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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정세 >
제목 <신년사를 대신하여> 정권이 교체된대도 고용안정 따위는 없다
글쓴이 채만수 | 소장 E-mail send mail 번호 225
날짜 2013-01-12 조회수 2650 추천수 140
파일  1357923440_1.hwp

  













정권교체에 대한 환상











정권교체에 대한 환상










18대 대선이 끝난 지 불과 수일 만에 5명의 노동운동ㆍ시민운동 활동가가 유명을 달리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ㆍ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ㆍ독재자의 딸의 당선, 극우 새누리당의 정권연장에 대한 절망감ㆍ공황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고, 극우 정권의 연장에 고무된 자본의 공세 또한 강화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그러나 대선의 결과를 이렇게 ‘절망적 패배’로 받아들이면서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이 연달아 목숨을 버리는 비극적 사태가 벌어지는 주체적 원인은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의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이다. 이러한 비극적 사태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지배에 따른 모종의 정치적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고, 이는 바로 우리 노동운동의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선의 결과에 대한 노동운동 일부의 이러한 절망과 공황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적 사태는 누가 보더라도 물론 이른바 ‘노동자 후보’의 ‘낙선’이나 ‘선전(善戰) 실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이른바 정권교체, 즉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로의 정권교체의 실패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당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대선의 결과가, 박근혜의 당선, 즉 새누리당의 정권연장이 아니라, 소위 정권교체, 즉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었다면, 절망감에서 오는 노동자 투사들의 자살이라고 하는 비극을 우리는 모면할 수 있었을까?





여러 정황에 비추어 물론 대선의 결과 그것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연유하는 절망감과 공황상태는 없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당장은, 다시 말하거니와 당장은 이러한 비극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도 과연 그러한 비극을 모면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을 절망적ㆍ필사적 상황으로,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종의 행동에 떨쳐나서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제쳐두고 하는 말이지만, 극우 새누리당의 권력과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권력의 차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당이 정권을 담당했던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10년을 냉정히 뒤돌아본다면, 위 물음에 결코 긍정적으로는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부정적으로밖에는, 즉 민주당의 문재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 사태를 중장기적으로는 모면할 수 없다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잠시 제쳐두고, 우선 이 두 당의 문제에만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당은 그 계급적 이해(利害)가 기본적으로 동일한 집단이며, 그 때문에 특히 그 경제적ㆍ사회적 정책의 성격과 내용ㆍ방향이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고ㆍ실업, 비정규직, 손배가압류 문제 등등 오늘날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들의 대부분은 물론, 심지어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장기간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나 그 이전의 정권들에 닿아 있지 않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것들은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 더욱 악화되었거나 새롭게 발생한 것들이기도 하다. 비근하게는 해고ㆍ실업, 비정규직, 손배가압류, 한미FTA 등의 문제로 8명의 노동자ㆍ농민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으며 투쟁한 열사정국이 바로 민주당, 특히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3년이었고, 노무현 정권 하에서는 그 후에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노동자ㆍ농민들이 줄줄이 목숨을 끊거나 경찰ㆍ용역깡패 등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사실상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이른바 ‘필수유지 업무 제도’도 노무현 정권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민주당의 집권과 새누리당의 그것에 작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대중이 누리는 약간의 정치적 유화(宥和) 분위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마저도 사실은 민주당 그 자체의 계급적 성격이나 체질에서 기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의, 아니,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독점 부르주아지의 절대적인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지배 때문에 그들 외에는 달리 지지할 정당을 찾지 못하고 있는 대중의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당 집권 하의 정치적 분위기가 다소 유화적이라면, 그것은,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계급적 이해ㆍ성격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지지대중의 성향, 그 압력에 의한 것일 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즉 민주당 자체의 계급적 이해ㆍ성격이 극우 새누리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민주당은 거기에 자리 잡고 있는 텃새뿐 아니라 두 당 사이를, 그리고 때로는 제3의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정당까지를 오고가는 정치철새들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바로 그 때문에, 즉 민주당 자체의 계급적 이해ㆍ성격이 새누리당과 동일하기 때문에, 예속적 독점자본의 정당으로서의 민주당은 또한 독점자본의 이해, 특히 후견세력으로서의 미ㆍ일 제국주의와 공유하는 자신들의 정치적ㆍ경제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극우 새누리당에 못지않은 정치적 폭압도 주저하지 않는다. 수만 명의 경찰 등을 동원하여 노무현 정권이 연출했던 부안 방폐장(放廢場) 사태라든가 평택 대추리 사태 같은 일종의 경찰계엄(警察戒嚴) 사태가 바로 그 예들이다. 민주당 정권은 물론 국가보안법도 온존시켜 충분히 활용했을 뿐 아니라, 정치사찰도 여전했으며, 아직까지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소위 전자주민카드제의 도입 등 대중에 대한 통제ㆍ사찰의 강화를 꾀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계급적 이해ㆍ성격과 불과 수년 전의 사실이 이러한데도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에 실패했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감ㆍ공황상태에 빠지고,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정권교체에 성공했더라면 무언가 상황이 크게 달라졌으리라는 환상 속에서 말이다.





이는 모두 바로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를 대중은커녕 노동운동의 투사들에게조차도 이해ㆍ숙지시키지 못하고, 사실에 기반하여 해방의 전략ㆍ전술을 마련ㆍ구사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에 그 주체적 원인과 책임이 있다.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된 이후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반동화 속에서 우리의 노동운동은 이렇게, 아니 갈수록 더욱 더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담론에 농락당하고 있다.















고용안정 따위는 없다










이번 대선 역시 여느 부르주아 정치놀음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대중기만적인 그것이었다.





이번 대선을 지배한 의제는 주지하듯이 ‘국민대통합’,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상생’, ‘복지’ 등등이었다. 대선에 출마한 모든 정파ㆍ후보들이 사실상 모두 이러한 의제에 매달려 있었고, 서로 상대방은 그것들을 실현하려는 진실성이나 실현 가능성이 없거나 희박하고 자신들이야말로 그것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제들은 사실은 지난해 4월의 총선 이후 새누리당ㆍ박근혜 쪽에 의해서 선도돼온 것들이었다. 따라서 지난달 월례토론회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이들 슬로건들을 선도한 것이 이렇게 새누리당의 박근혜 측이었고, 민주당의 문재인 측이나 기타 군소후보들이 그 뒤를 따라가는 형태로 선거전이 진행되었으니, 사후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대선의 결과는 이미 그러한 모양새 자체 속에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1)





이제 잠시 제쳐두었던 문제, 즉 소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중장기적으로는 오늘날 노동자계급이, 이 사회가 겪고 있는 비극적 사태를 모면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격과 법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경제적 이유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국민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니, ‘재벌개혁’이니, ‘상생’이니, ‘복지’니 하는 따위의 의제들이 총선과 대선이라는 지난해의 양대 선거를 지배했는가, 그 배경과 이유,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겠는가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이들 의제가 양대 선거를 지배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노동자계급과 농민, 기타 영세자영업자들을 비롯한 광범한 대중이 현재 심각한 빈곤과 불평등, 고용 불안, 경영 불안 등등 생존권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 사이에서 현 사회의 질서에 대한 분노가 부글거리면서도 그것을 타개할 과학적 방도와 전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독점자본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대표자들ㆍ대변자들은 ‘국민대통합’ㆍ‘경제민주화’ㆍ‘재벌개혁’ㆍ‘상생’ㆍ‘복지’ 따위의, 듣기에 그럴 듯한 요설(饒舌ㆍ妖說)로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대중을 기만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진보적 정당들로 대표되는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나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자임하는 많은 분자들은 그 사상ㆍ이론의 비과학성ㆍ동요 때문에, 그리고 또 다분히 편의주의를 추구하는 속물근성 때문에 저들 독점자본의 그러한 기만적 정치놀음에 어릿광대춤을 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릿광대춤이라는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이며, 많은 사람은 분노까지는 아닐지라도 야속하고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선의, 주관적 의도가 결코 아니다. 문제는 바로 그들이 이번 대선에서 수행한 객관적 역할이다.





노동자 후보를 자임한 후보들과 세력들이 그 자임에 값하는 유능한 후보ㆍ세력이었다면,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국민대통합’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경제민주화’는 기만적 말장난일 뿐이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른바 ‘경제민주화’ㆍ‘재벌개혁’ 따위를 통해 고용 안정이나 기타 노동조건의 개선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전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선전하는 대신에 자신들이 집권한다면 ‘경제민주화’ㆍ‘재벌개혁’ 따위를 보다 잘 혹은 보다 철저히 실현할 것이라는 따위의 요설(饒舌)을, 아니 코메디 아닌 코메디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물론 뛰어난 실천적 투사들로서 노동자 대중의 투쟁을 선동했지만, 정치적, 사상ㆍ이론적으로는 결국 본의 아니게 독점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에 일역을 담당한 것이다.





‘국민대통합’ 운운하는 것은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대립을 은폐하려는 수작, 이데올로기 조작에 불과하다. 착취와 억압의 사회, 계급적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ㆍ투쟁하고 있는 사회의 ‘국민’이 그 착취와 억압의 질서, 계급적 분열을 온존시킨 채 어떻게 대립ㆍ투쟁하지 않고 ‘대통합’될 수 있단 말인가?!





대선 후 박근혜 측에서, 그간 그리고 특히 대선 기간을 통해서 민주당이나 안철수 등 야권을 향해서 막말을 해대고 기타 악의를 들어냈던 극우 망종들을 주요 요직에 배치하는 것에 항의하여 민주당이나 기타 자유주의적 혹은 ‘진보적’ 언론이 “이것이 과연 국민대통합에 합당한 인사냐”는 식으로 투정하고 있지만, 그래 봤자 그들이 말하는 대통합이란 기껏 독점 부르주아 좌우 세력의 대통합일 뿐이다.





‘경제민주화’란 사실 내용이 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만일 그것이 요즘 말하는 ‘재래시장 보호’나 ‘골목상권 보호’라면, 기껏해야 그것은 노점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백만 영세상인들의 ‘경영’(?)을 유지시킴으로써 그들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로 전화되는 것을 다소라도 막으려는 심산이지만, 그러한 심산조차 사실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상인ㆍ소생산자의 분해ㆍ몰락과 자본의 집적ㆍ집중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필연적 법칙일 뿐 아니라,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역시 독점자본ㆍ대자본의 근시안적 탐욕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란 것이 만일 ‘진보적 지식인들’ㆍ‘진보적 언론’이라는 소부르주아 논객들이 말하는 ‘재벌개혁’ 혹은 더 나아가 ‘재벌 해체’라면, 그것은 사실은 경쟁력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독점자본의 합리화ㆍ효율화일 뿐이다. 그리고 독점자본의 그러한 합리화ㆍ효율화는 당연히 착취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보적’이라는 소부르주아 논객들은 그것을 노동자ㆍ인민의 과제로서 노동자ㆍ인민의 부담으로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소위 ‘경제민주화’를 통한, 혹은 재벌의 개혁이나 ‘해체’를 통한 상생이나 고용의 안정, 기타 노동조건의 개선 등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재벌이라고 불리든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든, 독점자본의 합리화ㆍ효율화일 뿐이고, 따라서 독점자본에 의한 착취의 강화, 독점자본의 경쟁력의 강화일 뿐이다. 즉, 노동자들의 고용의 안정이나 기타 노동조건의 개선이 아니라 그 보다 급속한 악화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재의 조건과 상황, 그 현재의 발전단계에서의 진실이다.





예컨대,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일본의 한 노(老)경제평론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세계 전체의 경제에 일찍이 없는 격렬한 변화가 발생하고, 그 영향은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철저한 ‘가격파괴’의 흐름이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다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의 흐름이라고도 해야 할 ‘가격파괴’의 물결은 업종을 불문하고, 또한 규모의 대소에 관계없이 어느 나라에서나 무서운 기세로 기업의 경영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기업은 곧바로 경쟁에서 패배하고, ‘도산(倒産)’이라는 형태의 엄중한 자연도태(自然淘汰)의 대상으로 되어간다.2)










이 노평론가의 발언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부르주아적 무지 혹은 과장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현(現) 상황이 그것이다.





우선 이 평론가는 “그 영향력”이 “나날이 확대되고” 있는 “‘가격파괴’의 흐름” 혹은 그 “물결”을 “세계 전체의 경제에 일찍이 없는 격렬한 변화”,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다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의 흐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 특히 기계제 대공업 생산의 발전경향 및 과잉생산 공황에 대한 무지의 표현이고,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인플레이션의 본질과 운동에 대한 무지의 표현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특히 발달한 기계제 대공업 생산은 과거에도 생산방법의, 즉 노동생산력의 혁신ㆍ혁명과 주기적 공황을 수반하면서 발전해 왔고, 따라서 그가 “‘가격파괴’의 흐름” 혹은 그 “물결”이라는 과장된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가격의 급격한 일반적 저하현상, 즉 가격혁명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최근의 그것을 가리켜 “세계 전체의 경제에 일찍이 없는 격렬한 변화”니,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다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의 흐름”이니 운운하고 있다.





한편, 인플레이션이란 주지하듯이 그 원인이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의 국가지폐 혹은 국가지폐화한 불환은행권의 남발에 따른 통화가치의 저락이며, 그에 의한 물가의 명목적 상승이다. 그리고 불환은행권의 남발에 의한 통화가치의 이러한 하락은 지금도, 아니 이번 대공황 속에서야말로 자본주의 선진 각국이 이른바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앞다투어 엄청난 량의 불환은행권을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그가 “‘가격파괴’의 흐름” 혹은 그 “물결”이라고 부르는 가격의 일반적 저하현상이 최근 20여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통화가치의 저락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압도하는 모종(某種)의 사태의 표현이다. 그런데도 그의 발언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물론 문제의식조차 전혀 없다. 이른바 “‘가격파괴’의 흐름” 혹은 그 “물결”을 가리켜 그가 “세계 전체의 경제에 일찍이 없는 격렬한 변화”라거나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다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의 흐름” 운운할 때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물가는 많건 적건 언제나 오른다는 관념이다. 즉, 철들면서부터 (―그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일반화ㆍ체제화되기 직전인 1927년생이다―) 인플레이션에 익숙해진 그로서, 그는 이 인플레이션이라는 명목적 가격상승 현상을 물가상승 일반과 등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법칙에 대한 부르주아적 무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의 무지야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현 상황, 혹은 방금 내가 “인플레이션을 압도하는 모종의 사태”라고 부른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평론가 하세가와는, “‘가격파괴’의 물결은 업종을 불문하고, 또한 규모의 대소에 관계없이 어느 나라에서나 무서운 기세로 기업의 경영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며,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기업은 곧바로 경쟁에서 패배하고, ‘도산’이라는 형태의 엄중한 자연도태의 대상으로 되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현 상황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대적으로 ‘고용 안정’이나 ‘노동조건의 개선’ 따위는 불가능하며, 거꾸로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그의 발언은, 최근 수십 년 동안에 특히 비약적으로 “무서운 기세로” 전개되어온, 마이크로 혁명 혹은 정보통신 혁명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혁명이 “업종을 불문하고, 또한 규모의 대소에 관계없이 어느 나라에서나 무서운 기세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 즉 재생산과정 전체를 지배해 왔으며, 자본주의적 과잉생산을 격화ㆍ항상화시켜 왔고, 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본 간 경쟁이 극히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고, 공황이 빈발ㆍ장기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가 도달한 비약적인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는, 만일 그것들이 자본의 경쟁 및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대신에 인류 공동의 발전을 위해 이용된다면, 아니 하다못해 어떤 한 사회의 공동의 발전을 위해 이용된다면, 인간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물질적 생산을 위해서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혁명적으로 단축하면서 인류의 오랜 꿈이었던 ‘자유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그 성과는 자본에 의해 사유(私有)되어 경쟁과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업종을 불문하고, 또한 규모의 대소에 관계없이 어느 나라에서나 무서운 기세로 기업의 경영환경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가격파괴’라는 “흐름을 타지 못하는 기업”을 “곧바로 경쟁에서 패배”시키면서, “‘도산’이라는 형태의 엄중한 자연도태의 대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가 그렇게 이용되는 한, 그것은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파괴적ㆍ파멸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도산’이라는 형태의 엄중한 자연도태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은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아야 하고,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기술개발, 기계의 개량을 통해서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혁명 이후,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 할수록 과학기술혁명이 더욱 가속도적으로 전개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기술혁명의 진전으로 “기계가 개량될 때마다 자본은 더욱더 소수의 노동자를 고용”3)하게 된다. 예를 들면, 소위 ME혁명, 즉 극소전자(microelectronics) 혁명의 초기단계인 1970년대 초에 우리에게는 이미 다음과 같은 자료가 주어져 있다. 즉, 어떤 작업을 종래의 공작기계로 하는 데에는 9,200명의 인원이 필요한데, 그 같은 작업을 NC공작기계, 즉 수치제어(numerical control) 공작기계로 하게 되면, 최초에는 3,933명이 필요하고, 같은 기계로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데에는 2,237명이면 충분하다4)는 자료가 그것이다. 같은 작업을 하는 데에 극소전자혁명 이후엔 그 이전의 4분의 1도 안 되는 인원밖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가 우리에게 주어진 1970년대 초는 아직 기계를 수치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기다란 테이프에 펀치로 수도 없이 많은, 그러나 일정한 복잡한 논리를 구성하는 구멍들을 뚫어서 작업제어기에 걸어야 하는 시대, 즉 ME혁명 내지 IT혁명의 말하자면 유년기에 불과했고, 따라서 그 자료는 하나의 추세는 보여줄 수 있을지언정, 이미 심히 낡은 것이다. 그 이후 지난 40년 동안에 전개된 그야말로 비약적인, “무서운 기세”의 과학기술혁명, 그로 인해 재생산과정 전반이 사실상 무인화(無人化)를 향해 수렴해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동일한 작업을 하는 데에 지금은 그보다도 훨씬 더 적은 수의 인원밖에는 필요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동일한 작업, 동일한 양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생산이, 그것도 가히 비약적인 규모의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반론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인용자]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는 반면에, 시장의 확대는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 진행된다”는 엥겔스의 지적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공장제도의 어마어마하고 돌발적인 팽창가능성과 세계시장에의 그 의존성은 필연적으로 열병적인 생산과 그에 뒤따른 시장의 과잉을 낳고, 그 수축과 함께 마비상태가 나타난다. 산업의 생활은 중위(中位)의 활황(mittlere Lebendigkeit), 번영, 과잉생산, 공황 그리고 침체의 시기라고 하는 계열로 바뀐다. 기계경영에 의해서 노동자의 취업과 따라서 생활상태가 겪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이 산업순환의 주기변화와 함께 일상적으로 된다.5)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인용자]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는 반면에, 시장의 확대는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 진행된다. 1825년부터 1867년까지 끊임없이 재발했던 침체, 번영, 과잉생산, 공황이라는 10년 주기의 순환은 확실히 소멸한 것 같지만, 이는 단지 우리를 영속적이고 만성적인 불황이라는 절망의 늪에 빠뜨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고대하는 번영기는 오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이 번영기를 예고하는 징후들을 감지하는 듯이 보일 때마다 그것들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그 동안 겨울이 올 때마다 “실업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중대한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지만, 실업자들의 수는 해마다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반면에 그 문제에 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우리는 그들 실업자들이 인내심을 잃고 그들 자신의 운명을 그들 자신의 손에 거머쥘 순간을 거의 추정할 수 있다.6)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의 행정(行程)은 실제로 그렇게 전개되어 왔고, 지난 40여 년 동안 비약적으로 전개되어온 과학기술혁명은 1930년대에 이어 오늘날 다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을 영속적이고 만성적인 불황이라는 절망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 당연히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의 수는 엄청난 규모로 해마다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반면에, 그 문제에 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이 인내심을 잃고 그들 자신의 운명을 그들 자신의 손에 거머쥘 순간을 거의 추정할 수 있는데도,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으로 ‘경제민주화’니 ‘재벌개혁’이니 하는 따위의,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의 기만적 헛소리를 앵무새처럼 짓거리면서 노동운동의 투사들이 연달아 목숨을 버리는 비극적 상황을 맞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최근의 상황 속에서의 노동자들의 처지와 관련해서는 물론 맑스의 다음과 같은 언명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에서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실행된다. 생산의 발전을 위한 모든 수단은 생산자의 지배 및 착취 수단으로 변하고,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그를 기계의 부속물로 떨어뜨리고, 그의 노동의 고통으로써 노동의 내용을 파괴하며, 독립적인 힘으로써의 과학이 노동과정에 합체됨에 따라서 노동과정의 정신적인 힘을 그로부터 소외시킨다. 이들 수단은 그가 노동하는 조건들을 망가뜨리고, 노동과정 중에서 가장 편협하고 음험한 전제에 굴복케 하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화시키고,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쟈거노트(Juggernaut)의 수레바퀴 밑으로 내던진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의 방법이고, 모든 축적의 증대는 거꾸로 그 방법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 된다. 그 때문에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서 노동자의 상태는 그가 받는 지불이 어떠하든, 높든 낮든, 악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상대적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으로 하여금 언제나 축적의 크기 및 힘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한 것보다 더 단단히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한다. 그것은 반드시 자본의 축적에 대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낳는다. 따라서 한 극에 있어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그 반대편 극에 있어서의, 즉 그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서 생산하는 계급 측에 있어서의 빈곤, 노동고(勞動苦), 노예상태, 무지, 야성화,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7)










이것이 곧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이 노동자들, 노동자계급에게 미치는 필연적인 영향이며, 다름 아니라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 상황이야말로 이를 더없이 절절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에서조차 이른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독점자본의 지배를 그대로 두고서도 소위 ‘경제민주화’ 같은 것을 통해서 다소라도 고용이 안정되고 기타 노동조건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다니! 노동운동의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이라고밖에 달리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기업’ㆍ‘사회적 경제’ㆍ‘사회적 협동조합’ 따위의





헛소리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발전을 가로막으려는 공격ㆍ공작은 수도 없이 많은 방향에서, 수도 없이 많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위에서 언급해온 ‘국민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니, ‘상생’이니 하는 따위의 기만적 언사들도 그 예들이지만, 최근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또 하나는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니, ‘사회적 경제’니, ‘사회적 협동조합’이니 하는 따위의 헛소리들이다. 자본주의적 지배ㆍ억압 기구로서의 국가, 각급의 지방정부들 및 재벌들과 더불어 이 사회의 진보적 언론이라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이, 그리고 물론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한 목소리로, 즉 극우와 ‘진보’가 한 목소리로 목청 높여 지껄여대는 그 헛소리들 말이다.





묻건대, 자본주의적 기업치고 사회적 기업이 아닌 기업이 어디 (있을 수) 있으며, 협동조합치고 사회적 협동조합 아닌 협동조합이 어디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사회적 경제이며, 모든 기업과 협동조합들이 다 사회적인 그것들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도 저들은 ‘사회적 기업’이니, ‘사회적 경제’니, ‘사회적 협동조합’이니 하고 떠들어대니, 수고스럽더라도 저들이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잠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기업’ 하면 떠오르는 가장 저명한 ‘진보적 지식인’은 아마 신영복 교수님일 것이다. 그 신 교수님께서는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 예컨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회적’이란 ‘여럿이 함께’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아닐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물건을 생산하고 생산물을 분배하는 주체인 기업의 사회성이야말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사회적 토대가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의 경제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이 경제가 성장하여도 그것이 고용과 복지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이다. “경제성장이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불경기 때에는 겨울 추위에 개울물이 먼저 얼듯이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먼저 고통에 내몰리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경제와 사람을 잇는 다리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업을 통해 사람이 모이고, 기업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하고, 기업을 통해 공동체의 성취감을 느끼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사람이 모여 ‘여럿이 함께’하는 경제를 이루도록 도와야 할 ‘기업’이라는 틀은, 오히려 현실에서 사람을 억누르고 채찍질하기만 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기업은 이런 존재이기만 한 것일까? 여럿이 함께하는 기업, 고통 받는 이웃을 함께 생각하는 기업은 불가능한 것일까?





지난해에 시작한 ‘사회적 기업가 학교’는 이런 아픔과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 한겨레경제연구소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가 뜻을 모았다. 소외된 이웃들의 아픈 현실을 어루만지는 기업가를 양성하기 위해 벌인 일이다. 시작은 이렇지만, 우리 사회의 공동체 구조를 새롭게 짜는 대안적 전망과 무관하지 않다.8) (강조는 인용자.)










교수님의 따뜻한 말씀 가운데 어떤 부분들, 예컨대 “... 물건을 생산하고 생산물을 분배하는 주체인 기업의 사회성” 운운하실 때 ‘사회성’의 정확한 의미나 “경제와 사람을 잇는 다리와 같은” 운운하실 때 ‘경제’의 정확한 의미 같은 것은 미욱한 소인으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대략 눈에 띄는 주장은 이렇다. 즉,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 구실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기업을 통해 사람이 모이고, 기업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하고, 기업을 통해 공동체의 성취감을 느끼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혹은 그것은 “사람이 모여 ‘여럿이 함께’하는 경제를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란 “여럿이 함께하는 기업, 고통 받는 이웃을 함께 생각하는 기업”, 혹은 “소외된 이웃들의 아픈 현실을 어루만지는 기업”이라는 것.





참고로, 이렇게 되면, 앞에서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던 부분 중 한 부분, 즉 “경제와 사람을 잇는 다리와 같은”의 의미는,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경제’, ‘사회적 협동조합’ 운운할 때 ‘사회적’의 의미는 대략 ‘사람이 모이게 하고, 먹을 것을 구하게 하고, 공동체의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이나, “사람이 모여 ‘여럿이 함께’하는 경제를 이루도록 (돕는)”이나, “여럿이 함께하는”, 혹은 “고통 받는 이웃을 함께 생각하는”, 혹은 “소외된 이웃들의 아픈 현실을 어루만지는” 정도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알기에 신 교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경제학을 전공하신 학자님, 즉 경제과학자, 사회과학자이시고, 당신께서도 아마 그렇게 자부하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어떠어떠한 존재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어떠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거나 “어떠어떠해야 마땅하다”,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과학일까?





싸구려 도덕일 수는 있어도 결코 과학은 아닐 것이다!





결국 ‘사회적 기업가 학교’ 교장으로서의 신 교수님이나 그 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함께 “뜻을 모았다”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 한겨레경제연구소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가 추구ㆍ선전하는 ‘사회적 기업’이란 과학적 분석과 사고(思考)에 기초한 기획이 아니라 싸구려 도덕에 기초한 망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은 차갑기만 하(여)” “‘기업’이라는 틀은, 오히려 현실에서 사람을 억누르고 채찍질하기만 하고 있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의 망상을 실현하겠다고 대대적인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사회적 기업’ 운동을 해온 자들이 그 ‘성공’(?)에 고무되어 분명 ‘사회적 기업’ 운동을 확대하여 벌이고 있는 이른바 ‘사회적 경제’ 운동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흥미로운 개념 역시 ‘진보적 언론’ ≪한겨레≫의 캠페인에서 발견된다. 그것에 의하면, “약자의 힘을 키워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완성하는 토대가” 되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공동체와 같은 사회적 경제는”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다른 동기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제영역이다.”9)





여기에서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운운할 때, ‘시장’은 분명 자본주의적 시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다른 동기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제영역”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이윤이 없이 작동하는 경제영역”이라고 해석해야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의사결정의 효과가 어떤 효과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의사결정의 동기는, 표명되는 동기와 실제의 내심이 일치하는지 어떤지를 사실상 알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효과에 비추어 중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경제’란 결국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이윤이 없이 작동하는 경제영역”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적 시장을 전제한 위에서 그러한 경제영역이 과연 존재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아니,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로 도처에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개인적 소비영역이 그렇고, 가족과 같은 기본 공동체의 내부 경제영역이 그렇다.





그런데 협동조합이나 소위 ‘사회적 기업’, 혹은 통일적 경제주체로서의 ‘마을공동체’도?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이윤이 없이 작동하는” 협동조합이나 소위 ‘사회적 기업’, 혹은 통일적 경제주체로서의 ‘마을공동체’는 결코 존재, 아니 자립적 존속이 불가능하다. 요즘 정부나 지방정부로부터 3년간의 재정지원을 받는 것처럼 존속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외부로부터 받는 동안에야 존속하겠지만, 그러한 지원이 끊기자마자 이내 존속이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 고유한 외적강제로서의 경쟁은 기업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생산방식의 개량ㆍ혁신을, 그리고 확대재생산을 강제하는 것인데, 그에 필요한 경비는 소위 감가상각비만으로는 조달될 수 없고, 그 상당 부분이 이윤으로부터 조달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협동조합이나 이른바 ‘마을공동체’의 재생산과정 전체가 그것 자체 내에서 완결되는 구조라면, 자립적으로 존속 가능하겠지만, 그러한 구조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망상에 불과할 뿐더러, ‘사회적 경제’론자들 스스로가 “(자본주의적) 시장에서(의) 작동”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난점 때문에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사회적 기업’론자는 이렇게, 즉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기업이 ‘사회적 기업’입니다”10) 하고, 너스레를 떨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너스레는 어디까지나 너스레일 뿐이다.





한편, ‘진보언론’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은 최근 이른바 ‘사회적 기업’ 혹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면서 특히 국내외의 몇몇 ‘성공적인’(?) 협동조합, 협동조합 기업들의 예를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선전방식은 사실 나치의 선전방식과 별차가 없는 그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 ‘성공’이 과장ㆍ미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조직, 예컨대 대표적으로 저 유명한 몬드래곤과 같은 조직은 결코 “이윤이 아니라 다른 동기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하물며 “이윤이 없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이윤 동기’에서 의사를 결정하고 있고, 엄청난 이윤과 더불어서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시장 속에서는 그래야만 존속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 조직 속에서 “이윤이 아니라 다른 동기로 의사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조직의 내부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서일 뿐이다. 그리고 소위 ‘사회적 경제’란 것이 그러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러한데도 그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이라면, 그 선전은 사기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경제’란 것이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속에서는 극소수가 기생하듯 존속할 수 있을 뿐, 사회 전면화(全面化)는 차치하더라도,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이나 영세 상공인들에게 의미 있는 규모로 확대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웬의 저 유명한 실험과 실패가 없었고, 나아가 그러한 운동들에 대한 과학적인 논의와 분석, 평가, 비판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러한 운동은 비판의 대상일지언정 비난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웬의 실험과 실패로부터, 그리고 그에 대한 과학적 논의ㆍ분석ㆍ평가ㆍ비판으로부터 무려 2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21세기이다!





그런데도 완고하게 그러한 망상에 매달리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진보언론’ㆍ‘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하여, 게다가 재벌을 위시한 극우적 조직ㆍ단체들이 자신들과 한 목소리로 그러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도 왜 그러한가를 전혀 성찰하지 않는 ‘진보언론’ㆍ‘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ㆍ‘진보언론들’이 오늘날 ‘사회적 기업’이니, ‘사회적 경제’니, ‘사회적 협동조합’이니 하고 떠드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소부르주아적 지위에 의해서 규정되는 몰(沒)과학, 사회운동사와 사회과학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즉 망상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그 몰과학, 몰이해, 망상을 자랑하고 전파하는 것이며, 그러한 소동을 통해서 반동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급 정부나 재벌 등이 그러한 운동을 함께 벌이고 나서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몰과학, 몰이해, 망상을 더욱 부추기고, 더욱 전파ㆍ보급함으로써 현존의 착취ㆍ억압체제를 온존시키고 강화하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길










자본주의의 가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즉 노동자들에게 절망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예컨대 이번 대선의 결과에 절망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정권이 교체되면 무언가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는 부질없는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은 독점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지배에 의한 것이고, 나아가 특히 국가보안법도 있고 하여 노동자계급운동의 수많은 상층지도부, 활동가들조차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무비판적으로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노동운동의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착취와 억압, 고통과 생존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빈곤과 무능력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물론 극복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근거 없는 격려나 다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는,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망을 강요하는 가혹한 현실 자체가 동시에 우리에게 절망이 아니라 저항ㆍ투쟁으로 떨쳐 일어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고, 노동자계급운동의 역사, 그 성과가 그 저항과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학을, 과학적 이론과 전략ㆍ전술을 풍부히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도의 사회과학 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라도, 바로 그 노동자라는 계급적 처지ㆍ조건 때문에 비판적 사고를 하려는 노력만 한다면,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론과,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비(非)과학을 분별할 수 있고,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론과 그에 기초한 전략ㆍ전술을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비과학은, 그것들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제시되더라도,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와 같은 계급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을 사회과학이게끔 하는 계급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관점이, 그러한 사실이 은폐ㆍ왜곡되어 있기 때문이고, 조금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그러한 은폐ㆍ왜곡을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노동자계급이 가야 할 길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역사, 그 성과로서의 그러한 과학적 이론과 전략ㆍ전술을, 이른바 ‘좌익 공산주의’니 ‘뜨로츠끼주의’니 하고 떠드는 일부 목청 높은 반쏘적 분자들처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부단히 익혀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그것을 현실의 구체적 조건과 상황에 맞게 실천에 옮기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새해 2013년을 그러한 해로 만들기 위해서, 즉 노동운동의 정치적, 사상ㆍ이론적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각별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비극적 사태를 방지하는 길이고, 노동자계급이 해방에 이르는 길이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것이다! <노사과연>






1) 이 책에 수록된 “제18대 대선 ―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2) 하세가와 케이타로(長谷川慶太郞), ≪‘超’價格破壞の時代≫, 東洋經濟新報社, 1994, p. 1.





3)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462.; “충용되는 노동력에 관해서도 생산력의 발전은 이중으로 나타난다. 첫째로는 잉여노동의 증대로, 즉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에, 그리고 둘째로는 주어진 자본을 가동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충용되는 노동력의 양(노동자 수)의 감소로”(≪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257.)





4) R. M. Bell, Changing Technology and manpower Requirements in the Engineering Industry, Sussex University Press in association with the Engineering Industry Training Board, 1972, p. 85. (히사노 쿠니오(久野國夫), ≪現代資本主義の生産力構造≫, 靑木書店, 1991, p. 145, 表III-5, 表III-6에서 재인용.)





5)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476.





6) ≪자본론≫ 제1권, 영어판 서문(Capital, Vol. I, Progress Publishers. 1954, p. 17.; MEW, Bd. 23, SS. 39-40.).





7)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S. 674-75.





8)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ㆍ[인용된 글의 집필ㆍ발표 당시] 사회적기업가학교 교장), “[시론] 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한겨레≫, 2010. 4. 14.





9) 김현대 선임기자, “[싱크탱크 광장] "새정부ㆍ민간 함께 ‘사회적 경제 펀드’ 조성해야"”, ≪한겨레≫ 2013. 1. 2.





10)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전 소장), “신영복 교수가 '착한 기업가' 교육에 나선 까닭-사회적기업가학교에 초대합니다”, <blog.hani.co.kr/goodeconomy/25395>.; 아뿔싸! ‘사회적 기업’이란 ‘착한 기업’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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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4 <신년사를 대신하여> 정권이 교체된대도 고용안정 따위... 채만수 | 소장 2013-01-12 2650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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