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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노동 - < 기타 >
제목 칼 폴라니 비판을 위하여
글쓴이 김건우∣현대자본주의 세미나, 맑스-엥겔스 저작 읽기 쎄미나 팀원 E-mail send mail 번호 268
날짜 2009-06-02 조회수 3409 추천수 149
파일  1243938547_폴라니.hwp

  

























1. 서론










바야흐로 대안, 대안, 대안의 시대다. 쏟아지는 대안의 물결들을 보라! 사회적 기업(대안 기업?), 대안 용품, 대안 학교, 대안 보육 등등 대안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의 물결과 함께 요새 더욱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호혜 경제’이다. 근래에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어찌나 ‘폴라니, 폴라니’하여서 그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한겨레 21�� 753호 특집기사에 따르면, 폴라니는 과거에는 빛을 못보고 근래에 들어 대공황을 타개할 하나의 방법으로 여러 학자의 인용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난 근래에 들어 폴라니가 대두되는 것은 하나의 학문적ㆍ실천적 ‘유행’이라고 생각한다. 쏘련은 해체되었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그대로이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진보’를 자처하는 여러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무언가(!)를 제시해야 하긴 하니까 계속해서 무언가 대안(아닌 대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대안의 과잉





폴라니의 핵심 사상은 ‘호혜 경제’였다. ‘호혜 경제’는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키는 이론인데 이러한 유형의 한 예로는 공정무역 거래가 있다. 한마디로, 시장을 시민사회의 영역 하에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부조의 증가와 협동ㆍ연대의 증대, 시민사회 단체의 시장에 대한 영향력 강화, 소비자 주권운동을 통한 시장에 대한 통제 강화, 그리고 전사회적인 공동체적 요소의 증가를 일으켜 결국 ‘호혜적인 경제’, 즉, ‘착한 자본가와 착한 소비자의 증가’, 궁극적으로는 ‘착한 자본주의’의 실현을 통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유토피아의 실현을 요망한다. 아아, 그대에게 축복을!










“어떤 경우에도 ‘상품화’시키면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어. 노동·자연·화폐야. 재화를 교환하는 시장은 필요해. 그렇다 해도 노동·자연·화폐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되는 거야 ... 노동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야. 인간을 사고판다고? 인간은 상품 가치와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야. 토지를 비롯한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시장에서 버려지거나 낭비되면 복구할 수도 없어.”[��한겨레 21�� 제753호, 2009.03.27. 이하 동일]










여기서 나는 폴라니의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노동력은 인간의 육체적 힘과 정신적 노력을 포함한 인간 그 자체에서 떼어낼 수 없는 힘으로써 그것을 상품화시킨다는 것은 인간 자체를 상품화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즉, 노동력의 상품화는 결국 ‘인간’을 한갓 ‘상품’으로 전화시키는 물상화의 한 경우가 된다. 이러한 노동력의 상품화 결과 자본주의 발전초기 영국에서는 아동노동 착취가 일상적이었고 노동일의 극대화와 노동강도의 극대화도 일반적이었으며 도망치는 노동자는 채찍질ㆍ태형 혹은 강제노역을 시키거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족쇄로 노동자를 묶은 뒤 노동을 시키는 상황도 빈번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가에게 ‘노동자(노동력)’는 이제 자본의 자기증식을 가능케 해줄 하나의 ‘상품ㆍ비품’에 불과한데 그것에 인간적인 존귀한 어떤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타이어에서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으로 인해 발암물질에 중독된 노동자들이 수십 명 죽었으며 수백ㆍ천 명은 잠재적인 질병 발생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도 반도체 유독물질의 직접적 접촉으로 인해 백혈병이 수십 명에게 발생했다. 그리고 자본가의 고정불변자본 절약 때문에(안전장치 등이 부실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 산재로 죽거나 다치는 노동자의 수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는 생활수단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시켜 시장에 팔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상품화된 노동자(노동력과 떼어 낼 수 없는)는 이제 쓰다 버리는 ‘상품’과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지와 같은 자연 또한 그 자체가 전지구적 공동 소유물로써 사실 어느 누구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윤 획득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모든 자원ㆍ재화 등을 상품으로 전화시킨다. 누가 물이 상품화 될 것이라고 예상을 했겠으며 누가 DNA염기서열이 상품화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일반화된 상품생산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 또한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위한 일반적 등가물 상품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정확하게는 인간의 노동력)ㆍ자연ㆍ화폐의 상품화는 체제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는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력)ㆍ자연ㆍ화폐를 왜 상품화시킬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ㆍ폭로하지 않고 이러한 문제점의 해결책으로 자본주의 체제(모순 그 자체인)의 전환이 아닌 동어반복적인 ‘도덕적 당위의 설파’, ‘호혜 경제 시스템’을 내세운다. 즉, 시민사회가 어떤 호혜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 협동ㆍ연대하거나 시민사회가 ‘악한 시장(노동ㆍ자연ㆍ화폐를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는)’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착한 시장’으로 전환시키는 등, 한마디로 시민사회가 ‘착한 소비자’가 되고 이러한 ‘착한 소비자’의 영향으로 ‘악한 자본가’가 ‘착한 자본가’로 전화되는 형태의 해결책이다.1) 여기서 내가 폴라니를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호혜 경제’가 자본주의 체제 내의 모순을 해결할 방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2. 공정무역거래 비판










“(폴라니 사상의)결정적인 것은 2006년 의회를 장악한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 새로운 세계 경제체제의 대안으로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을 끌어온 일이야.”[��한겨레 21�� 제753호]










사람들은 ‘호혜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로 공정무역거래를 꼽는다. 그럼 공정무역거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제 3세계에서 노동력 재생산비도 못 받는 노동자에게 적정임금(노동력 재생산비)을 주고 상품을 수입ㆍ수출하는 것, 혹은 아동노동을 착취하여 생산하는 상품 또는 기업에 대해서는 보이콧(Boycott)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정무역 커피이다.





공정무역 커피가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게 되자, 다국적 커피기업은 공정무역 커피를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스타벅스와 같은 다국적기업은 공정무역 커피 사용량을 부분적으로 늘리면서2) 대대적으로 ‘착한 커피’, ‘착한 초콜릿’ 등을 광고하고 있다.





이처럼 마케팅 수단이 되어버린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는 사실 ‘위신’, 즉 ‘착한’이라는 단어가 함축되어 있는 자선적 의미에서의 ‘위신’을 소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마케팅 효과이며(기업이 엄청난 돈을 쏟아가며 광고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공정무역거래 커피의 소비량 증가는 지속적일 수 없고 뚜렷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선적 의미에서의 ‘위신’이 그 상품에서 소멸된다면 그 지점부터는 공정무역거래 커피의 소비량은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3) 그리고 소비자들이 ‘착한 커피’와 ‘착한 초콜릿’을 소비함에 있어서 과연 제3세계 플랜테이션에서 착취당하는 성인노동자, 그리고 아동노동자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될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단순한 ‘소비’를 통한 의식화 내지 의식의 변화는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착한 커피’와 ‘착한 초콜릿’을 소비할 때 본질적인 문제의식(제 3세계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대한 고민보다는 상품에서 얻는 ‘착한’이라는 ‘위신’을 소비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4)





사실 이와 같이 ‘착한’이란 의미가 함축된 ‘위신’을 소비하는 행위는 부자가 불쌍한 마음으로 거지에게 지폐 한 장 쥐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거지는 하루 끼니는 때울 수 있겠지만 거지라는 상태의 고착성과 영속성은 변화되지 않는다. 이처럼 ‘착한 상품’의 소비자는 이러한 소비 행위가 제 3세계에서 다국적 기업의 횡포 하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 ‘하루 끼니는 먹게 해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윤리적이고 착하다’라는 식의 자위적인 자기합리화를 펼치게 된다. 나는 이처럼 지극히 ‘위선’적인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착한 소비자’는 그러한 ‘착한 소비’를 통해 제 3세계 커피생산 노동자들 중 ‘0.1%5)라도 제대로 임금을 받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것을 통해 ‘지금은 평화로운 세계(혹은 점차 평화로워지고 있는 상태)’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자기 합리화에 도취된다. 즉, 99.9%의 착취당하는 노동자에 대한 고민은 그 ‘착한’ 소비행위를 통해 소멸되며, 본질적인 문제의식의 희석과 합리화 과정이 완성된다.6)





이제 경제적인 문제로 넘어가자. 어떤 친구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람들이(칼 폴라니가 말하는 시민사회가) 그러한 소비행위라도 통해서 공정무역거래에 대해 알고 그곳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서서히 사람들이 의식화될 것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공정무역 커피를 더 요구하게 되면 결국 공정무역 커피는 지속적으로 증가(궁극적으로는 전량의 공정무역화)되는 게 아닐까?”










난 이러한 주장을 지극히 순전히 주관적인 환상에 근거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공정무역 커피의 기본적인 논리는 ‘착한 자본가’와 ‘착한 소비자’를 늘려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착한 소비자’가 ‘공정무역 커피’에 대한 소비를 통해 얼마나 다국적기업의 착취에 대해 알 수 있느냐는 물음은 차치하고라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가는 일련의 자본의 자기증식 논리, 즉 “의인화된 자본”의 명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자본의 자기증식이 중단되면 자본가는 경쟁에서 도태되고 이것은 자본가에게는 사형선고이다. 거기다 세계 커피시장은 이미 한줌의 독점자본에 장악되어 있는데 이들은 이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으며 서로간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생산과 공급, 유통을 조절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이 ‘공정무역 커피’의 양을 증대시킨다고 하더라도 커피시장의 독점자본은 ‘공정무역 커피 마케팅’이 가져다주는 이윤 증대량이 최적화되는 상태까지만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공정무역 커피 마케팅’이 가져다주는 이윤 상승분이 임금 증대로 인해 줄어드는 이윤량보다 작아질 경우 그 다국적기업의 이윤은 줄어들게 되고 이는 그 다국적기업이 경쟁 내에서 도태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착한 자본가’는 존재 할 수 없고 ‘의인화된 자본’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가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호혜 경제’는 없다.





결과적으로 공정무역거래의 한계는 명확하다. 통계를 통해서 보자면, “2008년 말 기준 4년 연속 전 세계 최대 공정 무역 인증 구매 업체(!)”인 스타벅스의 현재 공정무역커피 거래량은 스타벅스의 전체 커피 구매 물량의 단 “5%7)밖에 해당되지 않는다.8) 그리고 전 세계 커피 무역량 대비 공정무역 커피거래 비율은 “3만3992t”으로 “전체 커피 교역량의 0.1%에 불과”하다.9) 또 공정무역 연대조직인 국제공정무역연맹(IFAT: International Fair Trade Association)의 통계에 따르면 2005년에는 세계 무역량 대비 공정무역거래량의 비율은 “0.01%에도” 못 미쳤으며 “2003년 세계무역 규모는 7조2740억 달러였고 이 가운데 페어트레이드(공정무역) 상품 무역규모는 2억 6000만 달러로 0.0036%(!)에 불과했다.”10) 이러한 공정무역 거래 비율은 2000년부터 해마다 20%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그 증가의 결과 현재 2009년 공정무역 거래 비율은 “세계 무역량의 약 0.01%(국제공정무역연맹 추계)”라고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율이 4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60년간 지속된 공정무역 운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호혜 경제’ 운운하는 사람들이 이를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부른다면 그들은 삽으로 흙을 퍼다 나르는 것이 아니라 젓가락으로 흙을 퍼다 나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라는 지옥 같은 산의 영속화이자 견고화이다. 















3. ‘사회적 기업’ 비판










논점을 약간 바꿔보자. 난 위와 같은 논리 때문에 소위 ‘사회적 기업’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자기증식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갖는 체제이다.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 과정이 완전히 종료되면 사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종말이거나 다른 체제로의 이행이다. 그리고 자본의 자기증식은 고용된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에서 부불노동부분, 즉 잉여가치의 획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갖는다.





이제,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동시에 불변자본(생산수단)에 투자함으로서 상품을 생산하고, 이어서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시장에서 다른 기업들과 경쟁을 한다. 시장에서는 자본의 자기증식이 상대적으로 적은 기업은 다른 기업에 흡수되거나 시장에서 퇴출된다. 예를 들어, 어느 한 기업에서 특별잉여가치11) 획득을 위해 생산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수단, 혹은 기계 설비를 도입하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잠깐 동안 새로운 생산설비, 혹은 생산력 향상 수단을 도입한 기업은 특별잉여가치를 얻겠지만 다른 기업들 또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생산력을 향상시킨다. 그 결과 특별잉여가치는 소멸하게 되고 사회적 생산력은 증가하게 된다. 이것은 시장에서 ‘의인화된 자본’이 자본가에게 명령하는 철의 법칙이자 시장에서의 퇴출을 막기 위한 자본가의 생존 법칙인 것이다.





‘사회적 기업’ 또한 시장에서 다른 자본들과 경쟁하는 한, 위와 같은 ‘자본의 명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사회적 기업’은 상품시장에서 도태퇴출되든가, 아니면 ‘비非사회적 기업’으로 전환 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만약 ‘사회적 기업’이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시장점유율 확대와 그것을 위한 생산력 증진에 전념한다면, ‘사회적 기업’은 점차 ‘본래의 모습’(예를 들어, 사회적 소수자에게 일자리를 주거나, 실업자를 취업시키거나, 사회적 공공선 증진에 관련된 서비스ㆍ상품을 생산하거나 하는 등등)을 잃고 분업의 극대화와 그로인한 소외된 노동의 증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기업’의 ‘비非사회적 기업화’, 즉 이제는 최우선적 목적이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으로 전화되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적 기업(착한 기업?)’이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오직 자기증식을 본성으로 갖는 자본만이 존재할 뿐이다.















3-1. ‘사회적 기업’의 특수한 형태들










그런데 사회적 기업 중에는 질적으로 사회복지기관과의 경계선이 모호한 몇몇 특수한 형태들이 있다. 즉, 예를 들면, 정부의 지원금을 받은(주로 노동부) 사회적 기업이 소수자를 위한 행사나 복지지원을 하거나, 사회 내의 소외된 계층인 노숙자ㆍ독거노인ㆍ고아ㆍ미혼모 등을 도와주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은 실질적으로는 비영리적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나는 이러한 유형의 사회적 기업들이 현재 체제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사회 복지도 포함하여)의 행위는 정부(혹은 국가)의 체제 유지비용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기업에서 노숙자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보자. 노숙자와 같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최하층은 노동을 하고 싶어도 사회적 배제를 통해 노동을 할 수 없다. 즉, 노숙자의 노동력은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고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노숙자에게 사회적 기업은 복지 서비스(예를 들면, 하루 한 끼 제공, 작은 쉼터 제공, 겨울에는 동사 0명을 목표로 매 새벽마다 노숙자들이 죽었는지 점검 등등)를 제공한다. 난 이것 만큼 비열한 행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의 서비스는 사실상 그들을 가장 낙후된 삶의 상태, 가장 고통 받는 삶의 상태, 가장 비인간적인 삶의 상태 그대로 유지시키는, 혹은 더욱 그 삶에 고착시키고 종속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목숨은 이을 수 있을 정도의 빵만 넣어주면서 사실상 그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행위들은 폭동이나 체제 전복 등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한 지극히 체제 유지적인 활동이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모든 임금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현재 대공황 때문에 수많은 생산수단들이 가동되지 않고 놀고 있으며, 수많은 노동자가 해고되거나 조업이 중단되어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기업의 입장에서는 현재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수단을 가동시키는 것보다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게 더 낫기 때문에(혹은 기업이 부도가 났기 때문에), 한마디로 노동자가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고용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임금 노동자들은 생활수단을 획득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들의 삶을 영위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이에 따른 사회적 불만과 문제를 은폐하고 체제에 대한 분노를 적정수준 이하로 유지시키기 위해 ‘사회적 기업’과 복지기관은 임금 노동자들에게 복지 서비스, 현물보조 서비스, 아동복지 서비스, 최저 생계비, 실업 급여 지급 등을 제공하면서 질적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삶에 그들을 고착시킨다. 그 결과는 부자유의 고착화, 그리고 영속화이다.















4.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새 유행하고 있는 칼 폴라니의 ‘호혜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들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윤을 줄여가면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착한 자본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다른 자본에 흡수되거나 시장에서 도태되어 퇴출당할 것이다. 그리고 폴라니는 ‘노동’이 상품의 형태로 나타날 때 '재앙'이 나타난다고 적절한 비판을 했다.





하지만 이 비판이 유효한 비판이 되고 비판의 대상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발달할수록 생산수단이 자본가라는 소수의 수중에 집적ㆍ집중될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 있고 되고 있다는 사실,12)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개인이 생활수단을 얻기 위해서는 시장 내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 결국 임금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필요노동)만큼을 임금의 형태(지불노동)로 교환한 뒤 그것을 다른 노동생산물(상품/생활수단)과 교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폭로했어야 한다. 한마디로 폴라니가 비판했어야 했던 것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 시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였다.13)(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장광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화를 위한 소부르주아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명확해지는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산이 공동체의 사용가치를 위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잉여가치ㆍ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써 수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유일한 해결책은 생산수단을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유하는 것, 공동체의 사용가치 생산을 위해 생산수단을 전유하는 것이다.





이미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의 결과, 생산은 협업화ㆍ분업화가 급진전되었고 결국 생산은 지극히 공동적이고 사회적으로(공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소유는 지극히 사적으로 전유되는 지극히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자본은 공동의 생산물이며, 많은 성원들의 공동 활동에 의해서만, 사실 결국은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공동 활동에 의해서만 가동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본은 결코 개인적 힘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힘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이 사회의 모든 성원들에 속하는 공동의 소유로 변한다고 해도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만이 변할 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상실한다.14)










기업이 망하거나 소멸한다고 해서 기업의 생산수단이 소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들은 기업이 망하면 사회라는 공동체 자체도 망한다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특정 유형의 기업 형태가 아니라 자본, 그 자체다. <노사과연>






1) 칼 폴라니의 책 『거대한 변환』에서는 이러한 ‘호혜 경제’ 형태를 국가ㆍ시장ㆍ시민사회 간의 관계 변화의 세 번째 형태라고 설명한다. 즉, 18세기 중후반 산업혁명의 진전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이 고도화되자 시장은 국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급격히 팽창했다. 그래서 신성화된 자유무역의 확대, 금본위제의 자동조정 메커니즘에 대한 숭배, 화폐 창조의 자동적 메커니즘을 따라야 한다는 교리, 노동은 시장에서 가격이 정해져야 한다는 논리 등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었다. 이것을 폴라니는 첫 번째 변환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후 제국주의적 팽창의 결과 전쟁이 빈번해지고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영향력 강화와 보호주의의 확대 등 축소되었던 국가의 영향력은 다시 시장을 압도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환이다. 그리고 폴라니는 세 번째 변환, 즉 이제는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소비자 운동, 정치유권자 운동, NGO, 사회복지 제도의 증대, 기업(시장)의 사회화, 사회적 기업 등등의 형태를 통해 시장을 통제하는 ‘거대한 변환’이 도래해야 하고 또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폴라니는 냉전 구도가 해체되기 전에 이러한 세 번째 변환을 이야기하고 사망한다.






2) 2009년 현재 스타벅스에서는 공정무역 커피를 약 5% 정도 사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공정무역을 통해 추가로 지불되는 금액이 노동자의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부분적이고 많은 부분이 해당 지역에 건물을 지어주는 형태[예를 들면 학교, 병원 등]로 지원된다.






3) 이것은 곧 마케팅 효과의 소멸을 뜻한다. 예를 들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정무역 커피가 갖는 특수성이나 그와 관련된 이슈가 소멸하는 경우, 그리고 동일 시장 내에서 다른 상품이 마케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공정무역 커피보다 더 ‘위신’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케팅 효과는 무한히 정비례하지 않게 된다. 이는 마케팅이 계속 교체되며 끊임없이 생산되는 이유이다.






4) 다국적 기업의 제 3세계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자본의 운동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공정무역 상품을 생산해야하고 소비해야한다는 ‘호혜 경제’의 논리는 단지 동어반복적인 ‘윤리적ㆍ도덕적 당위’로써의 주장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5) 2006년 기준으로 전 세계 커피 무역량 대비 공정무역 커피거래 비율은 “3만3992t”으로 “전체 커피 교역량의 0.1%에 불과”하다.[한겨레 2006.9.1]






6) 이러한 점에서 ‘호혜 경제’의 모순이 나타난다. 즉, ‘호혜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의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보다는 ‘도덕적 당위’를 설파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것 스스로 내재해 있는 운동 법칙 때문에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폴라니는 시장을 ‘악마의 맷돌’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과연 ‘악마의 맷돌’이 ‘도덕적 당위’와 같은 윤리적 설교로 멈출 수 있을까?). 여기서 ‘도덕적 당위’를 설파하는 것은 ‘루시퍼’에게 ‘미카엘’이 되라고 설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7) 이러한 비율은 스타벅스가 2000년에 처음으로 공정무역 커피를 도입한 이래로 10년간 증가된 비율인데 2006년에는 공정무역 커피 거래량이 6%였고 이 비율은 3년간 정체되다가 2009년에는 5%대로 하락했다. 난 이러한 경향을 이유로 다국적 기업이 독점한 시장에서의 공정무역거래량은 공정무역거래 마케팅이 증가시켜주는 이윤과 임금 상승으로 줄어드는 이윤이 교차하는 이윤의 최적점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정무역거래량의 증가는 지극히 한계적이라고 생각한다.






8) “'별다방'은 세계의 친구요, 경쟁사는 파트너죠”[한국일보 2008.10.16]






9) “커피값 중 농민 수입을 두배로…맛과 향은 그대로”[한겨레 2006.9.1]






10) “가난한 유학생이 웬 사치냐고? <해외리포트> '윤리적 소비' 주장하는 '페어트레이드'”[오마이뉴스 2005.6.2]






11) 특별잉여가치는 시장 내의 일물일가 법칙에 따라 생산력 향상으로 인해 그 개별 가치가 줄어든 상품을 아직 생산력 향상이 적용되지 않은 상품의 가치대로 팔아서 생성되는 초과이윤이다.






12) 수많은 사람에게 재앙으로 되어 있는 자본주의야말로,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시장이 사회에 착근(embedded)”되어 있는 사회이다!






13)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교도는 직업인이기를 바랐다-반면에 우리는 직업인일 수밖에 없다.”(막스 베버, 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2006, pp. 144-145.)






14)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최인호 역,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2007, p.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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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6 칼 폴라니 비판을 위하여[3] 김건우∣현대자본주의 세미나, 맑스-엥겔스 저작 읽기 쎄미나 팀원 2009-06-02 3409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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