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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현장 >
제목 지키지 못한 약속을 위해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기아차 비정규직 故 윤주형 조합원
글쓴이 연정|르뽀작가, 자료회원 E-mail send mail 번호 219
날짜 2013-02-12 조회수 2257 추천수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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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1월 28일 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윤주형 씨(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사내하청분회 조합원)가 기아차 화성공장 인근 자취방에서 목을 매었습니다. 목을 매고 얼마 뒤 자취방에 찾아간 노동자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그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2월 4일 현재 故 윤주형 조합원이 세상을 떠난 지 8일차가 되었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고 있지 못합니다.





고인의 죽음 직후,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는 고인과 함께 복직투쟁을 해온 ‘기아자동차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이하 ‘기아 해복투’)’와 협의 하에 책임자 처벌과 원직복직 등의 요구안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례를 주관하기로 한 기아차지부 화성지회는 원직복직이 아닌 고인의 사망일인 1월 28일 자로 신규채용 하겠다는 회사 측 안으로 합의를 하고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기아 해복투’는 반대 입장 표명을 하고, 다른 부분은 다 포기할 테니 고인의 염원이었던 원직복직이라도 관철된 후에 장례를 치르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는 2월 1일 장례 강행 입장을 표명하였고, 여기에 반대하는 기아자동차 원하청 노동자들과 투쟁사업장 노동자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장례식장 염습실 앞에서 연좌하며 원직복직을 요구하였습니다. 2월 1일 장례식장에 온 화성지회와 사내하청분회 상집간부들은 연좌하고 있는 ‘기아 해복투’를 포함한 기아차 노동자 등과 장시간 동안 토론을 하였으나 결국 물리력을 행사하며 장례를 강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장례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주인 기아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김수억 씨가 화성지회 상집간부들에 의해 사지가 들렸다가 바닥에 내동댕이 처져 실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김수억 씨는 화성지회와의 논의 과정에서 하루만 더 노력해 달라는 애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연좌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우리한테 이러는 걸 회사에다가 하라’며 항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장례 강행에 실패하자 화성지회는 장례식장에서 철수하였습니다. 화성지회는 철수하는 시점인 이날 오전 10시까지 장례식장 이용료를 지불하고, 그동안 들어온 조의금과 방명록을 갖고 철수하였습니다. 이후, 새벽에 화성지회가 사내 상조회를 이용하여 몰래 염습실에 들어가 염과 입관을 한 사실이 드러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현재 故 윤주형 조합원의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기아 해복투’를 포함한 기아차 원하청 노동자들과 연대단위들은 어렵게 다시 장례식장 재계약을 하고, 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故 윤주형 조합원이 있는 화성 중앙병원 장례식장(사당역 4번출구 경진여객, 수원역 32번·33번·35번·38번)에 조문을 부탁드립니다. 매일 저녁 7시, 기아차 화성공장 북문에서는 고인의 넋을 기리고,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립니다. 화성지회가 그동안의 조의금을 모두 가져가 버려 당장 빈소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투쟁기금으로 함께 해주실 분은 기아해복투 후원계좌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마을 금고 90021-4386-6421 예금주 김수억)





힘겨운 해고생활을 했던 故 윤주형 조합원이 원직복직 하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을 독자들께 전하고자 2012년 7월 17일 재능교육지부 시청사옥 앞 농성장에서 진행했던 재능교육투쟁 거리 강연, <기아차 해복투 용감한 4총사 “이동우는 우리 조합원이다”> 내용을 나눕니다. 故 윤주형 조합원은 ‘해고란 (우리들에게는)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 미래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2.3차 하청 노동자와 계약직의 노동조합 가입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노동조합에게 이것을 요구하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철학과 관점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 故 윤주형 조합원은 조합원들이 어깨 당당하게 펴고 일할 수 있는 신나는 현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를 지키기 위해 꼭 현장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본 글을 쓰는 데에 꼬뮌영상네트워크의 영상 기록을 참고하였습니다. 소중한 영상 기록을 남겨주신 꼬뮌영상네트워크에 감사드립니다.   — <필자주>










* * *










해고란 (우리들에게는)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 미래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의미)










“기아자동차 1차 하청 해고노동자구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기아 해복투에서는 해고자들 가운데서 가장 “경박한” 그런 해고잡니다. 저는 해고노동자 윤주형 입니다. 반갑습니다.”










2012년 7월 17일 저녁, 재능교육지부 시청사옥 앞 농성장. 재능교육투쟁 거리 강연, <기아차 해복투 용감한 4총사 “이동우는 우리 조합원이다”>에 공동 강사로 참여한 윤주형 씨는 자신을 ‘경박한 해고자’라고 소개한다. ‘기아 해복투’는 매주 수요일마다 ‘용감한 형제들의 외부세력되기’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비정규직·노조탄압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이하 ‘공동투쟁단’)’ 활동 등 연대투쟁을 하고 있다. 이 날, 시종일관 재밌게 이야기 하려던 윤주형 씨의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윤주형 조합원은 자신의 아픔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밝고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는 ‘해고 되고 난 다음에 해고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는 솔직한 심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해고란 우리들에게는)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미래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마디로 정의를 해봤는데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실은 어디 가나 언제든 해고가 예약이 되어 있고, 자신의 당당한 요구를 이야기 하게 되면 회사에서 잘 잘리죠. 고만고만한 사업장에서 일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못하는 처지가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비정규직의 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2012년 7월 17일 저녁, 재능교육지부 시청사옥 앞 농성장. 재능교육투쟁 거리 강연, <기아차 해복투 용감한 4총사 “이동우는 우리 조합원이다”> 故 윤주형 조합원이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해고노동자는 불쌍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시선이 힘들게 했어요





기아차 정규직 해고자인 이상욱 씨가 사회를 보고 비정규직 해고자인 윤주형, 이동우, 김수억 씨가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 날의 거리강연 주요 컨셉은 자신들이 해고된 이유와 복직이 안 되고 있는 이유, 오랜 시간 복직이 안 되면서 받고 있는 상처 등이다. 이상욱 씨는 자신들이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하면, 여기 있는 연대동지들을 통해 자신들이 치유를 받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노동자 윤주형이 해고되고 나서 가장 참담하고 힘들었던 것은 해고노동자는 도와주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 해고노동자는 뭔가 많이 부족한 존재라고 하는 현장의 시선과 돌봄들이 저를 굉장히 불편하게 하고, 저를 너무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는 2009년 공정변경 시 노사합의에 따라 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며 사내하청분회의 지침을 받고, 그 지침을 완강하게 사수하는 현장투쟁을 하다가 2010년에 해고가 되었다. 하지만, 정규직 노동조합이 그 투쟁을 허락해준 적이 없다는 이유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기아차지부로부터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로 인정받지 못해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도 불승인이 나서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각종 민형사상 고발을 당하고 벌금이 나왔는데,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그는 그 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기소중지가 되고 수배 상태가 된다.










“어디를 갈 때마다 누군가 불심검문을 하지 않을까? 이런 것들 때문에 조마조마 했어요. 경찰들하고 맞닥뜨려서 싸울 때도 예전 같으면 (경찰이) 방패를 들어도 물러서지 않았을 텐데, 싸우게 되면 어느 순간 멈칫 하는 순간이 생기고. 내가 멈칫하는 걸 느낄 때마다 너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너무너무 비참했던 기억이 있어요.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동지들이 ‘우리가 모아서 벌금을 내줄게’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돈을 너무너무 받기가 싫은 거예요. 나는 현장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투쟁하는 동지로 서고 싶은데, 이 사람들은 계속 도와줘야 되는 동지로 보는 것이죠. 그것이 너무나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정당한 조합활동으로 인한 해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조합으로부터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와주겠다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지만, 윤주형 조합원은 그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정말 받고 싶었던 건 기아자동차지부의 ‘정당한 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 인정’과 신분보장기금, 법률비용 지원 등 공식적이고 정당한 지원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해고를 선택했나?










윤주형 씨는 2012년에서야 기아차 해고자 후원회 ‘희망’의 지원으로 벌금을 정리하고, 동료들의 집을 떠돌면서 생활하던 것을 정리하고 비로소 공장 앞에 월세방을 얻게 된다. 후원회 ‘희망’이 만들어지고 나서 윤주형 씨는 처음으로 생계비를 받게 된다. 그는 현장에서 자신이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이 현장에 언제 들어갈지 알 수 없고, 이 투쟁을 승리할지 알 수 없지만. 작지만 그래도 이 현장에서 윤주형이 남아서 꼭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더라. 현실에서 느끼는 참담함과 미래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희망. 윤주형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그래서 현장에 남아서 해고자 동지들과 투쟁을 하고 싶고요.”










그는 벌금 내지 못한 이야기가 창피하지만, 많은 동지들 앞에서 얘기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음이 좀 더 편해질 거 같다고 했다. 2008년에 해고된 정규직 노동자인 이상욱 씨는 자신이 해고를 선택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조립팀에서 일하던 그는 카렌스 단종으로 진행된 사 측의 강제 전환배치에 반대하다가 해고가 되었다. 당시, 기아자동차지부(김상구 지부장)는 회사와 일방적인 전환배치에 합의서를 작성하고, 이상욱 씨는 여기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자동차 라인에서 기계 밑에 기어들어갔죠. 그래서 설비가 섰습니다. 차가 내려오면 저는 죽겠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국장이 와서 지금 나오면 살고 안 나오면 죽는다라고 최후통첩을 저한테 하더라고요. 그때 안 나왔습니다. 그리고 해고되더라고요.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나는 왜 해고 됐을까? 그때 내가 해고를 선택했나?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서 물음표가 있습니다.”










그때 두 명이 같이 기계 밑에 들어갔는데, 소속된 현장 조직이 없는 그만 해고가 되었다. 그는 요즘 해고자로서 무엇을 해야 될까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는 화성공장 성폭력대책위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에 화성공장 여성의날 기획사업을 통해 여성노동자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그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남성중심적인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고충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동우가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인 이유










“최근 많은 집회 장소에서 윤주형 동지가 앞장서서 굉장히 많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제가 한번 외쳐볼 테니까 동지들 함께 따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동우는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다!”










이상욱 씨가 구호 선창을 하자 청중들이 “이동우는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을 외친다. 










“방금 외친 이 구호가 윤주형 개인의 주문이 돼버렸습니다. 왜 주문이 됐을까? 그게 어떤 의미일까? 왜 계속해서 이동우 동지 이름을 팔면서 돌아다니고 있는지 그 얘기를 들어봐야 될 거 같아요. 소상히 밝혀주십시오.”










사회자 이상욱 씨가 다시 윤주형 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2012년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함께 서울에서 평택까지 걸었던 ‘희망뚜벅이’에서 처음 투쟁사업장 노동자들 앞에 나타난 윤주형 씨는 ‘희망광장’과 ‘공동투쟁단’에서 늘 “이동우는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기아차 2·3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인 이동우 씨는 노동조합으로부터 1차 하청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합원 자격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신분보장기금과 법률 지원도 받지 못했다. 윤주형 씨는 그가 외치는 그 구호에 대외적인 의미와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속에 있는 윤주형 개인의 마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 함께 투쟁했던, 투쟁해야 할 동지와 함께 가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의무이자 의리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 안에는 일하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조합에 가입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입을 하겠다고 하는데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저희들이 복직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동우 동지의 조합원 인정문제, 2.3차 하청 노동자, 계약직의 조합원 가입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노동조합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철학과 관점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통합 주장이 사 측에게 이로움을 주고, 투쟁했던 노동자에게 상처를 주었다





윤주형 씨가 속 이야기를 시작한다. 윤주형 씨가 이 구호를 외치게 된 계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는 1사 1노조 조직통합을 목전에 두고 기아자동차지부와 기존 비정규직 노동조합인 금속노조 경기지부 비정규직지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던 때이다.










“08년에 조직통합을 목전에 두고...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폭력적으로 흡수한 것이죠. 저는 현장에서 함께 그룹에 속해 있던 동지들과 조직통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현장 조합원들을 조직하기 위해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나름대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를 제외한 세 분의 동지는 이러한 방식의 조직통합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2005년 6월에 설립된 금속노조 경기지부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는 사내하청 노조 최초로 대중파업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2007년에는 한-미FTA 저지 파업과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라인을 멈추고 참여했으며, 식당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이들의 노동3권을 따내는 성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비정규직지회는 2007년 임단협과 관련하여 원청의 교섭 참가 등을 요구하며 기아차 화성공장 도장공장에서 9일간의 점거 파업을 진행했다. 나는 그 당시에 소렌토와 스펙트라, 세라토가 한 대도 생산되지 않는 적막하고 어두운 기아차 공장 안을 걸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이렇게 투쟁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 파업과 관련하여 당시 지회장과 부지회장이었던 김수억·이동우 씨는 대법원에서 각각 2년 6개월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여 2011년에 출소했다. 





기아자동차지부는 “모든 노동자는 하나의 노조에 가입한다”는 금속노조의 ‘1사 1조직’ 규약에 따라 1사 1조직을 추진하여 2008년 조직통합을 한다. 하지만, 제19대 기아자동차지부(김상구 지부장)는 조직 통합 이전에 비정규직의 파업권 보장과 2.3차 하청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 등에 관해 비정규직지회와 의견 조율이 안 된 상태에서 2007년부터 기존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을 직가입 시키는 등 비정규직지회의 세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조직통합을 진행하여 비정규직지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윤주형 씨는 그 당시에 조직통합이 잘 되지 않으니까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들을 직가입으로 빼가고, 사 측 관리자와 현장의 비조합원들을 내세워서 마치 조직통합이 대세인양 선전을 해댔다는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가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싸움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정규직 노동조합이 아무리 관료화 되고 말아먹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목소리로 싸움을 하면 조직통합 이후에 얼마든지 싸움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조직통합 이후 2012년 오늘에 와서 그것을 바라보면 완전한 패착이었다. 그리고 조직통합을 주장했던 윤주형의 의사와 무관하게 윤주형의 주장이 사 측에게 큰 이로움을 주었고, 현장에서 투쟁했던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콘티에 짠 질문 중에는 ‘어떻게 복직할 건가요?’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사실 복직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청사진과 실천계획들이 있다기 보다는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그중에 제 옆에 있는 이동우 동지에게 죄를 씻는 마음으로 빚을 갚는 마음으로.....”















지금 민주노조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호










윤주형 씨가 울먹이자 청중들이 힘찬 응원의 박수로 보내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동우 씨에게 넘어온다. 이동우 씨는 투쟁의 과정에서 정견과 그에 따른 결과가 다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찍어서 분노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그에게는 실제로 좌우파를 막론하고 기존 정규직 집행부가 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그쪽으로 모아갔던 경험들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분노를 모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을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또 다른 동지들에게 칼날로 다가서기도 하기 때문에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단다.










“처음에는 대단히 쑥스러웠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투쟁을 하면서 누구는 어떻게 해달라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비정규직을 철폐하자, 정규직화 쟁취하자, 민주노조 사수하자’ 얘기를 했지. 이동우를 구하자는 내용이잖아요. 본인의 이름을 처음에 윤 동지가 그 구호로 외쳤을 때 저 팔뚝질도 하지 못했어요. 쑥스러워가지고. 제 이름을 제 얼굴을 알고 있는 동지들이 쳐다볼까봐 그 구호를 외칠 때는 고개를 푹 숙였던 생각들이 납니다.”










나는 이동우 씨를 비정규직지회 활동할 때부터 알고 있지만, 그가 2.3차 하청노동자이고 그것 때문에 조합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된다. 아마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 때 윤주형 씨가 외친 구호를 통해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그 전에는 들었어도 그냥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많다. 재능교육 유명자 지부장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외쳤던 구호 중에 가장 처절한 구호”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단다. 이동우 씨는 아직도 그 구호를 들을 때마다 절반 정도는 쑥스러움이 남아있다고 한다.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민주노조에 들어가고 싶은데, 노동조합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조직되지 못하는 문턱에서부터 막혀 있는 지금 남한의 민주노조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라고 생각해요. 이 구호가 조직되지 못하는 2.3차 하청 노동자들과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구호가 될 수 있는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 같이 한번 힘차게 구호를 외쳐봤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외쳤던 구호가 아니고요. 새로운 다른 구호입니다. 김수억은 우리 동지, 우리 대의원이다!”










김수억 씨 역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구호를 직접 들으니 “이동우 동지가 이런 느낌이었구나”를 실감하겠다고 한다. 김수억 씨 역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의원임에도 노동조합으로부터 대의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상하게 기아차동차 해고자들은 다 ‘인정하라, 인정하라’ 입니다. 현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기아차 비정규직 투쟁은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동지들에게 상처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자존심으로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지회였다면 윤주형 동지가 노동조합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네 따랐네 이딴 얘기를 절대 듣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노동조합이 함께 싸웠을 것이고, 함께 승리했을 것이란 얘기를 감히 해봅니다. 비정규직지회가 그러한 폭력적이고 노동조합적이지 않은, 노동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통합이 안 됐더라면 아마 이동우 동지는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부지회장으로서 활동가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0년에 해고된 윤주형 씨는 당시 기아자동차지부(21대 지부장 김성락) 내에서 ‘정당한 조합활동으로 인한 해고’ 문제로 계속 논란이 되다가 당시 대의원대회를 통해 임기 내에 복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였으나 집행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당시 집행부는 ‘대의원 대회 결정사항으로 금속노조 신분보장 기금 신청을 요청한다’고 하였으나 그는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을 받지 못했다. 요구 안건을 금속노조에 올리는 것부터 곡절이 많았던 신분보장기금 승인 심의 과정에서 윤주형 씨는 ‘동네 동사무소보다 더하다, 이게 진짜 관료구나. 결국엔 대공장 권력이 금속노조 안에서 강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계속 처리를 연기하자 윤주형 씨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에 항의를 하러간 적도 있다. 당시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 김현미(금속노조 부위원장) 위원장은 윤주형 씨에게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승인 불승인 결정을 못 내리니까 기아차지부하고 사이좋게 정리하고 와라. 그래야 정리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노신 『The_FocuS』[기획대담]기아차 해고자를 만나다, 2011년 11월)





다음 집행부(22대 배재정 지부장)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대의원대회에서는 윤주형, 이동우 씨는 복직 요구안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해고자들은 기아자동차지부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어느 집행부든 해고자 문제, 특히 비정규직 해고자 문제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해고자 내부를 갈라치기 하는 등 비슷한 입장을 견지해왔다고 이야기한다. 2011년에는 김수억·이상욱 씨만 대의원대회 요구안으로 올리자는 제안에 대해 수감 중이던 김수억 씨가 그럴 거면 올리지 말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김수억 씨는 수년간 노동자 투쟁이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일깨워주면서 함께 싸웠던 자신들의 자긍심이었던 노조가 해산되면서 현장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열심히 싸웠던 노동자들이 어떻게 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기아 해복투’라고 이야기한다. 그 즈음 기아 해고노동자들은 많이 힘들다고 했다. 장기간의 해고 생활이 주는 고단함과 복직 요구안조차 올릴 수 없는 현실 등 힘든 점이 많았을 것이다. 김수억 씨는 ‘힘들다고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자신의 상태라면서 곧 있을 수련회에 가서 고민을 나눌 거라고 했다.















하늘 보면서 목욕할 수 있다니 노천탕이 너무 좋은 거에요










“내가 김수억 동지보다 많이 아프고 차별받았다 얘기하는데, 김수억 동지한테 유일하게 이긴 게 있습니다. 1년 6개월 빵 생활 하는데, 저는 가석방으로 50일 먼저 나왔습니다. 가석방으로 나왔을 때 대단히 기뻤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때를 이야기하는 시간인데, 이동우 씨는 해고 기간 동안 직접적으로 기뻤던 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좌절 하거나 아니면 ‘내가 팽 당하는구나’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나마 비정규직지회 당시 파업할 때와 석방된 이후에 했던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을 하면서 많은 연대동지들과 함께 했던 것이 가장 기뻤던 기억이라고 했다. 윤주형 씨의 차례다. 사회자가 윤주형 씨도 기분 좋은 게 별로 없다고 하자, 윤 씨가 있어요. “왜 없다 그래? 있는데.”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복투 결성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수련회를 갔죠. 노천탕에 갔어요. 노천탕이 너무 좋은 거에요. 태어나서 그런데 처음 가봤거든요. 앉아 있는데 위에서 폭포가 떨어지지 않나. 그때가 최근에 가장 기뻤던 때 중의 하나구요. 정말 기뻤어요. 하늘 보면서 목욕할 수 있다니.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다니.”










김수억 씨는 2005년도에 노조 깃발 띄우고 처음 공장 세운 날 조합원들과 많이 울었는데, 그때가 인생에서 손꼽는 가장 기분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에는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활동과 공동투쟁단에서의 활동이 즐겁다 한다. 김 씨는 사회자가 ‘금지어’로 지정한 ‘동지’ ‘연대’ ‘투쟁’ 등의 단어를 계속 쓴다.










“공동투쟁단에서 새로운 동지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승리 얼짱 4조의 조원인데요. 거기에 있는 JW지회 ○○○ 동지가 여기 와계시더라고요. 내일 그 4조 조원들이 전부 콜트 콜텍에 가는데 단체복으로 몸빼바지를 입는답니다. 어떻게 그걸 입고 싸울까 걱정은 되지만, 새롭게 투쟁하는 동지들의 혈기 왕성하고 신나는 열기들 때문에 요새 가장 기분 좋고 내일 기대됩니다.”















값있는 동지라는 부름을 일깨워준 기아 해복투










윤주형 씨는 조직통합 이후, 해고되는 과정까지 멘붕이었다고 했다. 그동안 꿈꿔왔던 민주노조에 대한 꿈과 기대가 짧은 시간에 산산히 무너졌다. 해고된 후에는 해고투쟁을 안 하려고 한 달 동안 잠수를 타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내가 뭔가 씨앗을 만들 수 있을까? 희망을 일굴 수 있을까?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 측이 윤주형 씨의 복직을 막기 위해 현장 조합원들을 회유하여 그가 현장과 유기적으로 싸우기 힘든 조건이 형성된 것도 그에게는 큰 어려움과 고통이었다.





윤주형 씨는 1차 하청 노동자이고 기아차지부 현직 대의원일 당시에 해고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조합원 시비가 있었다. 윤주형은 정확하게 기아차 조합원임이 확인이 안 되니 분회장 선거 투표를 못하고, 금속 대의원에 출마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금속대의원 출마를 못한다고 하자, 그는 금속노조에 자신이 어디 조합원인지 알려 달라고 했다. 자신이 경기지부 조합원이라면 경기지부로 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얘기해도 금속노조가 기아차지부에 말을 못했습니다. 그때 ‘아, 정말 절망이다. 에이 젠장.’ 이러고서 땅바닥을 치고 있는데. 그때 이 세 동지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현장을 조직하고 함께 항의하는 과정 속에서 이 멘붕에 빠진 이후로 걸레짝처럼 아무 쓸모없던 동지라는 부름이 그 날 값있게 불려졌던 기억이 있어요. 그날 함께 했던 투쟁의 기억과 이상욱 김수억 이동우 동지에게 ‘동지’라는 값있는 표현을 했어요. 정말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라는 표현. 그날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어요.”










윤주형 씨는 가장 좋았던 때가 해복투 수련회 때 목욕탕 갔을 때와 자신의 문제로 기아 해복투가 함께 싸워주었을 때라고 이야기했다. 해고 이후 윤주형 씨는 이상욱 씨와 함께 기아차 구속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구속동지 석방! 해고자 원직복직! 고소고발・손배가압류 분쇄 현장대책위원회(준, 이하 ’석방대책위‘)’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2011년 김수억・이동우 씨가 석방되면서 ‘석방대책위’는 자연스럽게 해산하게 되고, 그 후 윤주형 씨를 포함한 4명의 원하청 해고노동자들이 ‘기아 해복투’를 만들어 활동하게 된다. 윤주형 씨는 ‘기아 해복투’를 결성하고 수안보로 갔던 첫 수련회가 가장 기쁜 일이라고 했다. 그때 4명의 해고노동자들은 모닥불 피워놓고 이야기하고, 함께 온천욕도 하면서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분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이동우 씨가 추가 답변을 한다.










“생각해보니까 또 하나의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빵에 들어가기 한 달 전에 애인 동지를 사귀었는데, 빵에서 나와 지금까지 투쟁을 같이 하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 써주고 있습니다. 만나는 시간이 대단히 적거든요. 그 시간 때마다 제 성질 다 받아주는 애인 동지가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이상입니다.”















북적북적하게 빈소를 메워주셨습니다: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










“대공장에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가슴 찢어지게 아픈 모습들이 많은데, 복직 투쟁을 하려고 해요. 거기로 다시 돌아가려고 투쟁을 하고 있어요. 이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 공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이 공장은 우리 해고자들에게 어떤 곳인가 라는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동우 씨는 해고가 부당하고, 자본이 노동자들을 갈라놓은 것이 부당하기 때문에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현장으로 돌아가서 함께 공장을 세우면서 같이 기뻐하고 울었던 조합원들이 이 투쟁들의 정당함을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또, 지금 현장에 있는 1800명의 비정규직과 3만 명의 정규직 조합원들이 앞으로 이런 투쟁들을 서슴없이 하기 위해서라도 현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수감 생활 중에 모친상을 당한 이동우 씨는 장례식을 위해 나왔을 때, 조합원들이 보여준 의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조합원들 보고 싶어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해고되고, 수배생활하고, 빵에 있었을 때, 우리 조합원 동지들이 보여주셨던 그 의리는 말로 못하는 것 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비오는 날 아침이었어요. 운동을 하러 나갔다가 어머니 부고 소식을 듣고 빵을 나왔을 때, 공장에 있는 동지들 중에 몇 명이 춘천교도소 앞으로 달려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가서 장례식장에 딱 들어서는데, 정말 많은 우리 조합원 동지들,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북적북적하게 빈소를 메워주셨습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제가 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동우 씨는 야근 근무 끝나고 잠을 줄여가면서 차타고 춘천교도소에 와서 면회 15분 하고 돌아가서 바로 출근을 했던 조합원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씨는 그 동지들이 있는 곳으로 꼭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서 그 동지들과 함께 노동하고 투쟁하고 싶다고 했다.















노동조합이 한번이라도 싸움을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김수억 씨는 수감 생활 중에 갑자기 찾아온 나이 많은 한 조합원의 이야기를 한다. 1사 1노조 조직통합으로 비정규직지회가 해산되고 사내하청분회로 넘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비정규직지회 시절 조합원들이 어렵게 싸워 만들었던 정년과 전환배치 관련 합의를 사 측이 일방적으로 다 깨버렸지만, 노동조합은 거기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노동조합 초기 때부터 싸우셨던 정말 나이 많으신 한 분께서 원래 면회 약속들이 다 잡혀 있는데, 갑자기 찾아오셨어요. 강제로 전환배치를 당한 거죠. ‘노동조합이 한번이라도 싸움을 하다가 전환배치를 당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눈물을 흘리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많은 현장에 특히 대공장이 이제는 더 이상 투쟁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대단히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출소하면서 결심했던 것은 정말 3년 안에 우리 해고자 동지들과 저희 조합원 동지들이랑 같이 이 기아차 화성공장 반드시 한번 다시 세운다. 그게 제가 현장으로 돌아가야 되는 이유입니다. 이 공장을 뜰 수 없는 이유는 3년 안에 기아차에서 조합원들하고 가슴 뜨겁게 울고 웃으면서 파업투쟁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려면 노조가 민주적 원리로 돌아가야










윤주형 씨는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려면 노조가 민주적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사노신’과의 인터뷰에서 했다. 그가 생각하는 민주노조의 원리는 단결, 투쟁, 연대였다. 그는 기아차지부에서 이것이 가능해진다면서 ‘더 큰 연대’를 내세웠던 주장에 따라 이동우 전 부지회장을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2·3차 하청의 문제는 집행부 내 기구를 설치해 장기전망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더 큰 연대’가 함께 투쟁한 동지를, 그것도 핵심간부를, 힘없는 약자라고 하여 쫓아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이야기 하면서 사내하청 조합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현실에서 계약직과 2·3차 하청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아차지부 민주노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사노신 『The_FocuS』[기획대담]기아차 해고자를 만나다, 2011년 11월)





윤주형 씨는 자신이 복직하고 싶은 이유를 “갈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대의원으로 출마할 때 조합원들과 했던 약속이 있다고 했다.










“현장에 조합원을 얼마큼 조직할 것이고, 여성조합원들을 추행한 자를 반드시 현장에서 몰아낼 것이고. 그때 기억으로 5가진가 약속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출마하면서 내는 공약사항과는 다르죠. 계속 싸워야 되는 문제니까요. 사람들도 지레 겁 먹기도 했고. 그 약속을 거의 다 지켰는데, 아직 한 가지를 못 지켰어요. 첫 번째로 내세웠던 공약은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우리 업체의 비정규직, 우리 조합원 아저씨들, 형님 아우들, 그리고 여성조합원들이 사 측 관리자 앞에서 어깨 당당하게 펴고 일할 수 있도록 신나는 현장 만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여전히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들 앞에서, 부당한 것들 앞에서, 현장의 노동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현장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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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 지키지 못한 약속을 위해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기... 연정|르뽀작가, 자료회원 2013-02-12 2257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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