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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현장 >
제목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
글쓴이 다함께성폭력사건피해자지지모임 E-mail send mail 번호 231
날짜 2013-07-15 조회수 2568 추천수 129
파일  1373861634_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방운동의 현주소.hwp

  

























지난해 11월, 한 여성활동가가 ‘노동자연대 다함께의 성폭력 방임을 폭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다함께’는 일대 논란에 휩싸였다. 피해자가 다함께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운동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만류했다고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본 ‘다함께’ 회원들이 집단적으로 덧글이나 SNS로 온갖 인신공격과 비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피해자의 사생활을 거론하거나 음해세력 운운하며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는 글들도 여럿 있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가해자 가운데 ‘다함께’ 회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보다 더 많은 충격과 논란을 불러온 것은 사건이 폭로되자 수많은 ‘다함께’ 회원들이 피해자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종 ‘진상이 불분명하다’면서도 사실상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몰아갔으며, ‘진상에 대해 이견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진상 조사를 하고 사건을 해결하자’는 제안에는 ‘다함께와 관계없는 사건’이라며 무시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피해자에 대한 비방글을 올리고, 주위 사람을 위협하고, 심지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등 집요한 괴롭힘을 이어갔다. 사건 폭로 후 7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진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른바 ‘자유로운 분위기’와 개방주의의 함정










사태의 발단이 된 사건은 2011년 7월 서울 시립대 교지 ‘대학문화’의 MT에서 일어났다. 피해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대학문화’의 편집장과 ‘다함께’ 소속 편집위원, 그리고 피해자 셋이 있던 상황에서, 편집장이 피해자에게 ‘자위해본 적이 있느냐’며 희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자위해본 적 없으며, 하고 싶지도 않다’고 대답하자 편집장은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보여주겠다’며 자기 휴대폰으로 여성이 자위를 하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을 틀었다. 피해자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 있던 ‘다함께’ 소속 편집위원이 ‘성포비아다. 너도 이런 것 좀 알아야 한다’고 나무랐다. 편집장은 계속해서 피해자에게 모욕적인 질문을 던지며 성적으로 희롱했고, 옆에 있던 편집위원은 거기에 맞장구치며 동조하였다.





편집장은 이후 ‘평소에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고 다녀서 가르치려고 보여준 것이다’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말을 바꾸어 ‘본래 성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는 평소 ‘대학문화’ 편집장이 성적으로 불쾌한 언설을 자주 했고, ‘다함께’ 소속의 편집위원은 여기에 동조했다고 진술했다.





편집장의 첫 번째 해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의 말이 근거없는 비방이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피해자의 성생활이 어떠했든 그것은 그녀를 성희롱해도 된다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해명에는 보다 주목할 부분이 있다. ‘대학문화’ 내에서 일상적으로 성적인 농담이나 언설이 이루어졌으며 편집장이 장난삼아 동영상을 틀었다는 지점에서는 양측의 진술이 일치하는 바, 결국 이것은 해석의 문제가 되는데, 이 ‘해석’의 차이는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 때문이다.





성을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처럼 취급하고, 성적 욕망을 금기시하고,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고는 성적 억압을 유지하는 기제 가운데 하나이다. 성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영역이며, 성을 둘러싼 감정이나 성적 가치관, 성에 대한 발화나 성적 행위 및 다른 모든 성적 사고와 실천들은 순전히 자연적이거나 개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른 모든 실천이 그렇듯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형성되며 해당 사회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성을 둘러싼 억압이 철폐되지 않은 해방은 결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성을 열등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진지한 사고나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거나 성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논의를 봉쇄하는 것은 해방을 단념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성적 보수주의는 실제로 이러한 결과를 낳아왔다.





그러나 이것이 성에 대해 아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거나, 더 나아가 무조건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곧 성적 자유와 해방으로 통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인지 아니면 권력을 더 많이 가진 자와 종속되고 억압된 자가 존재하는지, 사람들이 가진 성적 욕망이 어떤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그것을 추구하는 말이나 실천이 인간을 더욱 주체화하고 해방시키는지 아니면 파편화시키고 예속시키는지를 따지지 않은 채 금기 타파와 자유만을 외치는 것은 가장 반동적인 자유주의가 성적 영역에 응용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의 실천적 귀결은 사회적 구조를 사상한 자유주의의 폐단을 생각하면 이미 명백해진다. 성은 일견, 특히 공식적 영역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터부시되는 화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공식적 영역에서 남성은 성에 대해 많이 알고 말하도록 허용되거나 적지 않은 경우에 장려되는 반면, 여성은 성적 욕망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것을 혐오하도록, 혹은 최소한 성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과거와 달리 여성들의 성적 욕망이나 언행에 대해 사회가 점점 관대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격차는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실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할 수 있는 능력은 종종 ‘남성다움’을 인정받는 한 가지 방식이 된다. 성적 욕망의 성격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남성은 지배적․공격적․주도적, 여성은 피동적․소극적으로 다르게 사회화되는 것이다. 이런 기반에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성찰하지 않은 채 성적 욕망을 무비판적으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전횡을 가능하게 할 위험이 크다.





더구나 인간의 성조차 일상적으로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다. 포르노그라피나 성매매뿐만 아니라, 여성 아이돌이 성적 매력을 어필함으로써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나 여성의 몸을 끼워넣음으로써 구매욕을 촉발시키는 광고 역시 성상품화의 스펙트럼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언뜻 이것이 성에 대한 제약 없는 접근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상품으로서 성을 소비하는 것은 한 인간을 (구매력을 가진) 다른 인간의 한낱 소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인간 소외의 한 양상으로, 편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해방적이지 않다.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내가 보여주겠다.’라는 편집장의 짐짓 자신만만한 계도나, 이것을 거부하는 피해자에 대한 ‘성포비아’라는 야유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은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모두 답답하고 억압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계몽되어야 한다’는, 성적 개방성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이다. 이번 사건에서 그것이 드러난 양상은 누가 봐도 잘못됐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열했지만, 욕망의 성격에 대한 고찰은 사상한 채 모든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곧 진보이고 해방이라는 사고방식은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로 여기저기에 침투해 있다. 이번 사건을 단순히 문제 있는 개인 몇 명의 실수라고 넘겨버려서는 안 될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폭력에 대한 ‘다함께’의 이중잣대: 행동의 원리인가 선전 슬로건인가










그러나 이 일련의 사태에서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문제를 대하는 ‘다함께’의 태도였다. 문제가 폭로되자마자 ‘다함께’의 회원 수 명이 인터넷에 피해자를 공격하는 글이나 덧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여기에 수십 명의 회원들이 ‘좋아요’를 누르는 등 동조를 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함께’에서는 예외적으로 피해자에게 동조적이었던 한 회원은 피해자가 SNS에 올린 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규율분쟁조정위에 제소당했다. 그러나 정작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후 결성된 피해자 지지모임은 ‘다함께’에 진상 조사와 사건 성격 규정에 대한 토론을 거쳐 필요한 조치들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자고 수차례 공문을 보내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함께’는 시종일관 똑같은 답만 보내왔다. 이 사건은 개인들 간의 일이므로 ‘다함께’와 사건을 관련짓는 것은 명예훼손이며, 법정 소송이 진행 중이므로 진상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진상조사를 하자는 요청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했다. 학교 상담소에서 진상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으나, ‘다함께’ 소속의 가해자는 진술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절차를 유보할 것만 요청했다. 사유는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자, 가해자 측에서는 상담소의 절차가 불공정했기 때문에 응하고 싶어도 응할 수 없었다는 적반하장식의 답을 전해왔다. 요컨대, ‘다함께’는 결국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진상을 밝히기 위한 시도는 모두 거부하거나 사보타주해온 것이다.





게다가 ‘다함께’는 단순히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거나 회원들의 악플달기(?)를 방관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가해자 측이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다함께’의 유명한 여성운동가가 임신출산결정권네트워크 등의 연대체에서 사건 이야기를 꺼내면서 피해자의 사생활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거나, 가해자 대리인을 자처하는 ‘다함께’ 회원1)이 ‘자꾸 까불던데 한 번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려 스토커로 몰아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등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등, 조직적인 합의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괴롭힘이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건 폭로 이후로 오래 이어졌다.





한 대학에서는 중앙대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치 탄압을 연상시킬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피해자 지지모임에 속한 회원이 학교 총학생회실에 있는 인쇄 설비를 이용해 ‘다함께’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출력해 붙였는데, 이 대학의 ‘다함께’ 회원들이 총학생회장에게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니 누가 자보를 인쇄해갔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총학생회장이 거절하자, 이들은 ‘그러면 인쇄해간 시간을 알려달라. CCTV를 돌려보겠다’고 채근했다. 총학생회장이 ‘그것은 학교 본부에서 본부를 비판하는 자보를 붙인 학생을 징계하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 당신들이 하고 있는 대응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거부하자, ‘다함께’ 회원들은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고 아는 사람이 부탁해서 알아본 것이다’라고 둘러대었다. ‘다함께’가 ‘아는 사람이 부탁하면’ 무엇이든 해주는 생각없는 사람들의 조직이 아니라면 셈이 뻔한 거짓말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다함께’가 정치조직이 아니라 친목회라면, ‘다함께’의 항변은 충분히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다함께’는 해방사회를 말하는 정치조직이며, 조직원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도 않는 것은 그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가령 ‘다함께’의 조직원이 파업파괴에 가담하거나 기독교의 반동성애 캠페인에 동참했다면, 이는 분명히 조직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의 성은 본디 남성이 마음대로 폭력을 가해도 되는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면, 조직원에 의한 성폭력은 조직이 표방하는 기치와 노선에 배치되는 행동으로써 분명히 제재 대상에 해당한다. 하물며 ‘다함께’는 3.8 여성의 날 행사 공동기획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성폭력 문제나 낙태, 피임약 문제 등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정치적 행동에 참여해온 단체였다.





사실, 대외적으로는 ‘다함께’ 역시 이런 전제를 인정하고 발언해 왔다. 가령 몇 년 전에 있었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 대해, ‘다함께’는 민주노총의 사건 은폐와 2차 가해를 규탄하는 강경한 어조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항의한 바가 있었다. 이 때 ‘다함께’는 성폭력이 개인들 간의 문제라거나, 아직 진상이 가려지지 않았다는 따위의 이유를 들어 비판과 해결 촉구를 유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함께’의 이런 이중잣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성의 해방을 소리높여 외치고, 여성의 자유와 성의 평등을 둘러싼 투쟁을 앞장서서 주도해온 단체가, 다른 단체에서 발생한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던 단체가, 정작 회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는 그릇된 조직보위의 전형으로 제시해도 좋을 만큼 무책임하고 기만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다함께’는 진정 여성 해방을 지지해온 것일까? 동기의 순수성이나 감정적 열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묻는 것은 ‘다함께’가 어떤 차원에서 여성주의를 지지해왔는지이다.





어떤 노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그것을 조직 외부의 대상에게 강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변혁은 외부적인 투쟁을 필요로 하듯 또한 내부적인 투쟁을 필요로 한다. ‘다함께’가 표방해온 여성주의의 노선이 아무리 근본적이고 급진적2)이라 해도, 그것이 성적으로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습성을 저절로 바꾸어주지는 않으며, 그런 점에서 조직이 표방하는 기치와 조직원들의 실천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이 불일치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지난하고 소모적인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 실천을 노선에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어떤 기치도 행동의 원칙이자 새로운 질서의 기초가 아니라 그저 대중에게 도덕적으로 호소하기 위한 선전용 슬로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다함께’는 사회 주류적 성인식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조차 실시하지 않았으며, 내부에서 성폭력이나 성차별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고 시정하기 위한 매뉴얼도 전혀 구비하고 있지 않았다. ‘다함께’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노선과 배치되는 언행들이 회원들 간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도 상호비판이나 내부토론, 규율분쟁조정위원회의 개입 등을 통해 평가와 변화를 모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요컨대 ‘다함께’에 있어 성평등이나 성해방이란 대중을 동원하기 좋은 의제일 수는 있어도, 내부에서 학습하고 실천해야 할 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용인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지책










그렇다면 ‘다함께’ 이외의 운동사회 성원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다른 조직의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일까? 혹은 운동사회 전체의 명예가 더럽혀질 수 있으니 침묵하는 것이 옳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변혁을 표방하는 조직이 정치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올바른 관점과 실천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며, 지속적으로 잘못을 반복하는 상대에게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것이 정치조직의 책임이다.





그리고 운동사회 전체적으로 이러한 태도가 자리잡는 것이야말로, 운동사회 내부의 성폭력을 비롯한 폭력이나 차별을 막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일 것이다. 성폭력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일인 한 어떤 제재도 실효성 있게 집행될 수 없으며, 반대로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비호하는 행동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질 때 이것은 어떤 제재보다도 더 강하게 성폭력이나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물론 이런 말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고민들이 산적해 있다. 가령, 운동사회에서 아직도 성폭력이나 2차 가해가 용인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합의가 부족한가? 여성주의는 왜 ‘다함께’의 내부적인 원칙으로 실천되지 못했는가? ‘다함께’의 구성원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왜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가? 단순히 ‘다함께’가 유별나게 무책임하고 비민주적인 조직이어서인가, 아니면 ‘다함께’ 한 조직으로 국한할 수 없는 더 넓은 범위의 문제가 존재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지점까지 들어갔을 때, 우리는 비단 ‘다함께’를 비판하는 데서만 그칠 수 없으며, 운동사회 일반의 문제점들에 대한 질문들까지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는 결코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현재 내세우는 요구는 사건에 대한 공식적 인정과 사과, 피해자에 대한 비방과 폭력 중지, 반성폭력 내규와 교육 실시,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제재조치이다. 모호할 것도, 비현실적일 것도 없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한 조치들이다. 지난한 싸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운동사회가 성폭력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시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단호함과 약간의 관심을 보여준다면 말이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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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 말해, 가해자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는 ‘사건에 전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다함께를 탈퇴한다’고 밝혔으며 현재 ‘다함께’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사실 ‘다함께’가 번역·출판해온 소책자나 서적들의 논조를 보면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만한 부분이 많다.















보스코프스키 이런 사건을 두고도 다함께 홈페이지나 기관지 사이트 레프트 21 어디에도 이 소식은 나오지 않더군요... 자신들의 행동을 취급하지 않은 기관지와 홈페이지... 헛 웃음만 몇 가득입니다. 아마 '다함께' 함구공격을 작정이라도 한 것인지...
그리고 이런 사건은 다함께의 모조직 영국 사회노동자당(SWP)에도 있어서 몇 개월여를 끌기도 했습니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국제사회경향(IST)는 소소한 차이 정도를 제외하면 행동은 붕어빵이라는 생각밖엔 ...
2013-07-18 21: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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