어이다. 오늘날 인도의 공식 국어(National Language)로 채택되어 있다.





5) 편집자 주 : Thunchattu Ezhuthachan. (1495-1575). 16세기 인도 시인으로 말라얄람어의 아버지라 불린다. 에즈후타찬이라는 이름은 그의 카스트인 선생(schoolmaster)을 뜻하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6) 역자 주: 박티(Bhakti)는 헌신(devotion)을 뜻하는 말이다. 인도의 중세 시대에 이슬람들이 도래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토착 종교인 힌두신들을 경배하며 헌신하자는 대중운동 일어났는데, 이런 경향의 작품들을 박티문학이라 한다.





7) 편집자 주: Kunchan Nambiar. 18세기에 활약한 말라얄람어 시인. 에즈후타찬이 상당히 진지한 시인이었다면 그는 풍자적인 시들을 썼다. 말라얄람 풍자시의 대가.





8) 편집자주: Cherussery Nambuthiri. (1375-1475). 신실한 케랄리테(Keralites) 사용자들이 크리쉬나를 찬미하는 데 쓰이는 가타(Krishna Gatha)의 저자.





9) 편집자주 : Vaishnavites. 비쉬누 신을 경배하며 그의 10개의 화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던 이들.





10) 편집자 주: Tulsidas. (1543?~1623) 북인도 힌디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성자이자 시인.





11) 역자 주 : Kabir. (1440-1518). 브라만 집안에서 과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무슬림 직공의 가정에서 양육되었다. 이런 성장의 배경으로 그는 카스트제도에 비판적이었으며 이슬람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카비르는 힌두교의 조잡한 다신교를 거부하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융합하려는 종교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종교개혁사상은 시크교의 창시자인 나나크(1469-1538)에게 영향을 주었다.





12) 편집자 주: Tukaram. (1608-1649) 떠돌이 마라티어 시인으로 마라티어 언어구사가 가장 훌륭한 작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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