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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이론 >
제목 <기획번역>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1)
글쓴이 그로버 퍼(Grover Furr) E-mail send mail 번호 316
날짜 2013-03-06 조회수 3467 추천수 116
파일  1362538904_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1).hwp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편집자 주: 그로버 퍼(Grover Furr)는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몽클레어 주립대학(Montclair State University)의 교수이며, 러시아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 책은 러시아어로(2007년), 영어로(2011년) 출판되었다. 흐루쇼프(Nikita S. Khrushchev)가 1956년 2월 25일 비밀연설에서 스딸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이나 베리야(Beria)에 대해 했던 “폭로(Revealation)”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혔다. 2011년 영어 개정판을 번역하여, 이번호부터 본지에 전권을 연재할 예정이다. 부산지회 연구팀에서 수고해 주시기로 했다. 감사드린다. 각주는 별도의 표시가 없으면 모두 원주이다.]















1956년 2월 25일의 쏘련공산당 (CPSU) 20차 전당대회에서 행한 니끼따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악명 높은 “비밀연설”에서 스딸린 [그리고 베리아(Beria)]의 범죄에 대한 모든 “폭로”가 거짓임을 임증할 수 있는 증거.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거짓말이고, 그 한가지에 대해 나는 진실임을 입증할 수도 없고 거짓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로버 퍼(Grover Furr)










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July 2011






























감사의 말과 헌정사




















모스끄바에 살고 있는 편집자, 번역가이자 나의 친구인 블라디미르 L. 보브로브(Bladimir L. Bobrob)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결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구하기 어려운 쏘련에 관한 자료들과 여러 가지 책들과 논문들을 구하는 데 꾸준히 도움을 베풀어 주신 몽클레어 주립 대학(Montclare State University)의 해리 스프라규(Harry. S. Sprague) 도서관의 도서대출 사서인 케빈 프렌데개스트(Kevin Prendergast), 아서 허드슨(Arthur Hudson)과 세르지오 페레이라(Sergio Ferreira)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  *  *















이 책을 나의 아들 조셉 퍼(Joseph Furr)에 대한 추억에 바친다: 그는 나의 아들이자 친구이고 숙련된 디젤 트럭 정비공이자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서론





위조의 흐루쇼프파: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















1956년 2월 25일 행해진 니끼따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비밀연설” 5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예측 가능한 논평들이 쏟아졌다. ≪런던 통신, London(UK) Telegraph≫은 사설에서 그 연설을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이라고 불렀다. 같은 날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사설에서, 흐루쇼프의 전기를 쓰서 2004년 전기문학 분야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윌리암 타우브만(William Taubman)은 그 연설을 기념행사에서 “축하를 받을 만한” “위대한 행동”이라고 불렀다.1)





얼마 전 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을 다시 읽었다. 1962년 ≪뉴 리더(The New Leader)≫의 특별판으로 출판된 비밀연설 판본의 HTML판이었다.2) 그 연설을 읽는 동안, 나는 저명한 멘세비끼 학자인 보리스 니꼴라예프스끼(Boris Nikolaevsky)가 흐루쇼프의 연설 중에서 몇가지는 거짓말이라는 자기의견을 흐루쇼프의 연설에 대한 주석에서 표현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일찍이 그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에, 특히 베리아(Beria) 집단의 가면을 벗기고 난 후에, 중앙위원회는 이 집단에 의해 날조된 일련의 사건들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결과 스딸린의 그릇된 행위와 관련된 야만적인 제멋대로의 행위에 대한 아주 흉한 그림이 폭로되었다.










이 단락에 대해 보리스 니꼴라예프스끼는 주8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흐루쇼프의 이 말은 그다지 진실은 아니다:





스딸린의 삶에서 마지막 기간 동안에 있은 그의 테러 행위들에 대한 조사는 베리아에 의해 시작되었다... 스딸린의 고문집행실에 대한 조사를 거의 시작한 인물로 그 자신을 지금 서술하고 있는 흐루쇼프는, 실제로는 스딸린이 죽고 난 후에 처음 몇 달 동안 그 방을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제 아치 게티(Arch Getty)가 그의 권위 있는 저작인 ≪대숙청의 기원(Orgins of Great Purges)≫에서 아주 유사한 내용을 썼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흐루쇼프의 설명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불일치는 베리아와 예조프(Ezhov)에 대한 분명한 혼란을 포함하고 있다. 예조프의 이름이 때때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행들과 억압에 대한 책임은 베리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리아는 1938년까지 단지 지역공산당의 비서였다. 게다가 많은 보고서들은, 베리아가 1938년 예조프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경찰의 테러는 진정되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설명에서 그저 편리한 대로 예조프를 베리아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무엇을 감추려고 했는가? 어쨌든 흐루쇼프와 당의 지도자들이 최근에 베리아를 처형한 것은 베리아를 편리한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베리아를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한 것은, 그의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확실히 의심을 하게 만든다. (p. 268 n. 28: 강조는 그로버 퍼)










그래서 이전 쏘련의 비밀문헌자료에서 나온 많은 서류들이 빛을 본 지금, 진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스딸린에 관한 흐루쇼프의 “폭로” 중에서 더 많은 것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아주 다른 것을 발견했다. 흐루쇼프가 스딸린과 베리아에 대해 “폭로”한 구체적 언급 중에서 진실로 판명이 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확인을 하기 위해 조사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흐루쇼프는 단지 스딸린과 베리아에 대해서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 그는 사실상 거짓말 이외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비밀연설” 전체가 위조들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타우브만이 흐루쇼프를 향해 칭찬했던 “위대한 행동”이다. (더 짧은 글이지만, 흐루쇼프의 저속한 연설을 축하하기 위해 쓴 타우브만의 ≪뉴욕 타임즈≫ 특집기사에 있는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한, 독립된 기사가 틀임없이 있을 것이다.3)





학자인 나에게는 이 사실이 번거롭고 심지어 달갑지 않은 발견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흐루쇼프의 “폭로” 중에서 25% 내외가 위조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나의 연구는 놀라움뿐만 아니라 확실히 약간의 의심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그 내용을 독자들이 수용하고 칭찬해 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퍼의 훌륭한 연구 작업”, 기타 등등이라고.





그러나 흐루쇼프가 “폭로”한 모든 내용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 그리고 나의 두려움은 2007년 12월에 출판된 이 책의 러시아어판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철저히, 조심스럽게 증거를 인용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흐루쇼프 연설 전체가 진실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은, 스딸린 시대의 쏘련 역사의 전체 범주, 이 연설이 기초했었던 전체 범주에 도전하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 ―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 은 완전한 사기인가? 이러한 생각은 너무 소름끼쳤다. 누가 그러한 결론의 논리가 요구할, 쏘련, 코민테른, 심지어 세계 역사의 정정을 위해 씨름하기를 원하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내가 “장부를 조작했다”고, 진실을 덮었다고 ― 내가 흐루쇼프를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고발했듯이, 나도 사실을 위조하고 있다고 ― 믿는 것은 대단히 쉬울 것이다. 그리고 특히 내가, 스딸린을 인정받는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의 작업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될 수 있을 것이고, 문제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연구자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사상을 지지하는 것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때, 비록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에 대해 객관성이 부족하지 않나하고 의심하는 것은 신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연구가 스딸린과 베리아에 관한 흐루쇼프의 폭로 중에서 25%가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나는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사를 할 수 있었던 모든 “폭로”가 거짓이었기 때문에, 증거에 대한 입증의 의무는 학자인 나에게는 보통의 수준보다는 훨씬 더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번 연구에서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책을 구성했다.





전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다.





1장에서 9장까지로 구성된 첫 번째 부분에서, 나는 흐루쇼프가 그의 보고서에서 작성하고, 소위 “폭로”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진술이나 주장들 각각을 연구하였다. (약간은 앞서 나가기 위하여, 나는 내가 61가지의 주장들을 확인했다고 기록했다.)





서류자료가 공개된 상황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던 “비밀연설”에서의 인용문을 적고, 그후에 각각의 “폭로”를 적었다. 이 증거의 대부분은 1차 출처로부터의 인용문들로 제시된다. 오직 몇 가지 경우에서만 2차적 출처를 인용하였다. 제20차 전당대회에서의 흐루쇼프의 연설이 가지고 있는 허구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이전 쏘련의 문헌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고,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를 제공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배치한다면, 긴 자료의 인용문들이 읽기에 어려울 것 같아서, 본문에는 간단하게 증거를 언급했고, 부록의 각 장에 분야별 일차출처(때때로 2차적인 출처)에서의 완전한 인용문을 따로 두었다.





10장에서 12장까지의 두 번째 부분은, 이 연구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몇 가지 결론에 대한 논쟁과 방법론적인 성격의 문제에 할당하였다. 나는 흐루쇼프가 사용한 속임수 방법이나 거짓말의 유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연설 속에서 이름이 언급된 몇몇 당지도자들의 “복권”자료에 대한 연구결과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1차 자료에 관한 출처들을 다루었다. 각주나 참고문헌을 다는 전통적이고 학문적인 기록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어디서라도 일차자료들을 인터넷상으로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이용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모든 URL 참고문헌들은 이 책의 영어본이 완성되어졌을 때 유효하게 되었다.





몇 가지 경우에, 주요한 일차자료들을 인터넷에 Adobe Acrobat(PDF) 포맷형식으로 내가 올려 놓았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인용문이: 역자) 몇 페이지에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 hypertext markup language(HTML)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서툴거나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러시아에서 초안상태의 이 글을 읽어주었고, 나에게 비판의 도움을 베풀어주었던 나의 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당연히 그들의 최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남아 있는 실수와 단점들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는 없다.










모스끄바에 살고 있는 나의 훌륭한 동료이자, 학자, 연구가, 편집자, 번역자, 러시아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한 블라디미르 엘보비치 보블로프(Vladimir L'vovich Bobrov)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그의 영감, 지도, 모든 방면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이 책을 떠맡았을 수도, 더구나 완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서평과 비판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다.





제1장. 





개인숭배와 레닌의 “유언”















1. 개인숭배















흐루쇼프 :










동지들! 이전의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CC/CPSU) 전체회의에서처럼, 제20차 전당대회 중앙위원회 보고서에서, 전당대회 대의원들의 많은 연설에서 개인숭배와 그것의 해로운 결과들에 관한 아주 많은 말들이 나왔다.





스딸린이 죽고 난 후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한 사람을 떠받드는 것과 그 사람을 신의 능력과 동등한 초인적인 특징을 소유한 초인으로 바꾸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의 정신에 허용할 수 없고 이질적인 것이라고 간결하게 지속적으로 설명하는 정책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은, 그의 행위에 있어서 절대로 옳다.





한 사람에 대한 그런 믿음, 특히 스딸린에 대한 그런 믿음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 사이에서 배양되어져 왔다.





이 보고서의 목적은 스딸린의 삶과 활동에 대한 완전한 평가가 아니다. 스딸린의 공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충분한 만큼의 책들, 소책자들, 연구들이 그가 생존해 있을 때 이미 쓰여졌다.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데에서, 내전에서,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데에서, 스딸린의 역할은 널리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현재 우리는 당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매우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스딸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성장해왔는지, 어떤 특정한 단계에서 당의 원칙, 당내 민주주의, 혁명적인 법률의 엄수 등을,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타락의 전 과정으로 빠져들게 한 원천이 되어버렸던 개인숭배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성장해왔는지.










이 연설은 스딸린이 저질렀던 범죄와 악행에 대해 흐루쇼프가 했던 “폭로”중의 하나로서 종종 언급되어진다. 스딸린의 모습을 둘러싼 “특정인물에 대한 숭배”나 “개인숭배”라는 쟁점이 이 연설의 핵심 주제였다. 흐루쇼프는 “특정인물에 대한 숭배” 자체의 존재를 “폭로”하지는 않았다. 그 존재가 그저 당연히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4). 그것은 스딸린이 죽고 난 후 그 이래로 최고간부회의에서 계속 토론되어왔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연설의 시작에서 스딸린이 개인숭배를 장려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그러했다. 이 연설 전체를 통해 흐루쇼프는 ―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 그가 증명해야 했던 것, 그러나 증명할 수 없었던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스딸린이 독재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이러한 개인숭배를 그 자신이 장려했다는 것. 사실 연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루쇼프는 스딸린이 개인숭배를 어떻게 장려했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도 인용할 수가 없었다. ― 추측컨대 그가 심지어 단 하나의 그런 예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흐루쇼프의 연설 전체는 바로 이러한 거짓 위에서 작성되었다. 그가 했던 “폭로”의 나머지들도, ― 흐루쇼프에 의하면 ― 스딸린이 그의 주위에 창출하고 장려했던 “개인숭배”에 대한 설명의 범주 안에서 짜 맞추어져 있었다.





이 연구는 스딸린과 연관된 흐루쇼프의 모든 폭로가 사실상 거짓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먼저 흐루쇼프의 설명틀 그 자체 ― 스딸린에 의해 개인숭배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소위 스딸린의 “범죄”의 나머지 부분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저질러졌을 수 있다는 생각 ― 이것은 그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스딸린은 흐루쇼프가 스딸린의 탓으로 돌린 범죄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딸린은 그의 주위에 개인숭배를 만들지도 않았다. 사실 증거는 그 반대의 내용을 증명해주고 있다: 오히려 스딸린은 그의 주위에 구역질나는 개인숭배가 만들어지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개인숭배를 스딸린이 반대한 것은 위선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스딸린은 권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가 진정으로 개인숭배가 멈추어지기를 바랐다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 주장이 증명해야 하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강력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스딸린이 “개인숭배”에 의해 터무니없게도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역시 가정한다: 쏘련의 모든 인민들과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는 것.















1. 개인숭배에 대한 스딸린의 반대










스딸린은 오랫 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향한 칭찬과 아첨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개인숭배”에 대한 레닌의 평가에 동의했고, 레닌이 했던 것과 똑같이 개인숭배에 대한 내용을 기본적으로 말했다. 흐루쇼프는 레닌을 인용했지만, 스딸린이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스딸린이 했던 말의 긴 인용문 목록은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에 대해 스딸린이 반대했다는 증거를 여기에서 보여준다.5) 스딸린과 개인적인 접촉을 했던 사람들의 거의 모든 회고록은 스딸린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찬사를 반대했고, 심지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더 많은 일화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스딸린이 개인숭배를 반대한 것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이 덧붙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루지아 공산당의 전(前)서기장이었고 나중에 흐루쇼프에 의해 처벌을 받고 강등되었던 아까끼 므겔라제(Akakii Mgeladze)의 최근 사후에 출판된 회고록 ≪내가 알고 있었던 스딸린(Stalin, Kak Ia Ego Zna, 2003년)≫에서, 작가는 스딸린이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를 혐오했다고 자주 언급한다. 1980년대 사망한 므겔라제는 스딸린이 1949년 70회 생일을 특별잔치로 열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가와, 스딸린의 생일잔치가 전 세계 공산당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공산주의운동을 통일하는 데 봉사할 수 있다는 당의 다른 지도자들의 주장 때문에 마지못해 그것에 동의했다고 상술한다.





스딸린은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다른 중앙위원회 정치국 지도자들이 1937년 모스끄바를 "스딸린의 선물”(“Stalinodor")이라고 다시 이름 짓는 것을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쏘련의 영웅이라는 상을 거절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가 결코 받지 않았던 그 상이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에 놓인 베개에 고정되어 박혀버렸기 때문이다.















2. 1953년 4월, “개인숭배”6)와 관련해서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총회를 소집하려고 했던 말렌꼬프(Malenkov)의 시도










스딸린이 죽고 난 후, 말렌꼬프(Malenkov)는 개인숭배의 해로운 효과들을 다루기 위하여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총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말렌꼬프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을 비난할 만큼 매우 정직했고, 그들 모두에게 스딸린이 “개인숭배”의 무용성에 대하여 그들에게 자주 경고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이 시도는 최고간부회의에서 부결되었다; 특별총회는 결코 소집되지 않았다. 특별총회가 소집되었다면,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말렌꼬프의 제안을 지지하였든지 지지하지 않았든지 간에 ― 이점에 있어서 증거는 불충분하다 ― 흐루쇼프는 논쟁에 확실히 연루되어 있었다. 흐루쇼프는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일찍이 다루고자 했던 말렌꼬프의 시도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렌꼬프의 시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말렌꼬프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부인하였다.





3. 1953년 7월 총회 ― “개인숭배”7)를 반대했다는 혐의로 공격을 받은 베리아(Beria)










1953년 7월 부재 중인(아마도 그는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베리아(Beria)를 공격하기 위해 소집된 총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개인숭배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베리아를 비난했다. 이 총회와 베리아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의 음모에 있어서 흐루쇼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가 베리아를 공격하는 것과 베리아를 격하시키는 무기로서 “개인숭배”(공세: 역자)를 지지하는 것에 그가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누가 “개인숭배”를 장려했는가?










“개인숭배”의 근원에 대한 연구는 이 저작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파들이 스딸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시작했거나, 자신들의 적대활동을 숨기기 위해 열정적으로 “개인숭배”에 참여했다는 좋은 증거가 있다. 피고인들 끼리의 대면(Ochnye Stavki)에서 마음을 놓고 있는 순간에, 부하린은 ≪이즈베스티아(Izvestiia)≫에서 스딸린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작업을 이전의 반대자들에게 재촉했다는 것과, 부하린 자신이 “개인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또 다른 반대파인 칼 라덱(Karl Radek)은 1934년 1월 1일 판 ≪이즈베스티아≫에 실리고, 나중에 분리되어 소책자로 출판된 이상하고 초현대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축가 (Zodchii Sotcialisticheskogo Obshchestva)≫라는 “개인숭배”의 완전히 부풀려진 예를 처음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흐루쇼프와 미꼬얀(Mikoian)










“스딸린 격하”운동을 선동하고 열심히 고무했던, 스딸린시대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출신의 주요인물들인 흐루쇼프와 미꼬얀(Mikoian)은, 1930년대에 가장 열심히 “개인숭배”를 장려했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행동들이 진심이었다면, 우리는 흐루쇼프와 미꼬얀은, 스딸린을 외경심을 가질 정도로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가정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많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므겔라제의 회고록은, 그것을 버리는 것이 유행이 된 후에도 오랫 동안 스딸린에 대한 찬양을 계속 견지했던 당 지도자의 한 예를 보여준다.





그러나 흐루쇼프와 미꼬얀은 “개인숭배”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을 소집하려 했던 말렌꼬프의 시도가 좌절되었던 그 시기 동안인 1953년 3월 최고회의 간부회의 토론에 참여했다. 베리아가 스딸린에 대한 “개인숭배”(공격: 역자)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비판받고 있는 동안인 1953년 6월에 그들은 당의 지도자들이었다.





흐루쇼프의 “폭로”가 사실상 거짓이다는 것과 함께, 이러한 상황들은 어떤 다른 작업이 틀림없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레닌의 “유언”















흐루쇼프 :










쏘련과 당의 미래를 걱정하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스딸린에 대한 정확한 성격묘사를 하였고, 그가 극도로 무례하여 동지들을 적절한 태도로 대하지 않고, 변덕스럽고, 권력을 남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스딸린을 서기장 직위에서 이동시키는 문제를 고려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22년 겨울, 레닌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서기장이 된 후에, 스딸린 동지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을 축적했고, 나는 그가 이러한 권력을 항상 주의깊게 사용할지 어떨지를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기 위해 잠시 인용을 중단하겠다. 흐루쇼프는 여기서 스딸린이 “그의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레닌이 제기했다고 말한다. 사실은, 레닌은 단지 “스딸린이 항상 주의깊게 그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확신할 수 없다”고 썼을 뿐이다. 레닌의 글에는 스딸린의 “권력남용”을 비난하는 어떠한 단어도 없다.





흐루쇼프는 계속한다:










이 편지 ― 당의 역사에서 레닌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문서 ― 는 20차 당대회에서 대의원들에게 배포되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읽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한 번 이상 재차 읽을 것이다. 여러분은 당과, 인민과, 국가와 당의 미래 정책 방향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분명한 표현들이 담긴 레닌의 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말했다:










스딸린은 지나치게 무례하다. 우리 가운데에서,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기꺼이 용인될 수 있는 이러한 결점이, 서기장직을 유지하기에는 용인될 수 없는 결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지들에게 스딸린을 서기장 직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뽑을 것을 제안한다. 무엇보다도 단 한 가지 자질에서 스딸린과 다른, 즉 더욱 관용적이고, 더욱 충실하고, 더욱 친절하고, 동지들에게 더 사려 깊은 태도를 가지고, 보다 덜 변덕스러운 성격 등을 지닌 사람으로.










레닌의 이 기록은 13차 당대회에서 스딸린을 서기장 직위에서 보직이동하는 문제를 논의했던 대의원들에게 알려졌다. 대의원들은 스딸린이 레닌의 비판적 평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레닌이 심각하게 걱정했던 그러한 결점들을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의 직위를 유지하는 것에 찬성을 표명했다.





동지들! 당대회는 새로운 두 개 문서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이 문서들은 레닌의 “유언”에서 이미 윤곽이 그려진 스딸린의 성격을 입증한다. 이 문서들은 끄루쁘스까야(Nadezhda Konstantinova Krupskaia)가 그 당시 정치국의 수장이었던 까메네프(Kamenev)에게 보낸 편지와 레닌이 스딸린에게 개인적으로 보냈던 편지였다.





나는 이제 이 기록들을 읽을 것이다:










레프 보리소비치!(LEV BORISOVICH ― 까메네프의 본명: 역자)










의사의 허락 하에 레닌의 구술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편지가 짧다. 어제 스딸린은 나에게 몹시도 무례하게 화를 터뜨렸다. 나는 당에서 신참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당의 어떤 동지로부터도 무례한 말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었다. 당과 레닌에 관한 일들은 스딸린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매우 소중하다. 나는 현재 최대한의 자제력이 필요한 상태이다. 레닌과 논의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해 내가 어떤 의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무엇이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스딸린보다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과 훨씬 더 가까운 동지로서 당신과 지노비에프를 나는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지독한 독설과 협박으로부터, 나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무례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을 당신에게 간청한다. 통제위원회(Control Commission)의 만장일치의 결정이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스딸린이 나를 협박하며 감정을 격발시키는 구실을 찾는 것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어리석은 싸움을 하고 있을 힘도,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리고 나는 생활인이고 나의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다.










끄루쁘스까야










나제즈다 꼰스딴띠노프나(끄루쁘스까야: 역자)는 이 편지를 1922년 12월 23일에 썼다. 두 달 반 후, 1923년 3월 레닌은 다음의 편지를 스딸린에게 보냈다:










스딸린 동지에게:





사본: 까메네프와 지노비에프에게










친애하는 스딸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무례하게 전화 호출을 했고, 그녀를 무례하게 질책했다.





그녀가 당신에게, 들은 말을 잊을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노비에프와 까메네프가 그녀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다. 나에 반하여(against) 행해지고 있는 일들을 쉽게 잊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 아내에게 반하여 하고 있는 일들을, 나에 반하여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말들을 철회하고 사과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신중히 판단할 것을 요청한다.










레닌 드림





1923년 3월 5일










(장내는 술렁였다.)










동지들! 나는 이 문서들에 대해 내 견해를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 글들은 분명하게 사실을 드러낸다. 레닌의 생애 동안 스딸린이 이런 방식으로 처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레닌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당이 표방한 대의를 위해 활발하게 싸운 것으로 존중받고 잘 알려진 나제즈다 꼰스딴띠노프나 끄루쁘스까야에게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딸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을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그의 성격은 점차적으로 진행되었고, 지난 수년 동안에는 절대 참을 수 없는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문제의 문서는 “레닌의 ‘유언’으로써 당의 역사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이 용어를 뜨로츠끼에게서 가져왔는데, 뜨로츠끼는 1934년의 자신의 책 제목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반대파들 사이를 제외하고는, 볼셰비키 당내에서 그 문서가 그렇게(“유언”으로: 역자) 알려진 적은 결코 없었다. 실제로 바로 ‘레닌의 유언’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역사는 있다 ― 그것은 흐루쇼프에게는 잘 반영되지 않았다.





1925년 뜨로츠끼는, 맥스 이스트만(Max Eastman)의 책 ≪레닌의 죽음이후(Since Lenin Died)≫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에서, 레닌이 “유언” 또는 “유서”를 남겼다는 이스트만의 거짓말을 분명하게 부인했다. 중앙위원회 정치국(Poliburo)의 다른 위원들과 함께 뜨로츠끼는 레닌이 그런 것을 남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레닌이 이런 문서들을 일종의 유언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더니, 1930년대에 뜨로츠끼는 생각을 바꾸어 “레닌의 유언”에 대해 다시 쓰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는 스딸린에 대한 그의 당파적 공격을 목적으로 그러했다. 그러므로 흐루쇼프는, 더욱 가능성이 높게는 그의 협력자들 중의 한 명이 뜨로츠끼로부터 이런 용어를 취했음에 틀림없다 ― 비록 그들이 공식적으로 그렇게 인정한 적은 없지만.





흐루쇼프 연설의 다른 부분은 뜨로츠끼의 저술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뜨로츠끼는 모스끄바 재판을 날조된 계략으로 보았다 ― 이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그는 재판에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공동피고인이었기 때문이다. 모스끄바 재판의 첫 번째 피고인이었던, 1938년 3월 ‘부하린’ 재판의 아끄발 이끄라모프(Akbal Ikramov)는 20차 당대회 이후, 1957년 5월까지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8), 흐루쇼프는 비밀연설에서 지노비에프, 까메네프, 그리고 뜨로츠끼파의 사형집행을 개탄하였다. 1936년, 그들이 자백한 범죄에 대해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처벌을 받는 것은 그리 가혹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흐루쇼프의 개탄은 최소한 그들이 무죄임을 암시하는 선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흐루쇼프는 엄청난 범죄들에 대한 책임이 스딸린 혼자에게만 있다고 간주했고, 그 범죄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탈선시킨 것에 대해 스딸린 혼자만을 비난했는데, 이러한 흐루쇼프 연설의 전체적인 취지는 뜨로츠끼가 스딸린을 악마로 묘사한 것과 동일하다. 뜨로츠끼의 미망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비밀”연설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고인이 된 그녀의 남편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요청했다.9) 나딸리아 세도바-뜨로츠까야(Natalia Sedova-Trotskaia)가 “비밀”연설이 있고 그것을 곧바로 알았다는 사실은, 뜨로츠끼파가 여전히 쏘련공산당의 고위층에 정보제공자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한다.





1923년 3월 5일에 레닌이 스딸린에게 보낸 편지가 위조된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가 있다. 발렌띤 사하로프(Valentin A. Sakharov)는 모스끄바 대학 출판사에서 이런 논지의 주제로 중요한 학술서적을 출판했다. 그가 쓴 여러 글들과 그 책의 비평들에 그의 대체적인 주장이 요약되어 있다.10)





그 당시 스딸린 자신과 그 편지를 접한 모두가, 그것을 진짜라고 믿었다는 데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설령 진짜라 하더라도, 1923년 3월 5일에 레닌이 스딸린에게 보낸 편지는 ― 종종 그렇다고 전제되어 왔지만, 그러나 ― 레닌과 스딸린과의 불화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2주가 채 못 되어 레닌의 아내 나제즈다 꼰스딴띠노프나 끄루쁘스까야(이 서신교환에서는 “울리아노바 동지”로 불렸다)는, 레닌이 다음과 같은 말을 그녀에게 끈질기게 요청했다는 사실을 스딸린에게 전했다. 레닌이 자신을 위해, 자신의 극심한 고통을 끝내줄 수 있도록, 스딸린에게 청산가리 캡슐을 구해 놓을 것을 약속받으라고. 스딸린은 동의했다. 하지만 후에 3월 23일, 중앙위원회 정치국(Poliburo)에 “그것이 아무리 인간적이라 해도” 그런 일을 하기 위해 그것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고 스딸린은 보고했다.





레닌에 대한 매우 적대적인 전기를 쓴 디미뜨리 볼꼬고노프(Dimitrii Volkogonov)가 이 자료들을 인용했다.12) 그것들의 복사본들은 의회도서관에 있는 볼꼬고노프의 논문에 존재한다. 그것들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레닌의 비서 중 한 명이였던 리디아 포띠에바(Lidia Fotieva)는, 1922년 레닌이 자신의 병이 어떤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청산가리를 달라고 말할 것이라고 기록했다.13)





그러므로 비록 레닌의 1923년 3월 5일의 편지가 원본이라 하더라도 ― 그리고 사하로프의 연구는 여기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 레닌은 여전히 스딸린을 신뢰하고,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는 불화가 전혀 없었다.





볼꼬고노프(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12월 24일 아침에 스딸린, 까메네프 그리고 부하린은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레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돌보고, 병의 향후 경과를 전망하고, 가능한 최대한 안정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다음이 결정되었다.





1.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하루에 5~10분 동안 구술할 권리가 주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서한의 형식이어서는 안 되고,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이러한 기록에 대한 답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접견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2. 블라디미르 일리치와 정치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친구들과 가족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흥분시키거나 심사숙고할 소재들을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14)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 ≪레닌≫의 저자)에 의하면, 레닌은 아래의 날에 심각한 “사건들”(아마도 뇌졸중이었을 것이다)을 겪었다.










○ 1922년 5월 25일 ― “심각한 뇌졸중”(p. 443);





○ 1922년 12월 22~23일 ― 레닌은 “신체의 오른쪽을 전혀 쓸 수 없었다”(p. 461)





○ 1923년 3월 6~7일 밤 ― 레닌은 “몸의 오른쪽 상지와 하지를 전혀 쓸 수 없었다”(pp. 473~4).










12월 18일 공산당 정치국은 스딸린에게 레닌의 건강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고, 어느 누구도 레닌과 정치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지했다. 12월 22일, 끄루쁘스까야가 이 규칙을 위반했고, 스딸린은 이에 대해 질책했다. 바로 그날 밤에 레닌에게서 심각한 뇌졸중이 일어났다.





1923년 3월 5일, 끄루쁘스까야는 레닌에게 스딸린이 지난 12월 그녀에게 무례하게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격분하여, 유명한 편지를 스딸린에게 썼다. 끄루쁘스까야의 비서 V.드리조(V. Dridzo) ― 이 사건에 대한 그녀의 글은 1989년에 출판되었다 ― 에 의하면 이런 방식이었다.










이제,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의 이름과 스딸린의 관계가 몇몇 출판물에서 더 자주 언급되는 이 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데즈다와의 대화에서 스딸린이 무례했고, V. I 레닌이 그 무례함에 대해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스딸린에게 쓴 것이, 왜 하필 두 달 후에 일어났는가?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가 그것에 대해 나에게 종종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일이 어떻게 해서 생긴 일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23년 3월이 시작하자마자 그 일이 있었다.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와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가 전화기로 갔다(레닌의 아파트에는 전화기가 항상 복도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전화했오?’ ― ‘스딸린이예요, 그와 나는 화해했어요.’ ― ‘무슨 뜻이요?’





그리고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는 스딸린이 그녀에게 전화했었을 때 일어났던 모든 일을 ― 그녀에게 무례하게 이야기했고, 그녀를 통제위원회에 출석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는 ― 말해야 했다.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는, 모든 것이 정리되었고 그녀가 그 일에 대해 잊었기 때문에 신경쓰지 말아달라고 레닌에게 말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완강했다. 그는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에 대한 스딸린의 존경받지 못할 행동에 대해 매우 기분이 상하여, 1923년 3월 5일,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에게 보내는 복사본과 함께, 스딸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글을 썼다. 스딸린은 사과해야만 했지만, 그는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했으며,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15)










다음날 레닌은 더 심한 발작을 했다.





끄루쁘스까야가 정치적 사안들 ― 당원으로서 어떤 것을, 그녀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 을 레닌과 논의한 후, 레닌은 매번 짧게 발작을 했다. 이런 일이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다. 왜냐하면 레닌의 주치의가 어떤 일에 대해 레닌을 흥분시키지 말 것에 대해 특별히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레닌의 마지막 두 번의 심각한 발작을 재촉했던 것은 바로 끄루쁘스까야의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오랫동안 레닌의 비서로 근무했던 리디아 포띠에바(Lidia Fotieva)가 말했다;










나데즈다 꼰스딴띠노프나(끄루쁘스까야)는 그녀가 했었어야 하는 일을 항상 수행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레닌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레닌과 모든 일을 공유하는 데 익숙했다. 심지어 그녀가 절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레닌과 모든 일을 공유했다... 예를 들어, 스딸린이 전화상으로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는지를 왜 레닌에게 말했을까?...16)










그런데 1932년 스딸린의 부인이 자살했을 때, 끄루쁘스까야는 스딸린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는 1932년 11월 16일 ≪쁘라브다(Pravda)≫에 출판되었다.










친애하는 이오시프 비사리오니치(Iosif Vissarionych)(스딸린의 본명: 역자)에게:










요즈음은 웬일인지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당신의 손을 잡길 원하도록 만든다. 당신과 친밀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일리치가 병환 중일 때, 그의 사무실에서 당신과 나눈 대화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그것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우정을 표한다. N. 끄루쁘스까야17)










이 편지는 1922년 12월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이 있은 후에도, 스딸린이 레닌의 부인과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여준다.





스딸린은 레닌 가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아주 커다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작가인 알렉산더 벡(Aleksander Bek)은 리디아 포띠에바의 회고록을 썼는데, 회고록에서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은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들은 스딸린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스딸린은 위대하였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마리아 일리니치나(Maria Il'inichna)〔울리아노바(Ul'ianova), 레닌의 여동생〕가 나에게 말했다: ‘레닌 다음으로, 스딸린은 당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이다... 스딸린은 우리의 권위자였다. 우리는 스딸린을 사랑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종종 말했다’: ‘나는 단지 레닌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벡의 글에서, op. cit)










흐루쇼프는, 진행되고 있었던 일들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스딸린을 “나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단지 노력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스딸린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를 전후상황에서 떼어내 다루었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가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중앙위원회가 레닌의 건강을 위해 레닌을 정치적인 주제들로부터 확실히 떼어놓도록 할 것을 스딸린에게 지시했던 사실을 흐루쇼프는 빼버렸다. 이 금지는 명시적으로 “친구들”과 “집안 사람들(domestic persons)”을 언급했다. 레닌의 비서들은 당중앙위원회의 지시를 어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집안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특히 레닌의 여동생과 그의 아내인 끄루쁘스까야를 포함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었다. 스딸린은 끄루쁘스까야가 이러한 격리지시를 어겼기 때문에 그녀를 비판했다.





레닌의 글에 대해 1923년 3월 7일 있었던 스딸린의 회답이나, 나중에 레닌이 스딸린에게 독약을 요구한 내용도 흐루쇼프는 역시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빼버림으로서, 흐루쇼프는 1923년 3월 5일 레닌이 스딸린에게 글을 보내게 되었던 사건을 초래한 전후상황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스딸린과 레닌의 관계를 고의적으로 왜곡했다.





흐루쇼프는 레닌의 여동생인 마리아 일리니치나의 설명도 빼버렸다. 레닌의 비서였던 볼로디체바(Volodicheva)와 포띠에바, 끄루쁘스까야의 비서였던 드리조(Dridzo)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찾아지지도 않았다. 레닌의 마음을 분개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당중앙위원회의 금지조항을 어겼던 끄루쁘스까야의 행동들이, 레닌의 두 번에 걸친 발작의 원인이 충분히 될 수 있었다는 증거들을 빼버렸다. 스딸린과의 관계가 깨져버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2주 뒤에 레닌은 자신이 독약을 요구하면 독약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비밀스런 요구를 스딸린에게 맡길 만큼 유일하게 스딸린을 믿었다. 마지막으로 흐루쇼프는 끄루쁘스까야와 스딸린의 화해도 빼버렸다.





흐루쇼프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스딸린을 나쁘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흐루쇼프는 실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관심이나 혹은 전후상황 속에서 그 사건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1장 끝) <노사과연>






1) 흐루쇼프 전체 글은 On-line에서 이용이 가능하다.





http//chss. movclair. edu./ furr/research/kl/speech .html





2) 니끼따 흐루쇼프, The New Leader. “스딸린 시대의 범죄”. 아나톨 셔브(Anatol Shub). 보리스 니꼴라예프스끼(Boris Nikolaevsky)주석: New York. The New Leader, 1962.





3) 몇 가지 예: 타우브만(Tabvman)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백만 명”은 아닐지라도 많은 죄수들을 풀어준 사람은 흐루쇼프가 아니라 베리아였다. 그가 축하했던 “해빙기”는 스딸린 말기시대 동안 시작되었다. 흐루쇼프는 그것을(해빙기: 역자) 오로지 “우파들”의 반스딸린 자료로 제한적으로 활용했다. 스딸린은 1952년 10월에 은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차 당대회는 그것을 허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타우브만은 흐루쇼프가 자기는 억압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딸린의 (은퇴: 역자) 촉구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스딸린지도체제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억압에 대한 “할당 몫”을 요구했다. 타우브만은 “어쨌든 흐루쇼프는 그의 인간성을 보존했다”고 주장한다. 그 반대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흐루쇼프가 더 폭력배, 살인자 같이 보인다.





4) 역자주 : 흐르쇼프는, 구체적 증거도 없이 개인숭배가 있었다고 단지 전제하고 시작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5) 부록 1에서 1장과 관련된 인용을 보라. 스딸린은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긴 인용이 있다.





6) 역자 주: 이 부분에서 “개인숭배”의 의미는 “흐루쇼프가 개인숭배를 구실로 스딸린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7) 역자 주: 이 부분에서 “개인숭배”의 의미도 주6)과 같이 흐루쇼프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8) 이끄라모프(Ikramov)는 1957년 6월 3일 복권되었다: 다음을 보라. Rehabilitasiia. Kak Eto Bylo Febral's 1956- nachalo 80-kb godov.Moskva: "Materik", 2003. (hereafter RKEB 2), 851.





다음을 보라.





http//www.memo.ru/memory/communarka/chapter 5.htm.





9) Aimermakher, I., V.IU. Afiani, et al. eds. Doklad Khrushcheva o kul'te lichnosti Stalina na XXs"ezdt KPSS. Dokumentry. Moscos: ROSSPEN, 2002.(이후로 Doklad Khrushcheva) Razdel IV, Dok. No. 3, p. 610. 이 공식적 문서들의 편집자는 편지가 2월 25일 또는 그 이후에 씌어졌다고 언급한다; 흐루쇼프연설과 관련이 있고, 같은 날 전달되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세도바의 편지가 2월 16일 당대회에서 미꼬얀(Mikoian)의 연설에 답하는 의도로 씌어졌다는 것이다. 20차 당대회의 최고간부회(Presidium)에 보내는 세도바의 편지 복사본이 다음 주소에 있다.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sedovaltr022856.jpg





10) 11) V.A. Sakharov, "Politicheskoe zaveshchanie"V.I. Lenina: real'nost' istorii i mify politiki. Moscow: Izdatel'stvo MGU [Moscow State University], 2003.





12) 1923년 3월 23일 공산당 정치국에 보낸 스딸린 편지의 복사본이 다음 부분에 있다: D. A. Volkogonov, Lenin. Politicheskii. Kn. Ⅱ. Moscow: Novosti, 1994, pp. 384-385.





스딸린의 같은 편지는 주석의 형태로 다음에 있다. http//www.hrono.ru/libris/Stalin/16-67. html.





이책의 부록 1장에도 있다.





13) 이 기록은 1991년 출판되었고 아래의 장소에서 자문을 구할 수 있다.





http//www. hrono.ru/libris/Stalin/16-9. html





14) Volkogonov, Dmitri. Stalin. Vol.Ⅰ. M. 1992, Ch. 2, par. 156; 다음에서 인용.





http//militera.lib.ru/bio/volkogonov_db/02.html.





15) V. S. Dridzo, "Vospominania." Kommunist 5(1989)





16) L.Fotieva. 인용은 A. Bek, “K istorii polednikh  leninskikh dokumentov. dokumentov. Iz arkhiva pisatelia, besedovavshego v 1967 s lichnymi sekretariami Lenina." Moskovskie Novosti No.17, April 23, 1989, pp. 8-9.





17) 인용은 E. N. Gusliarov, Stalin v zhizni. Sistematizirovannyi svod vospominanii sovremennikov,dokumentov zpokhi, versii istotikov. Moscow: OLMA - Press, p. 237. Online at http//www.stalin.su/book.php?action=page&fr_6&fr_book_id+1 역시 인용은 Novoe Vremia NO. 46, Nov. 1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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